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9/34)

28.

지난 2년간 요한은 뉴욕에서만큼은 단 한 차례도 공연하지 않았다. 협주 요청이 들어와도 전부 정중히 고사했다. 심지어 뉴욕 최대의 공연장이자 유서 깊은 음악 홀인 카네기 홀에서 승요한을 정식으로 초청하고 싶다는 의사를 몇 번이고 밝혀 왔는데도 계속 린의 선에서 거절하고 있던 차였다.

그는 지구상에 그곳만 사라지고 없는 것처럼 철저하게 쳐다도 보지 않고 무시했다. 린의 눈에 그런 요한은 꼭 뉴욕이라는 도시를 머릿속에서 비우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다만 그 외면은 너무 아슬아슬해서, 역으로 뉴욕이라는 도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당장 그곳으로 날아가 버릴 듯했다.

그래서 어렵게 다시 수면 위로 뉴욕에서의 공연을 꺼냈을 때만 해도, 린은 그가 수락하리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외로 그는 순순히 승낙했다. 그녀는 그의 마음이 변할세라 급하게 카네기 홀에서의 공연 일정을 잡았다. 한국 리사이틀 1주일 뒤였다. 베를린으로 돌아오지 않고, 인천에서 뉴욕으로 바로 건너가면 될 것 같았다.

덕분에 현재 요한은 뉴욕의 한 호텔 스위트룸에서 쉬고 있었다.

“젠장, 죽겠군.”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에 드러누운 그는 잠을 청했다.

공연을 앞두고 있었으니 컨디션 조절이 무척 필요했다. 그러나 몸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직접 홀의 피아노 상태를 점검하고 드라이 리허설까지 마친 뒤라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게다가 이번 주 내내 끔찍할 정도로 심한 몸살을 앓았다. 그는 자신이 왜 갑작스레 아픈지 알 듯했다. 같은 서울 땅에 있는 것이 분명했던 수현은 그제 저녁 그가 떠날 때까지 이상할 정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영향으로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었다.

공연 직전에 몸 상태가 이만큼 엉망이었던 것은 없었던 일이라 요한을 담당하는 수행 파트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물론 그중 가장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은 당사자인 요한이었다.

눈 감고 숨을 고르고 있는 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지금 올 연락이라곤 린의 용건 정도였다. 그녀는 아직 홀에 남아 공연 담당자들과 최종 미팅을 하고 있는 중이니 따로 알릴 사항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손 하나 까딱하기 귀찮은 상황인데도 그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냈다.

“말해요. 최대한 간단하게.”

[요한, 나 혼자 자기 관리하기가 버거워서 도와줄 사람을 한 명 보냈어. 일단 이번 공연이 수습 기간이니까 테스트해 보고 통과시킬지 말지 가부 알려 줘. 지금쯤 도착했을 거야.]

동시에 따닥따닥, 하고 각이 잡힌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그 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객실에 출입할 수 있다면 린이 말한 예의 도와줄 사람일 것이었다. 발소리를 듣고 대충 성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나름대로 바르게 걷고자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박자가 영 제멋대로였다. 벌써부터 안 맞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미 도착했어요.”

그는 휴대폰을 침대 헤드 방향으로 던져 버렸다.

“목말라. 물 좀 줄래요.”

“…….”

“몸살 약도 구해다 줘요. 바로 잠 오는 걸로. 너무 심해서 내일까지 못 깨는 건 곤란하고요.”

수습생이 미리 물병을 들고 있었던 건지 금세 입가에 물이 조금 새어 들어왔다. 비몽사몽간에 비누 향이 훅 끼쳤다. 누워 있는 그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서였는지, 그의 전신 위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요한의 오른쪽 침대 매트리스는 수습생이 지탱하고 있는 손 때문에 꾹 눌려 있었다. 요한은 천천히 눈을 떴다.

“……!”

그러고는 그대로 수습생의 허리를 휘어 감아 그를 침대 위에 눕혔다. 삽시간에 반전된 위치에선 요한이 우위를 점했다. 당황한 수습생이 떨어뜨린 물병이 침대 시트를 흥건하게 적셨다.

“저…… 등이 너무 차가운데요.”

수습생이 난감한 듯 그러자 요한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수습생도 따라 일어섰다.

“여긴 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린이 얘기 안 했나요?”

“그 간지러운 존댓말은 또 뭐고?”

“이게 회사 내규라서요.”

“린은 나한테 반말해.”

“수습은 아티스트한테 함부로 하면 안 된대요. 정직원이 되면 저도 고려하죠.”

“게다가 나와 자고.”

“이런 미친. 진짜?”

수습생은 발끈했다. 그러다 농담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표정을 정리했다.

“그것도 정직원이 되면 고려할게요. 당장 더 필요한 거 있어요?”

“필요한 거?”

요한은 대답 대신 헤드를 향해 던져두었던 휴대폰을 들었다. 이런 상황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여전히 통화는 이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린, 앞으로 당신은 할 일 해요. 난 이 수습생을 고용할게요.”

[통과지? 그럴 것 같더라. 소중히 대해. 앞으로 우리 회사 자산이 될 애야.]

그제야 전화가 끊겼다. 요한은 당장 그에게 키스하기 위해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수현의 붉은 입술로 자신의 입술을 내리려던 때였다. 시야가 흐려졌다. 깜빡이던 수현의 눈이 꼭 감겨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풀썩. 오히려 눈을 감은 요한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수현의 온기 있는 손이 요한의 이마를 덮었다. 손바닥이 화끈거릴 정도로 펄펄 끓고 있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미친놈. 이 열에 정신 차리고 있었던 게 용하네.”

감기용 알약을 입에 문 그는 요한의 입 안으로 그것을 밀어 넣었다. 잠결에도 착하게 받아먹기에 물까지 머금어 넘겼다.

“그래도 그렇지……. 잠이 오신다?”

그러고는 잠든 요한의 허벅지를 탁 때렸다.

* * *

일어났을 때, 곁에 수현이 없어 요한은 자신이 꿈을 꾼 줄 알았다. 휴대폰 기록에 린과의 통화 내역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현실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녀로부터 걸려 온 부재중 전화 몇 통도 있었다. 협탁에 약 봉투들이 있는 것을 보니 자신이 기절하듯 잠든 동안 수현이 곁을 지키고 있던 모양이었다.

수현의 잔상은 머리에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자신의 기억 속 모습과 비슷했다. 머리카락의 길이가 조금 짧아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상냥한 인상과 잘 어울리는 멀끔한 모습이었다.

뒤늦게 그를 찾아 나섰지만 객실 어디에도 수현의 향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린의 일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보낸 수습생이라면 최대한 밀착해서 자신을 보좌하는 것이 가장 첫 번째 임무였다. 그런데 밤이 되도록 수현은 코빼기 하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요한은 보채는 듯한 인상을 주기 싫어 기다렸다. 그가 부담을 느끼면 또다시 향기처럼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꼬박 한나절이 지나자 견딜 수가 없어졌다.

“형은요?”

수화기 너머에서 린의 헛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정도는 하지? 오래 버틴다 싶더라. 내가 어디 좀 보냈어.]

“내 허락도 없이 말이죠.”

그녀가 쓸데없이 일을 시킨 덕분에 이틀 내내 수현과 제대로 대화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요한은 무척 골이 나 있었다.

[난 미리 알리려고 전화했었어. 네가 잠들어 있어 놓고 무슨 소리야? 연주자가 공연 전에 몸살이나 걸리고 너 완전 실격이야.]

“잔소리 듣기 싫어요. 대체 어디로 보냈어요?”

[하반기에 뉴욕 필이랑 협연 잡으려고 그쪽에 보냈어. 슬슬 걔도 악단이랑 부딪쳐 봐야지. 시간이 애매해서 오늘은 거기서 묵는다니까 내일 공연엔 나타날 거야.]

“유치하게 텃세 부리려는 거면 관두는 게 좋을 거예요.”

[네 담당이지만 클라시스 소속이기도 해. 난 걔 사수고. 일 시킬 합법적인 권한이 있어.]

“그래도 무리시키지 마요. 그런단 소리 들리는 순간 당신부터 자를 거니까.”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럼 난 매일 밤낮으로 야근을 시키겠어. 한국 사람이니 지옥 같은 코리안 타임 경험 좀 시켜 보자고.]

“입을 닥쳐 보는 게 어때요?”

[씨, 야, 요한! 진짜 이럴래?]

“더 얘기할 필요가 없겠네요. 오늘부터 당신은 해고니까, 다른 아티스트를 알아보세요.”

그는 짜증스레 전화를 끊었다. 도로 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지만 깨끗이 무시했다. 현재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 겸 상임 지휘자는 앨런 길버트였다. 지난해 요한과도 체코에서 함께 공연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앨런에게 직접 연락을 취하려다, 시간을 보고 관뒀다. 기다림은 이미 면역이 되어 있었다. 지난 2년 동안의 시간을 반추하며 버틴다면 오늘 밤은 그럭저럭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아서, 쓰러지기 전 봤던 수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여전히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 * *

깐깐한 연주자들은 공연 당일이 되면 이른 아침부터 여러 가지 준비로 바빴다. 무대를 최종 점검하는 작업만 해도 꽤 신경 쓸 일이 많아 힘에 부쳤다. 특히 본 공연의 무대에선 엄청난 집중력을 요하기 때문에 체력이 많이 소모됐다. 예민하고 까다로운 연주자는 공연을 마치기도 전 방전되기도 했다. 만일 무대에서 쓰러지지 않는다면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무대를 끝까지 완벽하게 마치도록 돕는 것이 보좌하는 매니저들의 몫이었다.

지난 새벽을 뜬눈으로 지새운 요한의 앞에 수현이 매니저를 자처하고 나타났다. 착장이 늘 입던 대로의 편안한 차림이 아닌 잘 갖춰 입은 정장이라 조금 낯설었다. 호텔 정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는 요한이 내려오자 깍듯하게 인사했다. 요한이 그런 수현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그는 웃으며 부드럽게 밀어냈다. 순간 그의 성치 않은 손을 억지로 건드려서 그런 게 아닌가 싶었지만 수현의 표정으로 보아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타시죠.”

요한 때문에 셔츠가 살짝 딸려 올라간 손목 부근을 정돈한 그는 의전용 리무진의 뒷문을 열었다. 타시죠. 그게 그가 꺼낸 말의 전부였다. 요한이 그대로 멈춰 서 있자 안 들어가고 뭐 하고 있느냐는 듯 안쪽으로 손짓만 까딱하는 것이었다. 결국 먼저 대화의 물꼬를 튼 건 요한이었다. 그는 싸늘하게 물었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린이 주문한 커프스를 찾으러 간 동안 제가 모시러 온 건데, 혹시 저 때문에 불편한 점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불편한 점이라. 요한은 수현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당신이 사람들 앞에서 이러는 게 불편해요. 이런 일은 관둬 줬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이게 제 일인데요.”

“린은 한 번도 내 차의 문을 열어 준 적이 없어요. 이런 일 하라고 운전기사를 고용하는 겁니다. 알아들어요?”

그제야 수현은 요한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시스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각자의 역할이 철저히 분업화되어 있기도 했다. 린이 인수인계를 하면서 일부러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몇 가지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지시한 모양이었다. 수현은 난감한 듯 웃다가 미간을 구겼다.

“하, 곽수린 이 여자가…….”

“일단 타요.”

금세 또 사라지고 말 것 같았는지 요한이 수현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를 차 안으로 에스코트하듯 밀어 넣었다. 그러자 수현이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이건 모양새가 좀 그런데요. 전 제가 알아서 반대편으로 타겠습니다.”

“명령이야. 아티스트가 원하는 건 전부 한다. 당신이 서명한 계약서에 적혀 있을 텐데?”

“차 문 열고 닫아 주는 건 안 되지만 원하는 건 전부 한다? 모순 아닌가?”

“불공정하다고 느껴지면 우수현 씨도 갑이 되면 돼. 타.”

호텔 정문의 직원들과 클라시스의 관계자들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무대의 관객들이 한국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수현은 마지못해 먼저 차에 탔다. 그러자 요한이 따라 타곤, 바깥에서 차 문을 닫아 주기도 전에 직접 문을 닫았다. 두 사람이 탑승하자마자 차량은 부드럽게 출발했다.

그가 묵은 트럼프 호텔에서 카네기 홀까지는 지근거리였다. 요한은 앞좌석의 칸막이를 열어젖히고 빙 둘러 아주, 대단히, 몹시 천천히 가 달라 요구했다. 그러고는 그대로 칸막이를 힘껏 닫아 방해하지 말아 달라는 의사를 피력했다. 뒷좌석은 꼭 요한이 설정해 놓은 통제 구역 같았다.

맹수의 먹잇감이 사정거리 안에 있었다. 이곳은 사람으로 바글바글한 맨해튼의 도로 위, 그리고 앞뒤가 봉쇄된 밀폐 공간이었다. 마땅히 몸을 숨길 곳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요한은 수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언제부턴가 수현은 자신이 다가서면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곤 했다. 그러나 오늘의 수현은 왼편의 충분한 여유 공간을 두고도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젠 어딜 갔었지?”

“린이 말씀 전한 걸로 아는데 아닌가요? 뉴욕 필 협연 답사차 에이버리 휘셔 홀에 다녀왔습니다.”

“그 좆같은 말투는 어떻게 해결이 안 되나?”

요한은 웬만해선 거친 말투를 구사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지금 그는 스스로를 통제 구역에 가둬 놓고 막상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현은 짐짓 고개를 저었다.

“이게 암묵적인 규칙…….”

“그딴 규칙 없어. 린은 대체 뭘 가르친 거야?”

“……은 아니라도 계속 이렇게 화낼 것 같으면 안 관두려고요. 재미있네요.”

요한은 하,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눈을 마주치자, 수현의 검은 눈동자가 장난스러운 빛으로 빛나는 것이 제대로 보였다. 지금 하는 양의 반 정도는 장난인 것 같았다. 넝쿨처럼 퍼져 나가던 열기가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성장을 멈췄다. 요한의 머릿속이 차분하게 식어 갔다. 그는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간절하게 물었다.

“날 다시 꺼내 주러 온 거 맞아요?”

“…….”

“난 아직 지옥이야.”

그는 수현에게 조금 더 바짝 다가앉아 어두운 회색 넥타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그 위에 경건하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수현이 요한의 양 뺨을 붙들고 천천히 입술을 맞물렸다. 깃털처럼 가볍게 스친 키스였지만 그 위에 수현이 덧댄 마음들은 아주 무거웠다. 살에 맞닿은 요한조차 상상할 수 없을 것이었다.

자신의 마음속 상처가 완전하게 봉합되지 않았다는 것을, 수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요한이 착하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반드시 최단 거리로 그에게 돌아가야만 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꼭 최대한 빨리 제출해야 하는 숙제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예상보다 일찍, 그에게로 회귀했다.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 같은 건 없으니까.

“뭐든 시키는 대로 할게요. 착하게.”

“그거 되게 반가운 얘기다. 마침 널 위한 음악을 만들고 있어. 네가 쳐 줬으면 좋겠어.”

정신을 차리고 보면 수현이 만들고 있는 모든 음악은 요한이 그 중심이었다. 그가 연주를 통해 소리로 만들어 내 주었으면 하는 화려한 선율들이 악보 위에 잔뜩 놓여 있었다. 아직 아마추어가 만든 조악한 악보에 불과하지만 요한의 연주가 부족한 부분을 전부 메워 줄 수 있을 것이다. 밝게 대꾸하는 수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요한은, 그의 촉촉한 입술 위에 자신의 것을 맞댔다.

“끝?”

수현이 ‘겨우?’ 하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안 끝. 섹스하고 싶어요.”

돌아온 요한의 대답이 퍽 난처했다. 수현은 잠시 앞쪽을 살폈다. 침대 위에 비하면 공간도 협소하고, 주변부를 빙빙 돌고는 있지만 언제 공연장에 도착할지 모르니 시간도 애매했다. 수현의 수락만 기다리는 요한의 눈이 안타까울 정도로 애달팠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나, 수현이 기억을 더듬어 볼 새도 없었다. 허리춤을 향해 뻗어 온 손이 불쑥 안으로 침입해 등허리를 매만졌다.

“요한, 앞으로 섹스는 서로 하고 싶을 때 하자.”

한쪽이 원해서 다른 한쪽이 대가를 받고 관계를 맺는 건 더는 사양이었다. 수현이 자신의 셔츠 안을 파고들고 있는 요한의 손을 겉에서 꽉 압박했다.

“난 지금.”

요한이 진득하게 눈을 맞춰 왔다. 밀폐된 공간에서 자신만을 원하고 있는 뜨거운 눈길이 온몸에 내리꽂힌다는 건 형언할 수 없는 야릇한 기분이었다. 수현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젠장, 나도 지금.”

조금 전 가볍게 스친 입맞춤은 허상이었던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허겁지겁 입을 맞췄다. 요한의 커다란 손이 그의 빳빳하게 다림질된 셔츠를 찢어 내듯 벗겼다. 그러고는 시트 위에 그대로 수현을 눕혔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그의 향기와 체온을 전부 빨아들일 작정으로 살결을 흡입했다. 수현은 그런 요한의 뒤통수를 끌어안았다. 뒷머리를 휘어잡듯 꽉 붙들고 입술을 요구하자 요한이 까슬한 혀를 단박에 밀어 넣어 왔다.

입 속의 동굴은 꼭 인체의 소우주 같았다. 살덩이들이 엉키고 있으면 입 속에서 땀으로 범벅이 된 나체 두 개가 엉켜들어 있는 것만 같은 질척하고 배덕한 기분이 들었다.

버클을 푼 손이 하반신으로 아주 빠르게 침투했다. 요한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수현을 공략하는 약탈자였다. 다만 공들여 애무하고 몸의 긴장을 달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요한은 다급히 수현의 속옷을 반쯤 벗겨 낸 뒤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수현이 자신의 입구를 그의 발기한 성기 끄트머리에 맞췄다. 미니 냉장고에 물 정도는 있었지만 윤활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아쉬운 대로 수현의 입에 손가락을 넣어 빨게 한 요한이 다른 한 손으로 수현의 입구를 더듬거렸다. 그러자 정신없이 손가락을 혀로 애무하던 수현이 입 속에서 긴 손가락을 모조리 뱉어 냈다.

“읏, 깨물 것 같아.”

“그래도 돼.”

“안 돼, 이 멍청아. 하, 으, 네 시간 뒤에 공연인 거 잊었어? 아래 있는 손도 치워!”

그러더니 한동안 닫혀 있던 공간을 스스로 꿰뚫기로 작정한 듯, 구멍을 벌리고 요한의 것 위로 천천히 내려앉는 것이었다. 꽉 맞물린 하체가 들썩일 때마다 물기 없는 내부가 삽입으로 인해 쫀득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수현은 요한의 드러난 목덜미를 꽉 물었다. 그 바람에 답답할 정도로 끝까지 채워진 단추가 툭 떨어져 나갔다. 오랜만이어서인지,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인지 수현의 절정은 금세 왔다. 사정하는 순간, 줄곧 참아 내던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황급히 요한에게 키스했다.

“아……! 읍……!”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의 한가운데서, 그는 생각했다.

그사이 네가 좀 자랐을까?

사랑이란 말이 얼마나 무거운 건지, 인지할 만큼은 말이야.

* * *

무대 장치를 점검하는 요한의 목덜미에는 커다란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아까 전 차에서 수현이 치아로 낸 상처 때문이었다. 평소 요한은 무대에 오를 때 특별히 메이크업을 하지 않기 때문에 최소한의 도구만 있을 뿐 마땅히 준비된 분장 도구들이 없었다. 비서진이 연락망을 동원해 전문가를 소환하려 하자, 밴드 하나면 족하다고 요한이 만류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다른 연주자들과 달리 요한은 외모까지 함께 서비스 되고 있는 결합 상품이었다. 무대에서 상처의 흔적을 달고 있다는 건 흐트러진 듯한 느낌을 줄 수 있었다. 다른 매니저들이 곤란해하며 린을 불러왔다. 그녀가 선두에 서서 입장 선회는 없다며 완강하게 버텼다.

“무대 위에서 넌 완벽하게 드레스업 된 상태여야 한다니까?”

“난 얼굴에 뭐 찍어 바르는 거 싫어해요. 이 소모적인 얘길 계속해야 하나요? 그리고 당신, 내가 어젯밤에 해고했는데 왜 여기 있는 거지?”

그러자 잠자코 듣고 있던 수현이 요한을 억지로 데리고 나왔다.

“그냥 하면 안 돼? 내가 보고 있기가 좀 그래. 그리고 린이랑은 내가 해결할 테니까 너무 몰아붙이지 마.”

시선이 조금 싸늘하게 느껴진다면 기분 탓일까.

“왜, 마음에 안 내켜서 그래? 시키는 건 다 하겠다며?”

“다른 사람 편드는 게 싫어요.”

물론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요한은 자신에게 늘 같은 통제의 기조를 유지해 왔다. 자랐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역시 아직 갈 길이 먼 모양이었다.

“맞아. 린이 개년이야. 야금야금 나 괴롭히려 들었어. 무엇보다 난 저 여자가 싫어. 그래도 너무 몰아붙이진 마.”

“왜?”

“아주 능력 있으니까. 너한테 큰 도움이 될 거야. 린은 나한테 좋은 사수기도 해. 나중에 내 입지가 넓어지면 내 매니저로 고용하고 싶을 정도라고.”

“그러니까, 날 위해서다?”

“그래. 나날이 똑똑해지는 만큼 너의 마음도 자랐으면 좋겠지만. 뭐, 아무튼 분발해.”

그제야 굳은 얼굴을 푼 요한이 픽 웃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목에 붙인 밴드를 툭 떼어 내고 수현의 뺨에 옮겨 붙였다.

“여기 키스해 줘요. 영광의 상처 위에.”

상처로 울긋불긋한 목덜미를 내밀며 그러기에,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수현이 쪽, 하고 짧게 입을 맞췄다 떼어 냈다.

“내가 자릴 비운 사이에 또 사라지지 않을 거죠.”

“그건 무대에서 내려온 다음 다시 확인해.”

“그런 대답 말고.”

“그러니까…….”

수현은 중간에 대답을 끊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따 봐.”

요한은 대답이 없었다. 다만 그대로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 매니저들과 무대 분장에 대해 적당히 타협했다. 그 속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던 린이 문밖을 내다봤다. 동시에 수현과 눈이 마주쳤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하고 있어서 그는 조금 놀랐다. 린은 속이 무척 상해 보였다. 자존심이 다쳤다기보다는 섭섭함이 큰 듯했다. 그녀를 보고 있던 수현의 속도 조금 뒤틀렸다.

승요한은 이미 만인의 연인이군.

줄곧 거부만 해 오던 그를 받아들이려고 결정하니 새롭게 보이는 게 아주 많았다. 그는 실력과 재력을 갖춘 대단한 연주자였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를 원하고 있었다. 어쩌면 진짜 분발해야 하는 건 이쪽인지도 모른다.

* * *

프로그램은 라흐마니노프 위주로 꾸며졌다. 러시아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정치적 이유로 미국으로 망명한 뒤 작곡보단 피아노에만 전념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들은 웅장하고 화려해서 요한과 궁합이 좋았다. 관객들은 물론이고 무대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던 수현도 그의 연주에 빠져들었다.

큰 무대에서 요한이 공연하는 모습이야 실황 DVD로도 질릴 정도로 봐 왔고, 실제로 도쿄에서 공연했을 때 몰래 보고 왔던 적도 있었다. 사람의 마음가짐이 변한다는 건 곧 주변 상황에 대한 인식도 달라짐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오늘따라 요한의 연주가 아니라, 연주를 하고 있는 악기 그 자체인 요한이 눈에 각인됐다. 두 시간여에 걸친 공연이 눈 깜짝할 사이 끝이 났다. 청중들은 아쉬워했다.

요한이 인사하고 들어간 뒤로, 변경된 앙코르 곡목이 무대 요원을 통해 수현에게 전달됐다. 그가 연주하는 진짜 마지막 곡은 라벨의 「볼레로」였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대부분의 클래식 공연에서는 앙코르곡도 미리 선곡된다. 그러나 요한은 예정되어 있던 리스트의 곡이 아닌 이 곡을 선택했다. 미국인들이 유독 좋아하는 장르인 재즈는 라벨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볼레로」를 재즈 형식으로 편곡한 버전을 이 무대에서 처음 선보이고자 하는 것 같았다. 손으로 개수를 헤아리고 있는 수현의 뒤에 린이 나타났다.

“편곡으로 열한 번째. 물론 편곡이라 정식 일련번호는 없어.”

“요한이 다루는 장르가 꽤 다양해졌네요?”

“네가 재즈 공부했다면서?”

“아, 어쩐지…….”

수현은 픽 웃었다. 뜬금없는 선곡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세계는 여전히 수현만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너 아주 부자 되겠다. 어쩌면 요한보다 더. 요한도 작곡 열심히 하고 있거든.”

“연주회가 드물다 싶더라고요.”

“네가 부러워. 실은 안 그랬던 적이 없었지.”

“아까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한이 정식 데뷔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10년 가까이 같이 일했어. 볼 장 다 봤다는 듯이 날 내팽개치는 게 섭섭해. 그래서 난 앞으로도 널 괴롭힐지도 몰라. 알지? 질투가 제일 무서운 거.”

“요한은 마음 깊이 고맙고, 자길 위해 애써 줬고, 그런 거 잘 몰라요. 알잖아요.”

“그걸 네 입으로 들으니까 더 기분이 엿 같네. 분명 나도 요한을 잘 아는데, 왜 네 앞에선 그걸 자랑할 수가 없을까? 싸워 보지도 못하고 진 기분이야. 그래서 난 네가 싫어.”

“우린 또 이런 대화를 하네요. 나도 린이 싫어요.”

마주 선 두 사람은 동시에 짜증스레 미간을 구겼다. 그러다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게로 돌아온 이상 각오는 돼 있겠지? 천지가 개벽한 것도 아니고, 요한은 여전히 감정에 무뎌. 네가 백번 말해 줘야 ‘아, 그게 그거였구나’ 할 거야.”

“상관없어요. 몰랐던 것도 아니니까. 솔직히 내 마음도 아직 답보 상태예요. 다만 너무 보고 싶어서 온 거고요. 나야말로 앞으로도 계속 이럴지 모르겠어요. 서로 이해해야죠.”

“…….”

“린, 난 요한이 저런 무대에서 언젠가 내 음악을 연주하게 할 거예요.”

“네 연주는 포기한 거야?”

“아뇨. 치고 있어요. 적당히. 취미로.”

왜 손을 잃었으니 피아노를 전부 버려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을까. 지금의 수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오랜 시간을 공들여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아쉬운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끔 그가 머릿속에 상상한 선율과 실연해 내는 소리가 현저히 달라서 당황하기도 하고, 오래 치다 보면 오른손이 납덩이라도 단 듯 왼손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그런 느낌은 때론 실생활에서까지 이어져서 양쪽 손의 균형이 안 맞아 불편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날의 요한을 떠올리게 되는 건 조건 반사 같은 것이었다. 더 이상 환청은 들리지 않지만 기억은 아마 그가 죽는 날까지 그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난 요한이 죽을 만큼 좋아요.”

“…….”

“또 가끔은 죽이고 싶을 만큼 밉죠.”

“좀 복잡한 남자지.”

“네. 그리고 나쁜 남자지만, 그래도 내 거니까 이젠 호시탐탐 그만 눈독 들여요.”

누군가의 이마에 소유권을 붙이는 것은 난생처음 해 보는 일이다. 이건 사실 요한이 잘하는 짓이었다.

수현의 기습 공격에 당황한 린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와, 너 원래 이렇게 재수 없는 캐릭터였니?”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무대 위로 요한이 다시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우레 같은 함성 소리와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다 피아노 앞에 그가 앉아 부드럽게 건반 위에 손을 올리자, 장내가 삽시간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앙코르 연주가 시작됐다. 수현은 집중했다. 린도 방해하지 않고 잠자코 자리를 물렸다.

“재즈라…….”

그를 지켜보던 수현은 미소 지었다.

그는 정말 특별했다.

그렇게 나쁜데도 계속 미워만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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