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보던 연우가 공간을 접자 이명이 울려 퍼졌다.
쯧. 가이딩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혀를 찬 연우는 흐린 시야로 차헌의 뒷모습을 쫓았다. 도약한 차헌은 소름 끼치도록 똑같은 자세로 동일한 자리에 창을 찔러넣었다. 달려간 연우는 드래곤이 휘두르는 꼬리를 피해 차헌이 뻗는 손을 붙잡았다.
공간을 접자마자 마나 코어가 심장을 쥐어짰다. 불쾌함을 참으며 손을 뻗었지만 잡힌 건 도민영의 손이 아니라 차헌의 손이었다.
아니, 이 새끼가 아무리 신이 나도 사람 상태는 봐가면서 신이 나야지.
뿌리쳐도 차헌의 손은 계속해서 연우를 붙잡았다. 도망 다니던 손에 포션 병이 쥐어졌다. 설마. 입술을 깨문 연우는 허겁지겁 뚜껑을 뜯었다. 지독한 맛에 헛구역질이 나왔지만, 혀끝을 눌러가며 억지로 포션을 삼켰다. 다 삼킨 이후에도 토악질이 올라와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을 정도였다.
“도민영 가이드는요?”
“기절했어요.”
서유진의 손끝을 따라가 보니 도민영이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저 상처로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했지만 연우는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저 사람 없어도 괜찮아요?”
“해봐야죠.”
비었다는 걸 알면서도 아쉬움에 빈 병을 기울여보던 연우는 가방을 열어 남은 포션을 확인했다. 하급 포션 세 개. 서유진을 바라보자 무거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C급 에스퍼에게 지급되는 보급품이 많지 않아 기대를 접어두고 있었지만, 빈손을 보자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거 찾아요?”
연우를 지켜보던 차헌이 제 보조 가방을 열었다. 다섯 병. 많지는 않았지만, 연우의 포션과 색이 다른 걸 봐서는 상급품이 분명했다. 연우와 차헌이 포션을 나눠 가지는 동안 치료 포션을 도민영의 입술에 조금씩 흘려 넣던 서유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럼 저는 포션을 수거하러 다녀오겠습니다.”
구석에 도민영을 숨겨놓고 방어막을 치는 서유진을 보며 차헌이 다가왔다.
“던전에서 포션도 나와요?”
“아니요?”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올려보자 차헌이 멀어지는 서유진을 손짓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차헌의 얼굴을 빤히 올려보던 연우는 눈을 굴렸다. 솔직하게 말하면 충격받을 것 같은데.
“포션이 있어도 필요 없는 사람들이 있죠.”
최대한 돌려 말하자 곰곰이 생각해보던 차헌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래도 돼요?”
안될 건 뭐가 있지? 포션을 쥐고 있는다고 살아나는 것도 아닌데.
길게 기지개를 켠 연우는 거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차헌의 손을 붙잡았다.
“갑니다.”
신호에 차헌의 눈이 바로 날카로워졌다.
그대로 공간이 접히고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비늘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용이 비명을 질렀다. 차헌을 붙잡고 바로 도망친 연우는 무릎부터 주저앉았다.
“잠시, 잠시만요.”
차헌의 손을 뜯어내듯 뿌리친 연우는 보조 가방을 열었다. 포션을 뜯는 손이 거칠게 떨렸다. 뚜껑은 제거했지만, 손의 떨림 때문에 마실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마셔보려 애쓰던 연우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헐떡거리자 서유진이 달려왔다.
바르작거리는 몸짓에 드래곤을 경계하던 차헌도 다급히 뛰어왔다. 서유진은 버둥거리는 연우를 잡아 누르며 차헌에게 병을 건넸다.
“부어요.”
그 말에 포션을 부어도 뒤틀리는 혀 때문에 포션의 반 이상이 연우의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뭐야, 왜 이래요?”
연우가 혀끝을 잡아 누르며 포션을 삼키고 진정하는 것까지 확인한 서유진이 한숨을 흘리며 답했다.
급이 낮은 에스퍼들이 마나 코어에는 한계가 있었다. 마나 코어가 과열되면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해가면서 이능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마나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다.
S급인 차헌은 아직 여유가 있겠지만 C급인 연우는 지금쯤 한계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서유진의 말에 차헌이 질린 얼굴로 연우를 바라봤다. 쉬자고 해도 괜찮다고 하더니 심장이 터져 죽으면 괜찮다고 한 말이었나보다.
“그럼 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쉬는 게 맞긴 한데….”
서유진의 말에 연우가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쉬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쉴 시간이 없었다. 드래곤에게는 치유 능력이 있다. 연우가 한숨 돌릴 때마다 드래곤의 상처는 아물 것이다. 더구나 지친 차헌의 마나 코어를 노리고 다른 마수들이 언제 던전을 넘어올지 모르는데 가만히 앉아 휴식을 취할 수는 없었다.
“다시 가죠.”
떨리는 손을 뻗어 붙잡자 차헌의 어깨가 움찔, 솟아올랐다. 일그러진 표정부터 몸짓까지 당장이라도 뿌리치고 싶은데, 그랬다간 연우가 쓰러질까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눈으로 보였다.
연우를 걱정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어쩐지 속이 뒤틀렸다. 정말 온실 속 화초 그 자체구나. 다른 사람이면 걱정이 뭐야, 연우가 힘들어할 때마다 입에 포션을 쑤셔 넣고 빨리 이능을 사용하라고 닦달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사이코패스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다.
대체 센터는 이런 것도 안 알려주고 뭘 한 거야?
“금방 끝날 것 같으니까 다한 다음에 쉬어도 돼요. 방금은 창이 들어가는 소리부터 달랐잖아요.”
그 말에 차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쑥스럽기도, 신나기도, 뿌듯하기도 한 표정을 보며 크게 숨을 고른 연우는 그대로 공간을 접었다.
발아래 열기가 느껴지자 지칠 대로 지친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뿌연 시야로 차헌의 뒤를 쫓고, 공간을 접고, 차헌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다시 한번 공간을,
“그러게, 쉬자니까!”
쓰러지는 연우의 몸을 받친 차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민영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서유진은 보이지 않았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연우를 붙잡은 차헌은 그의 볼을 잡아 눌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포션을 흘려 넣어봤지만 삼키는 느낌이 없었다.
목을 쓸어봤으나 머금고 있던 포션이 입술 밖으로 흘러나올 뿐이었다.
“아, 제발.”
덜컥 불안해진다.
하얗게 질린 연우의 얼굴을 보던 차헌이 거칠게 머리를 헤집었다. 부정적인 생각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해도 된다. 가늘어지는 숨소리에 연우의 목덜미를 받친 차헌은 포션을 머금었다.
그대로 입을 대고 흘려 넣자 맞닿은 입술로 꼴깍, 자그만 움직임이 느껴졌다. 입 안의 포션을 다 넘길 때까지 입을 대고 있던 차헌은 남아있던 포션을 한 번에 머금었다.
간헐적으로 꼴깍,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며 손을 뻗은 연우가 차헌의 목을 감았다. 매달리는 연우를 떼어내며 차헌이 포션 병을 내밀었지만, 연우는 계속해서 차헌을 끌어당길 뿐이었다.
“아니, 이것 좀 마시라고.”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손에 병을 쥐여주자 그제야 허겁지겁 입을 가져다 댄다. 얼마나 급하게 마시는지 턱을 타고 흘러내린 포션이 뚝뚝 떨어져 바닥에 스며들고 있었다.
텅 빈 포션 병을 기울이던 연우의 손이 뚝, 떨어졌다. 엉망이 된 턱을 닦아주는데 이쪽을 보는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조금 더 먹여야 하나? 보조 가방을 뒤적이는데 재촉이라도 하듯 연우가 손을 뻗어 붙잡았다.
“더 줄게요. 잠시,”
재촉이 아니다.
연우가 차헌을 당기는 것과 동시에 차헌이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둘을 숨겨주던 바위가 부서지며 드래곤의 황금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가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과 마주하자마자 시야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온몸이 분해되었다가 재조립되는, 몇 번이나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기분에 몸서리친 차헌이 쓰러지는 연우를 붙잡았다.
“끄으….”
듣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고통스러운 숨을 몰아쉬던 연우가 보조 가방을 열었다. 얼음창을 마구잡이로 던져 드래곤의 시선을 분산시킨 차헌이 달려와 연우를 부축했다.
품에 기대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연우를 추슬러 안은 차헌이 포션을 기울였다. 하지만 입술만 축일뿐 제대로 마시질 못했다.
힘없이 포션 병만 쥐고 있는 연우의 손을 붙잡은 차헌이 제 입에 마나포션을 흘려 넣다 말고 있는 대로 인상을 구겼다. 역한 냄새도 냄새였지만 혀끝에 닿는 순간 헛구역질이 나왔다.
“이게 무슨….”
끔찍한 맛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맛에 혀를 차던 차헌은 품 안의 연우를 내려봤다. 겨우겨우 숨만 쉬는 연우를 추스른 차헌은 그대로 포션을 머금었다. 더럽게 맛없네. 투덜거린 차헌이 조금씩 흘려주는 대로 받아마시던 연우는 조급증이 났는지 혀를 불쑥 내밀었다.
입을 살며시 벌려주던 차헌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이런 곳에서 첫 키스를 하게 될 줄이야.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느긋한 생각을 하며 두어 번 더 먹였을까, 정신없이 혀를 빨던 연우가 슬며시 차헌을 밀어냈다.
“정신이 들어요?”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마나포션과 타액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정리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의 초점을 확인한 차헌이 안도의 숨을 뱉었다. 연우가 마나 코어를 진정시키는 동안 차헌은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방금의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한쪽 구석에 몸을 숨긴 드래곤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가죠.”
“조금 더 쉬는 게 낫지,”
“아뇨. 지금 당장.”
연우의 말에 차헌이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연우는 단호하게 손을 뻗었다. 자가 치유 능력이 그 어느 마수보다 뛰어난 게 드래곤이다.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그 난리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연우의 설명에 차헌은 잠시 망설이다가 연우의 손을 마주 잡았다.
달려가 창을 꽂아 넣자 동굴이 무너질듯한 비명을 지른 드래곤은 앞발을 휘둘렀다. 빠르게 물러나 발톱을 피한 차헌은 비틀거리는 연우를 붙잡았고, 이를 악문 연우는 공간을 접었다. 좌표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쓰러지는 연우를 부축한 차헌은 텅 빈 보조 가방을 내려봤다.
“급이 달라도 에스퍼끼리는 마나 충전할 수 있죠?”
저게 무슨 소리야.
마지막 포션을 조금씩 빨아 마시던 연우가 인상을 콱 구겼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입술에서는 헐떡거리는 숨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잠시 제 손을 내려보던 차헌이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밀어 넣은 차헌이 단단히 깍지를 꼈다. 맞닿은 손바닥으로 흘러 들어온 마나에 숨통이 트인 건 아주 잠시였다. 가이딩으로 정제되지 않은 마나에 연우의 마나 코어가 크게 반발했다.
바둥거리는 연우를 끌어안은 차헌은 그대로 제 마나를 밀어 넣었다. 파고드는 마나에 바르작거리던 연우가 차헌을 밀어내고 뿌리치려 했지만, 차헌은 그때마다 연우를 잡아 누르며 조금씩, 조금씩, 마나를 밀어 넣었다.
“이제 그만….”
비명도 지르지 못한 연우가 차헌에게 매달렸다. 울먹임이 가득한 애원에 연우의 안색을 확인한 차헌이 천천히 손깍지를 풀었다. 차헌의 품 안에서 훌쩍거리던 연우는 마나 코어를 확인했다. 당장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던 마나 코어가 안정되었고, 마나도 어느 정도 차 있었다.
…이게 가능하구나. A 구역에서는 이런 걸 배우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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