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34)

29.

요한의 작업실 겸 주거 공간은 베를린의 클라시스 사옥 근방에 있었다. 수현은 처음 독일에 왔을 때 며칠간 그의 작업실에 머물다가 곧 베츨라어로 세간을 전부 옮겼다. 그러자 요한도 베를린의 집은 내팽개쳐 두고 1주일 중 6일은 이곳에 머물렀다. 다만 클라시스가 마련해 준 베를린의 집 쪽이 훨씬 크고, 쾌적했기에 애먼 집세만 낭비하는 셈이었다.

요한의 전담 매니저라곤 하지만 모든 일은 수현의 의지에 따라 실행됐다. 마음 내킬 때 요한을 따라나서는 일 외엔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회사에 상근하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 베츨라어에서 그는 악보 위에 음표를 끼적이거나 연주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오후에는 인근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산책을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주민들이 알아보고 인사하는 일이 요한보다도 더 잦아졌다.

요한은 현재 폴란드에 있었다. 올해부터 역대 쇼팽 콩쿠르 우승자들이 모여 쇼팽을 기리는 추모 음악회가 5년에 한 번씩 개최된다. 쇼팽 콩쿠르 출신의 거장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주도이자, 폴란드 바르샤뱌 오케스트라의 주최였다.

요한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이 공연 마지막 협주자에 선정됐다. 의미도 남다른 공연인 데다 딱히 특별한 일정도 없었지만, 수현은 굳이 따라나서지 않았다. 첫인상이라는 것이 무서워서, 쇼팽은 여전히 그에게 다소 불편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시간으로 생중계해 주는 실황 공연을 보고 있자니 후회막심이었다. 행사의 첫 공연인 만큼 다시없을 호화로운 선곡의 향연이었다. 추모 음악제에서 요한이 연주할 곡은 쇼팽의 가장 열광적인 선율 중 하나인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연주가 끝나고, 대회 참여자들이 전부 나와 관객에게 인사를 함으로써 공연은 막을 내렸다. 내로라하는 선배 우승자들의 사이에서 요한의 연차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겸손의 미덕을 보이며 무대 가장 뒤편에 서 있었다. 지휘자와 악장이 직접 그에게로 다가가 인사를 청하는 모습이 보였다. 거기까지 본 수현은 인터넷 창을 껐다.

주위에 소음이 거의 없었다. 그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집 안을 쓱 둘러보았다. 이쪽에 벽시계를 하나 두면 좋을 것 같은데. 저쪽에는 책장을 하나 더 들여놓고, 침대 옆에는 무드 등을 하나 사서 둬야겠다……. 그렇게 하나둘씩 들인 세간이 집 안에 가득했다.

처음 방문했을 때 깔끔했던 공간은 온데간데없었다. 게다가 온 바닥은 이미 수현이 이것저것 꺼내 어질러 놓은 통에 난장판이었다. 사실 깔끔한 성격의 요한은 좀처럼 이곳에서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군소리 하나 없이 늘 수현의 곁에서 잠을 청했다. 수현은 문득 그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졌다.

그때였다.

“요한이야?”

수현은 벨이 채 두 번이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지금 끝났어요.]

“나도 봤어.”

[거기서 볼 거라면 그냥 같이 오지.]

볼멘소리가 이어졌다. 함께 살면서 달라진 게 있다면 요한이 아이처럼 가끔 투정을 부린다는 것이었다. 어떤 감정이 크든 작든 가슴속에 피어오른다면 제때 확실하게 표현해 달라고 수현이 먼저 요구했다. 그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언제 와?”

[아, 지메르만이 면담을 요청했어요.]

‘그냥 거절하지…….’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수현은 화들짝 놀라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아직 입 밖으로 꺼낸 것 같지는 않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거절하려고 했는데 린이 선수 쳐서 수락했나 봐요.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대. 오늘은 못 돌아가요.]

수현은 입술을 달싹였다.

[왜 대답이 없어요?]

“아냐, 듣고 있어. 알겠어.”

[화났어요?]

“내가 왜? 알았다니까?”

도둑이 제 발 저리다더니, 꽁한 마음이 피어올라 곤란했다. 목소리까지 퉁명스럽게 되나갔다. 가뜩이나 요한은 자신에게 민감했다.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수현은 빨리 이 통화를 끝내야겠다고 느꼈다.

[화났는데?]

“하던 일 있어. 끊자.”

[보고 싶어요?]

“네가 그런 거겠지.”

[맞아. 직접 보고 만지고 싶어. 지금 뭐 입고 있는지 알려 줘요. 벗기는 상상하게.]

“난 폰 섹스 싫어. 벗기고 싶으면 지메르만 걷어차고 나한테 와.”

수현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종료 버튼을 누르기 전, 수화기 건너편에서 와하하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폴란드와 독일은 인근 국가이긴 하지만, 거리상으론 멀었다. 바르샤바에서 베를린까지만 해도 주행 거리로 600킬로미터가 넘는 장거리였다. 얼마 전 비행기 티켓이 누락되는 바람에 기차를 탔다가 장장 일곱 시간을 선로 위에 있었던 적이 있어서 잘 알았다. 운 좋게 바로 비행기를 탄다고 해도 공항에서 다시 베츨라어까지 한참이었다.

바르샤바와 베츨라어, 두 도시 간의 시차는 없으니 지금 그쪽도 밤 11시쯤의 늦은 시간일 것이다. 과연 그는 언제쯤 돌아올까.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수현은 방 정리를 하기 위해 청소기를 들었다.

* * *

파삭, 하고 무언가 밟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처참하게 부서진 것은 요한이 밟은 CD 케이스였다. 납작한 좌식 테이블 위에 반쯤 몸을 엎드린 채로 선잠에 들어 있던 수현은 눈을 번쩍 떴다. 요한은 산산조각 난 CD 케이스를 대충 구두로 밀어 치웠다. 그는 어젯밤 영상에서 봤던 무대용 연미복 차림 그대로였다. 다만 목에 맨 보타이가 한쪽 끈만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어서 무척 흐트러져 보였다.

“옷도 안 갈아입고 왔어?”

수현은 눈을 비비며 시간을 확인했다. 기억하기로 새벽 6시경까진 깨어 있었다. 지금은 이미 새벽녘의 서늘한 공기가 모두 사라진 아침이었다.

“독일은 면허 따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요? 게다가 한번 취소되면 답 없어.”

“설마 차로 왔어?”

“마침 시간대 맞는 항공편이 있었어요. 프랑크푸루트까진 비행기로. 여기까진 차로.”

공항에서 이곳까진 두 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통화한 게 지난밤 11시경이었으니 전화를 끊고 그대로 왔다고 하면 계산이 맞았다. 수현이 쑥스럽게 웃자, 요한이 그런 그의 복부 위로 손을 불쑥 집어넣어 그대로 들어 올렸다.

“좀 멋있게 들 순 없어? 내가 짐짝인 줄 아나 봐.”

“그 자세론 이게 최선이에요. 이 낮은 테이블은 또 뭐예요.”

“아, 지난달에 인터넷으로 샀던 게 어제 왔어. 여긴 다 좋은데 택배가 너무 느려.”

요한의 품에 안긴 채로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던 수현은 입을 쩍 벌렸다. 나름대로 치운다고 치웠는데 어젯밤보다 훨씬 어지러워져 있었다.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느냐면 요한이 발 디딜 곳도 마땅치가 않았다. 분명 어젯밤까지만 해도 걸어 다닐 공간은 있었는데……. 수현을 들쳐 안은 요한이 침대까지 가는 행로는 순례자의 길보다 험했다. 빠직, 하고 구두 굽에 뭔가 채이고 밟히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수현은 왠지 멋쩍었다.

“내가 간밤에 분명히 정리를 했거든.”

그러자 요한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와, 대단히 노력했군요.”

동시에 수현의 뒷머리가 부드럽게 베개 위로 닿았다. 침대 위도 악보용 종이나 필기구 따위로 엉망진창이었다. 요한은 한꺼번에 그것들을 바닥으로 쓸어 내고, 수현의 몸 전체를 편하게 고쳐 눕혔다. 갈증이 일었던지 그는 수현의 입술부터 머금었다. 입 속에 감돌고 있는 물기를 전부 흡수할 기세로 입 안의 타액을 빨아들였다. 그러고는 수현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끼워 넣고 바지부터 티셔츠까지 일사천리로 벗겨 냈다. 수현도 손을 뻗어 요한의 바지 버클을 풀어냈다.

그는 수현의 판판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툭 튀어나온 유실을 혀끝으로 핥았다. 그러자 수현이 허리를 파르르 떨며 뺨을 붉혔다. 요한은 이렇듯 생동감 있는 수현의 성적 반응이 때론 낯설었다. 과거의 그는 늘 섹스하는 내내 진저리치다가 가까스로 사정하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럴 때마다, 여태까지의 수현이 자신과 함께 있는 순간순간 얼마나 수많은 감정들을 억눌러 왔던 것인지 실감했다.

요한이 전보다 살이 오른 수현의 허벅지를 들어 올려 자신의 허리춤에 걸쳤다. 이게 본 게임을 시작하겠다는 상호 간의 사인이라도 되는 양 수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처음 삽입할 때의 이물감만큼은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요한은 그런 그의 둔부 아래로 손을 뻗어 깊숙한 내부로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아기처럼 꼭 매달린 수현이 요한의 목덜미에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한참 쫀득하게 감겨 오는 내부를 넓히던 요한이 자신의 것을 콱 박아 넣었다. 수현은 욱, 하고 뜨거운 신음을 토해 냈다.

“하아, 하, 읏……!”

헐떡이던 수현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요한을 올려다봤다. 잔뜩 찌푸려진 미간이 정면에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내밀어 요한의 두 볼을 쥐고 입을 맞췄다. 그 순간 그의 안으로 쿡, 하고 요한의 것이 찔러 들어왔다. 수현은 반사적으로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요한이 그의 홍조가 오른 뺨 위에 키스했다.

“평생 이렇게…… 어디에도 안 나가고 내 옆에만 있으면 안 돼?”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소릴 듣는다면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현은 이 말이 요한의 진심이라는 것도, 가능하다면 정말 실행하고 싶어 하리란 것도 알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요한의 어깻죽지를 끌어안았다. 입을 맞추기 위해 아래로 끌어당기자 순순히 딸려 내려와 혀의 온기를 나눠 주었다. 천천히 떨어져 나간 입술과 입술 사이에서 끈덕진 타액이 실처럼 이어져 있다 툭 떨어졌다. 동시에 엇박으로 요한의 하체가 수현의 안으로 끊임없이 밀려 들어왔다. 눈앞이 아찔한 와중에도, 수현은 그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애썼다.

요한의 상처는 뿌리가 아주 깊은 나무여서, 아무리 노력해도 들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평생을 걸쳐도 완전히 낫긴 어려울 것이었다. 그러니 그는 수현이 만족할 만큼은 끝내 자라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수현을 가졌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더 갈구하고, 원했다. 수현은 다 가졌는데도 아직까지 간절한 요한이 안타까웠다.

널 사랑해.

내가 몇 번이고 널 구해 줄게.

아무리 말로 사랑을 고백해도 그는 또 버려질까 불안해할 것 같았다.

“하,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뭐가 그렇게 불안한데?”

그가 안타까운 한편 마음이 답답해졌다.

이렇게 못 잊고 끝내 날 망친 네게 되돌아왔을 정도로 널 사랑하고 있다는데…….

“차라리 우리 결혼하자. 마침 여기 동성혼도 합법이잖아. 안 그래? 이 고집불통 새…… 읏……!”

그 순간 요한은 수현의 안에, 수현은 요한의 복부 위에 파르르 떨며 토정했다.

* * *

수마에 빠져 있던 요한은 천천히 눈을 떴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침대 위에서 뒤엉켜 보냈던 터라, 수현은 아직 잔뜩 지쳐 잠들어 있었다. 까무룩 잠들기 전에 분명 노을을 봤던 것 같은데 이미 창문 틈으로 한밤의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어느새 밤이 되어 버린 뒤였다.

목이 마른 그는 주방의 냉장고 문을 열었다. 베를린의 집에는 탄산수와 맥주 정도만 구비되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그곳과 달리 베츨라어 집의 냉장고 안은 뭐랄까, 중구난방이라는 말과 꽤 어울렸다. 콜라 같은 탄산음료와 생수, 주스, 우유 같은 유제품들까지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이렇게 커다란 냉장고인데도 공간이 비좁아 보였다. 그는 생수병을 꺼내 물을 마시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방에는 채 겉면의 비닐을 까지도 않은 인덕션과 현주가 선물이랍시고 보내온 로얄 알버트 찻잔들이 널려 있었다, 거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피아노 위에 쌓여 있는 악보들과 바닥에 깔린 더 많은 미색 종이들로 엉망이었다. 게다가 침대 아래로 반쯤 늘어져 있는 시트, 책상 위에 벗어 놓은 수현의 체크무늬 남방과 CD 케이스들, 협탁 위에 보다 만 채로 펼쳐 둔 책……. 심지어 오디오는 얇은 유리로 된 뚜껑이 아가리를 쩍 벌린 채 열려 있었다.

한국에 있는 수현의 방도 꼭 이랬다. 수현은 자신이 이런 난잡한 환경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 같지만 사실 요한은 이런 풍경이 싫지 않았다. 곁에 그가 늘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일일이 눈으로 확인받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수현은 종종 자신의 작업실에서 묵고 갔지만 결코 어디 한 군데 어질러 놓는 법이 없었다. 그가 이튿날 아침 도망치듯 떠난 뒤로도 늘 깨끗했던 공간을 보면서, 종종 아쉬움과 외로움을 동시에 느꼈다. 몸만 왔다가 그대로 빠져나가는 그에게서 흔적 하나 남기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느껴졌던 것이다.

외로움.

수현은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낄 줄 안다는 것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사실 요한은 보편적인 감각과 꽤 오랜 세월 동고동락해 왔다.

브람스가 좋아했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자유롭지만 고독하다.>

태어난 이후로 요한은 늘 그런 상태였다. 자유롭지만 고독하다……. 하지만 자유롭지 않아도 좋으니 조금만 덜 고독했으면 했다. 그걸 채워 준 것이 수현이었다. 그의 삶에 있는 모든 생기는 수현이 불어넣어 준 것이었다.

요한은 천천히 잠든 수현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의 이마 위에 제멋대로 뻗쳐 눈가를 가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길은 수현이 깰세라 아주 조심스러웠다.

단잠에 빠져 있는 수현은 말 그대로 꼭 천사 같았다. 가뜩이나 다정하고 온순한 인상이 눈을 감으면 훨씬 더 크림처럼 부드러워졌다. 요한은 정말 그를 어떻게든 망쳐서 곁에 눌러 두고 싶은 충동을 때때로, 실은 몹시 자주 느꼈다. 그런 방법밖에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요한에게 수현은 전혀 다른 방법론을 제시했다.

그는 수현의 허전한 왼손 약지를 매만졌다. 눈썰미가 좋은 그는 손가락으로 대충 어림잡아 손의 감촉으로 사이즈를 쟀다. 반지 같은 물건이야 수천 개라도 살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은 건, 그 작은 원형의 물건 하나로 사람을 속박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법적으로 사람들을 묶어 주는 제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런 일시적인 방법들이 아니라 진짜로 영원히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수현이라면…… 그가 선택한 방법이라면 믿고 따라도 좋을지 모른다. 그는 몇 번이나 자신을 구했으니까.

문득 두 사람이 처음 마주쳤던 때가 떠올랐다. 수현은 전혀 자신에 대해 기억하고 있지 못한 순간이지만, 요한은 혼자 생생히 떠올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떤 면으로 보면 누구와도 나누지 않고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수현에게 주지 못할 것이란 이 세상에 없지만, 자신이 구원받았던 그 순간의 환희 정도는 혼자 간직한다 해도 너그러운 그는 화내지 않으리라.

어린아이였던 자신의 모습이 흑백 영상처럼 어두침침한 색으로 나타나 머릿속에서 춤췄다. 다만 악에서 구해 달라고 되뇌며 걸음을 내달리던 소년. 그리고 그 소년의 모습은 성당의 피아노 치는 천사를 만나자마자 화려한 색채로 물감이 퍼지듯 물들었다.

나를 구한 것이자 동시에 내가 망친 것. 바로 이 곧고 아름다운 손이다.

후회했다.

정말 몇 번이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말은 좀처럼 믿지 않는 것 같지만 말이다.

“진짜 다신 안 그럴게. 앞으론 당신이 시키는 일만 할게요.”

“…….”

“너무 사랑해요.”

요한은 수현의 오른손을 들어 경건하게 입을 맞췄다.

* * *

베를린 티어가르텐 지역에 위치한 베를린 필 공연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번 정기 공연의 협연 연주자는 피아니스트 승요한이었다. 최근 해외 각지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던 연주 일정상, 그의 상징적 모체와도 같은 베를린 필과의 협연은 꼬박 1년 만에 이뤄졌다.

오늘은 하이네만의 간곡한 권유로 그가 직접 만든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초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간 요한이 작곡해 온 것은 대부분 소나타나 전주곡 등 피아노만으로 악보를 채운 것들이었다. 그가 만든 관현악곡은 처음 공개되는 일이라, 유난히 언론이 많이 모여들었다. 일설에 의하면 승요한이 만드는 모든 곡의 별명을 베일에 감춰져 있는 그의 연인이 짓는다고 하는데,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었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부제는 「축제」였다.

수현은 공연장에 들어와 미리 좌석에 앉아 있었다. 하이네만이 그를 초대하면서 따로 마련해 준 무대 아래의 로얄석이었다. 아직도 수현에겐 하이네만 같은 거장과의 사적인 교류가 꿈만 같았다. 요한이 아니었더라면 언감생심, 꿈에서도 비현실적이라고 이런 꿈을 꾼 자신을 욕했을 것이다.

연주회의 처음은 관현악단만의 연주로 시작된다. 특별 협주자인 요한은 프로그램 가장 마지막 부분에라야 등장했다. 세계적인 명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이 만들어 낸 음악은 무척 아름다웠다. 귀가 청결해지고, 또 황홀해지는 듯했다.

그런데도 수현은 이상하게 무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빨리 그가 아는 어떤 사람이 나타났으면 하고 계속 바라게 됐다. 그의 간절한 바람을 알기라도 하듯, 마침내 요한이 등장했다. 베를린 필하모니의 지휘자인 하이네만이 직접 나와 그를 맞이했다. 무대에 오른 그는 악장과 겸손한 태도로 악수하고, 지휘자와 친근하게 인사한 뒤 피아노 앞에 앉았다.

박수 소리가 한참 이어지다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가 만든 피아노 협주곡은 곡의 특성상 관현악 연주가 먼저 시작되고, 그 뒤에 피아노가 그들을 뒤쫓듯 따라간다. 베를린 필의 현란한 연주가 이어졌다. 기다리고 있던 요한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예의 버릇대로 피아노 건반 위에 부드럽게 손을 올렸다가 떼어 냈다. 그러고는 경쾌한 협주를 시작했다.

그가 만든 협주곡의 세 악장은 저마다 살아 있는 듯 생동감 있게 날뛰었다. 늘 음험하던 그의 음악과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그에겐 어두운 베토벤적 C단조가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해 왔지만, 경쾌한 D장조가 기대보다 훨씬 잘 어울렸다. 아마 관객들도 수현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연주가 언제 끝났는지 그 지점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수현이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요한은 일어나 관객을 향해 인사하고 있었다. 그는 무대 아래를 내려다봤다. 무대 위에서 보면 관객석은 전부 빛으로 보인다. 이토록 큰 대형 홀일수록 그런 현상은 더했다. 그는 그 빛의 틈바구니에서 무엇을 찾는 것일까.

기립 박수가 이어지는 동안 정중하게 인사한 요한과 관현악단들은 악기를 정리하고 무대 밑으로 하나둘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현은 급히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하이네만이 마련해 준 스태프 ID 카드를 목에 급히 걸치고 대기실이 있는 방향으로 가려는데, 누군가 손목을 붙들어 확 잡아당겼다. 상대의 얼굴이 단 1초만 늦게 보였더라도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쉿.”

요한의 이름을 부르려던 수현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커다란 합판의 뒤에 숨어 있는 두 사람은 잠시 소리를 죽였다. 아직 대기실 앞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무대 아래에서 볼 땐 뽀송뽀송한 상태처럼 보였는데, 막상 가까이에 선 요한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이 땀 좀 봐.”

걱정스러운 표정의 수현이 땀에 젖은 요한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자, 그는 그대로 수현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수현의 허리를 감싸 안아 대기실 안으로 몰래 끌어들였다.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은 그대로 문에 기대선 채 키스했다.

서로의 입 속을 넘나들며 살덩이를 엉켰다. 요한은 수현을 번쩍 들어 올려 기다란 소파로 직행했다. 풀썩, 쓰러지듯 소파에 기대 누운 수현이 요한을 올려다봤다. 당장 몸을 겹쳐 오리라고 생각했던 요한은 그를 내려다보는 채로 멈춰 있었다. 수현의 드러난 이마에 천천히 입을 맞춘 요한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냈다.

“보통 이런 걸 주는 거 맞죠.”

그는 수현의 왼손 약지에 얇은 반지를 끼웠다. 맞춘 듯 꼭 들어맞았다. 수현은 깜짝 놀랐다.

“무슨 의미지? 너 이거 청혼이야?”

“화답이죠. 청혼은 그쪽이 먼저 했잖아요.”

이런 서약의 반지가 필요한 일을 하자는 이야기를 꺼내긴 했었지만 그건 사실 생각나는 대로 막 내뱉은 말에 가까웠다.

“미안한데 솔직히 나 생각 안 해 봤어.”

“…….”

“그것도 너랑 평생…… 아니 물론 상상은 해 봤지만 진짜 이렇게…….”

말하던 수현은 미간을 구겼다. 요한은 멀뚱히 그런 수현을 쳐다봤다. 그의 눈이 말하는 듯했다.

어쩌라고?

정상적인 대화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한 수현은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잠시 응시했다. 그러다 요한의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전혀 장난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몸을 한 번 크게 들썩인 수현은 소파에 툭,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요한의 손이 그의 뒷머리를 빠르게 사수해 딱딱한 곳에 부딪히지 않게 보호했다. 그 바람에 어정쩡해진 요한의 자세를 올려다보던 수현이 조금 전부터 계속 새어 나오는 헛웃음을 참지 못하고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요한 같은 인간과 평생을 함께하는 것. 그가 끼워 준 반지를 보자 그게 아주 큰 일인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무거웠는데, 생각해 보니 이미 자신은 그와 함께 너른 바다를 항해할 작정으로 되돌아왔던 게 아닌가. 법적인 끈으로 묶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 제도가 요한에게 안정을 준다면 굳이 피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에겐 변하는 것도 없었다. 그가 이쪽의 응답을 기다리며 답지 않게 긴장하는 기색이 느껴져서 수현은 왠지 즐거워지기까지 했다.

“맞다, 너 되게 부자지. 결혼하면 그 돈 다 내 건데 까짓것 해 버리자. 독일에서 너 시민권 취득하게 해 줬지? 그럼 여기서 혼인 신고만 할까? 아니면 식도 올리고 싶어?”

요한은 미간을 구겼다.

“인상 쓰고 있더니 왜 갑자기 신났지?”

“미안. 갑자기 어마어마한 부자 된다니까 너무 신나 가지고. 티가 많이 났나 보네.”

“놀리는 거죠.”

수현은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요한의 뺨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부모님한테는 내가 말씀드릴게.”

물론 마음은 어렵겠지만 두 분이 끝내 승낙해 주시리라는 믿음이, 수현에겐 있었다. 요한은 무엇이든 수현에게 결정을 맡기겠다는 듯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 양보하는 법도, 수현이 가르친 대로 서툴지만 잘 따라와 주고 있었다.

수현이 손을 까딱이자, 요한이 그의 위로 풀썩 쓰러졌다. 허리춤을 꽉 끌어안고 식은땀으로 젖어 든 얼굴을 자신의 뺨에 비비는데도 조금도 불쾌하거나 싫지 않았다. 괜히 민망한 마음에 고개를 가로젓자, 수현이 끌어안고 있는 자세를 불편해한다고 생각했는지 요한이 몸을 일으켰다.

“너랑 이 지경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어.”

“난 알았어요.”

“잘나셨다.”

“더 분발할게요.”

“그래. 노력하는 자세는 늘 기특해.”

“원한다면 부모님께 함께 가도 돼요.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부모님을 싫어하진 않아요. 특별히 좋아하지 않을 뿐이죠. 앞으론 그것도 노력할게요.”

수현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는 요한의 멱살을 쥐고, 자신에게로 끌어내려 입 맞췄다.

* * *

서초동의 한 성당 주차장에 몇 대의 차가 연달아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일행들은 서로를 알고 있는 모양인지 인사를 나눴다. 수현의 직계 가족을 제외하면, 초대받은 인원은 열 명이 채 안 됐다. 이동준 내외와 현주, 재욱, 그리고 린 정도였다. 시야를 넓혀 보면 초대할 사람이야 많았지만 요한과 수현의 관계를 알고 있는 최소한의 인원만 초청했다.

일부러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성당으로 약속의 장소를 선택한 것은 과거를 제대로 마주 보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 모두, 특히 요한에게 그런 과정은 꼭 필요하다 여겨졌다. 성당에서 언약식을 했으면 좋겠다고 수현이 말을 꺼내자, 요한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수현의 존재와는 다른 방식의 구원이었을 신부님이 어느 날 갑자기 소멸해 버렸던 것이다.

그때 그가 느꼈을 허무함, 허탈함, 무엇보다 정말 자신이 엄마의 말처럼 불행을 몰고 오는 아이인 것은 아닌가 여겨졌을 해묵은 죄책감……. 이제 수현은 줄곧 신부님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했던 그를 이해하게 됐다. 그래서 천천히 시간을 두는 게 좋겠다고 여기던 찰나, 요한이 그러마고 수락했다. 더딘 그의 성장이 답답하다가도, 느리게 한 발짝 움직여 줄 때면 수현은 뛸 듯이 기뻤다.

일반적인 결혼식과는 절차가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 주례가 없었다. 대예배실 정 가운데를 비워 놓고 서로 둘러앉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두 사람이 서약을 맹세하고 그 증표인 반지 정도를 나눠 끼는 것이 다였다. 식이 모두 끝나고 나자 너무 허무해서 맥이 빠질 정도였다.

그래서 현주가 즉흥적으로 제안했다.

“우리 요한 씨가 연주하는 「요한」 들어 볼까요? 수현이가 그런 제목의 음악을 만들었다는 소문은 익히 들렸는데 한 번도 정식으로 공개된 적이 없잖아요. 다들, 어떠세요?”

요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수현이 만든 곡을 아까워했다. 그리고 다른 곡에 비해 「요한」을 연주하는 일을 힘에 부쳐 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대중에 공개하는 것마저 꺼렸다. 그 문제로 수현과 요한은 몇 번 다퉜다.

“난 싫어요.”

요한이 완강히 거부하자 수현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수현에게는 요한과의 갈등 상황을 타개하는 놀라운 비법이 몇 가지나 있었는데, 이렇게 협상하는 것은 그중 하나였다.

“그럼 앞으로 너의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가 않을걸.”

“…….”

“그리고 너 결혼하고 신혼여행 간 신혼부부가 밤에 뭐 하는 줄 알아?”

“같이 자겠죠.”

“정답이야. 하지만 넌 오늘 독수공방을 하게 되겠지.”

그의 설득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요한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지켜보는 소수 정예의 관객들은 기대감이 높아진 눈길로 요한을 주시했다.

그리고 요한은 낡은 피아노로 「요한」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작은 성당 안의 무대였는데도 요한의 연주는 이 공간이 광활한 초원인 듯 넓은 공간감을 느끼게 했다. 초대 손님들은 전부 피아노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때론 눈을 감고 때론 경탄하며 요한의 연주를 감상했다. 수현도 그랬다.

이 음악을 만들 때의 수현은 오로지 요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요한에 대한 사랑과 미움으로 곧 터질 것 같았다. 그를 지켜 내야 한다는 의무감과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 사이에서 절박했다.

마침내 완성된 이 음악을 서툰 연주로 처음 그에게 들려주자, 그는 수현이 치는 버릇 그대로 건반 위에서 따라 연주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 곡, 치기가 힘들어요.>

기법상으로 요한이 치기엔 어린아이의 장난 같은 악보였다. 그의 말은 누구의 슬픔에도 관심이 없는 그가 수현의 것만큼은 알아봐 주기 시작했다는 신호 같았다. 그래서 수현은 눈물을 쏟아 냈다.

연주가 끝나고, 아무도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요한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수현을 빤히 직시했다. 시선을 받아 내고 있던 수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버지가 흐느끼는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는 모습이 보였다. 게다가 이동준, 그의 아내, 현주, 재욱과 린까지 보는 눈이 한두 개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러나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요한에게 뛰어가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곤 그의 두 뺨을 쥐고 뜨겁게 키스했다. 입술을 떼어 낸 수현이 요한과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그러자 요한이 이렇게 말했다.

“넌 신의 은총이야.”

수현은 그의 품에 매달렸다.

“알아.”

내가 구원한…….

나의 베르테르.

“원래 신은 너만 사랑하거든.”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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