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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4화 (4/143)

4화

잠잠해진 마나 코어 위를 손으로 쓸어내리던 연우는 차헌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다음부터는, 하지 마요.”

진짜 아프니까.

눈물을 비롯한 타액을 닦아내며 힘없이 중얼거리자 차헌이 뚱한 표정으로 일어나려는 연우를 부축했다.

“가이드가 없을 때 에스퍼끼리 충전하는 법이라면서 이상원이 알려줬는데요. 아까 그 사람 마나는 잘만 받더니 내 마나는 왜요.”

그 말에 연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기는? 그 사람은 가이드고 그쪽은 에스퍼니까요?

아니, 잠시. 이상원은 대체 뭘 가르쳐준 거지?

자연에서 생성되는 마나를 받아들이고 정제하는 가이드와 달리 에스퍼는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마나 코어에서 직접 마나를 생성했다. 그렇게 생성된 마나는 각자 고유의 특징이 있었고, 그 특징은 가이드의 마나를 제외한 모든 마나에 반발력을 느끼게 했다. 자석의 N극끼리 밀어내는 것과 비슷했다.

그 반발력을 무시하고 에스퍼끼리 마나를 주고받는 건 상식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그냥 고문이었지.

혀를 찬 연우는 비틀비틀 중심을 잡았다.

아까보다 맑아진 시야로 숨을 고른 연우는 차헌을 살폈다. 연우가 그러하듯 차헌의 몰골도 정상이 아니었다. 비늘 때문에 미끄럽다며 신발을 벗어 던진 탓에 발은 화살을 입어 시뻘겠고, 마나 조절을 제대로 못 한 건지 손은 동상 때문에 파르라니 질려있었다.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만연했고, 색이 좋던 입술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앞발에 긁혔는지 피가 흐르는 이마에서 간신히 시선을 뗀 연우는 저 멀리 웅크리고 있는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꼬리로, 온몸으로 역린을 숨기고 있는 드래곤의 상태도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빳빳하게 솟아있던 꼬리의 가시도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미약하게 떨리는 손끝을 내려보던 연우는 미련을 담아 도민영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서유진이 돌아왔지만, 손에 들린 건 네 병의 포션뿐이었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감지덕지했지만 모두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도민영이 정신을 차리면 좋을 텐데. 포션을 조금씩, 조금씩 빨아 마시던 연우는 방어막에 기댄 채 잠이 든 차헌을 내려보았다.

초조함이 온몸을 덮쳤다. 이대로 모두 죽고, 책의 이야기처럼 차헌 혼자만이 살아남을까 봐 두려웠다.

[강차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참했다. 드래곤의 브레스에 모든 게 소실되었다.

그나마 남은 잔해를 끌어모아 만든 베이스캠프에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신음 소리만 울려 퍼졌다. 이렇게 모여있다가는 마수들의 표적이 되기 딱 좋았지만, 누구 하나 도망가지 않았다.

이곳에 강차헌이 있기 때문이었다.

기대가 가득 담긴 눈으로 차헌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마수들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불안함을 숨기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이대로 다들 이렇게… 죽는 걸까요.’

입 다물라고, 부정을 외치는 목소리와 울음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지던 순간이었다. 생존자들 사이에서 누군가 절뚝절뚝 걸어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한연화 에스퍼.’

삐딱하게 선 한연화는 강차헌을 바라보다가 마구잡이로 엉킨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여기저기서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엉망이 된 얼굴을 다시 머리카락으로 감추고 배를 움켜쥔 한연화가 입을 열었다.

‘제가 미끼가 될게요.’

공격 능력도 없는 S급이라 마수를 유인하기도 딱 좋고, 게이트가 열려서 나간다고 해도…. 뭐, 가망이 없을 것 같네요. 힘이 없는 소리로 중얼거리던 한연화는 자신의 배를 내려보다 고개를 들어 강차헌과 눈을 마주쳤다.

‘제가 멀쩡해 보이겠지만 이대로 혀 콱 깨물고 죽고 싶을 만큼 아프니까 나 살려보겠다고 머리 굴리지 말아요.’

‘…한연화 에스퍼.’

‘여기. 여기가 용의 역린이에요. 그다음에는 말 안 해도 알죠? 몰라도 알아서 해요. 나한테 말 걸지 말고. 말할 때마다 흘러내린 거 줍는 것도 기분 더러우니까.’ ]

몇 번이나, 책이 닳아버릴 때까지 읽어 외어버린 구절을 떠올린 연우는 몸을 웅크렸다. 연화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지 않도록 연우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연화만이 알았다.

그럴수록 연화는 연우에게서 멀어졌다. 미래는 정해져 있으니 바꾸지 말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었다. 제 입맛대로 미래를 바꾸려다가 인과율의 부메랑을 맞은 사람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잊었냐며 소리치는 연화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하필 연화지? 왜 하필 연화가 죽어야 하는 거지?

제 죽음을 차근차근 준비하는 연화를 보며 연우는 말 그대로 속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꼈다. 차헌이 수습한 연화의 시체를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연우는 센터장에게 달려갔다.

연화가 죽지 않게, 미래를 바꾸기 위해 다시는 미래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트렸다. 미쳤냐며 소리를 지르는 연화를 외면한 연우는 그대로 던전에 뛰어들었다.

천천히 눈을 뜬 연우는 체력을 회복했는지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있는 차헌을 올려봤다. 이대로 여기서 죽으면 연화는 오빠를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살아갈 게 뻔했다.

“좀 잤어요?”

“아니요.”

잠이 들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게 뻔했다. 찌뿌둥한 몸을 편 연우는 도민영과 서유진을 돌아보았다. 도민영의 안색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고 서유진의 방어막은 이제 거의 투명해져 있었다.

연우는 힘없이 손을 뻗어 차헌을 붙잡았다. 이제 믿을 건 차헌의 능력과 연화의 예지뿐이었다.

차헌이 창을 만들어내고 단단히 움켜쥐는 걸 확인한 연우는 그대로 공간을 접었다.

끄륵, 끄르륵, 거리는 드래곤의 신음과 독이 퍼진 수증기를 배경으로 달려간 차헌이 완벽한 자세로 도약해 창을 내리꽂았다. 차헌이 창을 걷어차는 것과 동시에 드래곤이 앞발을 들어 올렸다.

역시 함정이었다.

공중에서 몸을 비튼 차헌은 손을 휘둘러 얼음 단검을 만들었다. 드래곤을 향해 날아가는 얼음 단검과 반대로 방향을 튼 차헌이 손을 뻗자 당연한 듯이 연우의 손이 닿았다.

서로의 손을 움켜쥐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바뀐다. 마나 코어를 가늠해보던 연우는 그대로 공간을 접었다. 드래곤의 비늘이 발에 닿는 순간 달려간 차헌은 한 손에는 창을 쥐고 한 손으로는 주변의 공기를 얼렸다.

폐가 따끔거리는 기분을 외면하며 도약한 차헌이 살이 드러난 역린을 향해 창을 집어 던졌다. 더욱 깊이 들어가도록 걷어차자 발끝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달랐다.

작게 희열을 느낀 차헌이 손을 뻗어 연우를 붙잡았다.

“입 벌려요.”

“으, 흐으….”

이동하자마자 능숙하게 연우의 시중을 들던 차헌의 시선이 녹아내린 훈련복 끝단에 닿았다. 그 아래 붉게 달아오른 피부까지 살핀 차헌은 제 훈련복을 바라보았다. 차헌의 훈련복이 멀쩡한 걸 봐서는 포션뿐만 아니라 훈련복에도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다 하다 이런 것까지 차별하나.

혀를 찬 차헌은 훈련복을 벗어 연우의 팔을 집어넣었다. 포션의 맛에 정신을 못 차리던 연우는 어눌한 발음으로 괜찮다고 거절하다가, 차헌이 목 끝까지 지퍼를 올려준 뒤에야 고맙다며 훈련복을 추슬렀다.

손이 보이도록 훈련복을 접어준 차헌은 웅크리고 있는 드래곤을 내려보았다.

“또 함정일까요?”

“아마도요. 죽음이 다가올 때는 비늘을 세울 겁니다. 그때까지는 함정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고개를 끄덕인 차헌의 손을 잡은 연우는 계속해서 주저앉으려는 다리를 재촉하며 이동했다.

차헌이 뛰쳐나가고, 각도가 달라진 비늘을 살피던 연우는 손을 뻗어 차헌을 붙잡았다. 단숨에 포션을 들이킨 연우는 바로 공간을 접었다.

“이번이 마지막일 겁니다.”

“제발.”

기도하듯 중얼거린 차헌이 창을 움켜쥐는 것과 동시에 달려 나갔다. 울려 퍼지는 이명과 쏟아지는 두통에 신음을 흘린 연우는 뛰어오르는 차헌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고양이가 털을 바짝 세우며 경계하듯, 비늘을 세운 드래곤이 사납게 앞발을 휘둘렀다. 포션을 뜯은 연우는 떨어지는 차헌을 붙잡고 공간을 접었다.

튀어 나가는 차헌의 손을 놓아준 연우는 마지막 포션을 입에 털어 넣고 뒤를 쫓았다. 허공을 휘적거리던 드래곤의 앞발이 툭,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달려간 연우는 차헌을 붙잡았다.

앞발의 시작으로 드래곤의 몸이 천천히 무너졌다. 뿌연 연기를 일으키며 쓰러진 드래곤을 한참이나 바라봤지만, 그 어떤 미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와!”

잠시도 서 있을 수가 없어 쓰러지듯 주저앉은 연우와 달리 차헌은 허공에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다가 연우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돼요?”

몰려오는 두통에 머리를 붙잡고 고민하던 연우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와, 진짜 하나도 모르는구나. 내가 이런 애랑 드래곤을 죽였다니. 힘없이 웃음을 흘리던 연우는 드래곤의 배를 가리켰다.

“심장 옆에 붙어있는 마석을 획득하면 게이트가 열릴 겁니다.”

“오.”

“꼭 챙겨요. 그거 비싼 거니까.”

버릴 곳 하나 없이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드래곤이다. 그중에 제일 비싼 게 드래곤의 마석, 드래곤 하트였다. 해체해주겠다며 사체를 가져가 몰래 떼갈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했다.

이제 강차헌은 죽을 때까지 일을 안 해도 여유롭게 살겠지. 옆에서 도와줬으니까 어느 정도는 떼어주겠지. 그럼 그 돈으로 위험 구역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별장을 하나 사서 연화랑 편하게….

행복한 상상을 하던 연우가 쓰러지듯 드러눕자, 차헌은 잠시 쉬고 있으라며 드래곤을 향해 걸어갔다. 마석 뜯는 법은 알고 저러나? 배를 가르려는 차헌의 뒷모습을 보던 연우의 입꼬리가 그대로 굳었다.

드래곤의 비늘이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강차헌!”

간신히 몸을 일으켜 공간을 접은 연우는 차헌을 붙잡는 것과 동시에 입을 틀어막았다. 코에서 흘러내린 피가 손등을 넘어 가슴까지 적시고 있었다. 마나 코어가 미친 듯이 뛰며 마나를 만들어 내고 있었지만, 생성된 마나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주 잠깐의 시간.

드래곤의 입에서 솟아나는 연기와 이빨 사이로 튀는 불꽃을 보던 연우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서유진과 도민영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미래를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애를 썼는데 결국은 강차헌 혼자 남겠구나.

쓰게 웃은 연우는 얼음벽을 세우고 있는 차헌을 붙잡고 마지막 힘을 짜내 이능을 사용했다.

그리고, 암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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