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흐억!”
거친 숨을 토해내며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난 연우는 그대로 몸을 웅크렸다. 턱은 덜덜 떨리고 있었고 가늘게 뜨인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한참이나 덜덜 떨던 연우의 다갈색 눈동자가 흐려지더니 눈물로 부풀어 올랐다.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뚝, 뚝, 흘러내렸지만 차마 닦아내지도 못하고 자극을 피해 계속해서 몸을 웅크릴 뿐이었다.
드래곤의 브레스를 막아보려 뻗은 손은 익기도 전에 녹아내렸고, 끔찍한 광경에 비명을 지를 시간도 없이 온몸에 불이 붙었다. 연우의 마나 코어를 섭취하기 위해 아가리를 벌린 드래곤의 이빨이 몸을 조각냈다. 몸이 타오르는 고통 속에서도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찌르는 게 똑똑히 느껴졌다.
몸서리를 친 연우는 배를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리가 하염없이 바르작거렸다.
한참 동안 경련을 일으키며 괴로워하던 연우는 울먹이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바스락. 손안에서 구겨지는 보드라운 감각과 햇볕 냄새에 놀라 굳어있던 연우는 눈만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헐떡이는 호흡을 겨우겨우 뱉어내던 연우의 눈에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집?”
집이었다.
드래곤이 날뛰는 동굴형 던전이 아니라 대한 에스퍼 센터 기숙사.
연우의 집.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연우가 주변을 경계했다. 고요하고 적막이 내려앉은, 눈을 감고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곳.
내가 지금 고통에 취해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덜덜 떨리는 몸을 끌어안은 연우가 집안을 둘러보았다. 당장이라도 벽이 허물어지며 동굴의 모습이 드러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눈이 어둠에 적응하고, 초점이 돌아오며 주변의 풍경이 뚜렷하게 보였다. 동시에 피부에 눌어붙어있던 고통의 잔상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뭐야?”
눈에 힘을 주고 의심을 가득 담아 주변을 살피는데 희미하게 빛나는 시계가 보였다.
[20XX/ 02 / 18]
[AM 12 : 07]
깜박. 깜박. 날짜와 시간을 번갈아 가며 표시하는 시계를 바라보던 연우의 몸이 벌렁 넘어갔다. 긴장이 탁, 풀리며 온몸에 힘이 빠졌다.
“꿈을 꿔도 이딴 꿈을 꾸고 난리야.”
떨리는 목소리에는 아직도 울음기가 가득했다. 신경질적으로 눈물을 닦아내려던 연우의 손에 무언가 턱, 걸렸다. 베개 옆에 놓여있던 책이었다.
제목도, 작가도 적혀 있지 않은 양장 책.
검푸른색에 은색 문양이 그려진 표지를 내려보던 연우는 위화감을 느끼며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이 이렇게 깨끗했었나?
이 책의 주인공은 빙결 능력을 가진 S급 에스퍼, 강차헌이었다. 책은 강차헌이 센터에 입사하는 장면에서 시작되었다.
강차헌은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각성했고 이능을 다루는 게 매우 어설펐다. 그런 강차헌을 무시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던 A 구역 에스퍼들과 다투고 경쟁하며 성장한 강차헌이 던전 공략권을 따내는 부분까지 무감한 눈동자로 읽어나가던 연우는 연화의 이름을 보자마자 떨리는 숨을 토해냈다.
굳은 손가락이 간신히 책장을 넘기고, 다갈색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등급을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게이트가 나타나자 라운드 길드를 중심으로 연합팀이 생겼다. 그 팀에는 라운드 길드 소속인 연화와 센터의 강차헌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화의 예지로 완벽한 전략을 짰지만, 초장부터 서로 견제만 하던 길드들의 손발이 맞지 않는 건 당연했다. 위태위태하던 연합팀은 그대로 와해되었고, 길드원들이 빠져나간 베이스캠프를 드래곤이 기습하는 부분을 읽던 연우는 거칠게 책을 닫았다.
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쾅, 쾅, 뛰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외우고 있었다. 연화의 희생으로 강차헌은 드래곤을 죽인다. 게이트가 열리며 후발대가 들이닥치고, 강차헌이 수습한 시체에는 연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연우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온몸이 떨릴 정도로 사방이 쿵, 쿵, 울렸다. 떨리는 손은 책을 붙잡고 있지 못했고, 떨어지는 책을 보며 연우는 그대로 쓰러졌었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어 그 빌어먹을 꿈을 꾼 모양이었다.
책을 멀리 밀어낸 연우는 계속해서 떨리는 몸을 끌어안았다. 식은땀이 식으며 온몸이 서늘해졌다.
괜찮아. 단순한 악몽이야. 미래는 바꿀 수 있어. 중얼거린 연우는 눈물을 닦으며 이불에서 벗어나다 말고 망설였다.
땀을 많이 흘린 몸은 물을 원하고 있었지만, 침대 밖으로 발을 뻗기가 두려웠다. 발가락이, 발이, 다리가 타들어 가고, 드래곤의 이빨에 몸이 부서지는 감각의 잔상이 아직도 온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발이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다시금 그 고통이 온몸을 덮칠 것만 같았다.
반사적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낸 연우는 아무도 없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용된 공간 밖에서 이능을 사용하는 건 철저하게 금지되어있지만, 이 정도는 다들 몰래몰래 했다.
식탁 의자에 좌표를 설정한 연우가 이능을 사용하려던 순간이었다. 마나 코어에서 좌표로 흘러가던 마나가 손목 어딘가에서 반발력을 느끼며 다시 마나 코어로 돌아갔다. 사라진 마나 때문에 역할을 잃어버린 좌표가 튀어 오르며 연우의 몸도 휘청거렸다.
식탁과 침대 사이에 떨어진 연우는 넘어지지 않으려 발을 뻗었다. 중심을 잡은 연우가 아래를 내려보는 순간 발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끄, 으으….”
발가락이 녹아내리는 환상에 입을 틀어막은 연우는 눈물이 툭툭 떨어지는 발등에 시선을 고정했다.
멀쩡해. 여긴 집이야. 나는 멀쩡해. 다친 곳은 없어.
흉터 하나 없는 발가락과 발을 내려보며 끊임없이 중얼거린 다음에야 환상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식은땀을 닦아내며 호흡을 정리한 연우는 냉장고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다.
연우는 냉장고 문을 활짝 열고 시원한 냉기를 즐기다 컵 가득 물을 따라 한 번에 들이켰다. 그렇게 생수병 두 병을 비우고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아 식탁 의자에 쪼그려 앉은 채로 물을 조금씩 빨아 마시던 연우가 책을 노려보았다.
“뭐 이딴 식으로 생생한 꿈이 다 있지.”
숨을 고른 연우가 책을 제자리에 꽂기 위해 일어나려던 순간 공기들이 뭉치며 문을 만들어냈다.
“나 왔어.”
그 문을 열고 연화가 걸어 나왔다. 길게 하품한 연화는 노트를 집어 던지듯 식탁에 내려놓더니, 의자에 주저앉았다.
“또 거기서 잤어?”
“아니. 자려고 나왔어.”
무영 길드장은 애한테 괜히 이상한 걸 줘서.
노트의 내용을 보지 않게 조심하며 정리한 연우는 흐려지는 문을 노려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연화의 예지의 한 줄이라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뇌물을 갖다 바쳤다.
한 번 잠이 들면 못 일어나는 연화를 위해 온갖 사람들이 펜트하우스며, 별장이며, 호텔이며, 안락한 시설을 선물했고 무영 길드장은 아공간을 선물했다.
아직 소속도 없는 미성년자한테 던전 아이템을 선물해도 되나. 연우는 탐탁잖아 했지만, 연화는 꽤 좋아했다. 좋아하는 사람치고는 반응이 너무 담담하긴 했지만. 연화는 당연히 제 것인 듯 열쇠를 받아들였고, 거기서 살기 시작했다.
연화가 허락한 사람이 아니면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아공간은 보안상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그건 연화가 의식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한 번 잠이 들면 예지가 끝날 때까지 일어나지 못하는 연화를 챙길 수 없어 아공간 밖에서 연우가 얼마나 안절부절못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연화는 아공간에서 잠이 들었다.
“와, 어떻게 그렇게 자도 자도 졸리냐.”
“그러니까 가이딩을,”
“으아아. 졸려.”
길게 하품하던 연화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연우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꾸물꾸물 손을 들어 올려 귀를 틀어막았다.
아무리 정신계라지만 가이딩을 받지 않고 이능을 사용하는 게 걱정이었다. 혹시라도 아공간에서 폭주를 일으키면 어떻게 하려고. 이런저런 잔소리를 해봤자 결국엔 아공간에 저 스스로를 가둔 채 예지를 할 게 뻔했다.
한숨을 삼킨 연우는 연화의 손을 잡아당겼다. 누가 S급 아니랄까 봐 힘이 어찌나 좋은지 꿈쩍도 안 했지만 상관없었다. 귀에 내려앉을 때까지 잔소리를 하다 보면 언젠가 듣는 시늉이라도 하겠지.
“이능만 사용하고 가이딩을 안 받으니까 그렇지.”
“아, 또.”
이능 학교의 가이딩룸이나 협회의 가이딩실에서 적당한 가이딩을 받는 게 좋다고 몇 번을 말해도 연화는 예지가 끝나는 순간 연우의 집에 쳐들어와 잠을 청할 뿐이었다.
의자에 걸린 담요를 펼쳐 연화에게 덮어준 연우는 산발이 된 연화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었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땋아 정리하는데 고개를 튼 연화가 연우를 올려보았다.
“오빠 머리나 정리하지.”
“나야 자다 일어나서 그렇지.”
연우의 말에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하던 연화가 어쩐지, 중얼거리며 길게 하품했다.
“왜? 이번에는 무슨 꿈 꿨는데?”
연우는 입술을 말아 물고 우유갑을 노려보았다. 어린 동생에게 악몽을 꿨다고 칭얼거리는 게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잘… 기억이 안 나. 그냥 눈뜨니까 악몽이었다, 하는 기억만 나는 그런 꿈이었어.”
“그래? 나는 꿈을 꿔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침대에 벌렁 눕는 연화를 눈으로 좇던 연우는 책과 연화를 번갈아 보았다. 네가 쓴 책을 읽고 잠이 들었는데, 너를 살리려다가 내가 죽었다는 내용의 악몽을 말할 수가 없었다. 연화의 입에서 인정이든, 부정이든 자신이 죽는다는 말이 나오는 걸 상상만 해도 가슴 한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오빠 내일 출근하는 거 때문에 그래?”
“응?”
“무슨 일 있을 때마다 악몽 꾸잖아.”
이불을 끌어당긴 연화는 작게 웃더니 곧 웃음을 터트렸다.
“기억 안 나? 놀이동산 가기 전날 바이킹이 날아가서 못 타는 꿈 꿨다고 눈뜨자마자 대성통곡을,”
“기억 안 나.”
“웃기시네. 오빠 지금 귀 빨개졌거든. 사관학교 입학하기 전에는 뭐였지? 사막에 고립되는 꿈도 꿨다며.”
잊고 있던 기억이 하나둘씩 떠오르자 수치스러워하던 연우가 연화의 입을 막기 위해 베개를 휘둘렀다. 내려치는 베개를 막으며 깔깔 웃던 연화가 팔을 뻗어 연우를 끌어당겼다.
“벌써 두 시야. 일찍 자.”
“우유 데워줄 테니까 먹고 자.”
“나중에 일어나서 먹을래. 일찍 자야 내일 지각 안 하지. 얼른 자.”
옆에 누운 연우의 등을 토닥거리던 연화는 금세 잠에 빠질듯한 몽롱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생각하지 마, 전부 개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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