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꽃의 왈츠」
어느 해 3월.
그러니까, 요한이 열일곱이 되던 해. 러시아의 음악 황제라고 불리는 명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요한을 정식으로 모스크바에 초청했다. 초대장에는 모스크바행 비행기 표도 함께였다.
그는 이동준이 보낸 요한의 연주 영상을 보고, 자신이 대회 위원장으로 있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요한을 출전시키고자 했다. 대회에 출전하려면 기한 내에 지원서를 제출해야 했지만 위원장 권한으로 약간의 특혜까지 부여해 추가 접수의 형식으로 원서를 받았다. 요한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이 그의 연주 행보에 주춧돌을 마련했다는 명분을 얻고 싶은 것 같았다. 어쩌면 순수하게 요한의 재능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이동준은 무척 걱정이 많았다. 그는 요한이 연주하는 장면을 촬영해, 게르기예프에게 보냈던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 봤다.
대회의 시작은 2개월 뒤인 5월로 코앞이었다. 모든 콩쿠르에는 해당 대회만의 일정과 규칙이 있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연주자라고 한들 내규를 어긴다면 좋은 점수를 받기는커녕 피아노 앞에 앉아 보기도 전에 탈락할 수도 있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요한은 참가자 그 누구보다 취약했다. 그는 내킬 때만 연주하는 습관이 있었다. 심지어 다른 또래 아이들처럼 학교에 다니지도 않고 있었기 때문에 단체 생활 따위와는 상성이 안 맞았다. 마침 위원장인 게르기예프의 특혜까지 입었으니 대회 중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인다면 차이콥스키 역대 수상자들로 이루어진 심사 위원들의 보는 눈이 곱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연주만 듣게 한다면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인데…….”
요한은 특별했다. 그의 호화로운 연주는 듣는 귀가 깨끗해졌다가 동시에 더럽혀지는 듯한 모순이 있어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는 계이름을 배우고, 크레셴도나 데크레셴도 같은 음악적 기표들을 익히고, 그다음 아농·체르니…… 하는 식으로 단계별 ‘피아노의 규칙’을 학습한 게 아니었다. 이를테면 수학에서 더하기를 배우기 전에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먼저 본 것과 같았다. 그는 유명 오케스트라와의 피아노 협연 무대를 눈으로 보고, 프로의 연주를 귀로 들으며 자신의 식대로 ‘해석하는 방법’부터 익혔던 것이다.
눈과 귀가 좋아 기본기를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충실하게 악보를 구현해 냈기 때문에 이동준이 특별히 지도할 것도 없었다. 자신의 역할은 요한의 연주를 독려하고, 앞길을 열어 주는 것뿐이었다.
다른 사람의 손을 타는 일이 적다는 것은 자신만의 고집을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를 피아노 앞에 앉게만 하면, 본 적 없는 연주에 매료된 심사 위원들이 먼저 나서서 트로피를 그에게 수여하고 싶어 안달이 날 것이다. 이동준은 물론 수고롭게 요한을 초청한 게르기예프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피아노 앞에 무사히 앉히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가까스로 요한을 설득해 참가서를 제출하게 하는 데까진 성공했는데, 이제는 그를 어떻게 수현이 없는 모스크바에 데려가 몇 주간 머무르게 하느냐가 난관이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수심이 깊어진 이동준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수현으로부터의 전화였다.
[선생님, 요한이 모스크바에 간다면서요?]
“요한이가 그러니?”
[네, 어제 들었어요. 그런데요, 선생님. 저도 콩쿠르 보러 가고 싶어요. 국제 콩쿠르는 한 번도 본 적 없거든요. 따라가면 안 될까요?]
“하지만 넌 대입 준비로 바쁘잖아. 가면 몇 주는 있어야 하는데, 일정이 괜찮겠어?”
[괜찮아요. 수시 준비는 따로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래, 타진해 보마. 그 전에 부모님께서 먼저 허락하셔야겠지?”
[그건 맡겨 주세요!]
몇 마디 짧은 대화 끝에 전화는 끊겼다. 수현이 가겠다고 한다면 요한은 입 아프게 설득하려 애쓰지 않아도 따라올 것이었다. 어쨌든 한고비는 넘겼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이동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 * *
그해,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2등은 러시아의 미로슬라브 꿀띠쉐프가 차지했다. 요한의 연주는 완벽했다. 게르기예프에게 넌지시 전해 듣기로 심사 위원들도 만장일치로 우승자를 선정한 모양이었다. 한 위원은 쇼팽이 살아 돌아온대도 흠잡을 곳을 찾을 수 없는 연주였다고 극찬하기까지 했다. 새로운 천재의 등장으로 클래식계의 안팎은 이미 소란했다. 결코 이변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승자의 호명을 기다리며 여유롭게 앉아 있던 이동준은 문득 옆자리를 둘러봤다.
없다.
수현은 물론이고 당사자인 요한조차 없었다. 우승자 호명이 되기도 전에 이동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이변이 일어났다.
사회자의 발표가 끝난 뒤 객석과 기자석은 너 나 할 것 없이 웅성거렸다. 참가자들도 당황한 듯했다. 아마 이 소식을 접하게 된 누구라도 그럴 것이었다. 이동준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해,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우승자는 공석이었다.
“이 녀석들이 대체 어딜 간 거야!”
수현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봐도 받질 않았다. 요한은 원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기상천외한 행동을 가끔 했지만 수현은 어른들의 통제 범위 안에 있는 착한 아이였다. 한참 동안 요한과 수현을 찾아다니던 이동준의 귀에 익숙한 선율이 들려왔다. 그는 참가자 연습용으로 쓰였던 조그만 홀 안으로 홀린 듯이 들어갔다. 그 안에 두 대의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연주하는 뒤통수가 두 개 있었다.
‘「꽃의 왈츠」인가?’
잠시 서서 듣고 있던 이동준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왠지 두 아이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공기가 낯이 뜨거워서였다. 저쪽은 미성숙한 소년들이고, 이쪽은 황혼이 다 되어 가는 성인이건만 그가 차마 눈을 똑바로 뜨고 볼 수조차 없는 붉은 공기가 분명하게 퍼지고 있었다.
연주를 끝낸 요한은 피아노 건반 위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수현도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차마 쳐다보지 못했다. 그가 선 자리에서 요한은 얼굴이 보이지 않았고, 수현만 옆모습이 가까스로 보였다. 입을 손으로 막는 모양새가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듯했다. 걱정이 된 그가 다가서려 할 때였다.
힘겹게 서로를 마주 본 두 아이들은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그는 멈춰 섰다. 거리가 멀어서 대화 내용까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수현의 표정이 무척 어색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이동준이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가자, 요한과 수현이 그를 돌아봤다. 그리고 동시에 내뱉었다.
“오셨어요?”
표정으로 감정을 쉽게 유추해 내기 어려운 요한과 달리 수현은 무척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게 한눈에 보였다. 고개를 푹 숙인 그의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바람을 쐬고 싶다며 황급히 나가 버리기에, 요한도 이동준도 그를 붙잡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수현아……!”
“그냥 두세요.”
요한은 검지로 건반을 지그시 눌렀다. 그때까지 수현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던 요한의 얼굴은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손끝에 짜증이 가득했다.
“지금 형이 옆에 있으면 저 사고 칠 것 같아요.”
“…….”
“「꽃의 왈츠」는 이제 다신 못 치겠네요.”
“아니, 왜?”
“아마 형이 쳐 주지 않을 거예요.”
표정이 무척 아쉬워 보였다. 요한은 본래 표정이 다양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선명하게 표정이 드러나 있을 만큼, 마음이 동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애석해하는 그에게 수상이 좌절됐다는 이야기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버거웠다. 어떻게 전해야만 할까. 제자를 거둬 본 적도, 그 제자를 콩쿠르에 출전시킨 일도 모두 처음이라 이동준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몰랐다.
“저, 요한. 이번 콩쿠르는 우승자가…….”
“아, 올핸 공석이라면서요.”
“알…… 고 있었니?”
이동준은 깜짝 놀랐다.
“홀에 들어오다가 어떤 외국인한테 들었어요. 얼굴이 낯이 익길래 몇 마디 나눴거든요. 이번엔 어렵게 됐으니 아무 콩쿠르에서나 하루빨리 우승한 다음에 꼭 자길 찾아오라고요. 아까까진 여기 있었는데……. 지금은 어딜 갔는지 모르겠네요.”
“낯이 익었단 말이냐?”
“통역해 주는 여자가 그 사람 이름이 하이네만이라고 했는데. 베를린 필 상임 지휘자, 맞죠. 영상으로 몇 번 본 적 있어요.”
맙소사. 이동준은 눈을 한참 깜빡였다. 하이네만이 이곳에 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요한과 이미 접촉한 뒤였으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요한의 자질을 알아봤다면 왜 당장 그를 독일로 데려가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요한은 그야말로 다시없을 원석이었다. 좁은 땅에 썩게 둬서는 안 됐다.
“이유가 뭐라고 하든?”
“게르기예프가 특권을 준 걸 다른 참가자 측에서 알게 돼서 문제가 됐대요. 제 출전 자체가 공정하지 않다고 항의가 빗발친다나 봐요.”
거기까지 들었을 때 이동준은 납득했다. 이미 첫 출전에서 반칙을 쓴 셈이니, 공식적인 수상기록이라는 권위가 필요하다 느꼈던 것 같았다. 하이네만은 전방위로 발이 무척 넓은 지휘자지만 거둔 제자는 없었다. 하루빨리 아무 콩쿠르에서나 우승한 뒤 꼭 찾아오라고 말했다면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와 요한을 미리 점찍어 놓고 간 것이었다. 어쨌든 앞으로 하이네만은 물론이고 다수의 음악가들이 그를 주시하고 있을 테니, 트로피는 없더라도 이번 콩쿠르는 출전한 것 자체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그렇구나. 그래도 아쉽게 됐다. 몇 달 동안 고생했는데.”
“다음에 우승하면 되죠.”
또 출전해도 자기가 당연히 우승하리라는 말투였다. 요한이 연주에 자신감을 보이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동준은 다음 대회를 기약하는 그 때문에 놀랐다.
“오늘 전 이걸로 됐어요.”
요한의 기다란 손가락이 눈앞의 피아노를 가리켰다. 아마 네가 만족한다는 건 「꽃의 왈츠」 쪽이겠지.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서로가 남자이기 때문에, 또 이곳이 공연장의 무대 위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장애물들이 있어서 피차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아마 조금만 더 성적으로 성숙했다면 오늘 두 사람은 분명 잠자리를 가졌을 것이다. 요한이야 짐작하고 있었지만 수현까지 저런 반응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사실 그는 몹시 당황한 상태였다.
“요한, 수현이가 왜 그렇게 좋니?”
그는 질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동준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답지 않게 말을 고르는 듯했다.
대답은 한참 뒤에 이어졌다.
“예쁘잖아요.”
그러고는 부드러운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