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이듬해 1월.
피아니스트 승요한이 건강한 모습으로 독일에서 얼굴을 비쳤다.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관람한 뒤 하이네만과 만난 장면이 독일의 공영 방송인 「도이체벨레」를 통해 전파를 탔다. 지난해 휴식을 선언했던 그의 복귀 후 첫 공식 행보였다. 멀리 한국의 주요 언론사들도 영상 자료를 제공받아 일제히 이 뉴스를 보도했다.
다행한 것은 시간이 많이 지난 뒤라 그의 가족을 향했던 대한민국 언론의 관심도가 많이 사그라져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요한이 한동안 두문불출하는 바람에 일시적인 화제에 그쳤다. 또한 연애든 가정사든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니 지나치게 파고들지 않는 성숙한 시민 의식을 보이자는 여론도 서서히 생겨났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소속사 클라시스가 요한이 직접 인터뷰한 기사와 자사의 공식 창구를 통한 발표만이 사실이며 그 외의 모든 악성 소문들에 대해서는 소송까지 불사할 계획임을 밝혔다. 그렇게 일이 자연스레 일단락되어 가면서 수현의 집 앞이나 아버지의 학교 등지에 찾아오는 기자들은 점점 자취를 감췄던 것이다.
버스 제일 뒷좌석에 앉은 수현은 창밖을 내다봤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분명 이번 겨울이 그다지 춥지 않을 것이라던 기상청발 뉴스를 지난 12월에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말이 맞기는커녕 올해 겨울은 몇 년 만의 혹한기였다.
“글쎄 병원은 내일 간다니까.”
[원래 오늘이잖아! 너 일부러 안 가려고 그러는 거지.]
“이윤도 선생님이 오늘 외래 진료가 너무 많대. 상담할 거면 내일 오라셔서 검진받는 김에 한국대 병원까지 한 번에 싹 들를까 하고 시간 바꾼 거야.”
[진짜 손 재활하게? 그렇게 말해도 큰 변화 없을 거라고 듣는 척도 안 하더니 웬일이셔?]
“안 한다고 잔소리더니 이제 한대도 난리야.”
[좋아서 그러지! 너 1퍼센트의 차이가 얼마나 큰 줄 알아?]
“어, 버스 섰다. 엄마, 나 내려야 돼. 지금 눈 많이 와서 휴대폰 드는 거 불편해. 끊을게!”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급히 하차 벨을 눌렀다. 잠시 정차해 있던 버스의 뒷문이 열렸다. 가까스로 버스 정거장에서 내린 그는 약속 장소까지 천천히 걸었다. 발밑에서 뽀득거리는 눈의 촉감이 기분 좋았다.
최근의 수현은 예전과 같은 일상을 되찾았다. 그러니까, 요한이 되돌아오기 전의 삶 말이다. 그는 학교에 출근해서 오후에 퇴근했고, 한 달에 한 번씩 검진을 위해 병원에 다녔으며, 어머니와 때론 드라이브를 하고, 밤이 되면 ASMR을 틀어 놓고 잠이 들었다. 그러고는 종종 멀리 있는 요한을 떠올렸다.
여전히 삶 속에 요한은 있었으나, 실제의 그는 독일에 있었다. 달라진 것은 앞으로 손의 재활을 위해 재활 전문 병원에 다니기 시작할 것이라는 사실 한 가지뿐이었다.
내일 이윤도를 만나기로 한 것은 재활 병원을 추천받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재활한다 한들 이미 다 끊어진 인대 때문에 큰 변화는 없으리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약간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시도해 볼 작정이었다.
몇 개월 전, 파리로 홀연히 떠날 때의 수현에게는 사표 제출의 정성을 보일 최소한의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학교에선 제명된 상태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의외의 통보였다. 피아노과 교수인 선우엽이 자신의 연구를 목적으로 조교인 수현에게 긴 휴가계를 내게 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학부 때부터 그가 배려심 있게 수현을 돌봐 준 것은 사실이지만 왠지 이번 일에 있어서만큼은 다른 사람의 입김이 작용한 듯했다. 이동준이거나, 요한이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었다. 당장의 수현은 이 호의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가만히 집에만 앉아 있는 건 잡생각만 야기할 뿐이었다. 그래서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내는 데 바쁜 업무만 한 것은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돌아온 것을 보고도 부모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딜 다녀온 거냐는 평범한 질문조차 없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기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돌아온 한국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요한에 관한 관심으로 뜨거웠다. 특히나 그가 연인인 S에게 저작권 일체를 일임한다는 기사 때문에 S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던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가깝고 먼 주위 사람들 중 승요한의 ‘S’가 수현일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기사에서 그의 S를 여자인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고, S라는 이니셜이 당연히 성씨의 이니셜이라고 단순히 판단했기에 우씨인 수현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것 같았다. 타과 조교들이 오히려 그에게 S의 존재에 대해 좀 알려 달라고 넌지시 부탁해 오기에 수현은 자신도 모르는 일이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가게 앞에 도착하고 이동준의 이름을 대니 안쪽의 밀폐된 방으로 안내받았다. 그곳엔 이미 도착한 그가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얼굴이 한결 편해 보였다.
“제가 늦었나 봐요.”
“근방 서점 들렀다가 시간 뜨길래 내가 좀 일찍 왔어. 앉아라.”
“선생님 얼굴 좋아지셨네요.”
“너만 할까?”
수현이 벗는 두툼한 회색 코트 위에 눈이 조금 쌓여 있기에 이동준은 그것을 힐끗 쳐다봤다.
“밖에 아직 눈 오니?”
“펑펑 오죠. 집에 갈 때가 걱정이에요.”
“왜 그런 걱정을 해? 당연히 내가 데려다줘야지.”
“아, 호의는 한 번 거절하는 게 미덕이라 배웠는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오늘은 그냥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동준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얼굴 진짜 좋아 보이세요. 좋은 일 생기신 거예요?”
“요한이 도로 독일로 돌아갔으니 앓던 이 빠진 거지, 뭐. 그리고 마누라가 잠깐 한국에 들어왔거든.”
“와, 사모님 안녕하신 거죠?”
“그런 모양이다.”
스승의 간절한 바람대로 요한은 연주 활동을 재개했다. 데뷔 직후처럼 하루걸러 하루 연주하는 강행군은 아니었다. 꽤 여유롭게 일정을 잡았는지 그의 소식은 아주 가끔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독일로 돌아가 버리자 린과의 연락도 뚝 끊겼다. 물론 어머니께는 아주 가끔 연락을 하는 모양이지만 이제 어머닌 자신에게 요한의 얘기를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혹시 선생님이 선 교수님한테 따로 말씀해 주신 거예요?”
이동준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슬쩍 떠보기 위해 꺼낸 질문이었다.
‘이쪽은 아니군.’
그렇다면 자신에게 베푼 호의의 주체는 자연스레 요한이었다.
“뭘 말이야?”
“아뇨, 아니에요. 오늘 보자고 하신 용건은 뭔가요?”
“아, 그렇지. 이거 좀 읽어 볼래?”
그는 두툼한 서류 봉투를 수현에게 내밀었다.
“나머지는 전부 모집 요강 같은 거고, 네가 확인해야 할 건 제일 앞에 있는 한 부다.”
겉면에 인장이 찍힌 누런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자, 제일 앞면에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뉴욕의 메네스 음대 작곡과 지원서였다.
“계속 조교 일만 하고 있을 순 없잖아. 내가 추천서를 써 줄 수 있을 것 같다. 토플 점수가 필요하다는데 마침 네가 영어는 꽤 하니까 괜찮을 거야.”
선뜻 그러겠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걸리는 외적 상황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유학은 피아노를 전공하는 내내 수현이 상상만 했던 일이었다.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누군가와 달리 자신의 자질은 평범한 데 그쳤다. 지금이라고 한들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오히려 나이는 나이대로 먹고, 손도 멀쩡하지 않아 상황이 더 나빴다. 만나자마자 헤어짐부터 기약하는 수현은 벌써부터 아쉬운 마음에 종이 모서리만 만지작거렸다.
“여긴 동유럽같이 물가 싼 곳도 아니고 뉴욕이잖아요. 생활비만 해도 감당 안 될 거예요. 모아 둔 돈도 없고요.”
“그것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서 말을 꺼낸 거지. 얼마 전에 취임한 학장이 나랑 절친한 사인데, 이 친구가 대학원 장학 제도를 전면 개편해서 시스템이 굉장히 잘돼 있다는구나. 넌 성실한 편이니 성적은 웬만해선 유지할 거고 학비나 생활비를 그걸로 충당하면 돼. 뉴저지에 아내 명의의 집이 한 채 있으니 통학은 거기서 하면 될 거다. 뭐, 뉴욕 중심부가 아니라 왔다 갔다 하기 좀 불편하긴 하겠더라만.”
거기까지 듣고 나자 수현은 불현듯 의심부터 들었다. 이런 좋은 기회가 거저 생길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동준이 꺼낸 작곡 이야기는 너무나 뜬금없기도 했다.
“이거 요한이죠.”
“…….”
“요한이 절 도와주고 싶어서 선생님께 부탁한 거예요. 맞죠?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아닐 수가 없거든요.”
“그래. 요한이 먼저 말을 꺼낸 건 맞아. 네가 작곡을 제대로 배운다면 괜찮을 것 같다고 충고해 주더구나. 그걸 자기가 말하면 네가 본능적으로 작곡에 거부감을 느낄까 봐 그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대.”
당연히 그랬을 터였다. 또 이것을 빌미로 뭘 통제하고 요구해 올지 알 수 없어 거절부터 했을 것이었다. 수현은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처음으로 선생 노릇 하려고 직접 열심히 알아본 거야. 이제 요한은 내 손을 떠났다. 이미 날 뛰어넘은 지 한참이니 더 내가 가르치거나 도울 것도 없다고 봐야지. 내게 남은 제자는 너뿐이야. 돕게 해 다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수현에겐 꿈같이 솔깃한 얘기였다. 하지만 엄청난 행운이라 간단하게 치부하고 결정을 내리기엔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았다. 단순히 금전적인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자신은 선뜻 인생의 항로를 바꾸기에는 겁이 많아지는 모호한 나이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제가 뭔가를 다시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건 아닐까요.”
“정은 씨는 서른넷에 정식으로 소설가가 됐지. 신춘문예에 등단하기 하루 전까진 신문사에 다녔다. 너 그거 알고 있었니?”
소설가 강정은은 그의 아내였다. 말을 마친 이동준은 빙긋이 웃었다. 그의 말에 수현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마주 웃어 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잘 생각해 보고 알려 줘. 지금이 1월 말이니 반년 정도 준비해서 다음 학기부터 다니면 될 거다. 긍정적인 방향이었으면 좋겠구나. 그럼, 식사할까?”
먼저 이동준이 수저를 든 뒤로도 한참이나 수현은 정지 상태였다. 그는 수현의 사념을 방해하지 않았다. 이건 충분히 좋은 기회였다.
졸업한 뒤 줄곧 학과 조교로 일하면서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보다는 남의 것을 듣는 일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이렇게 서서히 가다 완전히 공급자가 아닌 소비자가 되어 버리는 그 순간, 피아노와 자신이 맺었던 긴밀한 인연은 끝이었다. 그래서 더 피아노와 밀접한 학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미 헤어진 연인에게 이렇게 매달려 있을 순 없는 일이었다.
마음이 복잡해진 수현은 테이블 위의 봉투를 괜히 한 번 꽉 쥐었다.
* * *
매년 졸업 시즌이 되면 졸업식 바로 전 주에 음대생들의 졸업 연주회가 열렸다. 요한이 한국 대학교에 왔다가 떠나간 지 꼭 1년이 되는 참이었다. 벌써 다음 주가 졸업 연주회였다.
당일 공연장에 올 초대 손님들을 위한 케이터링 서비스를 주문하고, 필요한 악보들을 준비하고, 무대 장치 설정이나 피아노의 조율까지 할 일이 태산이라 졸업생들보다 수현이 더 바빴다.
이번 회 졸업생 중에는 재욱도 포함되어 있었다.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그는 학교에 큰 행사를 제외하곤 잘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그의 동기들도 앞으로는 더욱 보기 어려울 테니 사인을 받아 둬야 한다고 성화였다.
재욱이 친목 도모로 바쁜 동안 그의 부모님을 응대하는 것은 수현이 대신했다. 다쳤던 일을 계기로 사이가 다시 원만해진 모양인지 재욱의 유일한 초대 손님은 부모님과 누나 부부, 그리고 예쁜 조카였다.
“나 기억해? 신입생.”
“졸업한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절 신입생이라고 불러요?”
승요한 홀로 들어가는 부모님을 뒤따라가던 재영은 남편와 아이를 먼저 들여보내고 수현의 앞에 우뚝 섰다. 그녀는 학교 다닐 때보다 살이 조금 올라 훨씬 보기 좋았다. 날카롭던 눈매도 좀 더 누그러졌다. 덕분에 그녀가 졸업한 뒤로 몇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나이는 더 어려진 것처럼 보였다.
재영의 졸업 연주회에서 두 사람이 협연했던 장면이 수현의 머릿속에 새록새록 떠올랐다. 사실 그때도 많은 교감을 하지는 않았다. 각자가 품고 있는 문제만으로도 복잡했을 시기였다. 자신은 입학 직후 수술 후유증으로 1년을 통으로 쉬었다가 재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고, 재영은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틈만 나면 연습하고, 함께 끼니때가 한참 지난 시간에 밥을 먹고, 그러고는 헤어졌다. 물론 식사 시간 내내 아무런 사적인 대화도 없었다.
“딸이네요? 아이 이름이 뭐예요?”
“예린이. 예쁘지? 근데 남편 성이 특이해서 붙여 부르면 덜 예뻐. 피씨거든.”
“곧 학교 다니면 별명 피아노 이런 거 되겠다.”
“나 진짜로 아노라고 지을까 고민했다니까.”
“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이름을 그렇게 지으면 애 얼굴을 나중에 어떻게 봐요.”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렸다. 한 무대에서 연주한 지 거의 10년이 흐른 뒤에야 나누게 된 개인적인 대화였다.
“그때 너무 정신없어서 제대로 말을 못 했는데, 네 연주 좋았어. 고마웠다.”
“언제 적 얘기를 지금 하는 거예요. 게다가 손 절면서 제대로 보조해 주지도 못했었잖아요. 까마득한 선배라 냉정하게 거절 못 했던 거 두고두고 후회했다고요.”
“정말 좋았어. 연주도 좋았고, 악기를 대하는 네 태도가 특히 훌륭했어. 너무 절절해서 가슴이 막 아프더라. 나 그때 너 때문에 무대에 올랐던 거야. 실은 졸업하면 바이올린 관두겠다고 부모님이랑 약속했었는데, 날짜 다가오니까 암담해져서 막판에 공연 보이콧할까 했었거든. 그거 몰랐지?”
“전혀 몰랐어요.”
“학교 다닐 땐 바이올린 켜는 게 그렇게 끔찍하더니, 막상 놓으려니 포기가 안 되는 거 있지. 그런데 당일 네 얼굴을 보니까, 마지막은 꼭 너랑 연주하고 싶더라고. 그래서 올라갔어.”
생각해 보면 연주회 당일의 재영은 좀 이상했다. 리허설 때도 나타나지 않아 애를 태우게 만들더니 본 공연 때 돌연 등장해선 계속 입을 꾹 다물고 앉아만 있었던 것이다. 덩달아 안절부절못하던 수현의 손을 갑자기 잡아채고 무대로 올라가기에, 겨우겨우 함께 연주했었다.
무대가 끝난 뒤엔 펑펑 울다 도망치듯 사라져 버려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 역시 자신의 연주가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마음이 조금 불편했었는데 그녀는 그게 아니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면서도 수현은 두 손을 꽉 그러쥐었다. 망가진 손으로 했던 자신의 연주가 너무 절실해서 아름다웠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그래서 스스로의 마지막을 자신과 함께하고 싶었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왠지 가슴이 후련했다.
“늦었지만 고마워. 덕분에 후회 없이 졸업했다.”
“저야말로요. 제가 빚졌네요. 선배, 저 뉴욕에 가려고요.”
“부럽다. 여행 가?”
“유학요. 지금 막 결정했어요. 선배한테 제일 먼저 알리고 싶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와, 피아노를 계속 치려는 거야? 안 그래도 재욱이가 너 졸업한 뒤로는 거의 안 치는 것 같다고 해서 좀 신경 쓰였었거든.”
“손이 이래서 전공하긴 어려울 것 같고 작곡이랑 병행해서 취미처럼 하면 어떨까 싶어요.”
“넌 항상 나한테 자극을 주는구나. 어, 나 들어가 봐야겠다. 예린이 우나 봐.”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던 그녀가 황급히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수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연주회가 시작되기 15분 전이었다.
홀의 입구를 빠져나온 그는 무대 뒤로 돌아 대기실로 향했다. 그 길에 졸업 연주회를 끝으로 학교와 결별해야 하는 학생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미 취직을 했거나 미래가 확실하게 보장된 극소수를 제외하면 전부 불안할 것이다. 그들의 초조한 마음이 충분히 이해됐다.
그는 그 혼란한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피아노과 학생들이 모여 있는 작은 대기실 정중앙에 자신이 찾는 사람이 서 있었다.
재욱은 늘 주변에 사람을 모래바람처럼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다. 밝고, 건강하고, 진솔했다. 그 긍정적인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수현이 머리 위로 손을 흔들자 용케 알아본 재욱이 빠르게 틈바구니를 비집고 빠져나왔다.
“선배!”
“나 뉴욕에 갈 거야.”
그는 다짜고짜 내뱉었다.
“네? 어디 여행 가요?”
기시감 생기는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냐, 유학 갈 거야. 너랑 재영 선배한테 제일 먼저 얘기하고 싶었어.”
감사의 표시를 어떻게든 하고 싶었다. 재영이 손을 다친 후 자신의 연주를 기억해 준 사람이라면, 재욱은 다치기 전 자신의 연주를 기억해 준 사람이었다. 이 남매에겐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수현은 재욱을 꼭 끌어안았다. 일방적으로 당한 재욱의 입장에선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곁을 내어 준다고 한들 수현에게는 일정 부분의 저지선이 있었다. 그가 먼저 스킨십을 한다든지 해서 상한선을 넘는 일이 결코 없었다. 연미복 차림의 남자는 이 상황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일까를 진중하게 고민했다.
나 착각해도 돼요? 지금 일보 직전인데?
그가 그렇게 눈으로 혼란을 가다듬고 있던 때였다.
“뉴욕에서 공연 생기면 연락해. 밥 사 줄게.”
헛물켰다 싶었는지 재욱이 멋쩍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선배 왜 갑자기 나타나서 절 차는 거죠? 자꾸 차면 나 내성 생겨서 내구도 높아져요.”
사실 오늘 만난 수현의 얼굴은 재욱이 봐 온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돼 있었다. 이번 결정은 그 영향도 있는 걸까. 단순히 승요한이 옆에 없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가 한국을 비웠던 지난 몇 년간 수현의 모습도 이래야만 했으나, 그 전의 수현은 자신이 만들어 낸 암흑 속에 파묻혀 있었다. 지난해 가을 잠시 사라져 있던 동안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찍는 것은 그 변화의 방점이리라.
“실은 작곡을 배워 보려고. 이동준 선생님이 학교를 주선해 주셨어.”
“와! 진짜요?”
“네가 아니었다면 결정 못 했을 거야.”
재욱은 깜짝 놀랐다. 수현의 품에 안겨 있는 채가 아니었다면 펄쩍 뛰었을 것이다. 그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애써 태연하게 표정을 정리하고, 목소리를 담담하게 내뱉으려 노력했지만 얼굴이 이미 터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재욱이야말로 수현 덕분에 인생이 바뀐 사람이었다. 그가 나침반이 되어 주었다. 그런 자신에게 수현이 네 역할 또한 그랬다고 말해 주니 오랜 짝사랑을 최대한의 예의로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선배가 만든 음악 언젠간 저도 치고 싶어요. 기대 많이 하고 있을게요.”
수현은 알 만하다는 듯이 웃으며 재욱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제가 뉴욕에 가면 재워도 주시나요? ……윽!”
그러고는 그의 등을 콱 꼬집었다.
* * *
무대의 마지막 순번은 지난번 피아노과 자선 공연 때처럼 역시나 재욱이었다. VIP석에는 이동준도 와 있었다. 그때 연을 맺은 뒤로 수현이 조언했던 대로 재욱이 종종 안부를 물어 온다는 것 같았다.
재욱이 선택한 곡은 브람스의 「피아노 4중주」였다. 졸업 연주회에 어떤 곡을 연주할까,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수현이 추천해 주었다. 처음에 재욱은 반려했다. 이게 그와 요한에게 어떤 의미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수현은 거절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 고민을 끝냈는지 다시 재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곡을 쳐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무대 위의 네 사람은 피날레를 장식하기 전 청중을 향해 예의 바르게 큰절했다. 서양식 음악인 클래식 무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동양식 인사였다. 이질감을 느낀 관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공연 시간이 길어지면서 다소 지루해하던 분위기가 반전됐다. 아마 재욱의 의견이었을 것이다.
무대 앞면에는 세 사람의 현악 연주자들이, 그들의 뒤에는 피아노 반주인 재욱이 앉았다. 연주자들이 제자리에 착석하자 장내는 엄숙한 분위기로 변했다. 무대 밑의 수현도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 섰다. 아까 헤어지기 직전 재욱이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을 때, 자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살아야지.>
살기 위해선 「베르테르」를 극복해야 했다. 자신이 요한에게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고 마음을 덜어 내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재욱에게 이 정도 도움을 받는 건 서로에게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리라.
공연은 훌륭했다. 분명 전반적으로 어둡고 음울한 선율인데도 어딘지 경쾌한 구석이 있었다. 그건 연주하고 있는 재욱이나 그의 친구들이 일부러 다소 밝게 해석해 연주한 영향일 것이다. 현악기의 뒤에 감춰져 있었지만 그 무대에서 재욱은 가장 화려하게 빛났다. 시작은 미약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창대하게 자라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관객들은 기립 박수를 쳤다. 조용히 홀을 빠져나온 수현은 밤을 등지고 섰다. 그는 거대한 건물을 올려다봤다. 전부 자라고 있다. 아직 지지부진하게 과거에 발목 잡혀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오늘 밤은 수현도 피아노를 마음껏 치고 싶었다. 잊어야 할 것이 생기면 밤새도록 치고, 또 치는 것으로 견뎌 내는 요한처럼 말이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 * *
<피아노 황제의 귀환. 내달 1일 예술의 전당서 승요한 리사이틀.>
한국의 각종 대중 매체 문화 예술란의 헤드라인이 그의 이름으로 도배됐다. 불의의 사고로 칩거하다 독일로 되돌아간 이후 꼬박 2년 만의 귀국이었다. 최근 그는 해외 순회공연으로 바빴다. 일정에서 다소 소외되어 있던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첫 시발점을 끊었다. 다음 주 열릴 독주회는 예술의 전당 측과 긴밀한 연을 맺고 있는 이동준이 직접 주선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공항에 빼곡한 인파와 취재진들을 벗어나자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요한은 오랜 비행으로 이미 초주검 상태였다. 그는 창밖의 경치를 잠시 살피다 이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두 시간여의 교통 체증을 견디고 난 뒤에야, 작업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요한의 스케줄을 담당하는 김 비서는 작업실의 문을 열었다. 그녀는 무척 깜짝 놀랐다. 늘 칼 같은 자세와 표정을 유지하는 그녀에게 답지 않은 당황이 느껴졌다. 요한은 그녀의 어깨너머로 작업실 내부를 들여다봤다.
2년 만에 주인이 되돌아온 작업실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아니, 이게…… 분명히 미리 악기 조율이랑 건물 청소를 함께 요청했었거든요. 며칠 전에 와서 제가 직접 확인도 했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우선 제가 이 근방 호텔을 수배해 보겠습니다.”
“네. 그러는 게 좋겠군요.”
여기저기 널려 있는 악보들, 필기구들, 저마다 반 정도씩만 채워져 있는 물통들, 갖가지 주전부리 과자 껍질들, 바닥에 펼쳐진 몇 권의 책들과 그 위의 얇은 모포까지. 그야말로 누군가 헤집어 놓은 양 엉망진창이었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무척 당황한 그녀가 다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걸러 나갔다. 요한은 너른 공간을 돌아보며 어지러운 광경을 일일이 눈에 담았다. 피아노 아래 떨어져 있는 악보 한 장을 주워 들자, 오른쪽 상단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S.
탁 트인 공간에 요한을 제외한 인기척은 없었다. 엉망이 된 작업실은 누군가 왔다 간 흔적인 셈이었다. 한 걸음 물러선 그는 그대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차량으로 돌아갔다. 통화를 마친 김 비서가 조수석으로 돌아와 기사에게 방향을 알려 주자, 그를 태운 차량이 부드럽게 출발했다.
“제 기억이 잘못된 걸까 싶어서 연락을 해 봤는데 분명히 청소 업체가 방문했다고 하거든요. 착오가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 다시 정리를 의뢰했고요. 하루 정도 걸린다고 하니까…….”
“아니에요. 괜찮으니 관두세요.”
요한은 만류했다.
“침입자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냥 둬도 괜찮을까요?”
“네. 누군지 알아요. 그냥 두세요.”
그 사람이 또 올지도 모르니까 그냥 두는 편이 나으리란 생각을 했다. 도로 정리된 작업실을 발견한다면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수현의 근황에 관해서는 주기적으로 전해 듣고 있었다. 현재 그는 메네스 음대 대학원에서 수학하고 있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요한은 당연히 지금 그가 뉴욕에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김 비서를 통해 작업실 전반적인 정리를 의뢰한 게 지지난주의 일이니, 그사이 아무래도 한국에 잠시 돌아와 있는 모양이었다.
요한은 눈을 감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뺨 위로 드리웠다. 그는 잠을 청했다.
* * *
공연 15분 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의 내부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객석은 만원이었다. 이미 전부터 입소문을 타 예매 창이 열리자마자 표가 매진되었다. 단 하루 공연이라 홀의 밖에는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전체가 꽉 찬 객석은 딱 한 자리만이 공석이었는데, 그건 앞줄 중앙의 초대석이었다. 그의 스승인 이동준의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요한은 공연 며칠 전 린을 통해 그를 거둬 준 가족에게 표를 보냈다. 돌아오는 회신은 없었다. 그리고 공연 당일이 되자 요한이 초청한 사람 중 이동준과 수현의 부모님, 계현주 기자만이 자리를 채웠다.
공연 전에도 후에도 대기실의 출입을 허락받은 것은, 이제는 애호가들 사이에서 중견 클래식 잡지사 취급을 받는 「클래시즘」의 계현주 기자 한 사람뿐이었다. 그동안 현주는 수현의 부모님과 꽤 친해진 모양인지 어머니, 아버지 하며 살갑게 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미안해요. 부모님께 대기실에 같이 가 보자고 설득해 봤는데 공연 전이라 요한 씨한테 부담될까 봐 거절하시더라고요.”
“두 분은 여전하시네요.”
현주는 요한에게 커다란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렇죠, 뭐. 사람 잘 안 변해요. 어르신들은 더하죠. 대신 이거. 어머니가 직접 준비하시고 아버님이 그걸 사신 거예요. 전해 달라세요.”
요한은 그것을 받아 들었다. 라눙쿨루스. 언젠가 수현의 어머니로부터 받았던 적 있는 겨울 꽃이었다. 실은 공연에 와 주리라고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결국 요한은 그들에게 제 속으로 낳은 아들을 망친 이방인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양부모님은 요한을 향해 관용의 여지를 남겨 둔 셈이었다. 현주를 곁에 두는 너그러움만 봐도 그렇다. 수현의 부모님다웠다.
“지금 한국에 있나요?”
문장엔 주어가 없었지만 현주는 그가 누굴 말하고 있는 것인지 곧바로 알아챘다.
“어떻게 알았어요?”
“작업실이 난장판이더군요.”
“아, 그동안 걔가 거기에서 지냈구나. 부모님은 호텔에 있는 줄 아시던데요? 마지막 방학이라 잠깐 왔나 봐요. 온 지 며칠 안 됐어요.”
그간 요한에게 수현의 소식을 알음알음 전해 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현주였다. 요한이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끊임없이 그를 향해 연락해 왔다. 답변이 있든 없든 개의치 않았다. 그런 그녀도 지금 수현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만큼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요한을 위한 배려였다. 어차피 이번 리사이틀에 초청해 봤자 수현은 응하지 않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잘 지내요?”
“부모님이 엄청 좋아하세요. 예전의 수현이로 돌아온 것 같다고요.”
반짝이던 과거로 회귀하는 수현의 앞에 요한이 다시 나타나는 일. 그건 요한을 제외한 이 세상의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난 언제까지 이렇게 손 놓고 기다려야 해?
그는 아직도 불행했다. 여전히 수렁에 갇혀 있었다. 그 아득한 수렁은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수현이 말했던 대로 축축한 흙탕물 냄새가 매일 그의 코끝을 괴롭혔다. 그가 침묵하자 현주는 적당히 자리를 피해 주었다. 공연 1분 전.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남자는 요한이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그는 건반 위에 부드럽게 손을 올렸다 떼어 냈다. 연주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프로그램은 요한이 직접 짰다. 한국인들의 정서를 고려해 직접 편곡한 「아리랑」과 새롭게 만든 론도도 한 곡 포함되어 있었다.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다. 예정에 있던 앙코르곡을 제외하고 또 다른 곡을 추가로 앙코르 연주할 만큼 무대 위와 아래 모두의 열기가 뜨거웠다. 즉흥적으로 연주한 마지막 앙코르곡은 차이콥스키의 「꽃의 왈츠」였다. 자신이 직접 편곡한 것이었다.
이 곡을 혼자 연주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수현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좋아. 우린 「꽃의 왈츠」를 극복할 필요가 있어.>
공연 전 그랬던 것처럼 공연이 끝난 뒤로도 요한은 모든 언론 인터뷰를 정중하게 사절했다. 지친 요한은 대기실 소파에 기다랗게 누워 있었다. 린이 나타나 뜨겁게 열이 오른 그의 이마에 아이스 팩만 얹어 주곤 재빨리 나갔다. 요한은 기다렸다. 10분, 20분, 30분……. 누워 있는 채로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끝내 수현은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