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전은 실패했다.
던전 부산물 분배에 불만을 가진 이상원이 자신의 팀원들을 이끌고 탈주했기 때문이었다.
이상원이 없다면 연합팀은 있으나 마나였다.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이상원이 빠져나가는 걸 알면서도 말리지 않은 연합팀도 연합팀이었지만, 이상원은 진짜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힘을 믿은 건지, 드래곤을 만만하게 본 건지, 짚을 짊어진 것도 모자라 기름까지 뒤집어쓴 상태로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다.
화염 저항을 믿고 뛰어든 모양인데, 상대는 S급 마수. 드래곤이었다.
그래, 뭐. 자기들끼리 죽일 자신이 있고, 드래곤 레어의 아이템이 욕심나서 탈주했으면 돌아오지를 말든가.
막상 마주치니까 덜컥 겁이 나서 도망쳤든, 자기들끼리 못하겠으니까 도움을 청하러 왔든 이유는 상관없었다. 드래곤을 잡으러 떠났던 이상원은 베이스캠프로 돌아왔고, 약이 잔뜩 오른 드래곤이 그 뒤를 쫓고 있었다.
그로 인해 불침번을 서고 있던 10인 부대 여섯팀이 전멸했고, 식량창고가 불타 소실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절망스러운 상황인데, 이상원이 드래곤의 앞발에 으깨지는 것과 동시에 무기 창고도 무너졌다.
베이스캠프를 모조리 태워버리고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드래곤은 씩씩거리며 생존자를 찾아 나섰다. 그 숨소리를 들으며 연우는 떨리는 손을 말아쥐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오늘을 위해 ‘책’을 몇 번이나 읽었고, 드래곤을 토벌하기 위해 온갖 작전을 짜냈다. 멀리 좌표를 설정한 연우는 크게 숨을 고르고 공간을 접었다. 드래곤을 죽일 자신은 없었지만, 도망 다닐 자신은 있었다. 토벌대가 돌아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게이트가 열리지 않는다면 이를 이상하게 여긴 센터가 후발대를 보낼 것이다.
문제는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거지.
드래곤이 돌아다니며 만들어 내는 진동이 조금 멀어지자 연우는 고개를 빼고 베이스캠프였던 곳을 살폈다. 예상보다 훨씬 처참한 광경이었다.
서로 조금씩만 양보하고 배려했다면 진작 드래곤을 토벌하고 귀환했을 터였다. 그렇게 센터로 복귀한 연우는 연화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잠이 들었겠지.
하지만 제대로 공략을 시작하기도 전에 부산물 분배 문제로 싸움이 일어났다. 그대로 연합팀은 흩어졌고, 이상원은 탈주했다가 죽었다. 덕분에 연우는 식량도, 무기도 없는 곳에서 드래곤을 피해 도망을 다니게 생겼다.
하여간 쓸모없는 놈.
혀를 찬 연우는 드래곤을 피할 곳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던전의 보스는 날개가 없는 사족형, 화염계 드래곤이었다. 물가가 없으니 높은 곳이 그나마 안전할 텐데…. 고개를 젖히고 던전을 살피던 연우의 눈에 동굴 벽을 따라 놓인 얼음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강차헌.”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연우는 벌떡 일어났다. 투명하지 않고 탁한 하늘색인 얼음 계단은 강차헌의 마나로 만들어진 게 분명했다.
그래. 강차헌이 안 들어왔을 리가 없다. 강차헌의 경력에 어떻게든 한 줄이라도 더 추가해보려 눈이 벌게진 게 센터장인데.
근데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를 모르겠다.
에스퍼가 마수를 사냥해 마석을 얻듯, 마수도 에스퍼를 공격해 마나 코어를 얻었다. S급 이능력자가 던전에 들어가면 그 마나를 느끼고 다른 던전에서 넘어올 정도로 마나 코어를 탐내는 마수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던전 공략은 빠르게 마수를 해치우고 게이트를 닫는, 치고 빠지는 형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상원도, 연합팀도 없는 지금 칠 수도 없고 빠질 수도 없었다.
하지만 강차헌이 던전에 남아있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강차헌은 공격계지만 방어가 가능한 멀티형이었고 무엇보다 책의 주인공이었다. 책에서 강차헌은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긴 하지만 결국 혼자서 드래곤을 토벌했었다.
…덤벼볼까?
솟아오른 얼음벽을 바라보던 연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강차헌은 미래가 보장되어있는 책의 주인공이고 드래곤을 토벌할 능력이 있는 S급 에스퍼였다. 그런 강차헌과 드래곤의 약점을 아는 연우가 손을 잡는다면…
후발대가 올 때까지 숨어서 버티는 것과 강차헌과 함께 드래곤을 토벌하는 선택지에서 고민하던 연우는 그대로 공간을 접었다.
사실 고민할 시간도 사치였다. 강차헌이 없다면 도망만 다녔겠지만, 강차헌이 함께 있다면 그를 노린 다른 던전에서 마수가 넘어오기 전에 드래곤을 죽이고 한시라도 빨리 던전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강차, 윽!”
“뭐야!?”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강차헌의 주먹이 날아왔다. 날아온 주먹을 피해 빠르게 공간을 접어 피하자마자 강차헌은 화살로 연우를 겨냥했다. 얼마나 긴장한 건지 눈앞에 있는 게 마수인지 사람인지 식별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살벌하게 빛나는 얼음 화살 앞에 선 연우는 침착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진정하세요. 대한 에스퍼 소속 한연우입니다.”
사납게 치켜 올라간 검은색 눈이 연우의 목에 걸린 사원증과 훈련복을 살피는 게 보였다.
“들어올 때 못 봤는데요.”
“보다시피 제가 C급이라서요.”
보통 높은 등급으로 이루어진 토벌대가 먼저 들어가 큼지막한 놈들을 죽이면서 앞서나가면, 낮은 등급으로 이루어진 공격대가 뒤쫓아가면서 잔챙이를 처리했다. 저쪽은 토벌대, 이쪽은 공격대였으니 마주칠 일이 없긴 했다.
익숙한 센터의 훈련복을 알아봤는지 차헌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 천천히 경계를 풀었다. 그를 붙잡은 연우가 미리 봐두었던 동굴로 이동했다.
공간 이동에 멀미를 느꼈는지 비틀거리는 차헌을 내려버려 둔 연우는 아래를 내려보았다. 차헌이 만든 얼음벽이 드래곤의 브레스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니, 말 좀 하고.”
“여기에 얼음벽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아까처럼요.”
그 말에 삐딱하게 서 있던 차헌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휘둘렀다. 얼음벽이 솟아오르는 걸 확인한 연우는 고개를 돌려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목을 치켜든 드래곤이 땅을 쿵, 쿵, 울리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드래곤이 지척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리던 연우는 대궁을 들어 올리는 차헌을 붙잡고, 다시 공간을 접었다. 사람 키보다 큰 가시가 박혀 있는 드래곤의 꼬리가 얼음벽을 박살 내는 걸 지켜보던 연우가 차헌에게 손짓했다.
“여기?”
“네? 아, 네.”
연우가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얼음벽이 솟아올랐다. 달려오는 드래곤을 지켜보던 차헌은 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공간을 이동하며 연우는 작게 감탄했다.
생각보다 협조적이네.
다른 S급처럼 구구절절 설명한 뒤에야 마지못해 이능을 사용할 줄 알았다. 아니면 이상원처럼 너를 못 믿겠으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며 어깃장을 놓으며 고집을 내세운다든가.
하지만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차헌은 연우의 작전을 이해한 듯 도망갈 타이밍을 잡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어쩌면 둘이서 드래곤을 잡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저기 보여요?”
브레스를 피해 공간을 접은 연우는 드래곤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검은 비늘로 덮인 목덜미에는 언뜻언뜻 황금빛으로 빛나는 비늘이 있었다.
“네.”
왼쪽 귀밑을 짚은 연우는 그대로 차헌을 올려봤다.
“저기가 드래곤의 약점이에요.”
“그런데요?”
어쩌라는 듯 대꾸한 차헌은 뭔가 깨달았는지 천천히 얼굴을 구겼다.
“미치셨는지? 저걸 지금 우리 둘이서 잡자고요?”
“네.”
연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차헌은 잡고 있던 연우의 손을 뿌리치며 속삭이듯 소리쳤다.
“그냥 도망만 다닐 생각 아니었어요? 저걸 어떻게 우리 둘이서,”
“드래곤을 자극할 생각이 아니라면 조용히 하고 마저 들어요. 드래곤은 역린을 보호하기 위해 왼쪽 앞발은 사용하지 않고 오른쪽 앞발로만 공격합니다. 최대한 왼쪽에 붙어서 공격하긴 할 건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꼬리가 길고 유연한데다 꼬리 뿔에는 신경독까지 묻어 있어서 항상 뒤를 경계해야 하고요. 그건 제가 할 테니 강차헌 에스퍼는 저기, 역린을 공격하면 됩니다.”
연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차헌은 입술을 말아 문 채로 드래곤을 노려봤다. 잠시 고민하던 차헌은 대궁을 집어 얼음 화살을 날렸다. 쐐액, 소리를 내며 날아간 화살은 드래곤이 앞발을 휘두르기도 전에 주변의 열기에 녹아내렸다.
차헌은 이것 보라는 듯 연우를 내려보았고, 연우는 달려오는 드래곤을 피해 차헌을 붙잡고 공간을 접었다.
“화살로는 절대 안 됩니다. 창이 제일 좋긴 한,”
“아까 무기 창고 박살 났어요.”
“저도 압니다. 그렇다고 앉아서 마수들이 몰려올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무슨 소리야. 어제 다 죽였잖아요. 저게 마지막 아니에요?”
아까부터 왜 계속 말을 끊지?
못마땅함을 담아 차헌을 바라보던 연우는 마지막 말에 쓰게 웃었다.
미래의 강차헌은 센터장이지만, 지금의 차헌은 A 구역에서 따돌림당하는 에스퍼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니 토벌대 뒤를 쫓는 내내 차헌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지.
드래곤을 피해 다시 한번 공간을 접은 연우는 던전 천장의 마나가 고여 일그러진 곳을 가리켰다.
각 던전은 분리된 곳이 아니었다. 이능력자들이 게이트를 통과하듯, 마수들은 던전을 통과할 수 있었다. 토벌이 시작되면 약한 마수들은 겁을 먹고 도망치지만, 호승심이 끓어 넘치는 마수들은 아니었다.
도망은 무슨, 되려 이쪽으로 넘어오는 경우도 왕왕 있어 예상하지 못한 마수를 마주치는 일도 잦았다.
따라서 연우 혼자서라면 도망 다니며 버틸 수 있지만, 차헌이 있다면 계획이 달라진다. S급을 노리는 마수들이 몰려오기 전에 빨리 드래곤을 죽여야 했다.
계속 도망만 다니면서 마나를 허비하느냐, 아니면 드래곤에게 덤벼라도 보고 죽느냐의 고민이다.
설명에 잠시 고민하던 차헌은 드래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쪽은 그러니까, 우리 둘이 저걸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네.”
단호한 대답에 연우를 가만히 내려보던 차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데요?”
“창이 필요해요.”
“아까 무기 창고 다 부서졌다고 말한 거 못 들었어요?”
“저도 봤다고 말했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있어봤자 소용도 없었을 거고요. 무기 창고에 보관하는 건 대부분 일반 무기라.”
“그럼,”
“창은 이제 강차헌 에스퍼가 만들어야죠.”
“…제가요?”
차헌은 자신을 가리키며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차헌의 손에 들린 얼음 화살을 눈짓했다.
“얼음 화살을 만들듯이 거창을 만드는 거예요.”
“제가요?”
그럼 내가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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