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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2화 (2/143)

2화

되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차헌이 제 손을 내려봤다. 뻗어 나온 손에서 창이 만들어지는가, 싶더니 곧 두 동강이 났다. 시무룩하게 쳐지는 어깨를 보는 연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이고 세상에.

A 구역 에스퍼들이 차헌의 능력을 견제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토벌대, 그러니까 이상원의 팀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정해져 있었다. 센터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토벌대에서 방출당하고 싶어 하는 에스퍼는 아무도 없었다. 새로운 토벌대를 만들려 해도 이상원은 새로운 토벌대가 만들어지는 걸 두고 보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기를 만드는 법도 제대로 안 알려줬다고?

동그래진 연우의 눈을 어떤 식으로 오해한 건지 귀가 붉어진 차헌은 등을 지고 돌아섰다.

“있어 봐요. 만들어볼 테니까.”

그러라고 대답한 연우는 드래곤의 동선을 살폈다. 잔뜩 몸을 낮춘 채 고개만 치켜든 채로 던전을 돌아다니는 드래곤의 뒤쪽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어?”

열기 때문에 만들어진 일렁거림이 아니었다. 회색에 가까운 은색. 방어막이었다.

“왜요?”

이상한 모양을 한 얼음덩어리를 쥐고 다가온 차헌은 연우의 시선이 닿은 곳을 살폈다.

“생존자가….”

중얼거린 차헌은 방어막과 떨어진 곳에 얼음을 집어 던졌다. 동굴 벽에 얼음이 꽂히는 것과 동시에 파편이 터졌다. 차헌은 얼음이 솟아오르는 곳으로 드래곤이 달려가는 걸 확인한 뒤 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응이 없자 뭐하냐는 듯 손끝을 흔들어 재촉하기까지 했다.

“안 가고 뭐 해요?”

“잠시만요.”

보조 가방을 열어 포션 개수를 확인한 연우는 한숨을 삼키며 차헌의 손을 잡았다. 차헌은 공간을 접자마자 달려가다 흡, 숨을 들이켜며 물러섰다.

방어막을 펼치고 있는 방어계 에스퍼 뒤로 처참한 몰골을 한 사람이 쓰러져있었다.

연우가 차헌을 제 뒤로 물리는 것과 동시에 방어계 에스퍼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리던 차헌과 달리 방어계는 안도하는 얼굴로 연우를 반겼다.

“살아계셨군요.”

“서유진 에스퍼.”

같은 구역은 아니지만, 토벌을 준비하며 몇 번 마주쳤던 공동구역 에스퍼였다. 고개를 꾸벅인 서유진은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제 뒤의 사람을 가리켰다.

“혹시 안전한 곳이 있습니까? 도민영 가이드가 너무 많이….”

도민영이라면… A급 가이드다.

연우는 보조 가방에서 치료 포션을 꺼내 건넸다. 보급용이지만 아무 조치도 안 한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포션의 뚜껑을 제거한 서유진이 병을 입에 가져다 대자 기웃거리던 차헌이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자기가 마시지? 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숙인 서유진이 도민영에게 입을 맞췄다.

서로 각인한 관계는 아닌 거로 아는데 도망을 다니며 끈끈한 전우애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연우는 도민영을 반쯤 끌어안고, 두 사람과는 적당히 접촉한 채로 공간을 접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냥 하나씩 옮길걸.

도민영을 내려놓은 연우는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공간이 찢어지는 듯한 이명이 들리고 있었다. 휴식도, 가이딩도 없어 불만을 가진 마나 코어가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마나 코어가 문젠가.

날뛰는 마나 코어를 가라앉혀보려 크게 호흡한 연우는 의식을 찾은 도민영에게 다가갔다.

“도민영 가이드. 힘든 건 알지만, 혹시 가이딩이 가능하십니까?”

연우의 물음에 힘없이 손을 내려보던 도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하게 느껴지는 방사형 가이딩에 이명이 가라앉는다. 심장을 쓸어내린 연우가 작전을 설명하자 서유진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그게 가능할까요?”

“가능해야죠. 원래 작전대로 화염 저항이 있는 각성자가 한 명이라도 더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 큼, 그래도, 팀 조합이 나쁘지는 않아요. 상태가 좀 나쁘기는 하지만 가이드도 있고, 공격계에, 방어계에, 보조,”

“원래 작전은 뭐였는데요?”

차례대로 강차헌, 서유진, 한연우에게 시선을 주며 응원하던 도민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헌이 불쑥 끼어들었다. 서유진이 지금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괜히 드래곤을 살피는 척 딴청을 피우던 차헌이 바닥을 툭, 찼다.

“몰라도 된다던데요. 끼어들 자리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누가요?”

차헌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질문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상원이 강차헌을 지나치게 견제하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던전에 들어오면서 작전 설명도 안 해주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전례 없는 대규모 게이트였고, 던전 측정기가 몇 등급인지 제대로 측정을 못 할 정도였다. 드래곤이 나타난다는 연우의 말에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 센터와 길드들이 연합한 거였다. 한 명이라도 힘을 더 보태야 하는 상황인데, 그 와중에 차헌을 견제하고 있었다니.

그래 놓고 혼자 돈 벌어보겠다고 탈주했다가, 팀을 전멸시키고 죽었다고.

상황정리가 끝나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아무도 작전을 설명해주지 않자 뚱하게 서 있던 차헌은 손을 뻗어 매끄러운 얼음창을 만들어 냈다. 겉모양은 대충 봐줄 만했다.

“이 정도면 괜찮죠?”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킨 연우는 창을 쥐고 땅을 쿡쿡 찔러보았다.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창의 중간 부분에서 파열음이 들렸다.

“더 강하게요. 통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겹겹이 쌓아서 만들어야 합니다.”

아리송한 표정의 차헌과 단호한 표정의 연우의 손에서 몇 번 왔다 갔다 한 얼음창은 점점 튼튼해졌다. 땅에 푹, 박히는 얼음창을 본 연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차헌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제자리에서 뛰어오르더니 달려가 드래곤을 향해 창은 던졌..다?

저 자식이!

연우가 기겁하며 차헌을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서유진이 방어막을 쌓아 올렸다. 좌표를 설정할 시간도 없어 대충 이동했더니 드래곤의 지척이었다. 숨을 참은 연우는 얼음창을 만드는 차헌의 입을 틀어막고 다시 한번 공간을 접었다.

“다 같이 죽을 일 있어요? 도민영 가이드 부상자인 거 알아요, 몰라요? 최대한 이쪽으로 시선을 끌지 말자고 얘기한 건 싹 다 까먹었어요?”

연우가 조곤조곤 따지자 새로 만든 창을 쥐고 있던 차헌이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선은 창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손으로 자꾸 창을 만지작거리며 외형을 바꾸는 게 딱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해서 신이 난 장난꾸러기 같았다.

저 천둥벌거숭이랑 내가 진짜 성공할 수 있을까.

한숨을 삼키며 드래곤을 살피자 차헌이 등 뒤로 붙었다.

“던져보니까 알겠어요. 멀리서는 공격 못 해요. 파편이 튀는 것도 한계가 있고.”

“가까이 갈 거예요.”

저린 손을 주무른 연우는 다시 한번 작전을 복기했다.

서유진은 방어막을 펼쳐 도민영을 지키고, 차헌과 연우는 드래곤을 공격한다. 마나가 부족하면 방어막으로 향해 가이딩을 받고, 다시 공격을 반복한다는 아주 간단하고도 말도 안 되는 작전이었다.

차헌의 손을 잡은 연우는 좌표를 설정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행 아이템이 없으니 도약을 위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곳, 드래곤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 드래곤의 꼬리를 피할 수 있는 곳.

모든 조건에 적합한 장소는 하나뿐이었다.

드래곤의 등.

좌표를 잡은 연우가 크게 숨을 들이켜자 차헌이 손을 붙잡았다. 마찬가지로 그런 차헌의 손을 움켜쥔 연우가 신호를 주며 공간을 접었다.

발아래로 드래곤의 단단한 비늘이 느껴지자마자 덜컥 겁이 났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두려움이 온몸을 덮쳤다. 이를 악문 연우는 드래곤의 등을 따라 달리는 차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이 드래곤을 죽이기 위해 책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던전의 특성을 미친 듯이 공부하고 드래곤의 약점, 공격패턴, 특징, 모든 것을 숙지했다.

그러니 차헌과 함께라면 단둘이서라도 드래곤을 토벌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작전이 도발적이고 무모해 보여도 괜찮았다. 차헌은 책의 주인공답게 무슨 짓을 해도 죽지 않았고, 연화가 예지의 끝을 보지 못하고 잠에서 깰 정도로 명줄이 길었으니까.

그러니 차헌은 여기서 죽지 않는다.

“정신 차려요.”

하지만 연우는 아니었다.

차헌의 재촉에도 연우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밭은 숨을 몇 번이나 토해낸 뒤에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이명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과부하를 버티지 못한 마나 코어의 비명처럼 들렸다.

“뭐…라고요?”

귀가 찢어질 듯한 이명 때문에 연우는 차헌의 뻐끔거리는 입술을 보며 겨우 말을 읽어냈다.

가이딩을 받으러 가자는 재촉에 이를 악문 연우가 공간을 접었다. 기다리고 있던 도민영이 손을 뻗어 연우를 붙잡았다. 맞닿은 부위에서 퍼지는 온기에 헐떡거리던 연우의 숨이 진정되었다.

“필요하세요?”

가이딩을 거절한 차헌은 주저앉은 연우를 들쳐 멨다. 물을 잔뜩 머금은 솜인형처럼 널브러진 연우를 안고 달리던 차헌은 방어막과 멀어진 걸 확인하고 팔에 힘을 풀었다. 나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고 했는데도 다리가 풀린 연우는 그대로 쓰러졌다. 한참이나 숨을 고른 뒤에야 몸을 일으킨 연우가 차헌의 손을 붙잡았다.

“가요.”

연우가 공간을 접는 것과 동시에 달려간 차헌의 손끝에서 창이 만들어졌다. 미끈거리는 비늘 때문에 미끄러질 뻔한 연우가 발끝에 힘을 주고 버티는 동안, 드래곤의 목을 따라 달리던 차헌이 뛰어올랐다. 그대로 역린에 창을 꽂아 넣은 차헌은 몸을 비틀어, 창을 걷어찬 뒤 그대로 떨어졌다.

차헌이 떨어질 곳으로 예상되는 지점으로 이동한 연우가 손을 뻗었다. 공중에서 두 손이 단단히 맞물리는 걸 느끼고 다시 공간을 접은 순간이었다.

“허억!”

기침이 터져 나왔다. 속이 뒤틀렸다. 누가 손을 집어넣고 심장을 쥐어짜는 통증에 눈물이 툭, 툭, 떨어졌다.

“여기 아니에요. 일어나요.”

차헌의 말에 비틀비틀 일어난 연우가 가슴을 움켜쥐며 공간을 접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도민영의 손이 닿는 순간 모든 통증이 사라지고 몸이 가벼워졌다.

숨을 고른 연우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대충 닦아내고 드래곤의 행방을 확인했다.

몸을 둥글게 만 드래곤은 역린에 꽂힌 얼음창을 녹이고 있었다. 얼음이 녹아 뚝, 뚝,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화되어 드래곤의 주변에 수증기가 짙게 끼어있었다.

“이제 숨도 쉬면 안 되겠는데요.”

차헌의 말처럼 수증기는 물감이 퍼진 것처럼 군데군데 보랏빛으로 물들어있었다. 드래곤의 진액에서 흘러나온 독의 흔적이었다.

안 그래도 죽겠는데 여기서 숨까지 참아야 하나.

연우가 작게 절망하는 동안 이전보다 굵은 창을 만들어낸 차헌이 손을 뻗었다. 위험천만한 상황임에도 묘하게, 아니, 확실하게 신이 나 보였다.

하긴.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센터장과 이상원의 싸움에 등이 터진 채로 뒷전에 밀려난 게 벌써 몇 년째였다. 각성한 이후로 제대로 능력을 펼칠 기회도 없었는데 처음으로 제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생겼으니 재밌을 만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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