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 나라를」
가로 300센티미터. 세로 200센티미터.
베츨라어의 집 한쪽 벽면에 자리를 차지하고 붙어 있는 세계 지도의 크기가 그쯤 됐다. 원래도 자신의 방 이곳저곳에 영화 포스터를 붙이길 좋아하던 수현은 급기야 이곳에 맞춤 사이즈로 제작한 커다란 지도까지 붙여 두었다. 그는 지금 예의 지도 앞에 서서 차이콥스키의 「이탈리아 카프리치오」를 듣고 있었다. 주말 오전에 대청소를 하면서 듣기 딱 좋은 생기 넘치는 곡이었다. 카프리치오는 이탈리아어로 ‘변덕스러움’을 의미했다. 차이콥스키가 바라본 이탈리아는 변덕 그 자체였던 모양이다.
“여기 너랑 잘 어울리겠다.”
수현의 검지가 유럽 중남부의 기다란 지형을 가리켰다. 책을 읽고 있던 요한이 그런 그를 향해 다가왔다. 등 뒤에서 전신을 감싸 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자, 그가 어깨를 으쓱해 밀어냈다. 그러고는 제대로 봐 달라는 듯이 이탈리아를 콕 집어 다시 가리키는 것이었다. 요한은 뒤늦게 지도를 눈으로 담았다.
“가 보고 싶어요?”
“너랑 잘 어울리겠다고. 변덕스러운 데다 제멋대로…… 들어 봐. 「이탈리아 카프리치오」.”
요한은 수현을 자신이 선 방향으로 돌려세웠다. 끌어안고 옆으로 춤추듯 몇 걸음 옮기자, 수현이 졌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요한을 마주 안았다.
“왜 다들 이탈리아를 좋아했을까?”
음악의 세계에서는 이탈리아어가 제1 언어로 쓰였다. 용어가 거의 이탈리아어였기 때문에 베토벤조차도 악보는 이탈리아어로 썼던 것이다. 게다가 수많은 음악가들이 열정적인 이탈리아를 떠올리며 명곡들을 남겼다. 오전부터 틀어 놓은 차이콥스키의 「이탈리아 카프리치오」도 그중 하나였다.
그만큼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음악 시장인데도, 막상 유럽에 머문 지 한참인 수현은 이탈리아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요한은 수현을 커다란 세계 지도 앞에 도로 세워 두고 오디오 방향으로 향했다. 수현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다리가 쭉 뻗은 그는 앞모습만큼 뒷모습도 굉장히 근사했다. 가끔은 그의 늘씬한 뒷모습만 보고도 설렜다.
‘갈 데까지 갔군.’
수현은 픽 웃었다.
“오페라 좋아해요?”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본고장이자 성지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흔히 오페라 하면 떠올리는 오페라 A, B, C는 「아이다」, 「라 보엠」, 「카르멘」 따위였다. 그중 「아이다」의 작곡가 베르디와 「라 보엠」의 작곡가 푸치니는 전부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수현도 한국의 학부 시절 수업 시간에 「아이다」나 「라 보엠」 같은 것들을 가끔 시청했다. 특히 「라 보엠」은 보헤미안이란 의미의 제목처럼, 특정 직업이 없는 예술가 초년생들이 극의 주인공이어서 교수들이 여유 시간에 즐겨 틀어 주었던 것이다.
“좋아하지.”
그는 이제 수현이 어떤 대상을 좋아한다고 말해도 일순 표정이 차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수현은 전보다 쉽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다. 라벨을 쳐 주지 않을까 봐 좋아한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던 옛날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요한이 그 대상들보다 훨씬 더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엄밀히 말하면 좋아하고 있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수현이 차근차근, 정말이지 큰 인내심을 가지고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었다. 몹시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요한이 하나씩 알아듣기 시작하면 그만큼 보람 있는 일도 없었다.
“베로나에 같이 가 보면 어때요?”
“베로나? 베로나 오페라 축제 열리는 그 베로나? 넌 사람 많은 데 싫어하지 않아?”
“싫어하지 않아요.”
“그래, 다만 좋아하지 않을 뿐.”
이제 요한의 이런 대답은 익숙했다. 그가 할 말을 빼앗아 대신한 수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베로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만나 사랑에 빠졌던 도시였다. 또한 하계에 열리는 대규모 오페라 축제로도 유명했다. 매년 한여름이 되면 ‘아레나 디 베로나’라는 이름의 고대의 원형 경기장에서 이탈리아의 여러 오페라들이 매일 밤 9시마다 상연되는데, 이는 비단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일반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대중적인 축제였다. 수현도 늘 한 번쯤 가서 직접 그 화려한 야외 공연을 보고 싶기는 했었다.
그는 다시 요한을 등지고 이탈리아 지도 위에 별 모양으로 표시된 도시들을 눈으로 일일이 살폈다. 베로나 바로 옆에는 베네치아가 위치해 있었다. 그가 알기로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아주 많은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곳이었다. 특히 그들이 사랑하는, 「베르테르」를 창조해 낸 브람스 또한 이 베네치아를 좋아했다.
“베로나 바로 옆이 베네치아인 거 알아? 브람스가 생전에 이탈리아 여행을 자주 했는데, 베네치아를 특히 좋아했대.”
“보통은 베네치아에 간 여행객들이 베로나에 하루 정도 들러요. 그렇게 루트를 짜 달라고 할게요. 다른 덴 가 보고 싶은 데 없어요?”
“그 정도면 될 것 같아. 넌?”
“난 그냥 우리가 같이 있는 걸로 됐어요.”
안 그래도 그의 추계 연주회 일정 전에 가까운 곳으로 여행이라도 갈까 생각했던 차였다.
7년의 시간은 대체 어떻게 견뎌 냈던 건지 더는 일분일초라도 떨어져 있길 싫어하는 요한 때문에 공연 일정이 늘 차질을 빚고 있었다. 사흘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북미나 아시아 등의 먼 나라에는 좀처럼 가려고 하질 않아 최근 그의 공연은 유럽이 주였다. 그는 수현이 따라온다면 해결될 일이라 종종 말하지만 언제까지나 자신이 요한의 뒤만 졸졸 따라다닐 수는 없는 일이었다. 슬슬 서로를 분리해 내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럴 때 불안하지 않도록 반지를 나눠 꼈던 게 아닌가.
“여행에서 돌아오면 이번 하반기엔 미국이랑 캐나다에도 다녀와. 린이 올해는 꼭 거기서도 공연했으면 좋겠대.”
“…….”
“왜, 싫어?”
요한이 천천히 눈을 깜빡일 때마다 늘 차분하게 내리깔려 있던 긴 속눈썹이 위아래로 함께 움직였다. 간헐적으로 드러나는 눈동자가 수현을 올곧게 직시했다. 부드럽게 다물려 있는 입술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는데 꽤 선명하게 붉었다. 별 표정은 없었다.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수현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빤히 자신을 응시하는 눈을 정면에서 마주 보고 있자니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 주고 싶은 충동이 들어서, 수현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 해묵은 애착 장애를 극복해야 했다.
언젠가 이윤도 선생에게 넌지시 물었을 때, 자신의 판단에 그가 억제형 애착 장애를 앓고 있는 것 같다는 대답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 유년기에 부모님과의 잘못된 애착 관계가 형성되어 양육자인 수현에게 왜곡된 애착 행동을 보이게 됐을 것이라는 논조였다. 그리고 미약하지만 반사회적 인격 장애의 기질 역시 보이고 있으니 검사를 통해 정확한 진단을 받아 보라고 권했다. 그때 그가 들어 준 몇몇 아동들의 사례는 꼭 작고 어린 요한들 같았다.
어쨌든 유전적 요인으로 결정되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와 달리 애착 장애는 후천적 요인으로 인한 질병이니 치료가 가능했다. 이 부분은 함께 노력해 볼 여지가 있었다.
“요한, 괴테도 이탈리아를 많이 좋아했대. 너랑 같이 가 보고 싶어.”
요즘 그들은 다시 사이좋게 괴테를 읽기 시작했다. 잠시 억누르고 쉬었던 애정을 다시 꺼냈다고 표현하는 쪽이 정확하리라. 이제 괴테의 책은 수현의 책장 정 가운데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꽂혀 있었다. 수현이 괴테 이야기를 꺼내자 그제야 요한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같이 여행 가 줄 테니까 멀리 가서 리사이틀 하고 와라?”
“불안해하지 말고 다녀와도 돼. 나 여기 있을 거거든. 심지어 매일같이 너만 기다리면서.”
“…….”
“돌아오는 날 내가 현관문 열어 줄게.”
요한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래서 수현이 자신의 목소리로 침묵을 메꿨다.
“괴테가 이탈리아 생각하면서 지은 유명한 시도 있지 않았나?”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 나라를.”
“맞다, 그거!”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라는 글에 등장하는 시였다. 이 시는 너무나 아름다웠던 나머지 많은 음악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베토벤이나 리스트, 슈베르트까지 이 시를 놓고 저마다 가곡을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이 원작 소설로 만든 오페라 「미뇽」에서도 이 시는 등장했다. 주인공 소녀 미뇽은 맑은 플루트 소리를 배경 삼아 이 시를 노래한다.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 나라를.]
수현은 땅을 발로 밟아 보기도 전에 이탈리아에 매료될 것 같았다. 요한에게서 돌아선 그는 작심한 듯 지도의 위를 손바닥으로 탁, 짚었다.
“좋아, 8월엔 베로나에 가서 오페라를 보자. 「미뇽」도 프로그램에 있어?”
“그건 오페라 규모가 작아서 베로나에선 취급 안 해요.”
“아, 거긴 웅장하고 유명한 것만 한댔나? 그럼 「아이다」는 어때? 나 그거 오페라 중에 제일 좋아하는데.”
“우수현 씨는 주인공이 죽는 걸 좋아하는군요. 가슴속에 아직 화가 많네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베르테르도, 「아이다」의 아이다도 끝내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그것들을 자신이 좋아하는 건 특별히 꼬여서라기보단 희극보단 비극이 가슴에 더 오래 남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수현은 미간을 구겼다.
“우연이야.”
“통계라고 하죠.”
동시에 요한이 음악을 재생했다. 괴테의 시를 노래한 오페라 「미뇽」의 한 부분이었다. 매끄러운 메조소프라노의 음성으로 아름다운 아리아가 너른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은근히 놀려 오는 그에게 한마디 덧붙이려던 수현은 픽 웃고 말았다. 기다리고 있겠으니 다녀오라는 자신의 말에 대한 긍정적 화답이기 때문이었다.
* * *
베네치아의 마르코 폴로 공항에 도착한 두 사람을, 클라시스가 보낸 수행원이 마중 나왔다. 그러나 요한은 그에게서 차 키만 건네받곤 고스란히 돌려보냈다. 단둘이 있는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직접 운전할 요량인 것 같았다. 수현은 좀처럼 손을 아끼지 않는 그가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딱히 도울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살면서 자의로 해외에 나온 일이 많지 않았던 자신은 국제 운전면허를 취득하지 않았던 데다가 독일은 자격 조건도 과정도 너무 까다로운 바람에 애초에 엄두를 못 냈던 것이다.
“차 키 이리 줘요.”
차 키를 빼앗아 쥐고 있던 수현이 고개를 젓자, 그가 내놓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의 커다란 손은 움직임이 늘 우아했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반짝 빛났다. 운전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피아니스트의 손에 늘 반지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됐다. 수현은 몇 번이나 차라리 목에 거는 편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물론 그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계속 여기서 시간 낭비할까요?”
“어떤 피아니스트가 운전하고 손에 액세서리 하냐고, 멍청아.”
요한이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면 아예 말이 안 통했다. 수현은 깊은 한숨을 토해 내며 차 키를 도로 건넸다. 요한이 차의 문을 열어 주려 옆으로 이동하자 보란 듯이 직접 조수석의 문을 열고 올라탔다. 언제든지 연주를 관둬도 상관없다는 그의 초연한 태도가 가끔은 수현을 상처 입혔다. 삶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개체가 아직도 자신뿐이라는 건 그의 마음속 상처 또한 여전하다는 얘기처럼 들렸다.
직접 벨트까지 야무지게 동여맨 수현이 요한이 탑승하길 기다리며 잔소리를 더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한국에 있는 아버지였다.
탁, 그사이 문을 닫고 탄 요한이 수현을 응시했다.
“어쩐 일이세요?”
[그냥. 생각나서 걸어 봤다.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잘 지내고 싶은데 요한이 말을 안 들어요.”
수현이 아버지에게 잘못을 이르듯 푸념하자 지켜보던 그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시동을 걸고 부드럽게 차를 운전하는 동안 수현은 창밖을 내다보며 아버지와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눴다. 어머니가 정기 검진을 받는 동안 문득 생각이 나서 걸어 봤다는 것이었다. 워낙 살갑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던 터라, 통화는 금세 끝났다. 수현은 문득 요한의 친아버지에 관한 일이 궁금해졌다.
“왜, 예전에 신부님이 친아버지 찾았다고 그러지 않았었나?”
“그랬었죠.”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때 그의 친부는 어린 아들을 맡지 못하겠다고 했다던 것 같았다. 곰곰이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요한의 옆모습은 윤곽이 무척 뚜렷했다. 입가에 웃음기가 전혀 없으니 차갑고 사나워 보였다. 똑같은 얼굴인데도 표정 하나만으로 조금 전 자신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선뜻 생각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원망한 적 없어?”
“없어요. 사실 그때 난 제발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빌고 있었거든. 오히려 다행이었죠.”
“날 다시 못 볼까 봐?”
요한은 그냥 웃기만 했다. 그제야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매단 평소의 그처럼 보였다. 실은 그때의 수현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친아버지라는 사람이 요한을 데리고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때 우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까 새삼스럽게 과거의 시간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네가 그때 그 아이였다는 걸 알면 그 아저씬 죽을 때까지 후회하겠지?”
“이미 죽었어요. 그것도 꽤 오래 전에.”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요한은 한 번도 그런 내색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내색은커녕 친부에 관해 10여 년간 일언반구도 없었던 것이다. 약간 섭섭했다. 그러다가 혹시 또 자신이 불행을 부르는 아이였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수현이 말을 꺼낸 것을 내심 후회하며 그를 쳐다봤다. 다시금 미소가 사라진 그의 서늘한 옆얼굴만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난 어쩌면 그 사람이 내 친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지가 확실했다면 엄마가 어떻게든 찾아내서 날 떠넘기지 않았을까요. 마찬가지로 그 사람도 내가 자기 아들이란 확신은 없었을 거고…….”
“…….”
“그래서 그런가. 죽었단 얘길 들었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거든요. 솔직히 지금까지 잊고 있었어요.”
“필요하면 날 아빠라고 불러도 돼. 네가 꼭 필요하다면……. 좀 징그럽긴 하지만…….”
덤덤하게 털어놓던 요한은 문득 수현을 돌아봤다. 그러고는 미간을 확 구겼다. 지금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은 색채가 선명해서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꺼림칙해하고 있었다. 금세 영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이 운전에만 집중하는 것이었다.
사랑한다는 가장 어려운 말마저도 매일 거침없이 하는 그는 막상 수현 쪽에서 이런 이상하고 간지러운 얘기를 꺼내면 곤란해했다. 수현은 그가 이렇게 의외의 면을 보일 때마다 정말 즐거웠다. 어차피 우린 이렇게 될 거였는데……. 그동안 낭비한 시간들이 아까웠다. 기분이 좋아진 수현은 뒤늦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요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넌 웃는 게 참 예쁘다.”
그를 관찰하던 수현은 무심코 순수하게 감탄했다.
“알아요, 아빠.”
“진짜 미쳤나 봐!”
이번엔 수현이 진저리치자, 요한은 손가락으로 핸들을 툭툭 건드리며 재미있어했다.
* * *
여장을 푼 베네치아의 호텔에서 목적지인 베로나까지는 차로 한 시간가량 걸리는 가까운 거리였다. 9시 공연이라, 베네치아 주변부는커녕 화려한 호텔 곳곳을 구경할 틈도 없이 시간이 빠듯했다. 호텔 직원에게 짐만 맡기고 그대로 서쪽의 베로나로 향한 그들은 오후 7시쯤 아레나 디 베로나가 있는 브라 광장 근방에 도착했다.
지중해의 한여름 날씨는 무척 뜨거웠다. 다만 습도가 높지는 않아서 불쾌함은 덜했다. 원형 경기장이 바로 보이는 브라 광장의 한 카페테리아에 자리를 잡고 앉은 두 사람은 간단한 저녁 식사와 함께 맥주를 마셨다. 8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주변은 노을이 지기도 전인 오후처럼 환했다. 요한이 자신도 맥주를 마시겠다는 양 새까만 흑맥주 병을 가져가기에 수현이 그의 팔뚝을 툭 때렸다.
“마시게? 그럼 우리 기차 타고 가야 돼.”
“…….”
“넌 이거 마셔.”
그렇게 말하면서 콜라 잔을 앞에 놓아주는데도 요한은 굳이 맥주병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수현이 줄곧 입을 댔던 자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깜짝 놀란 수현은 헛기침했다.
그는 다행히도 맥주를 마시는 일은 순순히 포기했다. 새벽녘이 다 되어서 기차를 타고 불편하게 돌아가는 상황보단 낫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목적을 달성한 그가 수현에게 다시 병을 내밀자, 수현은 미지근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한번 그의 입술이 닿았던 곳이라고 생각하자 괜히 의식하게 됐다.
테라스 의자에 기다랗게 몸을 걸치고 앉아 있는 그는 이상하게 눈에 띄었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는 대규모 관광지라 안일하게 생각했던 게 문제였다. 얼굴에 뭔가 바르거나 걸치는 것을 귀찮아하는 그에게 억지로 선글라스를 씌워 놨는데도 불구하고 이따금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생겨났다. 거의 집에만 갇혀 있는 편이라 잊고 있었는데, 전 유럽에 요한을 알아보는 사람이 생각보다 꽤 있었던 것이다. 다만 승요한이 지금 이곳에 있을 리가 없다고 긴가민가하는 상태라 가까이 접근은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막상 그는 아무렇지 않은데 수현만 조금씩 불편해지던 차였다. 이대로 거의 3만 명 가까이 수용이 가능한 저 거대한 공연장에 들어가서 탈 없이 오페라를 관람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피어났다.
한참 편하게 앉아 있던 요한은 자세를 고쳐 턱을 괴고 앉았다. 그건 마치 수현을 본격적으로 빤히 쳐다보겠다는 의사처럼 보였다. 시선을 느낀 수현은 머쓱하게 맥주만 꿀떡꿀떡 삼켰다. 그럴 때마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모습을 요한이 무척 집중해서 지켜봤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턱을 괸 채 자신을 지켜보기만 하는데 왜 머리부터 발끝까지 민감해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왜 또 눈으로 벗기는데?”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울대뼈가 진짜 섹시해요.”
“변태 같은 소리 하지 마.”
“깨물어 봐도 돼요?”
그가 불쑥 자신을 향해 몸을 기울이자, 수현은 누군가 볼세라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훅 뺐다. 그러자 요한이 수현의 턱을 붙잡았다.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남자끼리 이런 짓을 하면 승요한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시선 집중을 받기 십상이다. 애써 고개를 돌리던 그는 반대편 테이블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한 외국인을 발견했다.
아직도 유럽인들을 구분하는 데엔 서툴지만 완고한 느낌이 드는 게 묘하게 독일 사람 같았다. 목에 커다란 카메라를 매고 있어서 마음에 걸렸다. 소극적으로 저항하던 수현은 요한의 손을 탁, 쳐 냈다.
“들어가자. 공연 시간 다 됐어.”
수현이 아레나의 입장표를 챙기던 바로 그때, 귓가에서 가벼운 감촉이 느껴졌다. 수현은 재빨리 귀를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그러자 요한이 선글라스 너머로 눈을 맞추더니, 이번엔 수현의 목울대에 키스했다. 누가 봤을까 겁이 난 수현이 요한의 상체를 마구 때렸다.
그는 재미있다는 양 수현을 쳐다보다가 얼굴에 뭔가를 덧씌우고 있다는 게 불편하다는 양 선글라스를 결국 벗었다. 수현은 황급히 그를 억지로 일으켰다. 그러는 동안 카메라를 맨 남자와 두 번째로 눈이 마주쳐서 이번엔 가볍게 묵례한 뒤 그곳을 겨우 빠져나왔다.
* * *
주세페 베르디의 「아이다」는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힐 만큼 유명한 오페라였다. 규모도 워낙 크고 웅장한 전쟁 이야기라서, 야외 오페라로 적격이었다. 유니폼을 입은 직원에게 가장 중앙 좌석 레드석으로 안내받은 두 사람은 뒤편의 원형 경기장 전체 좌석을 한 번 쭉 둘러봤다. 사람들이 자리마다 거의 자리를 채우고 있어 하나의 개미 군단처럼 보였다. 공연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이렇게 큰데 소리가 저 끝까지 다 들릴까?”
“애초에 저기까지 전부 들리게 설계했을 거예요.”
몸을 반쯤 틀어 뒤를 쳐다보고 있던 수현이 정자세로 돌아앉았다. 금세 어둠이 내려앉았다. 공연 시작 전 들어올 때 받았던 초로 2만 명 가까이 되는 관객들이 일제히 불을 밝혔다. 무대에서 보면 장관일 듯했다. 오페라의 단장인 듯 보이는 남자가 관객에게 인사하는 모습이 무대 옆 스크린을 통해 보였다. 공연은 금세 시작됐다.
무대 위의 「아이다」는 화려했다. 관능적인 음악들이 원형 경기장 안을 촘촘히 수놓았다. 1막이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됐다. 좌석이 워낙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움직임이 불편했는데도, 그런 것은 까맣게 잊을 만큼 빠져들어서 집중했다. 제1막의 막이 내리자 쉬는 시간이 잠시 주어졌다.
“윽……. 일 났네.”
지나다니는 상인에게 맥주를 구입한 수현이 그것을 마시려다가 쏟고 말았다. 바지가 축축이 젖어 들자 찝찝해진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보지 마. 원래 주변 지저분하고 이거저거 잘 흘리는 거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내가 어떻게 봤는데?”
“너 매번 짓는 표정!”
“그러니까 그게 뭔데.”
“그걸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해?”
얼굴을 확 붉힌 수현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연신 바지춤을 닦는 손길이 분주했다.
“수습이 안 된다. 화장실 다녀올게.”
“같이 가요.”
“혼자 갈래. 오늘 너 이상하게 눈에 띄더라. 이 밤에 선글라스 쓰는 것도 웃기고…….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여기 있어.”
단호하게 거절한 그는 요한이 뭔가 대처하기도 전에 재빨리 걸어 나갔다. 가만히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요한은 편안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그는 몰랐다. 그저 수현이 쑥스러워하기에 ‘아, 내가 그를 사랑스럽게 쳐다봤구나’ 하고 짐작할 따름이었다. 아마 그의 말로 미루어 보아 자신은 그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곳의 화려한 공연이 수현에게는 취향에 맞는 모양이지만 사실 요한은 들어서던 순간부터 줄곧 지루했다. 수현의 얼굴만 쳐다보기에도 모자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게 내키지가 않았다. 다만 그가 즐거워하고 있으니 참고 견딜 뿐이었다.
맥주를 전부 쏟은 그를 위해 한 잔을 더 주문한 요한은, 잠자코 기다렸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새로운 막이 오를 때가 되자 커다란 징 소리가 들렸다. 주변 사람들은 거의 제자리를 찾아 들어와 앉아 있었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수현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여기 있으라고 말했으니까, 요한은 일단 기다렸다. 그러나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록 수현은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그는 2막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좌석은 원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가 일어서자 당연히 시선이 집중됐다. 그는 빠르게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설상가상으로 조금씩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세차게 내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랑비로도 금세 옷은 젖는다. 우산이 없는 수현이 감기에 걸리면 어쩌나 걱정이었다.
불안이 끝없이 팽창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손끝까지 다 저린 기분은 정말이지 오랜만이다. 요한은 자신이 지금 마치 뿌연 연기로 가득한 아편굴의 한가운데에 두 발을 의지하고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조물주는 여전히 나를 좆같이 싫어해.
제기랄, 메스꺼움이 몰려왔다.
그러나 그는 최선을…… 아니, 죽을힘을 다해 버텼다. 그렇게 발을 내디뎠다. 수현을 찾아야만 했으니까.
경기장에서 빠져나간 그는 들어왔던 길로 되돌아 나갔다. 허겁지겁 진행 요원들 사이를 헤치고 밖으로 나가자, 멀리 입구 근처에서 곤란해하고 있는 수현이 희미하게 보였다.
저기에.
그가 있다.
“요한?”
요한은 그대로 뛰어가 어리둥절해하는 수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당황한 수현이 진행 요원에게 됐다는 듯 손을 내저어 보였다.
“왜 나왔어?”
“…….”
“쉬는 시간 끝나면 입장이 제한된대. 그래서 다시 들어갈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었어.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었는데……. 요한?”
그는 미약하게 떨고 있었다. 어찌나 꽉 끌어안고 있는지 숨이 막힐 정도였다. 꼭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워낙 유명한 관광지라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수현은 저들이 보고 있으니 이 손을 놓아 달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그는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면 된다는 아주 기본적인 해결 방법도 생각해 내지 못했을 정도로 당황한 것 같았다. 자신을 깊이 가질수록 더 불안해하는 그를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 같기도 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수현은 천천히 그를 마주 안았다.
“너 언제 다 클래.”
뒤늦게 누군가 출입구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수현은 무심코 시선을 던졌다가 깜짝 놀랐다. 아까 전 카페테리아에서 봤던 외국인이었다. 숨을 고르면서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수현을 빈틈없이 껴안은 요한을 발견하곤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수현과 눈이 마주쳤는데, 고개를 젓다가 돌아서는 것이었다.
분명히 요한을 보고 뒤쫓아 나온 모습이었다. 저렇게 거대한 경기장에서 요한을 우연히 보고 따라 나왔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아마 아까 전 카페테리아에서부터 알게 모르게 쫓고 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우리 그냥 돌아가요.”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아직 공연은 반도 넘게 남아 있었으나, 핑계 좋게도 비가 조금씩 내렸다. 아레나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베네치아라는 이 도시의 이름은 라틴어로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계속해서 오라.
위대한 예술가들은 전부 그 이름에 이끌려서 자꾸만 이곳으로 발걸음 했던 게 아닐까.
“계속해서 오라…….”
목욕 가운 차림으로 침대 위에 엎드린 수현은 종이에 의미 없는 낙서를 끼적였다. 그의 곁에 앉은 요한이 아직 젖어 있는 머리를 수건으로 말려 주었다.
그들은 현재 호텔 아만 카날 그란데 베니스에 묵고 있었다. 카날 그란데 스위트룸의 전망은 그 어떤 호텔보다 훌륭했다. 창문 밖으로 베네치아의 정원과 음울한 대운하가 바로 보였다. 실내 또한 무척 고급스러웠다. 침실 높은 천장에 있는 프레스코화, 욕실에 있는 샹들리에…….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은 객실 곳곳이 사치스러울 정도의 화려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호화로운 곳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요한의 기분은 내내 저조했다. 아까 전 베로나에서 있었던 30여 분간의 악몽 때문이었다.
“이거 봐.”
수현은 요한을 향해 종이에 쓴 낙서를 내보였다. 귀퉁이에 이렇게 적어 둔 것이었다.
“모양이 꼭 하트 같지 않아?”
“…….”
“네가 만든 작품 번호 2번, 우리가 같이 만든 거였잖아. 그것도 실은 하트인 셈이지.”
요한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수현을 옆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그가 보여 주는 종이를 잠시 직시했다.
다행히 그때 태워 버렸던 악보는 요한이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어서 종이 위에 되살릴 수 있었다. 다만 아직까지도 대외적으로 S 2번은 사장된 것으로 알렸다. 이미 영상이 퍼진 바람에 알음알음 따라 치는 커버 연주까지는 제한이 불가능했다. 그래도 요한의 의지가 워낙 완강해서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은 아직까진 없었다. 수현이 꺼낸 말들을 잠자코 곱씹던 요한은 그대로 상체를 쓰러뜨려 그의 등에 기댔다.
“아무 음이나 이어 짓기. 또 할래?”
그간 억눌려 있던 과거를 조금씩 복구해 나가기로 결정한 두 사람은, 아주 예전에 하던 놀이들을 종종 함께했다. 수현이 한쪽 어깨를 슥 들어 올려 요한에게 의사를 물었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많이 가라앉아 있다는 게 닿아 있는 피부로 절실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 기분 풀어 주려고 노력할 필요 없어요.”
“…….”
“같이 있어 주는 걸로도 충분해요.”
그는 충분하다 말하지만, 자신은 도통 편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그도 말한 적이 있듯이 사람의 기본 기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누구라도 우아하게 물어뜯을 수 있는, 뱀 같은 인간이다. 인간이 구성하고 있는 먹이사슬 피라미드의 최상위 계급 포식자는 아마 요한과 같은 사람들일 것이었다. 그의 마음의 병이 낫기 전까진 줄곧 그러리라. 그런 그가 자신 때문에 이렇게 약해진 모습을 보이면, 그를 사랑하는 수현은 필연적으로 동요하게 됐다.
수현은 돌아누웠다. 요한이 그를 돕기 위해 상체를 살짝 들어 올렸다. 마주 보고 겹쳐 누운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 없이 잠시간 시간을 흘려보냈다.
“사랑한다고 말해 주세요.”
일단 수현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는 것으로 상황을 회피했다. 그러나 요한이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버텼다. 부드럽게 뺨을 어루만지던 커다란 손이 천천히 귓불을 매만지고, 이윽고 목선을 따라 내려와 그의 목욕 가운 앞섶을 손가락 끝으로 들췄다. 기다란 검지가 수현의 쇄골부터 유두를 향해 내려가 빙글, 한 바퀴 굴리고는 아래로, 또 아래로 수직 낙하했다. 푹신한 목욕 가운 안으로 모습을 감춘 그의 손이 수현의 것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아, 음…….”
아득해진 수현은 자꾸만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가 부끄러워 요한에게 키스하려고 했다. 그러나 단박에 거부당했다. 울컥한 수현이 그를 확 밀어냈다. 요한은 순순히 물러났다. 수현이 자신의 허리춤에 걸터앉자, 어마어마한 크기의 침대에 편안히 누워 그런 그를 올려다보았다. 수현의 뒤로 천장의 프레스코화가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순간 수현이 그림 속의 인물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손에 쥐어서 양감을 확인해야 그가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요한이 벌어진 가운 사이로 보이는 수현의 허벅지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뺨에 손찌검이 날아왔다.
한참을 요한의 허리 위에 앉은 채로 바르작거리던 수현이 시트 위에 구겨져 있는 종이를 들어 맞지 않은 반대편 뺨에 있는 힘껏 내려쳤다. 그 바람에 철썩, 하고 또 한 번 커다란 마찰음이 났다. 졸지에 양 뺨을 가격당한 요한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이런…… 별 거지 같은 짓까지 해 가면서 너를 달래 보려고…….”
시트 위에 떨어진 종이를 힐끗 살피자, 귀퉁이에 그가 작게 그린 ‘S2’가 들어왔다. 그런 뒤에 수현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자니 급박하게 사출감이 몰려왔다. 수현이 신경질을 내면서 조금씩 몸을 움직일 때마다 끈이 풀어진 목욕 가운의 벌어진 사이로 가슴팍이 훤히 들여다보였던 것이다. 드러난 살결이 유난히 색스러워서, 그는 픽 웃었다.
“웃어? 너 고개 어떻게 할지 이번엔 생각 잘하는 게 좋을 거야.”
수현이 입술을 내려 키스했다. 이번엔 요한도 피하지 않았다. 매끄럽게 빨려 들어온 혀가 어설프게 입 속을 휘젓기에, 잠자코 받아 주었다. 금세 숨이 가빠진 수현이 입술을 떼어 냈다. 요한은 입었다기보단 걸쳤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수현의 목욕 가운을 손끝으로 살짝 들어 내리고 목 주변에 꼼꼼히 입을 맞췄다. 동시에 그를 침대에 도로 눕히자 의외로 순순하게 굴었다. 요한은 그의 두 다리 사이에 무릎을 끼워 놓고 귓가에 속삭였다.
“방금 내가 생각을 되게 잘했는데, 상은 뭘 줄 거지?”
치밀어 오르는 욕망으로 눈가가 붉어진 요한이 수현의 온몸을 빤히 내려다봤다. 수현은 무릎을 비스듬히 세워 이미 발기한 요한의 성기를 툭 쳤다. 딱딱해진 질감이 고스란히 맨 무릎뼈에 전달됐다.
“아, 이런 건 한 3년쯤 뒤에 해 주려고 했는데.”
픽 웃음을 터트린 수현은 아슬아슬하게 온몸에 걸쳐져 있는 목욕 가운을 스스로 확 젖혔다.
“네가 귀엽게 굴면 내가 무슨 상을 주는지, 잘 봐.”
수현은 요한의 복부 위로 말을 타듯 올라탔다. 그러면서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있는 힘껏 조이자 그가 손을 뻗어 엉덩이를 쓸어내리는 행위로 화답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열락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점점 말이 없어지고, 뜨거운 숨결만이 남았다.
한참 그의 위에서 바르작거리던 수현은 그의 판판한 배 위에 엉덩이를 문지르다 천천히 아래쪽으로 이동했다. 골반을 꽉 짓누르고, 천천히 그 위에서 자세를 고쳐 걸터앉자 단단해진 그의 것이 바로 느껴졌다.
빛 아래 알몸 차림으로 있는 것은 언제나 부끄럽다. 혼자 있을 때조차도 그럴진대, 요한이 물기가 찬 눈길로 지켜보고 있는 게 창피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수현은 그 핑계로 요한의 눈을 가렸다. 그러자 다리 사이의 그가 가볍게 숨을 삼켜 목구멍으로 빨아들였다. 천천히 수현이 손바닥을 떼어 냈을 때, 그의 풍성한 속눈썹은 차분히 내리감겨 있었다.
“속눈썹이 너무 섹시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수현이 진담 섞인 농담을 하자 요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기특하게 감은 눈은 뜨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 말로 설명하지 않고 행동으로만 표현해도 그는 종종 이쪽의 의사를 알아듣는다. 이렇게, 느리지만 꾸준히 교집합을 늘려 가면 된다. 앞으로 같은 곳에서 서식할 수 있도록 서로의 규칙들을 배워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있었고, 요한은 그 어떤 일보다도 협조적이었다. 피아노를 치는 것보다도 말이다.
문득 그가 너무나 대견해진 수현이 그의 속눈썹 위에 한 번, 눈 밑에 진 그늘에 한번, 가볍게 키스했다.
얌전히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학성이 단전에서부터 피어올라 아랫배를 간지럽혔다. 수현은 요한의 손목을 넥타이나 수갑 따위로 묶고 싶은 충동을 아주 잠깐 느꼈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봐도 마땅한 게 없어 관뒀다. 대신 협탁의 오일 뚜껑을 열었다.
쭉 짜낸 오일을 요한의 성기에 꼼꼼히 바른 그는 자신의 안으로도 기름기 가득한 중지를 밀어 넣었다.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읏…….”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요한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바람에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수현과 정면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괴로워하고 있는 수현을 빤히 올려다봤다. 그러다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수현의 목울대에 한동안 시선을 고정했다.
뭐랄까, 그는 가끔 수현을 볼 때 마치 신기한 피조물을 난생처음 보는 양 굴었다. 지금처럼.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목 부근을 뚫어져라 보기에, 수현의 뺨이 달아올랐다. 그 사이 요한의 것이 한계까지 크기를 키워 수현의 둔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눈을 못 마주치겠어.’
수천, 수만 번은 본 얼굴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직시하는 눈빛을 감당하기가 녹록지 않았다. 시선을 교묘하게 피하던 수현은 아까 전 마시다 만 와인에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요한의 탄탄한 상반신에 찰랑거리는 붉은빛 액체를 모두 쏟았다.
그는 상체를 깊게 수그려 요한의 귓불을 빨았다. 뒤이어 유려한 턱선, 울대뼈, 쇄골, 그리고 유실에 이를 때까지 순차적으로 느긋하게 살결을 애무했다. 입 안에서 향긋한 포도주의 향이 물씬 감돌았다. 마침내 당도한 목표 점에서 멈춘 그는 치아 사이에 유실을 물고 가볍게 깨물었다. 그러자 요한이 수현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 손짓이 너무 애틋해서 역시 손은 묶지 않기를 잘한 것 같다고, 그는 막연히 생각했다.
로마네 콩티를 따르는 수현의 긴 순례는 다시금 이어졌다. 요한의 판판한 복부에 잠시 머물러 있던 그가 딱딱하게 부풀어 오른 요한의 것과 정면에서 시선을 마주했다. 그가 기둥의 선단에 키스하고는, 다시 요한의 골반 위에 자세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두 사람의 중심부를 한데 잡고 비볐다. 허벅지 뒷부분에 와인이 조금 묻어나 축축해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몇 번 뒹굴다 보면 정액이든 땀이든 그들을 흠씬 젖게 만들 터였다.
“아……!”
이번엔 요한의 손이 내부 통로의 확장을 도왔다.
자신의 것보다 훨씬 기다란 요한의 손가락이 침입하자, 수현은 그제야 안도감이 들었다. 통증을 수반하긴 했지만 놀랍게도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매 순간.
그가 너무 좋다.
“아! 아…… 음, 오늘 왜 이러지, 으. 요한, 나 벌써 좋아.”
밀부에 손가락 개수가 늘어날 때마다 헐떡임이 심해지더니, 급기야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보이지 않는 포승줄로 묶이기라도 한 양 행동에 제약을 받고 있던 요한은 짜증스레 미간을 구겼다.
“이건 상이 아니라 고문이야. 더 건드리지 마.”
“어라, 너 입술 벌어질 때 되게 야하구나. 빨고 싶다.”
“하, 씨발, 작정했어?”
“와, 욕하니까 쌀 것 같아.”
“젠장. 돌았군.”
“너무 비싼 술 마셔서 나 취한 거 아닐까.”
“반 잔 겨우 차 있었어. 네가 자초한 거야.”
결국 버티지 못한 요한이 벌떡 상체를 일으켜 자세를 뒤집었다. ‘상’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암묵적으로 수현이 리드하는 모양새였는데, 결국은 위치마저 다시 원상태로 전복됐다.
이윽고 뜨끈한 체온이 맞부딪쳤다. 두 사람의 위의 입과 아래 입이 다급하게 겹쳐졌다. 뜨거운 키스로 혀의 온기를 나누며 요한은 수현의 안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단번에 꿰뚫듯이 삽입하는 순간 수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잠시간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자신의 안에 파고든 요한의 일부를 음미하던 그는 자연스럽게 두 다리를 요한의 허리에 감쌌다.
여전히, 눈을 마주치기는 쉽지 않다. 오늘따라 유난히 그랬다. 왜일까.
양손을 뻗은 수현이 안아 달라는 듯 보채자, 요한은 별수 없다는 양 그의 등을 당겨 안았다. 접합부가 조금 더 깊게 연결됐다. 요한은 수현을 상체에 매단 채로 자신의 것을 욱여넣었다. 그가 키스를 원하면 키스를, 포옹을 원하면 포옹을 선사하며 완벽하게 그의 전신을, 어쩌면 전부를 가졌다.
“아! 아! 아! 하, 읏!”
오늘따라 더 쉽게 흥분된다던 건 빈말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수현은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사정했다. 벌써 지친 그를 어르고 달래 가며 요한도 뒤늦게 정을 토했다.
두 사람은 꽉 끌어안은 채로, 커다란 침대 위에 겹쳐 누워 있었다. 연결된 접합부가 여전히 쓰리고 뜨거웠다. 콘돔도 없이 안에서 사정한 덕분에 좁은 내부가 질척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그저 지금 이대로 머무르는 것을 택했다.
금세 도로 발기한 요한이 그의 뺨을 쥐고 입을 맞추려는데, 수현이 침대 위 천장의 화려한 프레스코화를 가리키며 난데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의아해진 요한도 머리 위를 살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날개 달린 천사들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요한.”
“…….”
“여기 천국인가 보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를 향한 선명한 욕망을 느낀 요한은 수현에게 깊숙이 키스했다.
* * *
며칠 뒤 베츨라어로 돌아온 두 사람은 다음 날 오전까지 수마와 전쟁을 치렀다. 그러고는 요한은 독주회 준비로, 수현은 직접 만든 곡을 실연해 줄 뮌헨 필 오케스트라와의 미팅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바빴다. 평일을 꼬박 그렇게 보내고 겨우 토요일 오후가 되자 편안하게 앉아 얼굴을 마주 볼 시간이 생겼다.
베로나에서 「아이다」를 보다 말았던 일이 줄곧 마음에 걸렸던 수현은 집에서 함께 「미뇽」의 DVD를 보는 게 어떻겠느냐 제안했다. 요한은 당연히 수락했다.
오페라 「미뇽」은 결국 사랑 이야기였다. 그들이 사랑하는 괴테는 늘 사랑을 다룬다. 어쩌면 그렇기에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리스트도 이탈리아 오페라 편곡 많이 했대. 너도 그때 「오텔로」 편곡하지 않았나? 「미뇽」은 별로야?”
3막이 모두 끝난 뒤, 화면을 정지한 수현이 요한을 돌아봤다. 대답이 없기에 의아하다 싶었다. 그는 죽은 듯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수현은 무심코 그의 코 밑에 손끝을 댔다. 당연한 일이지만 규칙적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이미 그의 잠든 모습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는데도……. 때론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하긴 자신은 하루 날 잡고 미팅한 뒤 돌아오면 끝이지만 그는 매일 베를린과 이곳을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피곤하기도 할 것이었다.
“잘 자네. 오페라 다 끝났는데 커튼콜도 없고.”
그는 아주 훌륭한 연주자지만 적어도 좋은 관객은 아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수현은 그의 차분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었다. 사르륵, 흘러내리는 촉감이 언제나처럼 기분 좋았다. 수현은 침대 헤드에 편히 기대앉고, 요한의 고개를 조금 돌려 자신의 허벅지 위에 눕혔다. ‘불안정기’ 동안 불면증이 재발했다던 그는 최근 들어선 아주 푹 잠들었다. 잠을 설치는 그가 꽤 신경 쓰였었는데, 잘된 일이었다.
인터넷 창을 켠 수현은 오페라 「아이다」에 관한 기사를 검색하다가 한 웹 블로그에 접속했다. 그러고는 깜짝 놀랐다. 화면 상단에 있는 사진 때문에 기시감이 일었다. 그 남자였다. 카메라를 목에 매고 있던 완고한 인상의 외국인. 베로나에서 요한을 쫓아왔던 남자 말이다.
그가 올린 글들을 쭉 살펴보니 아무래도 그는 아마추어 클래식 평론가인 모양이었다. 아주 많은 공연의 후기들이 있었는데, 수현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가장 최근의 글이자, 오페라 「아이다」의 후기였다.
내용은 평범했다. 공연 자체는 열광의 도가니였으나, 2막에 들어서자 비가 쏟아져서 관객들이 많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사뭇 아쉬웠다는 것이었다. 다만 가장 하단에 적은 짧은 덧붙임 말이 인상적이었다.
[p.s 여담이지만 나는 이 공연에서 우연히 승요한과 그의 연인을 보았다. 피아노를 지배하는 그의 건반 통제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S와 함께 있는 그는 의외로 스스로의 내면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듯 보였다. 마치 뒤늦게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사춘기 남자아이 같았던 것이다.]
예리하군. 수현을 사랑하고 있는 요한은 아직 미성년이었다. 그는 너무 더뎌서, 어쩌면 영원히 미성년에 머무르게 될지도 모른다.
노트북을 닫은 수현은 잠시 정지했던 DVD 화면을 다시 재생해 앞으로 한참 돌렸다. 오페라 「미뇽」에서 미뇽이 아름다운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었다. 수현은 그것을 몇 번이나 돌려 보고, 또 돌려 보았다.
미뇽은 노래했다.
[Connais-tu le pays(그대는 아는가, 그 나라를)?]
수현의 머릿속에 미뇽이 묘사하는 풍경들이 절로 떠올랐다. 오렌지 나무에서 열매가 알알이 익어 가고, 푸른 하늘에서 선선한 바람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그런 남쪽 나라가 말이다. 익히 아는 멜로디를 귀에 담으며, 수현은 요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예민한 그가 잠결에 마주 안아 오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했다.
[Hélas! que ne puis-je te suivre(아아! 내가 왜 당신을 따라가지 않겠어요).]
수현은 들려오는 노랫말을 곰곰이 곱씹으며 요한의 귀에 속삭였다.
“잘 자, 요한.”
그는 잠든 연인의 이마에 입 맞췄다.
이클립스 eBook 출간 도서 목록
신영미디어(www.sybook.co.kr)에서 출간된 유료 eBook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렬하게 낮과 밤을 지배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유료 eBook으로 만나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