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7/34)

26.

달빛이 드는 창가맡에는 두 대의 작은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아담한 이 도시나, 소담한 집 앞의 거리와 썩 어울렸다. 다만 요한의 화려한 연주와 어울리는 위용 있는 크기는 아니었다. 특히 악보를 올려 두는 보면대의 위치가 다른 일반 피아노들보다 현저히 낮았다. 오른쪽 손목을 들어 올리는 게 힘겨운 수현은 악보 한 장을 넘기는 데도 남들보다 배의 에너지가 소모됐다. 아마 요한이 특별히 자신을 위해 제작한 게 아닌가 싶었다.

각각의 피아노 다리에 나란히 등을 기대앉아 있던 두 사람은 서로가 아닌 정면만 쳐다봤다. 피아노는 아마 그들이 침대만큼 사랑을 많이 나눈 장소일지도 모른다. 연주도, 섹스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피아노에 기대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짐짓 어색해졌다. 수현이 먼저 요한을 돌아봤으나, 그는 여전히 창밖만 응시한 채였다.

“여긴 어떻게 왔어?”

“그냥요. 무작정 이쪽으로 오게 됐어요.”

“내가 여기 있는지 모르고 왔다는 얘기야?”

클라시스의 도움을 얻어 추적했다면 금방 자신의 행적을 찾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공권력을 움직이는 것은 때론 자본력이었으니까. 그래서 수현은 그가 자신을 일부러 쫓아온 것이리라 막연히 여기고 있었다.

“몰랐어요. 멀리서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죠.”

수현은 침묵했다. 그러자 요한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번번이 난 죽음의 문 앞에서 당신을 발견해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아, 신은 아직 날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은 남아 있…… 윽.”

“왜 그래. 괜찮아?”

요한은 자신의 복부를 손으로 꽉 눌렀다. 머리도 울리는 모양인지 물기를 털듯 고개를 두어 번 흔들기도 했다.

“사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어요. 눈을 떠 보니 작업실이었고, 린이 내가 죽으려고 했대요.”

이윽고 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고 얘긴 들었어. 전혀 기억이 안 나?”

“상황은 기억나요. 사고 직전에 환청이 들렸어요. 마침 좀 흥분 상태였던 탓도 있었고요.”

“혹시…… 간질 재발했어?”

“애초에 완전히 나은 적이 없었어요.”

「클래시즘」의 인터뷰에도 있는 얘기였다. 그는 현주가 측두엽 간질에 대해 질문하자, 예의 병은 늘 앓고 있는 것이며, 수현과 함께 살 때만 특별히 이상한 증세들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수현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는 그 시간을 ‘안정기’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수현과 떨어져 있던 7년의 ‘불안정기’ 동안 재발한 것 같았다.

환청이 들리는 것은 그와의 몇 안 되는 공통분모 중 하나였다. 물론 그는 타고난 것이었고 자신은 트라우마로 인한 후천적 발병이었지만, 어쨌든 원치 않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올 때의 공포심만큼은 잘 이해하게 됐다. 두 사람은 닮은 구석이라곤 거의 없었는데, 개중 비슷한 몇 가지 요소들이 대단히 힘이 세서 너무나도 다른 그들을 한데 묶어 주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수현은 자신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비극적 운명의 붉은 실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거미줄처럼 두 사람을 휘감고 있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악연은 그 어떤 인연보다 질기며, 성실하고, 고집스러웠다. 수현은 자신의 손가락을 보다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손은 좀 괜찮은지 모르겠다.”

이번엔 요한이 자신의 손을 들어 손등을 눈으로 확인했다. 얼마나 힘껏 물었던 건지 수현이 남긴 치아 자국이 몇 주가 지난 아직까지 깊게 패어 있었다.

“멀쩡해요. 솔직히 날 상처 내 줘서 좋았어요. 형은 나한테 약하니까, 이 상처가 사라질 때까지는 싫어도 신경 써 주겠구나……. 그런데 그날 일이 그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요.”

그날의 폭주하는 그는 정말 무서웠다. 수현은 내내 어쩌면, 하고 상상만 해 오던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진짜로 죽일 수도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그의 손에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의 요한은 그날과 달라 보였다. 자신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 같았다. 겨우 잘못했다는 진심 섞인 말 한 마디에 마음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럴 준비를 내내 하고 있던 것처럼 마음은 간사하게 굴었다. 굳게 잠겨 있는 줄 알았던 문은 빗장조차 걸려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기가 막힌 수현은 미간을 구겼다. 절대 잊어선 안 되는 사실이 있다면 요한이 자신의 손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그에게 어떤 거대한 상처가 있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아주 근원적인 질문을 요한에게 던졌다.

“대체 나한테 왜 그랬어?”

수현이 대답을 구하기 위해 그의 옆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요한이 자신에게 저지른 일이야 숱했지만 그는 이 질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요한이 수현을 천천히 돌아봤다. 그는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얼굴이었으나, 너무 울어서 눈의 실핏줄만은 죄다 터져 있었다. 요한은 태어나서 딱 세 번 울었고, 자신은 그 두 번을 목격했다. 그렇게 서럽게 우는 사람은 처음 봤다. 꼭 엄마를 따라 놀이공원에 왔다가 돌연 버려진 덜 자란 아이 같았다.

“오늘 질문이 아주 많네요. 나도 하나 묻죠. 그러는 형은 왜 약속을 어겼어요?”

대답이 의문문으로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어서, 수현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입술만 달싹이고 있자 요한이 먼저 말을 이었다.

“난 원하면 다치게 하는 거라고 배웠거든요.”

“미친 소리 하지 마. 난 그딴 거 가르친 적 없어.”

“아뇨, 엄마가.”

“…….”

“그거 알아요? 정신병은 유전이래요. 특히 나 같은 인간들은 더더욱…….”

“…….”

“다 그 여자한테 배운 거예요. 엄만 언제부턴가 어떤 손님한테 아킬레스건 끊는 방법을 아주 여러 번 물어봤어요. 가끔은 날 앉혀 놓고 연습했죠. 아직도 복사뼈에 상처가 있어요.”

그는 자신의 톡 도드라진 발목 부근의 뼈를 가리켰다. 수현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서 제대로 그의 몸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기에 전혀 몰랐다.

수현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꽤 돼서 상체를 낮추고 기울여야 했다. 힘겹게 손을 뻗어 그의 복사뼈 위를 만지작대니 손끝에 분명 기다란 상처가 만져졌다. 이렇게 큰 상처를 왜 여태 몰랐을까.

수현은 몸을 일으켰다. 자세를 고쳐 앉으니 어느새 요한과의 거리가 처음 나란히 앉아 있을 때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무심코 움직인 서로의 손이 스쳐서, 화들짝 놀란 수현이 먼저 떼어 냈다. 요한은 동요가 없었다.

“그 선생님이란 분을 못 걷게 하려고 했었나 보네.”

넌 어머니를 닮았구나.

그런 말로 그를 상처 내려던 수현은 이내 관뒀다.

“난 여태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아니었던 것도 같아요. 아마 자기한테 상처를 내려던 게 아니었을까……. 나도 누워 있는 동안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차라리 어디 한 군데가 완전히 망가져서 불구라도 됐다면 형은 날 봐 줬겠지…….”

“제정신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넌 진짜 돌았어.”

“물론 엄만 어느 쪽도 결국 실행하지는 못했어요.”

“그래. 상처는 너한테만 남았고.”

원망스러운 기색이 약간 담긴 목소리였다. 입술을 짓이기며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에도 여전히 짜증이 가득했다. 바로 수현이 ‘어디 한 군데가 완전히 망가진’ 적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민감한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던 요한은 일순 픽 웃었다.

“난 영원히 엄마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을 거예요.”

“…….”

“이제 형이 대답할 차례예요.”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용히 듣고 있던 수현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갑작스러운 고해 성사가 엄청난 무게가 되어 그의 가슴속을 짓누른 탓이었다.

그의 말이 그럴싸하게 들릴수록 수현은 혼란스러웠다. 베츨라어에 온 뒤로 줄곧 그에게 또 한 번 속아 넘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다만 거기엔 이미 망가지고 만 자신의 손은 영영 돌이키지 못한다는 절망도 필연적으로 함께 따라왔다. 자신의 마음마저 오락가락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약속을 어겼던 이유가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감추고 싶어서 괜히 센 척해 본 것이었다고 사실대로 말한다면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그래서 수현은 차마 솔직해질 수 없었다. 고작 이런 허무한 도돌이표를 위해서 그를 떠나온 것이 아니었다.

“진작 물어보지. 이제 와 그걸 대답하기엔 너무 늦었어.”

물론 대답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계속 끈질기게, 자신이 포기하고 털어놓을 때까지 물어봐 줬다면…….

늘 이렇게 이랬다면, 그랬다면. 머릿속으로 만에 하나를 가정해 보게 되는 습관도 더는 지겨웠다. 조금만 더 그의 옆에 있으면 그에 대한 연민에 점점 함락당할 것만 같아, 수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수현을 요한이 다급히 붙잡았다. 그는 아주 절실하고 절박해 보였다.

“역시, 내 말은 못 믿겠어요?”

“이거 놔. 10년 가까이 못 믿었는데 하루아침에 어떻게 널 철석같이 믿어?”

“적어도 형 앞에서 나쁜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어요.”

“넌 했어. 신부님 납골당에 국화꽃, 너지? 그때 모르는 척했잖아.”

“그건…….”

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거기 갈 자격이 없으니까요.”

그는 신부님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의외였다. 아니, 아주 놀라운 일이었다.

“네, 날 변호했던 적은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형이 늘 솔직했던 만큼 나도 최대한 솔직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나와 했던 약속을 안 지키고 다른 사람이랑 같이 피아노를 쳤을 때 그렇게 화를 냈던 거예요. 형은 분명 날 좋아하는데, 행동으로 거짓말을 했으니까.”

“……!”

“그 여자가 아니라, 나랑 자고 싶어 했었잖아요.”

“…….”

“내가 왜 7년이나 기다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손목을 붙든 그의 손을 떼어 내려던 수현이 너무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그런 것도 눈치 못 챌 정도로 무디진 않아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아마 자신은 입으로 소리를 내는 법을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돼요? 우리를 그때로 돌이키고 싶어.”

수현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되는대로 내뱉고 있는 것이었다.

“왜…… 왜 또 등신처럼 너한테 속아야 돼. 내가 네 엄마라도 돼?”

“그런 대답을 할 거라면 여기에 와 있으면 안 됐어.”

요한이 독일에 머물고 있을 땐 가족이 있는 한국이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찾아 한국으로 되돌아온 이후 모든 것은 무너졌다. 어디든 그는 따라올 수 있었다. 심지어 그가 자신의 뒤를 쫓지 않을 때도 그는 어디에나 있었다.

수현은 오랜 시간 그 사실들을 질릴 정도로 학습했다. 그가 포기해 주지 않는 한 두 사람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버리고 이곳까지 도망쳐 온 것은 그게 그 순간의 수현이 누릴 수 있고, 행사할 수 있었던 최후의 자존심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내가 실수했어. 그래서 꺼져 준다잖아, 놔!”

“제발. 이러지 마.”

요한은 벌떡 일어나 수현을 끌어안았다. 수현은 몸부림쳤으나 요한이 조금 전 했던 말들 때문에 너무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크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요한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가 전부 눈치채고 있을 줄은 까맣게 몰랐다. 한여름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서 없어져 버리고 싶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

“주세요…….”

그는 수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당황한 수현은 어정쩡하게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간절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던 요한이 허리를 숙여 수현의 발등에 부드럽게 입 맞췄다. 수현은 딱딱하게 굳었다. 언제든 차갑게 얼굴을 바꿀 수 있는 요한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가 머릿속으로 되뇌었지만 마음에서 무언가가 자꾸 비집고 올라왔다.

“네가 얘기해 봐. 어떻게 하면 돌이킬 수 있어? 나야말로 몹시 원해.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전부 망가졌어. 나야말로 돌이키고 싶다고. 말해 봐, 요한. 어떻게 하면 되는데?”

정말로 간절하게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것은 요한이 아닌 자신인지도 모른다. 그와 피아노를 두 손에 올려놓고 떳떳하게 관찰할 수 있던 시절. 그게 그림의 떡이나 여우의 신 포도였더라도 상관없었다. 정면으로 마주하고 마음껏 좋아했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두 사람은 돌아갈 수 없었다. 요한은 그걸 알면서 왜 자꾸 억지를 쓰는 것일까.

“여긴 꼭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했었잖아요.”

그건 이곳에 왔을 때 자신이 지나가듯 했던 말이었다.

“예전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고…….”

“…….”

“다시 나를 사랑해 줘.”

언제나 자신은 요한에게 약했다. 수현은 허탈하게 내뱉었다.

“그건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그냥 네 요구잖아. 조건은? 내가 네 부탁 들어줄 테니까 죽어 달라고 하면 죽어 줄래?”

“좋아요. 다시 날 사랑하게 되면 말해요.”

요한은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끄덕였다. 지켜보던 수현은 기가 막혔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당장 목매달아 죽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무디진 않다더니, 말만 번지르르한 그는 여전히 뭘 잘 몰랐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실은 아주 절실했다. 그에게 진짜 ‘베르테르’를 되찾아 줄 의지와 용기가 자신에게 있는 것인지, 그것을 들여다볼 시간. 이 시간이 멈춘 듯한 도시에서 해 볼 만한 일이라고 느껴졌다.

수현은 발목을 붙잡고 있는 그를 발로 걷어차고, 침대로 향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더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돌아눕자 우두커니 선 요한이 그런 그를 한참이나 지켜봤다.

* * *

잠에서 깬 요한은 본능적으로 옆자리를 살폈다. 얼마나 오랜만에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한 것인지 몰랐다. 몇 년째 그는 불면증과 불규칙적인 수면 패턴 때문에 고전하고 있었다. 몸은 개운했는데 머릿속은 차갑게 식었다. 옆자리가 그의 정신만큼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집 안은 무척 고요했다.

높은 천장을 중심으로 주변을 빙 둘러봤지만 위층에도 아래층에도 수현은 없었다. 그는 급히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건너편 노천카페에서 무언가 주문하고 있는 수현이 보였다. 동시에 이렇게 먼 거리에서 어떻게 알아챘는지 갑자기 이쪽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서로의 위치를 인지하고도 한참이나 그러기에 요한은 다소 당황했다.

‘뭘 어떡하란 말이지?’

그는 갸웃하다 손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수현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자 그제야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상냥하게 웃던 수현은 정말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지난밤 그를 지켜보며 우두커니 서 있던 자신에게 그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여기서의 규칙은…… 지금 시간이 9년 전이라는 그거 단 하나야. 너도 기억하고 있겠지만 그때의 우린 섹스하지 않았어. 대충 이해되지?>

그는 정말로 자신에게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머리도 제대로 안 말리고 나왔네. 면역력도 꽝이면서.”

수현은 그가 자신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요한을 향해 뻗은 기다란 손끝으로 그의 귓가를 툭 쳤다. 물방울이 땅으로 뚝 떨어졌다. 그 찰나의 온기가 따뜻했다. 요한은 자신의 귓불을 잠깐 매만졌다. 그가 예전처럼 대해 주니 자신도 어릴 때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주말의 느지막한 오후라 그런지 카페에는 평소보다 손님이 많았다. 개중 요한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요한을 향해 알은척을 하면 그가 고개를 까딱하고 마주 인사를 해 주는 일이 두어 번 이어졌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오지도, 질문하지도, 사진을 찍거나 하지도 않았다. 다만 계속 요한과 수현을 호기심 섞인 눈으로 지켜봤다.

이 소도시의 사람들은 클래식에 관해 큰 관심이 없었다. 괴테의 흔적들도 다소 방치되어 있을 정도이니 문화 예술보다는 당장 먹고사는 평범한 문제들을 더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함께 두 번째 모습을 드러낸 요한은 그들의 주의를 끈 것 같았다. 지난번 요한이 연주를 하다 수현을 따라 갑작스레 사라진 영향도 있으리라. 그때 두 사람 간에 흐르던 긴장은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것처럼 보였을 테니 말이다.

보다 못한 카페의 주인이 직접 나와 아주 작은 방해도 식사를 망친다며 손을 내저었다. 몇몇은 고개를 돌렸지만 아직도 이쪽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느껴졌다.

“독일 사람들 원래 이래?”

“원래? 뭘?”

“이렇게 남을 우리 속 동물 보듯이 관찰하냐고.”

“그런 편이에요.”

요한은 불특정 다수로부터 관심을 받는 일에 익숙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수현은 달랐다. 불편했다. 미간을 구기려던 수현이 의아해하는 시선을 느끼고 일부러 밝게 웃었다. 그들에겐 외계어처럼 들릴 언어로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만에 하나 그들을 욕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정으로 유추한다면 낭패였다. 지난번엔 그들의 선진화된 의식이 부럽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여러 번 부딪치다 보니 또 감상이 달랐다.

“이래서 사람은 겪어 봐야 안다고 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 게 있어. 먹어.”

두 사람 앞에 놓인 메뉴는 일전에 함께 먹었던 특제 소스 파스타와 연어 샐러드였다. 밖으로 나오기 전 수현은 독영 사전을 찾아 ‘again, pasta, salad’에 해당하는 단어를 찾았다.

손바닥에 세 단어를 적어 보여 주니 주인은 한참이나 그것을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조리실로 들어가 버렸다. 대충 된 걸까 싶어 기다리고 있는데 용케도 그가 지난번 요한과 왔을 때 먹었던 음식을 내왔던 것이다. 이런 어설픈 방법으로도 의사소통이 돼서 천만다행이었다.

원래 입이 짧은 요한 대신 수현이 거의 그릇을 비웠다. 계산하려는 요한에게 손을 휘휘 내저은 주인이 무언가 제안했다. 독어가 유창한 요한은 수현을 힐끗 보더니 길게 대답했다. 아마 주인을 설득하려는 것 같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수현은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주인이 수현을 향해 와다다 말을 쏟아 내는 것이었다. 난감한 듯 요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식대 대신 한 곡 쳐 달라는데요?”

“어, 칠 거야? 그럼 기다릴게.”

“아니, 나 말고.”

“나? 왜 널 두고…….”

거절하려면 손이 불편하다는 것을 주인에게 설명할 만큼의 단어가 필요했다. 수현은 무심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글자들이 아까 전 얼음이 담긴 물컵을 쥐었던 바람에 전부 흐려져 있었다.

“손에 있는 굳은살을 보고 알았대요. 분명 피아노를 아주 많이 친 사람 손이라고요.”

의사소통을 위해 단어가 적힌 손바닥을 보여 주는 동안 주인은 그걸 본 모양이었다.

“어제도 여기에서 연주했다면서요?”

“솔직히 엉망진창이었어. 또 연주해도 분명 그럴 텐데 왜 나한테 그러는지 모르겠네.”

어제의 연주는 너무나 어설펐다.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혼자 있을 땐 아주 드물게나마 피아노를 쳤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결코 연주하지 않게 됐던 게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음악을 자신이 망쳤다는 느낌을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 엉망진창을 듣고도 또 쳐 달라고 하다니 주인의 음악적 취향은 정통보단 이단인 모양이었다.

수현이 난감한 듯 웃자 물끄러미 보던 요한이 주인을 향해 통역했다. 주인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Es ist in Ordnung(괜찮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의 향연이었지만 수현은 왠지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용기를 얻은 그가 요한에게 물었다.

“주인에게 음악가 중에 누굴 제일 좋아하느냐고 물어봐 줘.”

통역을 듣고 난 주인이 수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Helene Fischer!”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헬레네 피셔? 대중 가수 아냐? 클래식! 클래식이라고 다시 전해 줘.”

그러자 고개를 주인이 무슨 의민지 알겠다는 듯 요한을 가리켰다. 하지만 요한이 만든 음악 중 대중에 공개되어 있는 것은 작품 번호 2번인 「피아노 소나타」 1번 정도가 전부였다. 게다가 이제는 폐기된 악보이기도 했다.

잠시 고민하던 수현은 차선책을 선택했다. 그가 고른 것은 리스트의 「위로」였다. 베츨라어. 묘하게 따뜻한 이 도시와 어울리는 곡이었다. 정적이고 차분한 곡이라 수현이 치기에도 부담이 적고, 음표도 대충 외우고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수현은 잠시 이 낡은 피아노와 인사를 나눴다. 양손을 부드럽게 건반 위에 올렸다 떼어 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먼발치에 선 요한이 지켜보고 있었다.

5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청중들은 오직 수현만을 주시했다. 작은 무대 위의 연주자는 최선을 다해 건반을 두드렸다. 그리고 연주가 끝났을 때, 그는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돌이켜 보면 요한에게 누굴 위로하는 법은 가르쳐 준 적 없었다. 그건 자신만의 몫이라고 생각해 왔다. 위로가 필요한 건 요한이고, 자신은 그를 달래 줄 사명을 지니고 그와 만나게 됐다고 믿었다.

늘 자신에게 무언가를 맡겨 놓은 듯했던 요한의 태도는 어떤 면으로는 수현이 만든 것이었다. 그에 관한 한, 자신이야말로 한없이 오만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구석구석에서 소박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수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요한에게로 다가갔다. 그때까지 요한은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리스트가 감격해서 울겠군요.”

“그거참, 눈물 나게 감동적인 감상평이네.”

수현이 받아치자, 요한이 뒤이어 말했다.

“다음 생이 있다면 우수현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억지로라도 날 사랑하게.”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자신은 이 말에만큼은 어떤 대답도 해 주지 못했다. 어차피 말해 준다 한들 사랑과 미움이 팽팽하게 세력 싸움을 하고 있는 이 복잡한 마음을, 요한이 제대로 이해할 리도 없었다.

* * *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근방을 거닐었다. 날이 금세 어둑어둑해졌다. 이렇게 여유롭게 함께 산책한 건 미성년이던 때 이후로 없던 일이었다. 요한이 제대로 콩쿠르 준비를 하기 시작하면서는 피차 거의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고, 그 일이 있은 뒤로는 부딪칠 일을 웬만해선 피해 왔다. 돌아온 요한과 다시 마주치게 됐을 땐 늘 침대로 직행했던 것이다.

조용히 걷던 수현은 문득 뒤를 돌아봤다. 한 걸음 뒤에서 따르고 있던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를 보면 복잡했다. 시간이 멈춘 공간이라는 자기 암시를 걸어도, 때때로 굼떠지는 손의 움직임과, 그걸 지켜보는 요한을 볼 때면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

“내가 널 다시 구해 주겠다고 마음먹으면 우린 어떻게 돼?”

“같이 있게 되겠죠.”

“널 끝내 거절하면?”

“내가 계속 뒤쫓지 않을까요.”

“그게 뭐야. 어느 쪽 결말이든 난 계속 널 보게 되잖아.”

수현이 허탈하게 웃었지만, 요한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날 다시 사랑하면 우린 헤어질 수 있어요.”

예의 조건 얘기를 하는 것이다. 웃고 있던 수현은 자신의 얼굴이 굳어 가는 것을 느꼈다.

서서히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늦은 오후의 석양이 비치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에 아주 흐릿하게 핏물이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요한이 수현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몸은 인간의 평균 체온보다 차가울 거라고 늘 생각했지만 막상 닿으면 의외로 따뜻했다.

따뜻한 물 같은 손길은 천천히 손목을 타고 내려왔다. 곧은 손가락이 수현의 마른 손목을 휘감아 꽉 쥐었다. 이대로 또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르면 어떡하나 덜컥 겁이 난 수현이 벗어나려 손목을 비틀었다. 그러자 그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자세를 고쳐 잡고 더 세게 쥐어 왔다. 사실 이미 망가진 손으론 그를 향해 제대로 저항할 수도 없었다. 표정이 싸해진 수현은 요한을 천천히 올려다봤다.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지만 원한다면 나한테 똑같이 해도 돼요.”

“너처럼 되는 건 싫다고 말했잖아. 놔, 기분 더러워.”

“잘못했어요.”

요한은 서서히 손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저린 손에 막혔던 피가 도는지 뻐근했다. 손목 위로는 다시금 온기가 느껴졌다. 바짝 독기가 올랐던 수현의 얼굴이 천천히 제 색을 되찾았다.

“이젠 아주 자동이구나. 갑자기 왜 이렇게 꽉 붙잡은 건데. 이유나 듣자.”

“손을 잡고 걷고 싶어요.”

수현은 할 말을 잃었다. 여전히 잡힌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왜 우리가 이 지경이 된 건지 그 여러 가지 이유 중 한 가지를 깨달았다. 요한은 때로 말보다 행동이 앞섰다.

“요한, 앞으론 손이 잡고 싶으면 내 의사를 먼저 물어봐.”

“…….”

“그리고 난 지금 너랑 손잡고 사이좋게 걷고 싶지 않아.”

손을 탁 쳐 낸 수현이 다시 앞서 걸었다. 요한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 * *

사고로 누워 있던 몇 주 동안, 그리고 이곳에 와서까지 그가 피아노를 치지 못한 기간은 벌써 한 달이 다 돼 갔다. 그런데도 요한은 금단 증상 같은 것도 전혀 없어 보였다. 정말로 그에게 있어 피아노는 수현과 자신을 이어 주는 매개체에 불과하다는 양, 거실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악기를 좀체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눈을 깜빡이는 시간을 제외하곤 오직 수현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랑비 내리는 오후, 침대 헤드에 기대 책을 읽고 있던 수현은 바닥에 앉아 침대에 얼굴만 걸치고 자신을 쳐다보는 요한에게 넌지시 말했다.

“피아노 쳐도 돼. 안 쓰면 녹슬잖아.”

“다신 안 칠 거예요.”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책을 힘껏 내던진 수현은 몸을 바로 세워 앉았다. 바닥으로 떨어진 책은 요한의 앞을 향해 굴렀다. 그는 그것을 주워서 가지런히 덮고, 협탁에 올려 두었다. 자신이라면 그대로 뒀을 것이다. 두 사람은 사소한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달랐다.

“그편이 공평하니까?”

“지랄하지 마. 너같이 성격에 하자 있는 인간한테 재능 빼면 뭐가 남아? 그리고.”

수현은 잠시 뒷말을 머뭇댔다.

“난 네 연주를 좋아해.”

그러자 요한이 일어나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수현을 마주 본 그는 되물었다.

“같이 칠래요?”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는 어때요?”

“네가 만든 거 말하는 거야? 그건 내가 외우고 있지 않잖아. 악보도 없고.”

“수린 씨한테 보내 달라고 부탁하면 돼요.”

“시간이 멈춘 공간. 잊었어? 그때 우린 그 여자 존재를 알지도 못했어.”

“그럼 「꽃의 왈츠」.”

그때 그가 얼마나 앓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자신이 아주 아팠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았다. 그는 모르는 일이지만 「꽃의 왈츠」를 치고 난 직후 숙소로 돌아온 수현은 화장실로 직행해 그날 먹은 것을 전부 게워 냈다. 왜냐하면, 요한이 가슴 터질 것처럼 좋았으니까. 줄곧 자신을 괴롭혀 왔던 그 마음을 나란히 앉아 연주하던 그 순간 정확히 깨달았다.

그와 자고 싶었다.

어쩌면 그는 그 순간의 자신을 읽어 냈던 걸까.

그날 이후로 수현의 마음은 줄곧 지옥이었다. 어마어마한 해일 위에서 난파된 배의 파편을 붙잡고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데, 얼마 뒤의 요한이 그의 손을 부러뜨려 심해 속으로 고꾸라뜨리고 만 셈이었다.

“좋아. 우린 「꽃의 왈츠」를 극복할 필요가 있어.”

수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두 사람은 창가의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았다. 피아노 위의 어스름한 조명은 조도가 무척 낮았다. 무대 위는 밝고, 객석이 어두운 콘서트홀과는 정반대의 환경이었다. 수현은 서로에게 썩 떳떳하지 않은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하려면 이편이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수현이 먼저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뒤따른 요한이 수현의 속도에 맞춰 연주를 시작했다.

인류로 비유하자면 요한은 진화했고, 수현은 퇴보를 넘어서 멸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요한은 인내심 있게 수현에게 보조를 맞췄다. 완성된 음악은 귀가 좋은 수현이 듣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그럴싸했다.

연주가 끝나고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숨을 골랐다.

수현은 요한을 돌아봤다. 자신이 먼저 그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요한은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눈빛이 뜨거웠다. 그는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 일어서서 수현에게 다가섰다. 휙, 그를 들어 올려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히고 잠시간 바라봤다. 수현의 등이 건반 위에 닿으면서 이상한 화성의 소리를 냈다.

“너 일부러 같이 치자고 한 거지. 섹스하고 싶어서.”

“알면서 왜 당해 줬어요.”

그때도 꼭 이랬다. 미성년이던 수현은 그와 나란히 앉아 함께 연주하자마자 무척 관계하고 싶었다. 다만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여자처럼 질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를 몰랐다. 무엇보다 그걸 자신보다 더 어린 요한을 데리고 해도 되는 일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 숨을 골랐다. 그러나 지금의 두 사람은 하는 방법도 너무나 잘 알았고, 피가 덜 마른 애송이도 아니었다.

짐짓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수현이 요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문득 치밀어 오르는 성욕을 억누를 수가 없어졌다. 그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목덜미를 한 손으로 그러쥐고는 그대로 입을 맞췄다. 입 속으로 자신의 혀를 강제로 밀어 넣고 이곳저곳을 투박하게 건드렸다. 요한은 당황하지 않고 그런 수현을 받아 주었다. 「꽃의 왈츠」를 칠 때처럼 성심성의껏 보조를 맞췄다. 두 사람의 키스는 이제 횟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잦은 일이라 금세 서로의 혀가 익숙한 자세로 엉켜들었다.

한참 동안 입 속을 오가며 살덩이로 온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수현이 고개를 떼어 내는 바람에 천천히 멀어졌다.

“하, 하아…….”

수현은 숨을 몰아쉬었다. 요한의 귓가로 가쁜 그의 호흡이 흩어졌다. 한참을 그 상태로 앉아 있던 그가 요한의 얼굴을 두 손으로 꽉 붙들었다.

“넌 나한테 박히는 상상 해 본 적 있어?”

“와, 상상하니까 섹시해요.”

“역시 안 해 봤군.”

“그 반대는 해 봤어요.”

“그래, 너뿐만 아니라 보통의 남자라면 다들 그렇지. 그런데 난 처음부터 박히는 쪽을 상상했어. 놀랍지 않아?”

“…….”

“왜냐면 그게 우리의 위치기 때문이야.”

검지를 들어 하얀 건반 위를 누른 수현은, 요한더러 보란 듯이 그 위의 검은 건반을 뒤이어 눌렀다. 수현은 늘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사람의 섹스야말로 권력의 역학 관계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라고 여겼다. 그래서 여태 요한이 요구하면 자신이 그의 연주를 화대로 받고 수락했지만 그 상호 협의된 거래마저도 때론 공정하지 않게 느껴졌다.

“빌어. 이딴 수작 부릴 시간 있으면 무릎 꿇고 제발 하게 해 달라고 개처럼 빌라고.”

요한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의자 밑으로 내려가 무릎을 꿇었다. 수현의 발등을 들어 올려 그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더니,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너무나 빠른 태세 전환이 놀라웠다. 수현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한테 박히는 걸 상상했어? 언제?”

요한이 묻자, 웃고 있던 수현의 얼굴이 싸하게 굳었다. 그사이 복사뼈 위로 올라온 요한의 입술이 천천히 발목을 지나, 종아리를 타고 점점 위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허리를 세운 요한이 수현의 셔츠 아래로 감춰진 척추뼈를 길게 훑었다.

“이게 개처럼 비는 거야?”

“발정기라고 생각해.”

“아, 생각해 보니까 여기가 시간이 멈춘 곳이었다는 걸 잊고 있었어. 여기서 우린 미성년자였지? 미성년자는 법적으로 성관계가 금지돼 있지 않았어?”

“그리고 여기가 독일이기도 하지.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수현은 잠시도 지체 없이 반박하는 요한을 날카롭게 쏘아봤다. 아랑곳하지 않은 요한은 천천히 등을 타고 내려간 손으로 둥그렇게 포물선을 그렸다. 바지 버클에 안착한 그의 손이 괜스레 풀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간을 봤다.

철썩, 수현은 요한의 뺨을 때렸다. 고개가 돌아간 요한이 천천히 다시 얼굴을 돌렸을 때,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입술을 부딪쳤다. 뜨거운 혀와 다급한 손길을 느끼며 수현은 요한에게 매달렸다. 그러자 요한이 수현을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거기까지 가는 시간도 아까웠다. 수현은 요한의 셔츠를 벗겨 냈다. 손이 마구 엇나갔다. 풀썩, 두 사람의 몸이 넓은 침대 위에 다급히 쓰러졌다. 그러고는 뒤엉키기 시작했다.

수현의 동그란 뒤통수가 침대 헤드에 툭 부딪쳤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수현은 눈꺼풀을 들어 올려 두 눈을 희미하게나마 뜨려고 노력했다. 이마를 요한의 어깨 위에 힘겹게 문지르다 떼어 내자, 불쑥 입 속 동굴 안으로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침입했다. 내부를 휘젓는 손가락은 여린 살들을 꼼꼼하게 눌러 입 안을 자극하고 있었다.

수현은 그의 손을 잡아당겨 빼냈다. 침으로 범벅이 된 요한의 손등 위에 상처 자국이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한국에서 자신이 깨문 것이었다. 수현이 그 위를 혀로 길게 애무하자, 움찔한 요한이 허리를 떨었다.

그는 수현이 젖병 문 아기처럼 열심히 손가락을 빠는 틈을 타 끈질기게 전신을 애무했다. 그러다 수현의 입 속에서 흥건해진 자신의 손가락을 그의 입구 주변에 대고 꾹 압박해 밀어 넣었다.

“읏……! 으음…….”

뜨거운 내부에서 원을 그리듯 손가락을 계속 굴리자 수현이 신음했다. 정상위는 늘 하반신이 버거웠다. 땅기는 허벅지가 중력을 따라 자꾸만 수직 낙하하려 하자, 요한이 허벅지의 뒷부분을 꽉 붙들었다. 그러고는 독이 바짝 오른 자신의 것을 수현의 입구에 끼워 맞추고 그대로 박아 넣었다.

“하, 윽……!”

안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질량감과 열기 때문에 그의 것을 조이고 있는 내부의 살들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둔부로 닿는 까칠한 음모와 그가 안에서 밖으로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나는 질척한 소리, 자신의 귓가에 흩뿌려지는 요한의 거친 호흡까지, 그 모든 게 수현의 정신을 까마득하게 만들었다.

힘겹게 눈을 뜬 것이 무색하게, 연신 도로 감겼다. 수현이 있는 힘껏 눈 주변을 구기는 바람에 미간까지 덩달아 좁혀졌다. 요한은 그 찌푸려진 살결 위에 입을 맞췄다. 동시에 거친 운동이 시작됐다.

“읏……!”

“아, 아, 아, 좀 천천히 들어와, 이 개자식아……! 윽!”

손을 둘 곳이 없어진 수현이 요한의 기다란 목을 감싸 안았다. 상반신에 힘을 줘 요한에게 가까이 닿으려 하자, 요한이 등허리로 손을 넣어 그를 들어 올렸다. 마른 나신이 요한의 피부 위에 철썩 달라붙었다. 땀 흘린 두 육체가 맞닿자 금세 질척였다. 그런데도 떨어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결박했다.

하반신의 생경한 통증 때문에 손을 바르작거리던 수현은 요한의 어깨뼈를 힘껏 쥐었다. 그가 붙든 자리가 손자국 모양으로 하얗게 질렸다가, 손톱으로 상처를 내자 붉게 달아올랐다. 자세가 몸에 잘 맞지 않는 모양인지 연신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의 상체에 매달려 있는 통에, 요한은 그의 자세를 고쳐 주기 위해 천천히 빠져나왔다.

“하, 읏……! 젠장, 애 낳는 기분이야!”

요한은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아들? 아니면 딸?”

“개 같은 소리 하지 마!”

대화다운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요한의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금세 다시 수현의 밀부로 침투했다. 자세가 불편한 것 같기에 정자세로 수현을 눕히고 무릎을 들어 올려 다트를 던지듯 한 번에 내리꽂았다. 그러자 수현이 좀처럼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양 고개를 도리질 치는 것이었다. 번쩍 뜬 눈도 약간의 원망을 담고 있었다. 요한이 키스하려 얼굴을 가까이하자, 수현이 요한의 귀를 꽉 물어 버렸다.

“윽……!”

신음을 내뱉은 요한이 손을 수현의 양쪽 뺨 옆으로 지탱했다. 수현은 처음처럼 요한의 목을 휘어 감았다. 그러고는 또다시 바짝 몸을 붙여 매달렸다. 그 바람에 복부 위로 곤두선 수현의 것이 꾹 짓눌리고 있는데도 요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참 그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리던 수현은 눈앞에 있는 현재의 요한을 보며 과거의 그를 함께 떠올렸다.

만일 두 사람의 첫 관계가 규칙이나 거래가 아닌 순리대로 이어졌다면, 첫 경험을 할 때의 자신은 아마 끊임없이 그를 몇 번이나 쳐다보고, 또 가지고 싶어 했을 것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체온을 나누는 이 행위는 여태까지와 같은 고통이 아니라 두 사람 간의 정서적 교감이었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자 수현은 요한이 너무나도 애틋해졌다. 그는 요한의 뺨을 두 손으로 붙들고 자신에게로 내려 부드럽게 입술을 머금었다.

잠시 멈칫했던 요한은 다시 움직였다. 그가 몸을 부딪쳐 올 때마다 철썩, 하는 낯 뜨거운 소리를 내며 끈적한 피부가 마찰했다. 몇 번 가볍게 쪼듯이 입 맞추던 수현은 혀를 밀어 넣고 게걸스레 키스했다. 요한이 눈을 감고 그런 수현의 어깨를 휘어잡았다. 그는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처럼 수현의 아래와 위로 한꺼번에 돌진했다. 숨이 막힌 모양인지 수현이 가쁘게 헐떡였다. 전에 없이 욕망에 솔직한 눈가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 * *

요한은 침대 위에 누운 채였다. 땀에 절어 있는 수현은 그런 요한의 위에 엎드려 있었다. 이불 덮듯 수현을 포갠 요한의 손가락이 그의 등을 쭉 타고 내려가며 연주하듯 움직였다.

수현은 지금 그가 자신의 등을 건반 삼아 연주하고 있는 곡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정신을 집중했다. 쉽지는 않았다. 그러는 와중 그의 긴 손가락이 수현의 둔부 사이로 파고들었다.

“안 돼, 이제 그만. 밤새우겠어.”

“왜? 난 밤새도록 하고 싶어.”

“찢어질걸?”

“내가 예쁘게 꿰매 줄게.”

“어이가 없다.”

기가 막힌 나머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요한의 손이 다시 등허리 주변을 타고 올라와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여유롭게 후희를 즐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늘 그가 원하면 옷을 벗고, 관계를 맺고, 도망치듯 씻고, 가능하다면 도망가고, 그럴 수 없을 땐 등을 돌리고 잠들었다. 화대로 받은 요한의 연주는 관계의 전일 때도 후일 때도 있었다.

얼마나 기계적으로 관계 그 자체에만 매달려 왔는지를 깨달았다. 습도 높은 곳에서 더운 땀을 나눴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건조했던 것이다. 수현은 요한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요한도 꼭 그렇게 그를 올려다봤다.

“왜 진작 말 안 했어? 네가 기억하는 처음이랑 내가 기억하는 처음이 달랐다는 거.”

자신이 그때 피아노를 치고 있던 게 아니라 다른 걸 하고 있었다면, 요한은 그걸 선택했을까? 이를테면 과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거나, 영어 웅변 연습 같은 걸 하고 있었다면 말이다.

“그때 내가 피아노가 아니라 다른 걸 하고 있었다면?”

“그러면 난 그 다른 걸 했겠지. 널 만나고, 기쁘게 만들고, 또…….”

“나처럼 되기 위해서.”

이를테면 서로를 얻기 위해 들인 기회비용은 각자의 미래였다. 수현은 본의 아니게 자신의 꿈을 빼앗겼고, 요한은 오직 수현을 위해 자신의 진로를 결정했다. 다만 크게 잃은 게 없는 요한이 비교 우위에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지금 그의 위에 있는 것처럼 눈을 현혹하지만 실제로 수현을 꿰뚫는 것은 요한이니까 자신이 압도적으로 큰 손해를 입은 셈이었다.

“어쨌든 너랑 같이 있는 건 내가 훨씬 손해야.”

“알아. 난 손이 많이 가지.”

수현은 대답 대신 요한의 턱 끝에 관자놀이를 비볐다. 그러고는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댔다. 어쩐지 그의 달아오른 눈동자를 오래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였다.

“눈 감고 들어.”

그는 시키는 대로 착하게 눈을 감았다. 수현은 그제야 눈을 서서히 뜨고 요한을 다시금 내려다봤다. 언제 봐도 깎아 놓은 듯 잘생긴 얼굴이다. 차갑고 기다란 눈매와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음험한 기운을 감추고 나니 훨씬 인상이 순했다. 언제 자신을 잡아먹을지 알 수 없는 맹금류가 아니라, 그저 요한으로 보였다. 수현은 용기를 냈다.

“요한, 네 말이 맞아. 열아홉의 나는 널 좋아해.”

차분히 수현의 뒷말을 기다리던 요한은 두 눈을 번쩍 떴다. 달빛에만 의지한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수현이 정말이지 아름답게 보인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러자 수현이 두 손을 들어 올려 요한의 눈꺼풀 위를 덮었다. 그의 눈을 보고 있으면 솔직하게 다 털어놓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언제 처음 너랑 자고 싶었냐면…… 그건 너무 오래됐어. 그걸 내 안에서 인정한 건 너랑 같이 「꽃의 왈츠」를 쳤던 열아홉 살 때. 그리고…… 또 뭐가 있었더라.”

“…….”

“아, 내가 그날…… 너와 했던 약속을 어기고 다른 사람과 같이 나란히 앉아서 피아노를 쳤던 건, 그것도 네가 맞아. 괜한 객기였어. 난 널 좋아하고 있었고, 그걸 들킬까 봐 두려웠거든. 그걸 알게 되면 네가 날 떠날 것 같았어. 그게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니까…… 난 그때부터 줄곧 널 미워한 셈이네.”

본론은 지금부터였다.

“나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넌 죽지 말고 독일에 남아서 다시 연주해.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클라시스 스카우트 건은 거절이야.”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죽어선 안 됐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떵떵거리면서 살아야 했다. 어떻게 살린 목숨인데. 어떻게 보면 자신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결과적으로 인생 전체를 걸고 그를 구한 셈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들은 요한은 몸을 들썩였다. 그 바람에 그의 위에 있던 수현까지 휘청했다. 다시 그의 어깨를 잡아 누르고 눈을 가리자, 의외로 순순하게 따라왔다.

“어째서? 나한테 기회를 주기로 했잖아.”

“진짜로 기회를 주려는 거야. 그래서 가겠다는 거고.”

“난 이해 못 하겠어. 대체 왜…….”

“아직 사랑하는데.”

“…….”

“네가 너무 미워.”

“…….”

“이걸 이해할 수 있겠어? 넌 못 할걸?”

순간, 몸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그러나 묘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수현이 직접 자신의 몸을 확인하려 시선을 내렸다.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러나 자신이 아니었다. 요한의 상체가 아주 미약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몹시 동요한 것 같았다. 수현은 그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 뺨에 키스했다. 놀랍게도 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강제로 시야를 봉인당한 요한은 자신의 진솔한 표정을 볼 수 없을 테지만, 방금 내뱉은 말들은 조금의 확대도 축소도 없는 수현의 진심 그대로였다. 누군가를 아직 미워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상처가 남아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상처가 아무는 데엔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자신의 것은 아직 실밥조차 꿰매지 않고 어설프게 바늘로 봉합만 해 둔 상태였다. 그런 자신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한계까지 밀어붙인 요한 덕분에 간신히 봉합해 둔 것마저 터져 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비가 오면 시린 뼈처럼 삶 속에서 문득문득 고개를 드리우고 그를 쪼아 댔다. 이런 상태로 그와 다시 함께할 수는 없었다.

“우리 시간을 좀 갖자.”

“…….”

“지난 7년 동안 난 너무 초조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 같은 게 없었어.”

침묵의 실을 짜는 요한은 받아들일 수가 없는 듯 보였다. 역시. 많이 자랐구나 생각하다가도 결국 제자리였다. 손바닥 위가 기다란 속눈썹 때문에 간지러웠다. 요한의 말대로 여전히 수현에게 그는 하나하나 일일이 설명해 주어야 하는,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다.

“난…….”

“네가 이 과정조차 견디지 못한다면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지금처럼 넌 날 쫓고 난 도망칠 거라고. 그러길 원해?”

“…….”

“대신 우리, 새로운 규칙을 만들자.”

시간을 갖자고 말했지만, 솔직히 얼마나 걸릴지는 자신도 몰랐다. 그를 다시금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내일 당장이 될지, 수십 년 뒤가 될지. 그래도 수현은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그를 구해 주겠다고 먼저 약속했던 것은 자신이었다.

“넌 수렁 속에서 기다려. 축축한 흙탕물 냄새 때문에 괴로워하고 아파도 하면서.”

“…….”

“그럼 내가…….”

수현이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요한의 깊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다시 널 구하러 올게.”

요한.

난 오늘을 또 후회하게 될까?

난 너 때문에 또…… 슬퍼지게 될까?

“그땐 네가 사랑이란 말이 얼마나 무거운 건지, 알 정도로는 자라 있었으면 좋겠다.”

놀랍게도 요한은 발끈하지도, 억지를 부리지도, 지난번에 수현이 약속을 안 지켰으니 이번만큼은 절대 속지 않겠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수현의 오른손을 끌어 내려 차갑게 식은 손바닥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착하게…….”

“…….”

“기다릴게요.”

<내가 다시 널 구하러 올게.>

그건 요한의 귀에 사랑의 최상급 표현처럼 들렸다.

* * *

이곳에 처음 올 때부터 수현에게 짐이라곤 없어서, 공간의 모습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그런데도 난 자리는 뼈아팠다. 이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모습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던 모습도 전부 가끔 자신이 보는 환상이었던 것만 같았다. 시린 손끝 발끝에서부터 흘러나온 차가운 피가 점차 온몸과 머릿속까지 퍼져 나가고 있는 듯했다. 요한은 뭐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침대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그는 홀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수현을 생각하는 일을 제외한다면 할 줄 아는 일도, 할 수 있는 것도 그것밖에 없었다.

그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연주했다. 밤부터 다시 새벽까지, 또 새벽부터 아침까지. 그가 만들어 낸 선율은 사흘 밤낮으로 동이 트고 지는 내내 이어졌다. 연주라기보단 혹사에 가까웠다. 어떤 대상을 떠올리지 않으려 몸과 마음을 다른 쪽으로 몰두하는 것 같았다.

며칠간 그가 연주한 수십 곡의 레퍼토리 중 「베르테르」는 없었다.

“넌 또 버려졌네, 요한.”

그리고 며칠 뒤 베츨라어의 집으로 린이 찾아왔을 때, 요한은 침대 위에서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얇은 이불을 그의 등에 덮어 주자, 잠시 뒤척였다.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야?”

그녀는 아주 낯선 얼굴로 잠들어 있는 그가 깨어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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