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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8화 (8/143)

8화

“C 구역 이능력자 여러분. 이쪽으로 오세요.”

훈련소장의 뒤를 따라 C 구역으로 이동한 연우는 침착하게 훈련장을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도 익숙했다. 익숙한 걸 넘어서 집 같은 아늑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앞으로 3개월. 그동안 팀원들 간의 마나 적응을 마치고, 가상 던전 훈련을 통해 던진 마나에 익숙해진 다음 본격적인 임무를 맡게 될 겁니다.”

첫 번째로 공격계들의 이름이 불렸다. 명단을 나눠 가진 공격계들이 팀원을 호출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한연우 에스퍼!”

이름이 불리는 곳으로 향하자 공격계의 옆에 선 가이드, 조희서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연우입니다. 박서현 에스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오! 저를 아세요?”

화들짝 놀라는 표정에 연우는 목에 걸린 사원증을 눈짓했다.

“아이, 나는 또 뭐라고.”

웃으면서 인사를 해오는 공격계 에스퍼, 박서현을 보던 연우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최동원입니다.”

“우리 팀 조합 좋네요?”

박서현의 말대로 팀의 조합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B급 가이드에 B급 공격계, C급 방어계, 보조계가 붙은 기본에 충실하고… 익숙한 팀이었다.

연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꽤 탄탄한 팀인데도 조희서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연우를 볼 때부터 못마땅한 표정이더니 최동원의 등급을 확인하고는 말 그대로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조희서의 곁에 선 박서현이 최동원에게 인사하며 시선을 차단했지만, 이미 최동원은 맥 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예….”

팀원끼리 동그랗게 모인 각성자들은 같은 구역 에스퍼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있었지만, 조희서만이 그 누구와도 인사를 나누지 않고 훈련소장에게 달려갔다.

필살 적인 뒷모습을 보던 연우는 작게 혀를 찼다.

어느 곳이나 그러하듯 사관학교도 가이드가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B급인 조희서도 A급 에스퍼와 팀을 이룬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니 센터에서도 A급과 어울릴 줄 알았는데 B 구역도 아닌 C 구역에서 C급과 팀을 이뤄야 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러다 큰코다쳤지.

…뭐?

훈련소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조희서를 보던 연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했더라…?

“한연우 에스퍼, 이쪽이요.”

최동원의 뒤를 따라가 훈련복을 받은 연우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제대로 잠을 못 자서 그런가 오늘따라 생각이 계속 끊기는 기분이었다.

“저기, 저기! 잠시만요!”

훈련복을 갈아입고 나오자 보조 가방을 쥔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최동원이 연우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아, 저거 조립하는 거 어렵지.

부품을 건네받아 조립을 도와주는 동안 박서현이 침울한 표정의 조희서를 데려오고 있었다. 조희서를 슬쩍 눈짓하는 박서현에게 눈인사를 건넨 연우는 낑낑거리며 허벅지에 벨트를 달고 있는 최동원의 팔뚝에 보조 가방을 달아주었다.

“감사합니다. 옷이 좀 복잡하네요.”

괜찮다고 웃어준 연우는 옆으로 이동해 무기를 받았다. 칼은 훈련용으로 지급된 가짜였지만 총은 아니었다. 묵직한 무게에 손잡이를 쓸어보던 연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우는 훈련복을 갈아입느라 지체된 사람들을 뒤로한 채 구석으로 걸어가 총을 분해했다. 무게에 익숙해지기 위해 받은 것이라 총알은 없었지만….

분해된 총을 내려보던 연우는 시선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총을 쥔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입술에서는 간헐적으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대체 뭐지?

NAC912-7712. 총의 일련번호마저 익숙했다.

이 상황이 미치도록 혼란스러웠지만 혼란스러워할 시간도 없었다.

모든 기시감과 위화감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억지로 납득했다. 이능력자 협회에서 에스퍼로 분류 받자마자 사관학교로 들어갔던 연우와 달리 연화는 이곳저곳 끌려다녔다. 연화에게 센터에 관한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고, 책의 주인공인 강차헌의 주요 배경도 센터였다. 이 모든 광경이 익숙한 이유가 읽고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의아함과 수상함은 한 곳에 그러모아 머릿속 한군데에 꽉꽉 밀어두었다. 그것들을 이상하게 여기고 고민하는 것보다 현실의 문제에 집중하는 게 우선이었다.

“죄송합니다!”

엉뚱한 곳으로 굴러가는 마나볼을 보던 연우는 허리 굽혀 외쳤다.

이능이 제멋대로 튀고 있었다.

“괜찮아요. 긴장 풀어요!”

“다시 해봅시다~”

입술을 말아 문 연우는 마나볼을 줍기 위해 달렸다. 최동원은 너무 긴장해서 그런 것 같다고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박서현은 다시 한번 해보라며 마나볼을 던져주었다.

연우는 크게 숨을 몰아쉬고 마나 코어에서 마나를 뽑아 좌표를 잡았다. 여기까지는 원활했다. 좌표에 문양을 그리자 심장 한쪽이 뻐근해졌다. 아니, 고작 이것 가지고 마나 코어가 부담을 느낀다고?

마나볼에 마나를 흘려 넣은 연우가 좌표를 향해 이능을 사용했을 때였다.

“아!”

좌표를 설정한 곳은 박서현의 오른손이었는데 마나볼이 떨어진 건 조희서의 왼쪽 어깨였다. 빠르게 튀어 나간 박서현이 마나볼을 낚아채 최동원에게 던지고, 손바닥만 한 방어막으로 마나볼을 튕겨 받은 최동원이 연우에게 던졌다. 손안에 들어온 마나볼에서 흘러나오는 최동원의 마나를 느낀 다음, 다시 마나를 흘려 넣은 연우가 다시 좌표를 잡았다.

아까보다 조금 더 오른쪽으로.

제대로 좌표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나볼은 박서현과 조희서 사이에 뚝, 떨어졌다. 박서현이 굴러온 마나볼을 집어 올릴 때 싸늘한 음성이 떨어졌다.

“또.”

조희서였다.

“너 지금 장난쳐? 벌써 몇 번째야?”

“에이. 뭐, 손에 안 익어서 그런 거죠. 저도 한 번씩 삐끗하는걸요.”

“맞습니다. 아직 적응 기간이니까요.”

박서현과 최동원의 두둔에 딱딱하게 굳어있던 조희서의 눈초리가 더욱 매서워졌다. 그 표정으로 훈련 내내 연우를 노려보고 있던 조희서는 훈련종료 알람이 울리자마자 가차 없이 몸을 돌려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왜 저런데요. 한연우 에스퍼만 실수하는 것도 아니고.”

각 팀원의 가이드들이 에스퍼와 접촉하며 가이딩을 하는 모습을 부럽게 바라보던 최동원이 투덜거렸다. 먼저 간다며 어깨를 두드리는 박서현을 보던 연우는 한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훈련이 끝났음에도 자발적으로 남아 훈련하고 있는 팀들이 제법 많았고, 마나볼이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잘 좀 합시다와 죄송합니다, 가 번갈아 울려 퍼지는 훈련장 한쪽으로 굴러가는 마나볼을 눈으로 좇던 연우는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이능을 사용할 때마다 반발력이 느껴졌다.

반발력은 좌표로 흘러 들어가려는 마나를 가로막았고, 마나를 흡수하지 못한 좌표는 그대로 공중으로 흩어졌다. 좌표가 없으니 이동할 공간이 없어 이능이 제멋대로 튀는 것이었다.

처음 각성했을 때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대체 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린 연우는 훈련복을 더듬었다. 어디 회수 못 한 아이템이라도 붙어있나, 그게 아니라면 반발력이 느껴질 이유가 없는데. 혀를 찬 연우가 손을 뻗었다. 마나 코어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오른손에서 넘실거리다가 손짓에 따라 부드럽게 왼손으로 넘어갔다.

마나를 다루는 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숨을 길게 쉬자 훈련 도구를 정리하고 있던 최동원이 어깨를 도닥였다.

“천천히 해요, 천천히. 어깨에 힘도 빼고. 조바심을 내면 되던 것도 안 되고 그러더라고요.”

최동원의 말에 숨을 고른 연우가 살짝 웃으며 인사했다.

“한연우 에스퍼는요? 안 가요?”

“조금만 더 연습하고 가려고요.”

같이 하겠다며 짐을 내려놓는 최동원을 돌려보낸 연우는 훈련장 구석에 앉아 격자 모양으로 핀을 내려놓았다.

반발력이 느껴지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팀에 속한 이상 팀원들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잠깐의, 아주 작은 실수로 사람이 죽어가는 곳이 던전이다. 스멀스멀 밀려오는 기억을 밀어낸 연우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팀원들이니까 괜찮다 괜찮다 해주는 거지 훈련소장에게 들킨다면 센터에서 퇴출당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다른 것들은 둘째치더라도 연화의 보호자 자격을 잃게 된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건가. 내가 완벽해야 연화를 지킬 수 있으니까. 그래야 어렸을 때처럼 연화가 돈벌이에 이용되지 않을 테니까.

가볍게 한숨을 쉰 연우는 마나볼 대신 탁구공을 쥐었다. 연습하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일단 A, 1부터.

* * *

“또 여기서 잤어요?”

핀을 노려보고 있던 연우는 화들짝 놀라며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아침이었다. 연우는 몸을 풀고 오겠다는 최동원에게 인사하고 연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는 건지, 등교 준비를 하는 건지, 아니면 아공간에서 예지를 보고 있는 건지, 전화를 받지 않는 연화에게 밥은 제때 챙겨 먹으라고 문자를 남기자 박서현이 슬렁슬렁 걸어왔다.

“출근을 일찍 한 거예요? 설마 또 여기서 잔 건 아니죠?”

“여기서 잤어요.”

핀을 정리하던 연우가 웃으며 답하자 가방을 내려놓던 박서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연습도 좋지만, 적당히 해요. 마나 코어에 부담 안 가게.”

어깨를 두드리는 손에서 미약한 마나가 느껴졌다. 온몸을 휘감고 흩어지는 마나에 응답하듯 연우도 손에 마나를 담아 박서현을 두드렸다.

7년, 아니, 무슨 소리야. 3년 차라서 그런지 박서현은 틈이 날 때마다 마나 적응도를 높이기 위해 손에 마나를 담아 툭툭 건드렸다. 그 덕분에 시선을 두지 않아도 박서현이 훈련장 주변을 뛰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여기요.”

“아. 감사합,”

“도와주지 마요. 쟤 강박증 있어서 어차피 다시 정리하니까.”

조희서의 말에 정리를 도와주던 최동원에게 인사를 하다만 연우가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각성 열을 앓기 전, 이능이 불안정한 시기가 있었다. 손에 스치는 물건마다 사라지는 경험을 한 뒤로는 모든 물건이 정해진 자리에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정리를 도와준 최동원과 함께 적당히 몸을 풀고 있자 훈련 시작 알림음이 울렸다.

훈련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직직 끌렸다. 오늘은 또 어떤 실수를 할까. 대체 왜 이능이 제멋대로 튀는 걸까. 한숨을 쉬며 팀원들과 함께 대열을 맞추는데 입구 쪽이 웅성거렸다.

“어. 강차헌 에스퍼다.”

한 가이드의 중얼거림에 모두의 시선이 훈련장 입구 쪽으로 향했다.

훈련소장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아하니 사전에 약속되지 않은 방문인 게 분명했다. 웅성거리는 이능력자들을 진정시킨 훈련소장이 입구 쪽으로 달려가자 A 구역 훈련소장이 과장된 동작으로 손을 흔들었다.

“음. 다들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하세요.”

“무슨 일로 방문하셨죠?”

“어… 다른 게 아니라, 강차헌 에스퍼가 견학을 좀 하고 싶다는데. 괜찮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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