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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9화 (9/143)

9화

A 구역 훈련소장의 말에 C 구역 훈련소장이 괜찮겠냐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하게도 반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다들 반기는 분위기였다.

가이드들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나섰다가 자기들끼리 눈이 마주치자 민망해하면서도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에스퍼들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강차헌에게 열렬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등급과 능력에 따라 센터에서 팀을 정해주는 C 구역과 달리 S급은 자신의 팀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강차헌은 아직 팀이 없다.

A 구역 각성자들은 이미 끼리끼리 팀이 정해진 상태이니 강차헌은 기존팀에 속하거나 새로운 팀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니 지금 이 시기에 강차헌이 다른 구역을 견학하는 이유는…?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마다 자신의 사원증이 잘 보이도록 가슴을 내민 이능력자들이 입구 쪽으로 달려가려던 순간이었다.

“자, 집중.”

크게 손뼉을 쳐 시선을 끈 C 구역 훈련소장이 마나볼을 팀별로 하나씩 지급했다. 날아오는 공을 받은 연우는 애써 한숨을 삼켰다.

또 이거야? 사방에서 지겹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든 불만을 무시한 훈련소장은 마나볼을 공중에 띄웠다 낚아채기를 반복하며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설명해드리자면, 여러분들이 그렇게 무시하는 이 마나볼은 마나 적응훈련에 가장 효과적인 도구입니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대단한 포부를 가지고 센터에 입사하셨으니 당장이라도 마수와 겨뤄보고 싶다는 그 당찬 마음, 이해는 가지만 그전에 옆에 선 팀원이 어떤 마나를 가졌는지 몸에 익히는 게 우선입니다.”

설명에도 입을 삐죽이는 이능력자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던 훈련소장은 어느새 다가와 멀뚱히 서 있던 강차헌에게도 마나볼을 하나 던졌다.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는 것으로 마나볼을 피해버린 강차헌은 훈련소장을 쏘아보았다.

“견학 선물이었는데… 뭐, 필요 없으시면 버리시도록 하시고.”

강차헌을 일별한 훈련소장이 박수를 쳤다. 신호에 팀원끼리 흩어지면서도 이능력자들은 강차헌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강차헌 주변으로 자리를 잡는 다른 팀들과 적당히 거리를 둔 연우는 허전한 옆을 둘러보았다.

“박서현 에스퍼는요?”

질문에 삐딱한 웃음을 그린 최동원이 훈련장 한쪽을 턱짓했다. 강차헌의 주변에 가이드들이 몰려있었다. 다가가지도 못하고 쭈뼛거리는 가이드들 사이에 조희서도 끼어있었고, 그 옆에 선 박서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음…. 일단 우리끼리 연습할까요?”

어색하게 웃던 연우가 마나볼에 마나를 흘려 넣으려던 순간이었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이끄는 대로 몸을 돌린 연우가 눈을 크게 떴다. 강차헌이 마나볼을 움켜쥐고 있었다. 아주… 터트릴 듯이….

저렇게 하는 거 아닌데?

의아함을 가지자마자 그늘이 진다, 싶더니 허공에서 얼음이 뚝 떨어졌다. 기함한 연우가 최동원의 팔을 움켜쥐고 공간을 접었다. 땅에 발이 닿는 순간, 온몸을 울리는 진동에 몸을 재빨리 웅크렸다.

뒤이어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잠시 뒤, 최동원은 펼친 방어막을 접으며 주변을 확인했다.

“이게 뭐야.”

훈련장 한가운데 사람 키보다 큰 얼음덩이가 꽂혀있었다. 뒤늦게 몸을 일으킨 연우 역시 저게 뭐냐며 중얼거렸다. 보통 얼음처럼 투명한 색이 아니라 탁한 하늘빛을 띠고 있는 걸 보아하니 강차헌의 이능으로 만들어진 얼음이 분명했다.

“하하하!”

가라앉은 침묵을 깨트린 건 A 구역 훈련소장의 웃음소리였다.

“아, 우리 강차헌 에스퍼가 아직 이능을 다루는 게 좀 그래요. 얼마 전에 각성했다 보니까~ 그, 다들 아시잖아요? 그때 막, 어? 그러는 거?”

그 말에 비틀비틀 일어나던 에스퍼들이 아, 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한 번씩 이능이 불안했던 경험이 있으니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사건을 둥글게 무마시키려는데 강차헌이 얼음물을 끼얹었다.

“저기요.”

“음? 그래요. 강차헌 에스퍼.”

“내가 왜 댁네 에스퍼예요?”

삐딱하게 선 강차헌은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쏘아 뱉었고, A 구역 훈련소장은 참담한 표정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런 싸가지.

반사적으로 혀를 차려던 연우는 대신 혀끝을 잘근거렸다.

“그리고… 다들 눈알이 달렸는데 어련히 알아서 피했겠죠?”

자신의 말에 싸한 침묵이 깔렸음에도 강차헌은 턱을 치켜든 오만한 자세로 주변을 둘러보다 고개를 까딱이며 뒷말을 붙였다.

“에스퍼인데?”

이제 훈련장에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뭐, 맞습니다.”

방어막을 펼쳐 가이드들을 보호하고 있던 훈련소장이 걸어 나와 얼음을 툭, 건드렸다.

“이런 것도 못 피하면 그게 에스퍼입니까? 크기가 작은 것도 아니고 이만하면 다들 어련히 알아서 피해야죠. 안 그래도 다들 아슬아슬한 훈련을 하고 싶어 몸이 달아있었는데 강차헌 에스퍼가 이런 이벤트를 열어줘서 고마워하고 있을 겁니다.”

그 말에 굳어있던 A 구역 훈련소장이 허,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어… 뭐,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음. 우리는 이만 갈까요?”

등을 떠미는 손짓을 몸을 비틀어 피한 강차헌은 앞에 놓인 얼음을 턱짓했다.

“저거는요.”

“아, 신경 쓰지 마세요. 금방 치웁니다.”

얼음을 올려보고 주위를 둘러보던 훈련소장과 눈이 마주친 연우는 설마…하며 가슴을 졸였다.

“한연우 에스퍼.”

호명에 연우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제발 잘못 들었기를, 다른 에스퍼를 불렀기를 빌고 빌었지만, 훈련소장은 연우를 똑바로 보며 손짓하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았다 뜬 연우는 손을 내려보았다. 아무리 연습해도 이능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통통 튀는 마나볼처럼 제멋대로 튀어 오르는 이능을 잡아 누를 수가 없었다. 언젠간 들키겠지, 생각했지만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들킬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떨리는 손을 감춘 연우가 걸어 나가자 멀리서 조희서가 다가왔다. 그래도 같은 팀이라고 가이딩을 해주려나 보다, 하는 일말의 기대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가온 조희서는 가이딩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 뒷짐을 쥔 채 속삭였다.

“너 이제 쫓겨날 것 같지?”

비아냥거리는, 그리고 약간의 들뜸이 묻어 있는 조희서의 목소리를 뒤로한 연우는 얼음 앞에 섰다. 무게를 가늠하기 위해 팔을 벌리는데, 서늘한 얼음이 손에 닿는 순간 청아한 마나가 느껴졌다.

손끝을 간지럽히고 흩어지는 맑은 기운에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맴돌았다.

“저기에 옮겨놔요.”

훈련소장의 말에 웃음기를 지운 연우는 훈련장 구석을 바라보았다. 좌표를 그린 연우가 쿵, 쿵, 아프게 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여기서 실수하는 순간 훈련소장이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긴장해서 그렇겠지, 하고 넘어가 주면 정말 다행이겠지만 이능 테스트를 다시 받아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퇴출로 끝이 나면 좋겠지만 최악의 경우 연화의 보호자 자격을 잃을 수도 있었다.

연우가 보호자로 있는 지금도 연화의 책을 한 줄 이라도 읽어보려 성황인 사람들이었다. 연화를 지켜줄 수 있는 보호자 자격마저 잃는다면 연화의 후견인이 누가 되든지, 연화의 이능만 빨아먹겠지.

그들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긴장감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못하겠다고 뺄 수도 없었다. 공간계 이능력자가 단순히 물건을 옮기는 것뿐인데 여기서 못하겠다고 도망가는 건 이능에 자신이 없다고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제발. 제발. 실수 없이.

한숨을 쉰 연우는 좌표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손 안 가득 잡혀있던 얼음이 분해되는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수고했어요.”

자리로 돌아가라는 훈련소장의 말에도 꼼짝없이 제 손을 내려보던 연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능을 쓸 때마다 몸 어딘가에서 느껴지던 반발력이 사라진 상태이었다. 좌표에 얌전히 옮겨진 얼음을 보며 숨을 고르던 연우는 활짝 웃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짜릿한 희열감에 연우는 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팀원들에게 돌아가는 걸음걸음이 어찌나 가벼운지 훈련장이 아니라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최동원을 향해 걸어가던 연우는 반걸음 물러났다. 커다란 무언가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위를 올려보자 팔짱을 낀 강차헌이 삐딱하게 서서 연우를 내려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매섭게 생겨서 함부로 말을 붙이기 어려운 얼굴이다. 거기에 큰 키 때문인지, 딱 벌어진 어깨와 체격 때문인지 올려다보자 위압감이 상당했다. 연우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서자 강차헌이 쑥, 손을 내밀었다.

“강차헌입니다.”

“네?”

“강차헌이라고요.”

재촉하듯 살랑살랑 흔들리는 손을 보며 눈을 깜박이던 연우가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굳은살이 딱딱하게 배겨 아플 줄 알았는데, 마주 잡은 손은 예상외로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사람의 손에 이런 비유를 하는 게 좀 우습긴 했지만, 담요에 폭 싸인 듯 포근하기까지 했다.

“연우야.”

맞잡은 손을 멍하니 내려보고 있던 연우가 화닥 놀라 손을 빼려고 했지만, 강차헌은 연우의 손을 단단히 옭아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동안 사뿐사뿐 다가온 조희서가 눈꼬리를 접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이딩 안 해도 돼?”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지나치게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내는 조희서를 찜찜한 눈으로 바라보던 연우는 고개를 틀어 강차헌을 올려봤다. 나는 연막이군.

굳이 받을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연우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달뜬 목소리가 차헌을 향했다.

“강차헌 에스퍼는 가이딩 필요없으,”

“네.”

말이 중간이 끊겼음에도 조희서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 하나 없었다. 아, 그러시구나. 하는 아쉬움만 가득할 뿐이었다. 박서현이 가이딩 좀 해달라고 우는 소리를 몇 번이나 내고 나서야 적선하듯 가이딩을 해주던 태도와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아쉬움을 가득 담은 눈으로 자신을 흘끔흘끔 바라보는 조희서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차헌이 손을 잘게 흔들었다. 그 손짓에 온몸이 요동치는 걸 억누른 연우가 왜 그러냐는 듯 올려보았다.

“이름.”

“네?”

“이름 못 들었어요.”

“아, 보조계 한연우입니다.”

연우의 대답에 맞닿은 손을 물끄러미 내려보던 차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휘적휘적 빠져나가는 강차헌의 뒤를 A 구역 훈련소장이 뒤따랐다. 그 뒤로 다시는 강차헌을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저 사람은 왜 또 왔대요?”

최동원의 물음에 연우는 속으로 그러게요, 답하며 훈련장 구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강차헌이 뚱한 얼굴로 둥지를 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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