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10화 (10/143)

10화

-아니, 오빠 나 일어났어. 진짜 일어났어.

“거짓말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

졸음기 가득한 연화의 칭얼거림에도 끊임없이 재촉하며 훈련장으로 들어가던 연우는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능력자들을 보고 눈인사를 건넸다.

저마다 다른 곳에서 몸을 풀고 있었지만, 시선이 닿은 곳은 한군데였다.

어딜 보는 거야?

몸을 돌리자 구석에 자리를 잡은 강차헌이 벽을 바라보며 둥지를 틀고 있었다.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둥지였다. 강차헌이 앉은 자리 주변으로 삐죽삐죽한 얼음이 솟아올라 누가 봐도 여기에 강차헌이 앉아있다. 하고 알려주고 있었다.

갑자기 C 구역에 출몰하기 시작한 강차헌은 훈련장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거나, 벽을 보고 서 있거나, 갑자기 훈련용 공을 뻥뻥 차 대곤 했지만 대부분 저렇게 둥지가 생길 때까지 앉아있다가 A 구역으로 돌아가곤 했다.

“왜 왔대요?”

그러니까.

강차헌이 나가기를 기다리던 연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로 자연스럽게 얼음 치우기 담당자가 된 연우는 얼음 둥지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아침마다 연습하고 있으니, 연습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면 일도 아니지만 귀찮은 건 귀찮은 거였다.

“자기 구역도 있으면서 굳이….”

도와주겠다며 다가온 최동원이 투덜거렸다. 그 소리에 같이 몸을 풀고 있던 에스퍼들이 맞아요, 거기 훈련장 엄청 좋다면서요. 작게 외치며 불만에 동조했다.

“A 구역 입구부터 경비 삼엄한 거 봤어요?”

“우리는 구경도 안 시켜줘 놓고… S급이면 저렇게 남의 구역에 쳐들어와서 마음대로 연습해도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요.”

훈련장에 들어서던 에스퍼들도 한쪽에 놓인 강차헌의 둥지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힐끔거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센터 전제적으로 깔린 차별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S급이 자신들을 무시하고, 그 태도를 아무도 지적하지 않으니 당연히 열받을 것이다. 그런데도 강차헌이 자신을 흘끔거릴 때마다 혹시…? 하는 기대감을 버리지 못하는 스스로 자괴감도 느낄 테고.

그러니 대놓고 불만을 표하지 못하고 이렇게 몰래몰래 뒷말을 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A 구역은 훈련을 얼마나 험하게 하는 거래요?”

우리는 아직도 마나볼 갖고 장난만 치고 있는데. 불만 어린 중얼거림에 에스퍼들이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러다가 가상 던전에 들어가서 누가 팀원이고, 뭐가 마수인지 구분 못 하고 서로 공격하다가 다쳐서 나오는 에스퍼들 여럿 봤다.

혀끝을 깨물던 연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방금의 말처럼 강차헌의 얼굴에는 볼 때마다 상처가 하나둘 늘어나 있었다. 오늘은 입술이 얻어터져 있던데… 그렇게 다칠 일이 뭐가 있지? 체술 훈련이라도 하는 건가?

“아무래도 우리랑 다르긴 하겠죠?”

“우리도 다른 것 좀 했으면 좋겠어요.”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훈련소장은 오늘도 역시 두 손 가득 마나볼을 쥐고 들어왔다. 입을 삐죽이는 팀원들과 자리를 잡은 연우는 마나볼에 마나를 흘려 넣고 이능을 사용했다.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좌표 위로 말끔하게 떨어지는 마나볼에 미소를 지은 것도 잠시,

“역시. 그럴 줄 알았지.”

조희서의 이죽거림에 연우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박서현에게 떨어져야 할 마나볼이 최동원의 손에 들려있었다.

“너 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아닐 겁니다. 한연우 에스퍼 오늘도 여기서 잤죠? 그리고 아침부터 연습했고.”

그렇다는 대답에 목덜미를 문지르던 박서현은 훈련소장에게 달려갔다. 박서현과 대화를 나누던 훈련소장은 연우를 바라보다 입구를 손짓했다.

“가서 좀 쉬고 와요. 마나 코어 과부하 온 걸 수도 있으니까.”

등을 미는 손길에 터덜터덜 걸어가던 연우는 허망한 표정으로 손을 내려봤다.

이건 뭐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왜 됐다 안 됐다 난리야?

마나 과부하가 올 만큼 많은 이능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아침에 강차헌의 둥지를 옮길 때만 해도 멀쩡하던 이능이 왜 훈련을 시작하자마자 난리인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심장에 붙어있는 마나 코어를 뜯어내 따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연우는 휴게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박서현의 말대로 너무 오래 연습해서 과부하가 온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마나 코어에 문제가 생긴 거라면? 센터에서 쫓겨나겠지. 그렇다면 연화는?

천장을 올려보던 연우는 눈을 감고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내려 했다. 생각은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은 마나 코어를 가라앉히는 게 우선이었다.

심장 주변을 부드럽게 배회하는 마나를 느끼며 의식적으로 머리를 비우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혹시,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튀어 올랐다. 결국 잠이 드는 데 실패한 연우가 훈련장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또 생겼네.

훈련장 구석에는 아침에 말끔하게 치워뒀던 둥지가 솟아올라 있었다. 그 안에 얌전히 앉아있는 강차헌을 보던 연우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어렸을 적 책으로 성을 쌓아 그 안에 얌전히 앉아있던 연화의 모습이 떠올라 자꾸만 시선이 그쪽으로 갔다. 덩치부터 시작해서 외형이나 능력까지,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도 그랬다. 넓은 곳을 두고 꼭 구석에 자리를 잡는 것 때문에 그런가.

연화는 넓다 못해 광활한 정신계 반 한구석에서 늘 인형처럼 앉아있었다. 아무런 표정 없이 가만히 앉아 그림만 그리던 연화는 연우를 발견하고 나서야 표정이 돌아왔다. 제 품 안에서만 울상을 짓는 연화를 끌어안으며 연우는 다짐했었다. 내게 의지하는 이 작은 아이를 지켜주겠다고.

뭐, 어쩌다 보니 연화가 연우를 보호하는 경우가 더 많긴 했지만.

보호받고 싶으면 S급 말고 나보다 낮은 등급으로 각성하던가. 어깨를 으쓱인 연우는 바닥에 널려있는 훈련 도구를 보며 혀를 찼다.

어떤 자식이냐.

자기가 쓴 물건은 자기가 정리해야 한다는 법도 모르나. 혀를 끌끌끌 차던 연우는 근질근질한 손을 잡아 누르며 핀을 꺼냈다. 치워주다 보면 당연히 누가 알아서 정리하겠거니, 하고 계속해서 내버려 둘 확률이 높았다.

연우가 조금 늦은 날, 누구 한 명쯤은 나서서 강차헌의 둥지를 치울 만도 한데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연우만 멀뚱히 기다리는 것만 봐도 답이 나왔다.

알아서 정리하겠지.

텅 빈 훈련장을 둘러보던 연우는 강차헌의 둥지와 적당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넓어서 좋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훈련할 자리가 없어서 훈련종료 알람이 울리자마자 눈치 싸움을 해야 했었는데. 마나볼로 단순한 반복 훈련을 하는 것도 지겹고 강차헌이 기웃거리니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개별 훈련하는 사람들이 없어졌다.

덕분에 넓게 쓰고 좋지, 뭐.

자리를 잡고 앉은 연우는 이능을 사용하기 전에 마나 코어부터 확인했다. 불쾌한 두근거림도 없었고 이명 또한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힘없이 픽, 떨어지거나 엉뚱한 곳에 떨어지는 탁구공을 노려보던 연우가 뒤를 바라보았다. 벽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던 강차헌이 훈련장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쪽저쪽 왔다 갔다 하던 강차헌은 훈련 도구가 널린 곳에 슬그머니 앉았다. 원래의 목적이 저거였나보다. 앉아서 이것저것 건드리는 강차헌을 지켜보던 연우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딱 보면 방패인 것도 모르나. 대체 공격계가 방패 들고 뭐 하려고. 특별한 훈련이라도 하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거였다.

한참 동안 훈련 도구를 건드리기만 하는 강차헌을 지켜보던 연우가 눈을 데굴, 굴렸다.

그러고 보니….

평균적으로 12살 전후로 각성하는 에스퍼와 달리 강차헌은 19살, 꽤 늦은 나이에 각성했다. 평생 평범한 일반인으로 살 줄 알았던 19살의 강차헌은 양궁 선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각성했지. 그것도 국가 대표를 선발하는 시합 날에.

경기하다가 갑작스럽게 각성한 강차헌은 자신이 에스퍼라는 걸 쉽게 인정하지 못했다. 보호를 받으며 집으로 돌아간 강차헌은 그대로 칩거했다. 그리고 자신이 쌓아 올렸던 모든 업적이 어쩐지 에스퍼라서 그랬구나, 하는 말로 폄하되는 걸 지켜봐야 했다.

문을 걸어 잠근 강차헌은 모든 사람의 방문을 거절했지만, 전국의 길드장은 강차헌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넓은 양궁장을 한순간에 얼려버린 강차헌이다. 그 짧은 순간만으로 판단할 수 있을 만큼 능력이 대단한 강차헌을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내로라하는 길드장들이 직접 문을 두드렸지만, 강차헌은 자신의 방에 틀어박힌 채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런 강차헌을 집 밖으로 나오게 만든 게 센터장이었다. 차헌은 자신을 ‘국가 대표’ 에스퍼로 만들어 주겠다는 모두의 제안을 거절하고 센터장의 손을 잡았다.

차라리 길드에 들어가서 돈을 받지.

평생 일반인으로 살아오신 강차헌의 부모님은 아들이 센터에서 얼마나, 어떻게 갈려 나갈지 꿈에도 모른 채 센터로 향하는 강차헌을 배웅했었다.

하루라도 빨리 강차헌이 대한 에스퍼 센터와 계약했다고 못 박아두고 싶었던 센터장은 사관학교 과정을 3개월로 단축해버렸다.

1년 풀코스를 꽉꽉 채워 들어도 이능 사용이 어딘가 어설픈 게 사관학교 출신 이능력자였다. 사관학교 내부 강사들은 대부분 센터 소속 에스퍼라 던전을 공략하랴, 마수를 토벌하랴, 위험 구역을 정화하랴, 게이트를 찾아내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 에스퍼들이었으니 모든 수업은 이론 수업으로 대체되었다.

아주 가끔, 가뭄에 비 오듯 실습을 할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모두 수박 겉핥기식이었다. 그러다가 가끔 외부 강사로 길드 소속 에스퍼들이 초청될 때도 있었다. 그들은 뭔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될성부른 떡잎을 골라내 길드 산하 아카데미에 편입시키기 위해 방문했다. 제대로 된 선생님이 없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 자체를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런 곳에서 3개월만 배우고 나왔으니 제대로 배운 게 당연히 없겠지.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이능에 강차헌은 불안해했지만 센터장은 일단 센터로 가자고, 거기만 가면 된다며 순진한 애를 꼬드겼다.

제대로 된 교육을 기대한 강차헌은 떨리는 마음으로 센터로 향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A 구역 각성자들은 강차헌의 어리숙한 이능을 다독여주기는커녕 S급이 저게 뭐냐며 비웃기 바빴다.

그런 곳에 있다 보면 우직한 사람도 삐뚤어질 게 분명한데 아직 어린 강차헌이 엇나가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조롱을 무시하고 훈련하는 강차헌을 보며 센터장은 연습을 안 해도 완벽한데 왜 이리 열심히 하냐며 칭찬 아닌 질타를 했고, 부센터장은 뭘 하든 강차헌이 잘했고 나머지가 못했다며 무조건 강차헌을 두둔했다.

그러니까 애가 저렇게 싸가지가 없지.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