٩(ˊᗜˋ*)و 감상용입니다 갠소하세요♥ORH ٩(ˊᗜˋ*)و
[BL]광염 소나타 3
21.
자정의 집 안은 어두웠다. 부모님은 일찍 잠자리에 드는 편이었다. 조심스럽게 거실을 지나, 방으로 가는 동안 수현은 요한의 손목을 꽉 붙들고 있었다. 이 손을 놓치면 왠지 그가 떠나가 버릴 것만 같았고, 그러면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게 될 것 같아 겁이 났다.
천만다행인 것은 요한을 이끌고 도망치듯 집으로 들어가는 자신을 재욱이 붙잡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한 번 수현의 손을 내쳤던 요한 역시 막무가내로 이끄는데도 잠자코 따라왔다.
방의 불을 켜자,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별로 안 좋네. 독일에 가 있었다고 들었어. 오늘 귀국한 거야? 꺼낼 만한 인사말은 꽤 많았다. 수현이 그중 하나를 추첨하듯 뽑아 말을 붙이려던 찰나였다.
“와, 이 방은 언제 들어와도 굉장하네요.”
빙 둘러 방 안을 확인한 수현은 헛기침을 했다. 요 근래엔 최소한의 정리마저 전혀 하지 않아서 평소보다 훨씬 꼴이 조잡했다. 주변이 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요한에겐 익숙하지 않을 풍경이었다. 심지어 아마 요한이 기억하고 있는 수현의 방보다 훨씬 더할 것이었다.
“앉을래?”
“앉을 곳이 있다면요.”
“이걸 치우면……. 음, 안 되겠네.”
이 시간에 나가서 대화를 할 만한 곳이라고 해 봤자 골목 한참 바깥까지 걸어 나가야 겨우 있는 24시간 커피 전문점이 다였다. 수현은 바닥에 널린 옷가지들과 종이 따위들을 대충 한곳에 밀어 치웠다. 그러자 모세가 가른 홍해처럼 길이 나타났다. 침대 위에 걸터앉은 요한은 방 안을 유적지 사전 답사하듯 쭉 둘러보았다.
“신경 안 써도 돼요. 난 이 방이 좋거든요.”
이 공간에 들어오면 최근 수현이 영위한 생활이 한눈에 보였다. 입었던 옷, 읽었던 책, 덮었던 이불, 들었던 CD……. 책상 위에는 요한의 눈에도 익숙한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며칠 전 현주를 만나고 왔던 수현이 문득 생각나 꺼내 읽던 것이었다. 그는 힐끗 수현을 살폈다.
“손을 놓든 옆에 앉든 하죠? 자세가 너무 어정쩡한 것 같지 않아요?”
그제야 손목을 꽉 붙들고 있었던 손바닥이 화끈해졌다. 그를 붙든 채로 불편하게 서 있던 수현은 그의 손목을 놓고 정자세로 섰다. 요한은 픽 웃었다. 옆에 앉으란 얘기였는데 그는 예상대로 전자를 골랐던 것이다.
“귀국한 줄 몰랐어.”
“밤늦게 도착하는 비행기 편을 탔어요. 조용히 들어오고 싶더라고요.”
“그럼 가서 쉬지 왜 이쪽으로 왔어.”
“싫어요?”
가만히 수현을 올려다보고 있는 시선이 따가웠다. 그와 있는 장면을 또 보인다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았던 요한은, 막상 가타부타 말이 없어 더 불안했다.
수현이 속 편히 싫다고 대꾸해도 되는 상황인가 무척 갈등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요한 쪽에서 수현의 손목을 붙잡아 왔다. 손길은 꽤 부드러웠는데도 불구하고 아팠다. 심리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트라우마는 늘 실질적인 통각으로까지 이어져 그를 괴롭게 했다.
요한은 수현의 손목을 붙든 채로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자 균형을 잃은 수현이 그의 전신 위로 빗속에 우산 드리우듯 쓰러졌다. 요한이 수현의 등을 당겨 안고 꽉 깍지를 꼈다. 본의 아니게 결박된 수현은 눈 둘 곳을 찾지 못했다. 밖은 어둡고, 안은 조명으로 환했다. 안팎이 대비되어 주변이 훨씬 더 밝게 느껴졌던 것이다.
“금단 현상인가 봐. 1주일 넘게 안 봤더니 못 참겠어요. 몸은 좀 어때요? 오늘은 예의 빨아 줄 수 있는 상태인가?”
지난번 「음악인의 밤」에 있었던 일로 한동안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던 수현은, 새삼 그때의 통증이 떠오르는 듯해 미간을 찌푸렸다. 불편해진 그는 양손을 요한의 가슴팍 위에 올리고 그 반동으로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요한이 힘주어 그를 당겨 왔다.
“형은 이미 실수를 하나 했어요.”
확, 잡아당겨진 손목 때문에 수현은 요한의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대로 돌려보내거나, 최소한 날 두고 혼자 집에 들어왔어야 했죠.”
보호하고 싶은 대상이 있다면 위험 인자로부터 떼어 놓는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 그 순간의 수현에겐 집으로 요한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아마 시간을 돌린대도 똑같이 할 것이었다. 그게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여긴 밀폐되어 있고…….”
거미줄을 타듯 신중하게 내려간 요한의 손가락이 수현의 티셔츠를 슬쩍 들췄다. 수현은 그의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
“거기다 벽 하나를 가로막고 부모님이 잠들어 계시지.”
“난 소리 들려도 상관없어요.”
“내가 아주 상관있어. 그리고 나랑 자고 싶으면 S.2 악보를 돌려줘.”
“아, 조건 이행 없이는 ‘안 대 주겠다’라는 얘기인가?”
어렴풋이 그렇지는 않을까 했지만 요한의 반응으로 미루어 어느 정도 확신이 섰다. 그는 정확히 언제부턴지는 모르지만 아까 전 일어난 일련의 사고를 대강은 목격했던 모양이었다. 추측으로는 맨 처음 재욱이 입 맞췄던 순간은 보지 못한 게 아닐까 싶었다. 거기서부터 봤다면 그저 상황을 관조하듯 지켜보다가 나타나지는 않았으리라.
수현은 머리가 복잡했다. 이게 사실대로 이실직고하는지를 판단하려는 그의 테스트일까, 아니면 그냥 언제나와 같이 수현을 희롱하는 유희일까. 이렇게 오랜 시간 그를 알아 왔어도 도통 모르겠다.
“그건 원본을 태웠어요.”
“넌 다 기억하고 있잖아. 다시 써.”
조건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이쪽도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수현은 무척 단호하게 나갔다. 이번에야말로 수현이 그에게서 빠져나와 일어서려 하자, 순식간에 몸이 뒤집혔다. 잠시 눈을 마주치고 있던 두 사람 중 수현만 시선을 피했다. 환한 빛깔의 인공 불빛 아래 있는데도 자세 탓인지 상황 때문인지 흐르는 공기가 야릇했다. 그를 계속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요한은 그런 수현의 턱을 붙잡아 자신에게로 돌렸다.
한쪽 무릎을 세운 그가 수현의 다리 사이를 불쑥 파고들었다. 양손이 머리 위로 들어 올려진 수현은 그의 손에 포박당했다. 요한의 오른손이 수현의 허리춤을 파고들어 등줄기부터 청바지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 읏…….”
신음이 터져 나오는 입을 막고 싶었으나 두 손이 자유롭지 않았다. 수현은 몸부림쳤다. 두드러진 무릎뼈가 하반신을 자극하기 시작하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집은 원체 좁고 오래된 건물이라 벽이 물렀다. 피아노를 치면 대문 밖에서부터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큰 소리를 내면 반드시 안방까지 미칠 것이다. 부모님이 듣고 깨기라도 한다면, 하는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게다가 이 좁은 방. 이곳은 수현의 더럽혀지지 않은 최후의 벙커였다. 이 어지러운 방에서 그와 섹스한 적은 없었다. 이곳만큼은 안 됐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한 방이 절실했다. 수현은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일전에 현주를 만나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의 암울한 유년 시절은 분명히 현재의 요한에게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가 좀처럼 얘기해 주지 않는 것만 봐도 그랬다.
“어머니도 네가 죽였어?”
요한은 눈썹을 스윽 들어 올렸다. 뜬금없는 말을 하는 수현의 눈을 길게 들여다봤다.
“그날 승국환 신부님은 불에 타는 너희 집을 지켜보고 있었다던데. 그때 손잡고 있었다던 게 너지?”
한참 동안 수현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요한은 허리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거뒀다. 하반신을 어지럽히던 무릎도 거둬들였다. 당장 단단히 잠긴 바지 버클부터 풀어낼 것 같던 긴장감은 날아가고, 민감해졌던 등과 아래의 열기도 식었다.
요한은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있는 것은 수현뿐이었다. 순간적인 판단이 먹혀들어서 다행이다. 다만 극복한 건 지금의 상황일 뿐 뒤에 이어질 일을 짐작도 할 수 없어 겁이 났다.
그는 들춰진 옷가지들을 전부 끌어 내리고 몸을 지네처럼 움직여 요한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난 결백하다고 분명히 얘기했는데. 생각보다 기억력이 나쁘네요.”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 낮은 음성 속에 무언가가 섞여 있는 듯했으나 선뜻 끄집어내기 어려운 아주 미세한 형체였다. 수현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악몽을 꾸다 간신히 늪에서 빠져나온 지친 낯으로 요한을 바라봤다.
“조만간 함께 독일로 가요. 준비는 이쪽에서 할게요. 그 얘기 하려고 들렀어요.”
수현은 무척 당황했다.
“나한테 결정을 맡기겠다고 한 거 아니었어?”
“배려하고 양보하니까, 처음 약속까지 잊어버린 누구 때문에. 생각을 바꿨어요.”
“요한, 그럼 말이 나왔으니까 나도 정식으로 답변 줄게. 난 독일에 안 가.”
“…….”
“여기 가족들이 있어. 난 안 가. 못 가. 약속을 못 지키게 돼서 미안하지만……. 내가 안 가르쳐 줬던 게 있어. 사람들은 종종 약속도, 규칙도 안 지키고 깬다는 거야.”
“마지막 말은 못 들은 걸로 하죠. 오늘은 좀 쉬는 게 좋겠군요.”
그는 방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겨진 수현은 당장의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드는 한편 그가 이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예감 때문에 절망했다.
그는 자신과 피아노가 단번에 결별할 수 있게 만들었건만, 왜 자신은 그에게 자신과의 결별마저 마음대로 하게 할 수가 없는지 모르겠다.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의 인생인데 왜 자기 멋대로 설계할 수도, 개척할 수도, 위로할 수도, 그 어떤 것도 뜻대로 되지가 않는 건지 또한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큰 잘못을 하면서 살아온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어쩐지 울컥하고 눈물이 치솟을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방 안이 너무 밝았다. 이런 환한 빛으로 가득한 방 안에서 우는 건 이상한 것 같아서 차마 울 수조차 없었다.
* * *
사물에 적합한 쓰임이 있는 것이나 인재에 걸맞은 자리가 있는 것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적재적소가 있다. 꽃에게도 저마다의 자리가 있었다.
꽃은 계절을 타는 예민한 생물이었다. 그중 천고마비의 계절에 전성기를 맞는 꽃들엔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들이 유독 많았다. 특히 노상에 피는 가녀린 코스모스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을이 되면 드라이브를 즐겼다. 차를 타고 외곽으로 빠져나가 보면 노지에 가득한 코스모스들이 만개한 모습을 꽤 흔히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운전석에는 수현이, 옆자리에는 어머니가 앉았다. 오늘 데이트는 어머니 쪽에서 먼저 청했다. 웬일로 미사도 빼먹고 일요일 이른 오전부터 조르시는 통에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왔던 참이었다. 언제나 밝은 에너지가 가득한 그녀가 오늘따라 이른 아침부터 다소 가라앉은 것 같아 보여 거절하지 못했다.
“기분은 좀 나아졌어요? 열성 신도가 웬일로 미사까지 다 빼먹고?”
“코스모스 보고 싶더라고.”
“뭐 안 좋은 일 있어?”
“그냥 기분 전환이 필요했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내세의 기반을 다지는 것보단 지금 즐거운 게 중요하지. 하느님도 엄마 이해해 주실 거야.”
그녀는 조수석의 창문을 반쯤 열었다. 서행하는 차 안으로 가을 아침의 부드러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네 아버지 내년에 퇴직하시면 꽃 시장 대신 보내야겠어. 나이 들면 아침잠 준다는데 왜 엄만 자도 자도 졸릴까?”
“소녀의 마음으로 살아서 그래. 회귀하는 거지. 애들은 아침잠 많잖아.”
농담을 건네던 수현은 창밖 구경으로 바쁜 어머니를 살폈다. 그가 이렇게 집중해서 쳐다보면 언제나 마주 돌아봐 주던 그녀였다.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오늘따라 어머니는 돌아봐 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너 무슨 고민 있니?”
어제 새벽 요한이 다녀간 뒤로 수현은 계속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약속 운운하며 자신을 억지로라도 독일로 데려가겠다고 말했다. 계속 마음 한구석에서 걱정하고 있던 일을 요한이 다시 수면 위로 꺼낸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작정했다면 수현이 몸부림쳐 본들 제대로 저항하기 쉽지 않을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컸다.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도망쳐야 하는데, 자신은 갈 곳이 없었다. 그는 애써 말을 돌렸다.
“우리 지금 엄마가 복잡해서 나온 거 아니었어?”
“어제 네 방에서 나오는 요한이를 봤어.”
수현은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양 가슴이 철렁했다. 자정이 넘어 당연히 주무시는 줄로만 안일하게 생각했다.
“네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봐, 수현아. 꼭 한번 얘기하고 싶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 어젠 그냥 잠깐 들렀다가…….”
“이쪽으로 우회전해야 돼.”
그렇게만 말하고는 돌연한 침묵이었다. 꾹 다물린 어머니의 입술은 주변을 드라이브하는 내내 열리질 않았다. 꽃을 보고 기분 전환을 하러 나왔다는데, 꽃이 전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었다. 상상만 해도 늘 표정부터 화사해지는 만개한 코스모스를 직접 보고도 그랬다. 어머니의 저런 표정은 처음 봤다. 수현은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렇다 한들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의 실을 끊어 낸 것은 그녀였다. 손가락 끝이 창밖의 허름한 건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쪽에 성당이 하나 있어. 같이 들어갔다 오자. 지난번에 엄만 네 아버지랑 한번 들른 적 있는데 여기 외져서 신도도 거의 없더라. 엄청 조용해. 아니면 엄마만 잠깐 들렀다 나올 테니까 밖에서 기다리든지. 우선 저쪽에 차 세워.”
“나랑 잠깐 얘기 좀 해.”
“솔직하게 얘기할 생각은 있고?”
창밖만 내다보던 그녀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수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뭐라고 해명해야 할 것인가. 너무 갑작스러웠기에 이쪽도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런 준비 같은 건 할 수 없을 것이다.
순진하고 단순한 그녀는 그들이 보여 주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을 거라고, 너무 자신 좋을 대로만 생각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간 모르는 척해 왔던 그녀가 갑작스럽게 얘길 꺼냈다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혹시 그녀의 눈에도 위태위태한 아들이 보였기 때문은 아닐까.
“마음이 어지러울 땐 어딘가에 털어놓는 것도 방법이야. 속이 시원해지거든. 수현아, 우리 성당이 싫으면 저렇게 먼 곳에 있는 곳은 어때? 아무 데나 목적지 없이 출발해서 발견하는 첫 번째 성당. 아무도 너를 모르는 곳에 가서 털어놓고 오는 거야. 꼭 성당이 아니어도 좋아. 코스모스밭이라도 괜찮을걸. 운치 있고 좋잖아?”
조금 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돌연 입이 꾹 다물리고 만 아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엄만 왜 요한을 우리 집에 데려오기로 결정했어? 요한이 천재라서?”
생각해 보면 두 사람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간 적은 없었다. 어머니가 요한을 데려오겠다고 말했을 때, 수현은 처음부터 쌍수 들고 환영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왜 그랬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본래 그녀의 결정에 가타부타 토를 달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만 의견이 엇갈리면 혼자 조용히 고민했다. 그러면 기다리다 못한 어머니가 다가가 아버지를 들들 볶으며 설득하는 식이었다.
그러니 아버지 또한 어머니에게 왜 꼭 요한이어야 했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녀가 가족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들은 것은 처음일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그녀의 얼굴이 급작스레 하얗게 질렸다.
성당 입구로 진입한 차량이 모래자갈이 가득한 공터에서 멈춰 섰다. 주차하던 수현은 무심코 어머니를 돌아봤다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왜 그래요. 괜찮아?”
황급히 손사래를 치던 그녀는 글러브 박스에서 티슈를 꺼내 얼굴을 닦았다. 얼굴에는 땀 한 방울 흐르고 있지 않았다. 닦아 내고 싶은, 보이지 않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천천히 수현을 돌아봤다.
“요한이…… 요한이가 너무 불쌍했어. 마침 거둬 줄 사람이 필요했고…….”
“…….”
“그리고…….”
그녀는 수현을 물끄러미 살폈다. 머뭇대면서 입을 달싹이는 모양새가 영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려는 게 아닌가 싶었다. 원체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이었다. 수현은 한참 뒤에야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만에 하나 너한테 문제가 생기면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지금 수혈 얘기하는 거야?”
“…….”
“잠깐만. 엄마도 아버지랑 똑같이 그래 놓고 아버지 두고두고 원망한 거야?”
그녀는 두 손을 꼭 모으고 허벅지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양손으로 쥔 티슈가 탁구공만 하게 구겨졌다. 수현은 기가 막혔다.
“사람이 어떻게 그래?”
“맨 처음에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거야. 아주 오래 후회했어. 그리고 지금 엄만 요한일 정말 사랑해.”
“아버진 걔 안 사랑할까? 지금 사랑하는 게 면죄부가 된다고 생각해? 그거 요한이가 알고 아버지랑 한동안 불편했던 거 엄마도 알잖아?”
오히려 계속 데려오는 것을 반대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누군가를 대신한다거나, 필요에 의해 일부분만 이용당하는 듯한 비참한 기억은 좀처럼 사라지기 어려웠다. 그는 요한이 아버지에게 늘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다. 비난을 퍼붓던 수현은 당사자인 요한에게까지 생각이 미쳤다.
“요한도 알아?”
어머니만큼은 순수하게 그를 아껴 주고 싶어서 거뒀다고 여기고 있었으나, 엄청난 착각이었다. 함께 살 땐 이상할 정도로 요한의 편을 더 들어 주는 부모님에게 섭섭했던 적이 종종 있었다. 여태 요한이 워낙 속을 알기 어려운 데다 범상치 않은 재능까지 지니고 있어서 어려워하는 것 같다고 짐작했지만, 사실 그들은 아마 가슴 깊숙이 요한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지니고 살아왔던 게 아닐까 싶었다.
수현은 카시트에 편히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괜히 물어봤다.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그냥 물어보질 말걸.”
“수현아, 미안해.”
“왜 나한테 사과를 해!”
버럭 소리친 수현은 그녀의 시선이 꽂혀 있는 창밖의 성당 건물을 살폈다. 어머니가 홀로 내리려고 하기에, 수현이 만류했다.
“내리지 마. 내가 들어갔다 올게. 나 때문에 여기 오려고 했던 거잖아.”
벨트를 푼 수현은 차에서 내렸다.
매주 일요일은 전국의 천주교도가 미사를 드리는 공식적인 날이었다. 문을 열고 천천히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성전의 익숙한 풍경과 함께 낯선 이들이 몇 보였다. 수현은 가볍게 묵례하며 그들을 지나쳤다.
그는 천천히 고해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사방이 가로막힌 곳에서 딱딱한 의자에 한참 앉아 있었다. 그때까지도 머릿속은 요한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헌신하는 부모님에게 너무할 정도로 마음을 열어 주지 않았던 그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입장을 번복했던 일이야 이미 요한도 아는 것이었다. 요한이 처음부터 그녀의 의도마저 알고 있었다고 전제한다면 모두 말이 된다. 정말이지 그는 비뚤어지지 않고 바르게 크는 쪽이 훨씬 말이 안 되는 이상한 삶을 살아왔다.
어머니는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수현이 발걸음하지 않던 성당에 오늘 굳이 발을 들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제정신으로는 그런 생각을 해선 안 된다고 이성이 그를 붙들었다. 그러나 끝없는 슬픔이 그의 온몸을 휘어 감았다. 차마 도저히 육성을 낼 수는 없어 속으로만 되뇌었다.
‘요한이 불쌍해요.’
그는 정말 그 누구에게도 조건 없이 사랑받아 본 적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인간 이하인 것처럼 느껴졌다. 요한조차 누가 누굴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냐며 비웃을 일이었다.
바깥에서 철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가 예민한 수현은 이 소리가 썩 멀리에서부터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뭔가 옮기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거리가 아득해서 정체를 알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누군가 바깥에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마음속으로 낸 목소리를 들킬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그는 벌떡 일어서 고해소를 빠져나갔다.
* * *
한국 대학교 출신의 피아니스트들이 알음알음 모여 여는 자선 음악회. 피아노과만의 독특한 전통이었다. 다른 학과의 졸업생들은 동창회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가지지만 피아노과 졸업생들은 매년 가을쯤 한 차례 시청이나 구청의 회관 같은 저렴한 공연장을 대관해 자선 음악회를 열었다. 초대받은 피아노과 졸업생의 가족이나 친지, 지인들은 공연을 관람하고 자신이 내고 싶은 만큼 티켓의 가격을 책정해 모금함에 낸다. 그것을 근처의 양로원이나 보육원 등에 전달하는 식이었다.
웬만하게 마음이 동하지 않고서는 엉덩이가 무거워 가지 않는 수현도 매년 이 공연만큼은 참석해 일정액을 기부하곤 했다. 마지막에 연주할 메인 연주자는 얼마 전 서울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재욱이었다. 선후배들이 만장일치로 추대했다는 것 같았다.
수현의 발걸음이 넝마주이처럼 터덜터덜했다. 공연장에 갈 시간이 딱 차량이 정체될 시간이어서 도로에 갇히지 않기 위해 대중교통을 탔더니 발이 아팠다. 내일이 주말인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간신히 시간 맞춰 도착한 공연장 안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많았다. 심지어 올해에는 이동준도 참석했다. 수현은 멀리서 그를 발견하곤 눈짓으로 인사했다. 지난번처럼 불러서 샴페인이라도 마시게 할까 봐 황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공연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게 이어졌다. 콩쿠르도 아니고 정식 유료 공연도 아니니 연주 방식도 자유로웠다. 공연하고 싶은 사람은 자발적으로 신청을 하고, 프로그램도 자신이 짜고 싶은 대로 짰다. 앉는 자리도 선착순으로 앞자리부터 채우는 방식이었다. 인터미션 시간 동안에는 간단한 다과를 하며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나 선후배끼리 인사도 건넸다.
수현이 앉은 제일 뒤쪽 자리 근방에는 익숙한 몇 동기들의 얼굴과,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현주도 있었다. 현주도 그를 알아본 모양인지 마침 비어 있는 수현의 옆자리로 와 앉았다.
“너 온 줄 몰랐어.”
“쉿. 아직 공연 중이잖아.”
“에이, 또 차갑게 그런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몸을 더 그를 향해 틀었다.
“다들 승요한 얘기만 해. 특히 지난번 「음악인의 밤」 공연이랑 증발해 버린 S.2. 하긴 걔가 우리 모두의 우상이긴 우상이지. 그렇게 가까이에서 연주하는 거 직접 볼 줄 누가 알았겠어. 참, 나 어제 요한 추가 인터뷰했어. 한국 다시 온 건 알지?”
“알아.”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어제 인터뷰 단둘이 만나서 진짜 길게 했거든. 와, 진짜…… 너 우리 잡지 특집 호 꼭 봐야 돼. 어, 마지막 주자 재욱인가 보다.”
무대에서 이쪽은 보이지도 않을 텐데, 현주는 무대로 올라오는 재욱을 향해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고는 수현에게 귓속말하듯 몸을 낮추고 속삭였다.
“심 씨 말이야. 애가 워낙 평판이 좋아서 그런가 다들 걱정이 많아. 괜히 구설수 올라서 짠하다고. 아니, 그러게 언론들은 뽑아 준 심사 위원을 욕하면 될 걸 왜 애를 잡나 몰라?”
“넌 언론 아니고?”
“난 정직하고 바른 언론.”
지랄하네. 수현은 픽 웃어넘겼다.
“요샌 그래도 좀 나아진 것 같더라.”
“그러게. 레닌그라드랑 다음 달에 협연한다며? 앞으로 잘 풀릴 일만 남았지, 뭐. 어? 본다. 이쪽 본다. 갑자기 왜 저래?”
재욱이 선택한 곡은 미공개 상태였다. 안내 책자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어떤 곡을 연주할 것인지 다들 궁금해했다.
무대에 등장한 그는 한참 동안 피아노 앞에 앉지도 않고 객석을 살폈다.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주변은 너 나 할 것 없이 금세 웅성웅성해졌다. 공연장 안에 퍼지는 이상한 기운을 무대 위의 연주자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재욱은 아랑곳없이 둘러봤다. 한참을 그러더니 뒤편의 수현을 또렷하게 응시했다. 위치상 잘 보이지 않을 텐데 의아하게도 그는 이쪽에 수현이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제야 피아노 앞에 엄숙하게 앉은 그는 부드럽게 건반 위에 양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연주가 시작됐다. 보통 피날레 연주에는 웅장하거나 장엄한 곡, 혹은 기교적으로 빼어난 화려한 곡을 선택하곤 하는 게 암묵적 전통이었다. 이 무대가 성대하게 막을 내린다는 자축의 의미였다. 그러나 재욱의 선곡은 예상을 다소 빗나갔다.
그가 낙점한 것은 슈만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이었다. 특히 2악장의 환상곡은 스승의 딸이었던 클라라에게 보내는 연가였다. 후일 리스트가 ‘충만함과 평온함으로 표현한 위대한 열정의 곡’이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을 만큼 슈만의 애수가 서린 사랑 고백이었다. 수현도 학부 시절 예브게니 키신의 레코드로 들어 본 적이 있어 귀에 익숙했다.
이런 애절한 사랑의 곡은 어딘지 처절한 데가 있는 재욱의 연주와 참 잘 어울렸다. 피아니스트의 사랑 고백은 이토록 낭만적이다. 요한의 존재가 없었다면 이렇게 애틋할 정도로 자신을 많이 좋아해 주는 그를 좋아하게 됐을까. 그편이 평범하니까 말이다.
“아, 좋다. 역시 단순한 애들은 도화지 같다니까. 뭘 그리느냐에 따라 달라져. 쟤 되게 금방 좋아진다. 꽤 하는데?”
현주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수현도 절절한 연주에 집중했다. 다만 연주 내내 수현은 재욱과 자신의 빗나간 큐피드의 화살이 왠지 가엾다는 생각을 했다.
* * *
공연이 끝난 뒤 어떤 얼굴로 재욱을 봐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런 수현의 고민을 알기라도 한 듯 이동준이 중간에서 중재자가 됐다. 재욱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하고 싶다며 단체 뒤풀이 대신 따로 단둘이 자리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오로지 이동준을 봐서 술자리에 참석하겠다고 했던 수현은 재빨리 시끄러운 이자카야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재욱은 그를 붙잡고 싶어 하는 눈치가 역력했지만, 대선배인 이동준의 제안을 무시하고 그를 뒤따라올 수는 없었다. 그저 가려는 수현을 잠시 뒤쫓아 나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진짜 그냥 가는 거예요? 이동준 선생님께서 보자고 하신 건데 같이 있어도 되잖아요.”
“난 됐어. 배울 게 많은 분이니까 너 이참에 많이 배워. 궁금한 거 다 뽑아 먹고. 연락처도 따 놓고.”
“그날 일은 거듭 죄송해요.”
“난 잊어버릴 거니까, 너도 그렇게 해. 늦었지만 생일 축하하고.”
가방을 뒤적여 조그만 선물을 꺼내자, 재욱은 황망한 얼굴로 받아 들었다. 그 자리에서 포장지를 까 열어 보는 손길이 다급했다. 악보 여러 장을 한 번에 고정하는 핀이었다. 납작한 앞판에는 재욱의 이름 석 자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사실 아직까지 이 핀을 파는 가게가 남아 있으리라곤 생각 안 하고 찾아갔는데, 종로의 한 상가 내에 10여 년 전 모습 그대로 있어 주어서 수현이 더 감사했던 판이었다.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어 주는 존재들은 언제나 고마운 법이었다.
“우와, 이거! 선밴 진짜 잘 안 놓치네요. 진짜 감동이다. 안아 봐도 돼요?”
“안 돼.”
“네. 제가 또 학습한 바가 있어서.”
그가 머쓱하게 그러자 수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그날 승요한이랑은…….”
“그건 네가 간섭할 영역이 아냐.”
그가 딱 잘라 선을 긋자 더 이상 영역을 침범하지는 못했다. 이런 점이 요한과 재욱의 근본적인 차이였다. 본인이 내키지 않으면 아무리 애원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요한과 달리 재욱은 그가 거부하면 일정 부분 이상 접근하지 않는다. 만약 그를 좋아할 수 있었다면, 자신은 꽤 그럴싸하게 행복해졌을지도 모른다.
“참, 휴대폰 고쳤어.”
“진짜요?”
“그래. 그럼 먼저 간다.”
안타깝게 보고 있는 재욱을 뒤로하고, 수현은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재욱도 떠나가는 그를 두 번 붙잡지는 못했다. 그저 수현이 남기고 간 선물만 그를 움켜쥐듯 꼭 잡아 보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왠지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재욱은 인간 대 인간으로 그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점점 사람을 멀리하게 되면서 그의 주변에는 생존자가 몇 없게 됐다. 그의 마음을 알고 있으나 받아 줄 의지는 없기에 제대로 관계를 끊어 내는 편이 그를 위한 일이란 생각도 문득 들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을 속이게 됐다. 때론 위로가 필요하니까. 이기심이 진실 위를 뒤덮고 엉켜들었다.
고지가 저 앞인데 오늘따라 천 길 같았다. 집 근방의 골목 어귀를 걷고 있는데, 얇은 재킷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확인하니 이동준이었다. 두 시간여 전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참이었다. 자신이 놓고 온 물건이 있거나 저쪽에서 급한 용건이 있나 싶었다.
“네, 선생님.”
[수현아, 지금 이쪽으로 좀 와 줄 수 있겠니? 재욱이가 사고로 좀 다쳤는데……. 이거 곤란하게 됐네. 내가 지방에 일이 있어 새벽 기차로 내려가야 하거든.]
너무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가까스로 기계를 붙들고, 떨어질 뻔한 마음도 붙든 채로 그는 멈춰 섰다. 제일 먼저 염려되는 건 역시나 피아니스트의 또 다른 목숨인 손이었다.
“다치다니요? 손은 무사해요?”
[나오는 길에 주차장에서 교통사고가 있었어. 운전자가 뺑소니를 쳐서 경찰도 오고 있는 중이다. 따로 정밀 검사를 해 봐야겠지만 다행히 육안상 손에는 상처가 없더구나.]
“천만다행이네요.”
[그것보다 지금 수술 중인데 끝난 뒤에 누가 같이 있어 줘야 할 것 같거든. 아까 얘기하다가 부모님이랑 불편한 사이라고 들었던 게 생각나서 말이다.]
“아, 걔 부모님이랑 거의 의절하다시피 했어요. 제가 갈게요. 거기가 어딥니까, 선생님?”
[한국대 병원 응급실이다. 데스크에 말을 해 놓으마.]
그곳에서 추태를 부렸던 일이 자연스레 떠올랐지만 그런 일로 다친 재욱을 모른 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현은 그러마고 답변하고 전화를 끊었다. 자신의 차까지 가는 골목길에 죽 늘어선 가로등은 정확히 반만 점등되어 있었다. 여기까진 어제도 본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그는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이 가까워져 있었다. 집으로 잠깐 들어갈까 하던 그는 이내 관두고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운전대를 쥔 손에 땀이 차고 연신 떨렸다. 불안했다. 아니라고 생각하고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 재욱이 다친 일이 자신 때문인 것만 같았다. 혹시나 요한이 무슨 짓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던 것이다.
지난번 집 앞에서의 일을 목격하고도 요한이 아무 말 없이 돌아가 버린 일도, 하필이면 운전자가 사고 후 달아나 버렸다는 점도 모두 마음에 걸렸다. 그런 짓을 할 정도로 요한이 멍청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데도 계속 요한을 결부해 생각하게 됐다. 이 정도면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건 요한이 아니라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