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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11화 (11/143)

11화

“어제 훈련 도구 정리 안 하고 퇴근한 사람 자수합시다.”

훈련소장의 말에 어디선가 흡,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심드렁한 눈으로 훈련명단을 뒤적거리던 훈련소장은 볼펜을 딸각였다.

“박채은 에스퍼. 10점 감점입니다. 팀원들은 5점 감점.”

“네? 아니, 훈련소장님. 저는 정리했는데요.”

“첫날 설명 못 들었습니까? 팀원들은 운명공동체라고. 던전에 들어가서도 그렇게 말 할겁니까, 강민준 가이드? 나는 했는데 쟤는 안 했어요. 그렇게?”

그 말에 에스퍼가 뭐라고 반박할 듯 입을 열었지만, 훈련소장은 손을 흔들어 입을 막아버렸다.

“첫날 분명 경고했습니다. 적색 경고가 울리지 않는 이상 하고 있던 일은 마무리해야 한다고. 할 말 있습니까?”

그 말에 눈을 에스퍼는 눈을 내리깔았지만, 가이드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런 둘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훈련소장은 마나볼이 가득 담겨 있는 바구니를 끌고 왔다.

“오늘도, 역시나.”

힘없이 중얼거린 최동원이 마나볼을 가져왔다. 손목을 풀고 있던 연우가 경고하기도 전에 튀어 나간 박서현이 마나볼을 회수했다.

“흠집 있어요.”

C 구역의 훈련 도구는 노후화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다른 훈련 도구는 낡아도 그럭저럭 쓸만했지만, 마나볼은 아니었다. 마나를 제대로 가둬두지 못하는 마나볼로는 아무리 훈련을 해봤자 그 어떤 효과도 얻지 못할 테니까.

눈치껏 정상품을 골라도 훈련 중 뻥, 뻥, 터지는 게 마나볼이다. 최동원은 불량품을 쌓아두는 곳에 마나볼을 던져두고 새로 가져왔다. 그렇게 구석에 쌓인 마나볼이 한가득이었다.

그러니 강차헌이 흠집투성이 마나볼을 가지고 노는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예상된 일이었다는 거다.

이를 악문 연우는 훈련장에 널브러진 훈련 도구를 노려봤다.

이 자식들이 훈련 도구 제때제때 정리 안 하지.

다른 곳에 비해 인력난이 심한 센터가 자신들을 쫓아낼 수 없다는 걸 확신한 이능력자들은 대놓고 삐딱선을 탔다. 아침에 훈련소장이 아무리 경고를 해도 귀찮다는 듯 눼~ 대답하고는 자기들끼리 키득거렸다.

벌점을 받아봤자 눈에 보이는 불이익이 없으니 대놓고 훈련소장 앞에서 농땡이를 부리는 모습까지 보였다.

아니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훈련장 한쪽 구석엔 정말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엉망으로 훈련 도구가 흩어져있었다. 다른 에스퍼들이 그래도 정리를 해야 하지 않겠냐고 따지면 어차피 내일 와서 똑같은 훈련을 할 건데 뭐 하러 정리하냐며, A 구역과 달리 청소하는 사람도 없는데 어질러놔도 뭐가 문제냐며 되려 소리를 높였다.

뭐가 문제기는, 쟤가 문제다.

연우는 초조한 얼굴로 차헌을 살폈다. 아예 자리를 잡은 차헌은 슬라임으로 만든 훈련 도구를 떡 주무르듯 주무르고 있었다.

아이고 힘도 좋지.

정해진 자리가 아니면 들어가지 않고 튕겨 나오는 훈련 도구는 차헌이 꾹꾹 밀어 넣은 대로 구겨져 있었다. 뿌듯한지 슬며시 웃고 있는 얼굴에 잘했다고 박수라도 쳐 줄 뻔했다. 그래그래, 잘했으니까 이제 저기 가서 놀라고 쫓아내고 싶었다.

훈련 도구를 닥치는 대로 구겨놓은 것에 만족하지 않은 강차헌은 하필이면 불량 마나볼을 쌓아놓은 곳을 기웃거렸다. 마찬가지로 불량으로 분류된 훈련 도구를 살펴보던 강차헌은 마나볼을 훈련 도구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연우는 벌떡 일어나 강차헌에게 다가갔다.

“저기.”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던 건지. 연우의 부름에 차헌이 고개를 쐑, 돌렸다. 기가 막힐 정도의 반사신경에 한 대 얻어맞을 뻔한 연우가 한발 물러서자 마나볼을 쥐고 있던 차헌이 삐딱하게 고개를 틀었다.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요.”

그런데요?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을 참은 연우는 눈꼬리가 뾰족해지지 않게 힘을 줬다. 이쪽을 내려보고 있는 오만한 눈매를 보자 내가 괜한 짓거리를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후회가 밀려들었다. 지금이라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불량 마나볼과 행복하게 놀라고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연우의 눈에는 차헌의 모든 행동이 갓 태어난 두 살짜리 아기가 칼을 들고 설치는 것과 별다를 것 없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러다가 다치는 걸 뻔히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것도 못 할 짓이다.

미간을 꾹꾹 누른 연우는 훈련 도구를 살폈다. 저기 활도 있는데 특기 살려서 화살 쏘고 놀 것이지 꼭 위험한 걸 건드리고 있어. 혀끝을 깨문 연우가 훈련 도구 더미에서 공격계 훈련 도구를 몇 개 골라냈다.

이 정도면 안전하게 놀겠지.

옆을 돌아보자 쪼그려 앉은 강차헌이 방어계 훈련 도구, 방패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건 방어계용이고 이게 공격계용이에요.”

조심스럽게 손에 들린 방패를 빼내며 뒤쪽을 가리키는 연우의 말에 강차헌의 고개가 돌아갔다. 검은 눈동자가 연우가 따로 빼놓은 도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이쪽으로 돌렸다.

“그래서요.”

허.

방긋 웃은 연우는 방패를 돌려주었다. 이 망할 오지랖. 칼을 들고 망나니짓을 하든, 마나볼을 터트려 먹든 상관할 바 아니었다.

언감생심 고맙다는 말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래서요?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대로 몸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이건 방어계용이라면서요. 근데 왜 나한테 주는데요.”

방패를 내려놓은 차헌이 연우의 훈련복을 붙잡고 있었다. 중심을 잡기 위해, 그리고 차헌을 자연스럽게 뿌리치기 위해 몸을 흔들었지만, 차헌의 손은 굳건하게 훈련복을 붙잡고 있었다.

S급은 손가락 힘도 센가?

어떻게 하면 훈련복을 잡아뺄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연우를 빤히 올려보던 강차헌이 바닥에 놓여있던 훈련 도구를 가리켰다.

“저거는요.”

“네? 그건 보조계용인데요.”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건지, 자기 눈에 멋있어 보이는 건지, 아니면 못 먹는 떡이 탐이 나는 건지, 강차헌이 들어 올리는 것마다 방어계 아니면 보조계용이었다.

심지어 마지막에 집어 든 건 가이드용 측정기였다.

그런 강차헌의 뒷모습을 내려보는 연우의 눈이 가라앉았다. 누가 봐도 제대로 훈련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마나를 다루는 법도 몰라서 허공에 얼음덩이를 만드는 실수를 했겠지.

S급 대접은 어딜 가나 다 이런 식인가.

변한 게 하나도 없네. 혀를 찬 연우는 홱, 올려보는 강차헌과 눈을 맞췄다. 너 보고 찬 거 아니니까 눈에 힘 좀 풀어라.

차헌의 옆에 쪼그려 앉은 연우는 훈련 도구를 구분했다. 대충 보다가 흠집이 있는 건 휙휙 던져놓자 눈으로 연우의 손을 쫓던 차헌의 귀를 붉혔다. 이제야 저쪽이 쓰레기통으로 쓰인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뭐, 모를 수도 있다. 앞으로 배워가면 되는 거지.

“이쪽이 공격계용이에요.”

“그런데요.”

일관된 대답에 연우가 방긋 웃었다.

너 진짜 내 동생이었으면 한 대 맞았어. 웃는 얼굴로 이를 악문 연우는 멀쩡한 마나볼을 몇 개 골라주고 일어났다. 이 정도면 혼자서 연습하겠지, 싶었지만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몸이 또다시 기우뚱, 기울었다.

“이건 왜 줬는데요.”

차헌의 손이 가리키고 있는 건 마나볼이었다.

왜기는, 연습하라고 이 자식아. 또 하늘에 얼음 둥둥 띄우지 말라고.

혀끝을 깨문 연우가 차헌의 옆에 앉으려는데 저 멀리, 연우의 짐 속에서 벨 소리가 들렸다. 연화의 알람으로 지정된 벨 소리라 급하게 일어난 연우는 바로 공간을 접었다.

“여보세요?”

-오빠. 오늘도 집에 안 와?

“그러려고 했는데, 왜?”

-아니 오랜만에 밥이나 같이 먹을까 했지.

잠기운이 흠뻑 묻어나오는 나른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린 연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딱 봐도 자다 일어난 것 같은데 지금까지 잤으면 아무것도 안 먹었겠네. 메뉴를 고민하며 짐을 주섬주섬 챙겨 나가려던 연우가 몸을 돌려 강차헌을 찾았다.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강가에 애를 내둔 기분이라 오늘은 이만 돌아가라고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잠시만, 저거 마나볼 아닌 것 같은데.

기껏 쥐여준 마나볼을 내려놓은 차헌이 다른 훈련 도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마나볼과 아주 흡사하지만 다른 종류의, 수중계 에스퍼를 위한 훈련 도구였다. 그걸 슬라임 볼처럼 주물럭거리는 모습에 심장이 조마조마해졌다. 저렇게 작은 워터볼에 물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모르고 저러는 게 분명했다.

“어, 잠시, 강차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차헌의 마나와 만난 물이 얼어붙으며 팽창하는 소리가 들렸다. 쯔억, 하고 볼이 갈라지는 소리에 전화를 끊은 연우는 공간을 접어 차헌에게 달려갔다.

“놔요!”

“뭔데요!”

“놓으라니까?”

깜짝 놀란 차헌은 워터볼을 쥐고 놓지 않았다. 연우는 뺏기지 않으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린 차헌의 손을 내려보다 혀를 찼다.

사람이 경고를 해주면 알아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말도 더럽게 안 듣지.

워터볼 대신 차헌의 손목을 잡은 연우는 둘을 통째로 샤워장으로 이동시켰다. 샤워장의 문을 닫은 연우가 워터볼을 놓으라고 소리쳤지만,

쏴아아악.

이미 늦었다.

파도가 내려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물이 쏟아졌다. 좌표를 잡을 시간도 없이 물살에 떠내려가던 연우는 차헌의 손을 붙잡았다. 이대로 물을 얼린다면 연우와 차헌은 얼음 속에 박제될 게 분명했다.

“푸하.”

열심히 발을 놀려 수면에 얼굴을 내민 연우는 차헌의 팔을 들어 올렸다.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강차헌은 이내 상황을 이해한 듯 순순히 만세 자세를 취했다.

눈 밑이 따끔거리는 게 그냥 물이 아닌 바닷물인 모양이었다. 배수구를 통해 물이 천천히 빠지는 동안 얌전히 동동 떠 있던 연우는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강차헌을 흰 눈으로 힐끔거렸다.

저러다 얼굴 터지겠네.

물이 어느 정도 빠지자 철벅 철벅 걸어간 연우는 샤워기를 틀어 따가운 눈 밑을 정리했다.

소금물에 절여져 빳빳해진 머리카락에 물을 적셔서 소금기를 빼는 동안 강차헌은 그 자세 그대로 꼼짝도 안 하고 아래를 보고 있었다.

자기가 잘못한 건 알고 있나 보군.

물 온도를 가늠해보던 연우는 바닥에 고인 물을 쓱쓱 밀어내며 차헌에게 걸어갔다.

쿠와아악.

물이 말끔하게 빠지는 소리에 차헌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저기서 더 붉어질 수 있을까, 싶은 얼굴을 올려보던 연우가 차헌의 팔을 내려주었다.

안 끌려오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이 무색하게 차헌은 얌전히 따라와 샤워기 아래에 섰다. 엉망으로 젖어있는 차헌의 모습에 연우는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방심하면 빵, 터질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자책하고 있는 애 앞에서 웃을 수는 없지.

샤워기 아래에서 멍하게 물을 맞고 있는 차헌의 몸을 돌린 연우가 세수하는 시늉을 하자 차헌이 주춤주춤 손을 들어 올렸다.

아이고 세상에. 연화도 세수는 혼자서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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