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염 소나타(외전)
하드보일드 멜로
1.
태양이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살갗마저 녹일 듯이 포악한 혹서기였다.
그 때문에 이번 여름 공기는 유난히 숨이 막혔다. 올여름이 유난히 무더운 건지, 아니면 자신이 다른 나라의 극단적이지 않은 계절에 너무 길든 탓인지 몇 걸음만 내디뎌도 호흡이 가빴다. 그나마 습도가 높지 않은 게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원래 우리나라 여름이 이렇게 더웠나?
이렇게까지는 아닌 것 같았는데.
요한의 작업실 대문 문턱을 넘어서던 수현은 제 위를 내리쬐는 햇볕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위해 손차양으로 눈썹 위를 가렸다. 그제야 겨우 하늘을 힐끗 올려다볼 수 있었다. 마치 이 땅 위가 무법지대 같았다. 지글거리는 태양이 지상을 괴롭히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듯했다.
이런 계절이 오면 요한은 꼭 빨래처럼 늘어졌다. 에어컨을 최저 온도로 맞춰 놓고 몇 시간, 어쩌면 몇 날 며칠이고 서늘한 공간에 기절한 듯 누워 머무르는 것이다. 자신이 잠깐 작업실을 비운 사이 요한이 어떤 형태로 이 시간을 견뎌 내고 있을지가 절로 상상이 갔다.
이윽고 현관의 손잡이를 잡아 보니 따끈따끈했다. 잠금장치를 풀고 안으로 입성하자 차가운 공기가 수현의 달구어진 뺨을 스쳐 지나갔다. 꼭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마치 문을 열면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디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수현은 요한을 찾아 삼만 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꼭 동화 속 주인공 앨리스가 들어간 이상한 나라의 안을 누비는 듯했다. 어쩌면 이곳은 영화 「나니아 연대기」에서 문을 열면 보이는 설원이 펼쳐진 세계일 수도 있었다.
“요한.”
그는 역시나 기절한 듯 누워 있었다. 문제는 그가 몸을 뉘고 있는 곳이 피아노나 침대 따위의 익숙한 환경이 아니라 딱딱하기 짝이 없는 맨바닥이라는 점이다.
“요한, 일어나. 왜 이런 데서 자.”
일으켜 주려고 했는데, 반대로 그에게 휩쓸리고 말았다. 요한이 비몽사몽간에 수현의 손을 잡아끌어 제 옆에 눕혔기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모로 누워 요한을 쳐다보고 있자니, 그가 자연스럽게 수현의 전신을 끌어안아 왔다.
“추워…….”
잠투정처럼 하는 말을 듣고 수현은 픽 웃었다.
“온도를 이렇게 해 놓고 있으니까 당연히 몸이 얼지.”
“어디 다녀와요?”
“엄마 꽃집. 나 오랜만에 한국 왔으니까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갔다 왔어.”
“왜 이제 와요.”
“너 또 이러고 있을 것 같아서 예정보다 빨리 일어난 거야. 그냥 같이 갈 걸 그랬나?”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화를 이어 가는 것마저 귀찮은 모양이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요한이 이렇게 늘어져 있을 것 같아서 계속 눈에 밟힌 바람에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돌아왔던 차였다. 요한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가볍게 웃어 보인 수현이 주방 쪽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뭐 좀 먹었어? 너 또 아무것도 입에 안 댔지.”
대답은커녕 도리어 품에 파고드는 요한 때문에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현재 요한은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얼마 후 있을 국내 리사이틀의 준비를 할 겸, 알게 모르게 향수병을 미약하게 앓고 있던 수현의 지친 마음을 달랠 겸 일정보다 보름 앞당겨 조용히 들어왔던 것이다. 이번에 길게 체류한 뒤 독일로 돌아가면 푹푹 찌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을 듯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돼. 독일은 여기보다 시원하기도 하고.”
“여름 싫어.”
“여름은 너 좋아할걸?”
“아무도 나 안 좋아해요.”
“무슨 소리야. 내가 너 좋아하잖아.”
마치 잠투정처럼 혼잣말인 듯 대화인 듯 음성을 이어 가던 요한이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요한의 뚫어질 듯한 눈길이 수현의 입술 위를 향했다. 그 신호를 기꺼이 알아채 준 수현이 그의 턱을 붙잡았다. 가볍게 입술을 맞물리자 그가 고개를 기울여 혀를 밀어 넣었다. 입 안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어 온 살덩이의 촉감은 꽤 미지근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래서 정확한 온도를 섣불리 가늠할 수가 없었다.
입 안의 치열한 세계가 어떤 기온을 품고 있든 상관없이, 맞닿은 요한의 피부 위는 서늘했다. 차가운 바닥에서 요한과 누워 있던 수현은 담요라도 챙겨 와야겠다고 느끼곤 어설프게 상체를 일으켰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제게서 빠져나가려는 기척을 느낀 요한이 꼭 갈퀴로 쓸어 담듯 수현의 온몸을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밧줄로 포박하는 것처럼 제 안에 가둬 두었다. 그는 마치 아직 뜨거운 열기가 남아 있는 수현의 몸과 제 것을 부딪치면서 공평한 체온으로 맞춰 가려는 것만 같았다.
수현은 그에게 보조를 맞춰 아픈 아이 달래는 양 등을 쓸어내렸다. 요한의 옷자락 아래 감춰진 탄탄한 맨살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그것마저 차가웠다.
그래도 자신을 향해 뛰는 그의 심장 정도는 뜨거우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춥지 않아?”
“더운 것보단 나아요.”
“일 이야기 해도 돼?”
“싫어.”
“진짜 하면 안 돼?”
수현이 요한을 향해 애원을 담아 설득하려 들자 그도 여러 번 거절 의사를 표명하지는 못했다. 다만 목울대 위에 제 이마를 문지르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을 취했다. 그런 그를 마주 안은 채로, 수현이 덤덤히 목소리를 이었다.
“이번 국내 리사이틀 앙코르 곡 뭐 할 거야? 오케스트라에서 정해지면 알려 달래.”
역시나 듣기 싫은 듯했다. 자세를 정반대로 고쳐 등지고 누운 요한은, 수현의 손을 잡아끌어 제 복부를 뒤에서 감싸게 하고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물러설 수 없는 수현이 고개를 쭉 빼서 요한의 귓가에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공연 끝난 다음엔 바로 출국해야 하니까…… 그 전에 우리 어디 놀러 가자.”
“안 가요.”
아이처럼 솔직하게 구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의 귓불을 깨물자 요한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러고도 얌전히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귓전에 울리는 수현의 목소리만큼은 싫지 않은 모양이다.
“부모님 모시고 가자는 걸까 봐 그러지? 아냐, 나랑 둘이 가는 거야. 사기 충전 차원에서.”
“…….”
“요한?”
“듣기 좋아. 계속 소리 내 봐.”
본인의 유려한 연주를 매일같이 듣고, 또 듣곤 하는 요한이지만 정작 그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수현의 낮고 다정한 음성이었다. 그의 말에 짐작 가는 바가 있어 흠칫한 수현이 손을 아래로 끌어내려 앞섶을 더듬었다. 성기가 살짝 곤두서 있는 형태가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요한의 등에 얼굴을 묻고 웃음을 터트린 수현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려고 했다. 다만 이번에도 요한이 움직이는 게 한 박자가 더 빨라 무산됐다.
갑작스럽게 달려든 그가 수현을 바닥에 정자세로 눕히고는 고개를 기울여 키스했다.
“읏……!”
게걸스러운 혀가 입술을 핥더니 틈새를 가르고 진입해 와 질서 정연한 내부를 망가뜨려 놓으려 들었다. 치아가 부딪치고, 혀끝이 겨우 만났다. 급박하게 엉켜든 살덩이의 온도는 이제 확실히 뜨겁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여태까지 늘어져 있던 사람의 아귀힘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어깨를 더듬는 손이 거칠고 추진력이 넘쳐서 수현은 당황했다. 그러나 벅차지만 최선을 다해 그에게 보조를 맞추려 시도하니, 요한도 점점 여유를 되찾고 부드러운 손길로 수현의 몸을 어루만졌다.
“으응…….”
살짝 떨어진 입술 위로 수현의 탄성이 흩어졌다. 그가 이 소리에 더욱 자극받은 듯 다시금 입술을 부딪쳤다. 수현은 벌벌 떨리는 왼손으로 그의 등을 끌어안고, 호흡을 맞춰 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꼭 어린아이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듯이 느리지만 신중했다.
마침내 마른 상체를 더듬던 요한의 손이 천천히 팔뚝을 타고 내려왔다. 수현의 팔꿈치를 문지르다가 서서히 손목으로 내려와 왼손을 허공으로 끌어당겼다. 그가 후들거리는 수현의 손목 두드러진 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눈을 마주쳐 왔다.
그는 여전히 압박하듯 수현의 위에 버티고 있었다. 마치 군림하는 군주처럼 내려다보는 압도적인 시선이었으나, 사랑이 가득했다. 사람들이 이걸 알까.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가 어려운 수현이 벅찬 얼굴로 요한의 턱에 입을 맞췄다.
“요한, 하고 싶어?”
그는 끄덕였다.
“일을 해야 놀지. 리사이틀 앙코르 곡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요한이 졌다는 양 허탈하게 내뱉었다.
“「네 손을 위한 환상곡」. D904.”
“D904……. 슈베르트구나? 듀엣 하게? 누구랑?”
“솔로용 편곡을 직접 새로 해 볼까 싶어요.”
“앙코르 곡으로 너무 길지 않아? 15분 넘을 텐데. 좀 자를 데 없나?”
“4악장 전부 칠까 해요.”
태도는 생각보다 단호했다. 요한이 본인의 안에서 미리 준비한 그림이 있는 것이다. 수현은 순간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어 입술을 달싹였다. 망설이다 어렵사리 그에게 물었다.
“요한, 편곡 내가 해 줄까?”
순간 움찔한 요한은 대답 대신 수현의 팔을 들어 올리고 셔츠를 탈의시키려 들었다.
“윽…… 하…… 이 온도에 벗기는 거 좀 양심 없는 거 아냐? 실내 온도 좀 높이면 안 돼? 아니면 침대로…….”
“괜찮아. 형 몸이 금방 뜨거워질 거야.”
바지 버클을 만지작거리던 요한이 수현의 바지와 속옷까지 한 번에 확, 벗겼다.
* * *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환상곡」은 짐작보다 훨씬 어려운 곡이었다.
멜로디 자체는 듀엣 곡이긴 했지만 그렇게 복잡하진 않았다. 화음을 살리고 솔로 편곡을 해도 테크니션인 요한이 연주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요한이 이 곡을 선택한 의도가 수현에게 다소 불투명하다는 점이었다.
슈베르트가 사망하기 몇 달 전에 작곡된 이 음악은 초연 후 애제자이자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캐롤라인 에스타르하치에게 헌정됐다. 사랑 고백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 이 음악에 대한 대중적 해석인 듯했고, 수현도 여태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얼핏 보기에는 단순한 세레나데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수현은 까다로운 요한이 굳이 이 음악을 앙코르 곡으로 선정한 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게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편곡을 해야 했는데 요한이 도통 입을 열려 들지를 않았다.
그 때문에 요 며칠 사이 그는 이 악보를 달달 외울 정도로 뚫어져라 보고만 있을 뿐 악보 위에 음표 하나 그려 넣지 못하고 있는 답보 상태였다.
괜히 편곡을 해 주겠다고 그랬나.
수현이 텅 빈 오선지 위를 보며 심란해하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침실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수현은 그 여름을 닮은 시원한 멜로디에 귀를 기울였다.
“작은 배?”
드뷔시의 「작은 모음곡」 중 ‘작은 배’라는 부제를 지닌 한 곡이었다. 푸른 물 위에 떠 있는 아담하고 가벼운 배의 모양이 요한이 건반을 두드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연상됐다.
침대 위에 엎드린 수현은 그걸 귀로 듣는 호사를 누리면서, 펜 끄트머리를 잘근잘근 씹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수기로 직접 악보를 그려 가면서 편곡을 한다고 하면 열 중 아홉 명은 놀라워했으나, 요한을 닮아 가는 모양인지 수현도 직접 펜대를 굴려 그림 그리듯 음표들을 적어 나가는 이 과정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발랄한 선율이 잠시간 지속됐다. 그러다가 아쉽게도 금세 음악이 끊겼다. 이윽고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들려 고개를 들어 보니 제 앞에 요한이 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가 침대에 걸터앉아 수현을 등 뒤에서 포개듯이 감쌌다.
그는 수현이 입으로 물고 있는 펜을 제 입으로 빼앗아 땅으로 던지더니, 뺨에 입 맞췄다. 그사이 그의 시선도 수현이 보고 있던 악보를 향한 듯했다.
“힌트 좀 줘.”
“무슨 힌트? 난 다 줬어요.”
“왜 하필 이 곡이야? 말해 줘. 악장한테 악보 줘야 돼. 네가 계속 늑장부려서 이제 진짜 시간 얼마 없어.”
“슈베르트가 이 음악을 캐롤라인이랑 같이 연주한 적이 있었을까요? 난 이게 오로지 짝사랑 실패에 관한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부드러운 수현의 눈매가 악보로 가 닿았다. 대체로 잔잔한 멜로디와 강한 트릴이 3악장까지 엎치락뒤치락하며 이어지다가, 마지막 4악장에 이르러서야 폭발적인 감성을 토해 내는 듯한 열정적인 화음이 등장한다. 그러고는 언제 누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다시 처음의 잔잔한 상태로 되돌아와, 다소 허무하게 전 악장이 끝이 났다.
수현이 요한을 향해 돌아누웠다. 그러자 그가 늘씬한 콧잔등에 제 입술을 문질렀다.
“넌 실패하지 않았어.”
언제쯤이 되어야 그가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는다’ 같은 소리를 하면서 자신을 떠보려 들지 않게 될는지 모르겠다. 교활한 그는 끊임없이 수현의 애정을 확인하려 들었다. 아직까지도 자신이 손아귀에 완전히 잡히지 않는다고 느껴 마음이 불안한 것이다.
연주회를 통해 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앙코르곡은 물론이고 실제로 리사이틀의 프로그램 전체를 수현을 위한 곡들로 채우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 구애에 어떻게 답을 해 줘야 좋을까 열심히 고민을 해 봐도 뚜렷한 답은 안 나왔다. 평소에도 수현은 최대한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정확한 평균을 내기란 어렵겠지만 평범한 커플들에 비해 훨씬 관계의 횟수도 잦았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하고, 제 몸의 일부를 점령하도록 내주어도 탐욕스러운 요한에게는 모자란 게 분명했다.
감성의 온도가 남들보다 낮은 그로선 완전한 안도라는 개념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노력하고 싶었다. 달싹거리던 수현의 입술이 야릇하게 벌어졌다.
“사랑해. 알지?”
“…….”
“슈베르트의 짝사랑이 반드시 성공으로 끝나도록 근사하게 편곡해 줄게.”
두 팔을 수현의 몸 양옆으로 뻗어 제 몸을 지탱하고 있던 요한이, 그대로 둑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러고는 수현의 몸을 가볍게 짓누른 채로 목울대를 빨았다. 그는 언어로 응답하지 않았으나, 수현에게는 그의 대답이 전이됐다. 자연스럽게 손을 뻗은 수현은 그의 뒤통수를 감싼 풍성한 머리카락에 손을 넣어 요한을 어루만졌다.
“우리 어디로 가요?”
“어디?”
“놀러 가자면서요.”
“아…… 맞아. 그랬다. 어디가 좋아? 가 보고 싶은 데 있어?”
“우리가 할 때 삐걱거리지 않을 만큼 침대가 크고 튼튼한 곳.”
한 해에 수차례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면서 연주 여행을 하지만 사실 요한은 어느 나라에 가서도 숙소에 틀어박혀 있는 것을 즐기는 성향이었다. 화가들이나 음악가들이 괜히 여행을 다니는 게 아니다. 수현은 그를 거쳐 간 스승들로부터 듣는 것뿐만 아니라 보는 것들이 감성을 일깨운다고 배웠다. 그걸 매사 심드렁해하는 요한에게도 가르쳐 주고 싶었다.
“틀어박혀서 책만 보지 말고.”
“악보도 봐요. 피아노도 치고.”
“난 데이트가 하고 싶어.”
수현이 그러자 요한이 제 몸을 일으켰다. 아주 가까운 곳에 서로의 깊은 눈동자가 있었다.
“한 번 더 말해 봐.”
“난, 데이트가 하고 싶어.”
“데이트.”
그가 따라 해 보라는 듯 선창해서, 수현은 몹시 진지한 표정으로 따라 했다.
“데이트.”
“입술이 왜 이렇게 예뻐요? 이렇게 벌어질 때. 연꽃 같아요.”
이제 그의 찬사는 대화 중간에 없으면 허전할 정도로 일상이 돼서, 수현도 민망해하거나 낯설어하지 않게 됐다. 픽 웃음을 터트리는 수현의 입 속으로 요한의 길쭉한 손가락이 침투했다. 그는 검지를 밀어 넣고 여린입천장과 혀, 그리고 고른 치아까지 꼼꼼하게 애무했다.
“아…….”
수현의 입이 더욱 크게 벌어졌다. 본능적으로 열기가 가득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눈꺼풀을 무겁게 내리감았다가 다시 뜨자, 요한이 제 손가락을 입 속에서 꺼내어 그 위에 질척하게 묻은 타액을 빨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드러났다. 마르는 게 아깝다는 양 그가 혀로 손가락을 핥는 모습이 유독 외설적으로 보였다.
“너 지금 진짜 호색한 같아.”
“벌어지는 게 예뻐서.”
“언젠 목울대가 섹시하다며.”
그는 그 말 또한 맞는다는 양 뚫어져라 수현을 직시했다.
“봐도 봐도 좋아?”
신중한 표정으로 끄덕이는 모양새가 귀여워 보였다. 수현은 자신이 요한에게 완벽하게 졌다는 걸 이런 순간들이 도래할 때마다 끊임없이 실감했다. 안아 달라는 듯 요한을 향해 손을 뻗자, 그가 상체를 들어 올려 제 품에 으스러져라 안았다. 매 순간, 가슴이 벅찼다.
“우리 갈 곳 내가 정해도 돼?”
그가 또 끄덕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디에 가는지는 요한에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그는 누구와 함께 있는지가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아마 자신이 지옥으로 가자고 하며 손을 내민들 요한은 무조건 수현의 뒤를 쫓아오리라.
원하는 답을 구한 수현은 지그시 눈을 감고 그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 *
낮에 밖을 다니는 건 요한이 단칼에 거절했다. 그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자신이 서 있으면 꼭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물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이 무더운 계절을 싫어하면서도 막상 외출할 때의 요한은 긴소매 차림을 했다. 사람들이 알아볼까 싶어서 캡 모자는 수현이 씌웠다.
아직 그가 한국에 미리 들어와 있다는 것마저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중요한 공연을 앞두고 쓸데없는 외출을 했다는 인상을 심어 줄 수 있어 그의 소속사인 「클라시스」 측에서 단단히 단속을 했던 터라, 더운 날씨였지만 모자는 필요악이었다.
미리 자리를 예약했던 덕에 벤치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야 겨우 모자를 벗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요한의 옆모습은, 밤처럼 아름다웠다. 홀린 듯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수현에게로 무심코 고개를 돌린 요한의 눈길이 닿았다. 당황한 수현이 엉겁결에 물었다.
“많이 더워?”
“아뇨, 바람 불어서 생각보다 시원해요.”
그들은 서울 일각에서 개최된 한 연꽃 축제의 야간 행사를 관람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앉은 맞은편 큰 연못에 은은한 달빛이 비쳤다. 그 위를 떠다니는 밝은색의 풍성한 연꽃들이 아름다운 광경을 자아냈다.
꽃잎이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으로 된 연꽃들이 연못 위를 그윽하게 덮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눈이 황홀한데 금상첨화로 선선한 바람마저 불었다. 입추가 지난 마당이라 늦은 시간에는 뜨거운 한낮과 달리 너그러운 자연이 약간의 여유를 보여 주는 듯했다.
“원래 이런 거 좋아해요?”
“당연히 좋지. 예쁘잖아.”
“연꽃? 원래 좋아했었나?”
“아니, 나도 이렇게 많은 연꽃은 태어나서 처음 봐. 꽃 종류는 엄마가 도매에서 떼어다 파는 거나 보고 알지…… 네가 연꽃 타령해서 갑자기 보고 싶어졌던 거야. 생각보다 훨씬 근사하다. 나오니까 진짜 좋지 않아?”
“좋아요. 좋은 거 보면서 같이 있을 수 있어서. 그런데 나만 좋은 걸까 봐 걱정돼요.”
“또 그런다. 나도 좋아.”
“연꽃?”
“너랑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계속 똑같은 거 물어봐도 돼. 나도 몇 번이고 말해 줄 거니까.”
그가 픽 웃음을 터트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얼마든지 반복해서 확인 사살을 시켜 주겠다고 하니 도리어 요한의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질문이 멈췄다.
그렇게 고즈넉한 풍경을 앞두고 두 사람의 시간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그사이 수현의 관심은 제 앞에 있는 연못, 그리고 그 위를 장식하고 있는 수십 송이의 연꽃에게로 돌아갔는데, 요한의 것은 아직 제자리였다. 뚫어질 듯한 시선이 뺨을 간지럽혔다.
“꽃 봐. 나 말고. 난 매일 보는 거잖아.”
“우린 못 본 기간이 같이 지낸 기간만큼 길어서, 계속 보고만 있어도 시간이 아까워요.”
“나도 그래. 그래도 꽃들 봐 줘. 난 네가 가을에도 겨울에도 볼 수 있지만 얘들은 이때 아니면 못 보는 거거든. 꽃이 7, 8월에 피고 져. 아시아에서만 주로 소비하기도 하고.”
“…….”
“요한. 연꽃 꽃말이 뭔 줄 알아?”
“뭐더라…… 순결? 그렇게 들었던 기억이 나요.”
“응, 한국에선. 그런데 중국에선 ‘당신을 생각하느라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라는 의미래.”
그제야 요한의 눈길이 연꽃에게도 자리를 내주었다. 생각이 많아진 두 사람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양 침묵을 지켰다. 눅눅한 공기 위에 바람이 스쳐 지나가 체감 온도를 낮췄다.
일렁이는 물 위를 직시하고 있자니, 어딘가에서부터 아득한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출발하기 전 얼핏 들은 정보로는 이 축제 기간 중 주말마다 늦은 밤에 야외 음악제가 열린다는 듯했다. 멀리 인파들이 있는 곳이 그 현장인 모양이었다.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흥겨워 보였다.
자연스럽게 선율에 귀 기울이고 있던 수현이 문득 물었다.
“이 음악회 주제가 좀 모호하지 않아?”
전통 음악과 대중가요, 재즈 따위의 음악들이 중구난방으로 이어졌다. 특별히 콘셉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원자를 받은 뒤 주최 측은 자리만 제공한다고 가정하면 말이 됐다. 향기로운 연꽃과 아마추어들의 연주라는 불협화음에 흥미를 느낀 수현이 박자를 맞춰 손을 까딱거리고 있는데, 요한이 제 상체를 급작스럽게 기울였다.
정자세로 앉아 있는 수현의 앞에 요한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그가 그대로 고개를 틀고 깊은 키스를 하려고 해서, 수현이 제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엄정한 재판관처럼 눈을 마주치곤 안 된다는 양 눈짓을 보냈다.
“왜?”
“여긴 밖이니까.”
“주변에 아무도 없잖아요.”
“지금은 그렇지. 그런데 또 이렇게 우리가 밖에서 데이트를 할 때 네가 키스가 하고 싶어지면? 너 지금 내가 허락하면 그때도 또 할 거지?”
“…….”
“이건 우리 사이에 신설된 또 하나의 규칙이야. 오늘부터 머릿속에 새겨 넣어. 한국에 와 있을 때는 외부에서 절대 키스하지 않는다.”
“한국 싫어.”
“너 점점 애 같아진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요?”
그가 은근하게 수현의 셔츠 자락을 매만졌다. 그 위를 야멸치게 쳐 내면서 설핏 웃음을 흘린 수현은 끝내 그 물음에 응답하지 않았다. 사실 답하지 않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를 감당하고 책임지는 데는 이골이 나 있었다. 요한은 여름을 싫어하지만 수현의 등쌀을 이기지 못해 외출을 감행했고, 한국이 싫다고 말하지만 자신이 오자고 설득하면 결국 또 들어줄 터다.
그들 사이에 적막이 흐른 틈을 비집고 대중적인 클래식 곡이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잠시 뒤, 기교가 넘치는 피아노 연주로 방점을 찍고 난 뒤 잇대어진 박수 소리가 요란했다.
“귀가 썩는 것 같아.”
향기로운 연꽃과 아마추어들의 연주라는 불협화음에 흥미를 느낀 수현과 달리 요한은 정반대의 감상을 토로했다. 눈썹을 힐긋 들어 올리는 모양새가 불쾌함을 표출하고 있었다.
“연주 더는 없나 봐. 음악 소리 더 안 들려. 음악회 끝난 것 같다.”
동시에 그가 불쑥 고개를 돌렸다.
“같이 한 곡 쳐 주세요.”
“나랑? 갑자기?”
“「네 손을 위한 환상곡」 어때요. 매일 악보 봤잖아요.”
보는 것과 직접 연주하는 것에는 언제나 간극이 있었다. 머릿속 상상으로는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일도 실제 현실에 부딪쳐 보면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수현이 좀 망설이는 듯하자, 요한이 손을 붙잡아 일으키며 설득했다.
“사람들은 전부 비켜 달라고 하고. 둘이서만.”
이토록 분명한 의지를 지니고 요한이 요구하면, 수현은 약해졌다. 하는 수 없이 그에게 이끌려 음악회가 막 열리고 난 장소로 접근했다. 공연이 끝난 뒤라 관객들은 거의 사라지고, 악기들을 정리하는 사람들만이 남아 있었다. 아마 이 연꽃 축제의 관계자일 듯했다.
요한이 말간 얼굴을 드러내자 그들이 죄다 알아보고 흠칫 놀랐다. 걸어오는 길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그는 수현이 손수 씌워 주었던 모자를 벤치 어딘가에 내팽개치고 온 것 같았다. 수현을 무대 근처에 세워 둔 요한이 관계자들에게 다가갔다. 의사를 교환하는 뒷모습만으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잘 알 것 같았다. 난감해하는 시선이 눈길을 돌리다가 하얀색 피아노에 제 시선을 고정했다.
자신도 모르게 무대 위로 올라간 수현은 건반을 부드럽게 눌러 봤다. 기대보다는 조율이 잘되어 있었다. 무심결에 요한을 좇듯 고개를 돌리자, 그도 이쪽을 직시하고 있어 눈이 마주쳤다. 관계자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비켜 주고 있었다. 역시나 요한이 그들에게 잠시 자리를 물려 달라고 요청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두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사라지고 난 뒤, 요한이 무대로 올라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수현이 자연스럽게 그의 옆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네 손을 위한 환상곡」은 한 대의 피아노로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할 수 있는 곡이었다.
“나 악보가 좀 가물가물해.”
“마음껏 틀려도 돼요. 내가 맞출 거니까.”
무대 한가운데에 오롯이 남겨진 그들은 천천히 건반에 손을 올렸다.
이윽고 잔잔한 멜로디로 위대한 곡의 1악장이 시작됐다.
알레그로 몰토 모데라토. 음정들은 매우 빠르게 활력을 이끌어 내다가 과도하지 않은 빠르기로 변환됐다.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소리들이 조화롭게 엉켜들었다. 악기를 함께 연주하는 것은 그들에게 교감이고, 겨우 이어 붙여진 관계의 확인이자 서로에 대한 사랑을 인지하는 일이었다. 요한은 그 과정을 통해 그나마 안심했고, 수현도 기꺼이 해 주고자 했다.
숨이 가빠졌다가 다시금 잦아드는 음악은 무더운 여름과 잘 어울렸다.
요한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최대치의 속도로 내달렸더니 몇 번이나 손이 엇나가고 음이 틀렸다. 그럼에도 요한은 부드럽게 보조를 맞추면서 수현을 뒤따랐다. 능숙하게 이어지는 음들이 풍성하게 반짝거렸다. 수현이 잘못 연주하는 부분마다 요한이 독특한 박자로 덧입혀서 꼭 전혀 다른 음악을 듣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자리를 비켜 주었던 사람들도 다시금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풀숲을 헤치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내는 바스락거리는 소음들이 화려한 음계에 뒤섞였다. 요한의 손에 아슬아슬하게 제 것이 스칠 때마다 수현은 입술을 질끈 감쳐물었다. 덜덜 떨리는 왼 손목을 겨우 지탱하면서 연주하는 수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네 손을 위한 환상곡」은 악장의 구분이 있으되 연주할 때는 막힘이 없이 넘어갔다.
클라이맥스인 4악장만을 남겨 두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슈베르트 아니야? 그런데 쟤 손목이 좀 이상한 거 같지 않아?”
“맞지? 승요한 왼쪽.”
“손목 병신 같은데 무슨 승요한이랑 같이 피아노를 친다고…… 악보 다 해치잖아.”
눈치를 보면서 조용히 감상하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도 난데없이 튀어나온 목소리를 향했다. 추측건대 아마 두 사람이 여기에서 연주하기 전에, 정식 음악회에서 공연을 했던 사람들 중 일부인 것 같았다. 워낙 가까이에 서 있던 터라 수현에게도 그 소리들이 들렸으나 무시했다. 다만 요한은 그러지 못하는 듯했고, 아마 실제로도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게 맞을 터다.
일순 일방적으로 연주를 그만둔 요한 때문에 수현의 손도 우뚝 멈췄다.
“요한, 나 괜찮아.”
그의 기운이 심상치가 않아서, 본능적으로 위기 의식을 느낀 수현은 일단 말리기부터 했다.
어느 공연장에나 무례한 관객은 있었다. 여태까지의 요한은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찬사도 혹평도 모두가 해당 공연을 감상한 자의 몫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도를 넘는 비난도 감수했다. 심지어 그를 두고 온갖 성적인 표현으로 누더기를 만들어도 무대응으로 응했다. 어쩌면 크게 관심이 없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하지만 수현을 향한 모욕만큼은 참을 수 없는 게 분명했다.
그는 벌떡 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수현이 요한을 붙잡으려고 했으나, 가까스로 뻗어 본 왼손은 이미 10여 분이 넘도록 피아노 연주를 하면서 많이 지친 나머지 힘없이 뚝 추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걸 본 요한의 얼굴이 더욱 차가워졌다. 사람들은 이 동요를 모른다. 그러나 그의 미세한 표정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수현만큼은 잘 알았다. 그는 지금 무척 화가 나 있었다.
뚜벅뚜벅. 무표정한 얼굴의 요한이 천천히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세 명의 남자가 모여 서 있었다. 그들은 요한이 자신들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한 나머지 무난하게 지속되고 있던 연주가 본인들이 함부로 입을 놀린 영향으로 인해 강제로 끝났다는 것은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신기한 생명체를 보듯이 요한을 주시하는 시선이 징그러울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승요한? 맞죠? 이번에 우리나라에서도 리사이틀 한다더니…….”
대꾸 없이 그들 세 사람을 싸늘하게 내려다본 요한은 제일 끝에 있는 남자를 향해 접근했다. 바로 앞에서 마주 서니 요한의 키가 훨씬 커서 수현이 있는 자리에선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 탓에 두 사람이 어떤 상태로 대치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뒤늦게나마 무대 아래로 내려가 말려 보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요한의 손이 공중으로 한껏 추켜올려졌다.
“요한! 안 돼!”
퍼억! 요한은 주먹에 있는 대로 힘을 실어 남자의 얼굴을 갈겨 버렸다.
“억……! 이 미친 새끼가!”
고통 섞인 고함을 친 남자는 비틀거리다가 잔디 위에 무참한 모습으로 쓰러졌다. 그 위에 올라탄 요한이 한 번 더 주먹을 난폭하게 내질렀다.
“안 돼, 손……! 제발!”
비명처럼 수현이 외쳤으나 그는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남자의 일행들이 뒤늦게 심각해진 상황을 파악하고 그들을 떼어 놓으려 했으나, 늘씬한 몸 어디에서 솟아 나온 괴력인지 요한이 전부 뿌리쳐서 두 남자마저 내동댕이쳤다.
이윽고 그는 수현을 향해 험한 말을 내뱉은 남자를 향해 더한 직접적 폭력으로 응답했다. 요한이 커다란 손이 남자의 턱을 강타했다. ‘뻐억!’ 하고 거친 마찰 음이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가로질러 사방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남자의 입가에 피가 흘렀다. 그러나 요한의 눈동자에는 동요라곤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침착하고 싸늘하게 남자를 힐난했다.
“말이란 원래 책임이 뒤따르지. 안 그래?”
그 순간,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요한의 눈빛이 일순 형형한 빛을 띠었다. 이윽고 그의 눈동자가 완전히 색을 잃었다.
그가 남자를 미친 듯이 난타하기 시작했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던 주위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