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그냥 바닷물이니까 대충 씻어내고 나와요.”
찝찝하면 씻고 가라고 말하려던 연우는 눈을 굴렸다. 연우야 여유 옷이 있다지만 강차헌은? 빌려주려 해도 딱 봐도 사이즈가 안 맞아 보인다. 뭐, 그런 거야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진짜 애도 아니고.
수건을 뽑아 건넨 연우는 물기를 닦아내는 차헌을 보며 감탄했다. 안 그래도 입고 꿰맨 듯이 딱 달라붙어 있던 훈련복이 물에 젖으니, 무슨 진공포장으로 사람을 가둬둔 것 같았다. 저러고 걸을 수는 있나? 벗는 것도 일이겠다.
혀를 찬 연우는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보급소가 열려있는 시간이었다. 훈련복을 새로 받고… 집에 가면 되겠다. 시간을 계산한 연우는 어떻게든 물을 쥐어짜 보려는 차헌에게 손짓했다.
“찝찝하면 훈련복 새로 받아서 갈아입고 가요.”
하지만 차헌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뚱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탈탈 털어낼 뿐이었다. 뭐지? S급은 A 구역에서 훈련복을 맞춰야 하나?
돌아가려는지 출구 쪽으로 향하는 차헌의 뒷모습에 연우가 잠시 고민했다. 저러고 돌아다니면 풍기 문란으로 신고당할 것 같은데.
차헌도 고민이 되는지 문고리를 잡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대로 척, 척, 물소리를 내며 돌아오는 차헌에게 남는 훈련복이라도 빌려줘야 하나, 주변을 둘러보던 연우는 깜짝 놀랐다.
“감사합니다.”
허리를 숙인 차헌이 우물쭈물하더니 다시 한번 허리를 굽히고 그대로 걸어 나갔다. 물 자국이 흥건히 남은 바닥을 보던 연우는 입을 틀어막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인사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 * *
“뭐야. 꼴이 왜 이래.”
“또 거기서 잤어? 잘 거면 편하게 자라니까.”
“밥 먹고 자려고 잠깐 앉은 거야. 보자마자 잔소리야.”
“지는? 문 열고 들어오자마자 뭐? 꼴이 왜 이래?”
집으로 들어가자 식탁에서 졸고 있던 연화가 손을 흔들며 맞이했다. 인사하는 연우를 보자마자 비린내가 난다며 질색하는 연화 때문에 남매 상봉의 시간은 짧게 끝났다.
급하게 말려서 그런지 곱슬거림을 넘어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에 물을 적시던 연우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흔한 감사 인사였지만 같은 에스퍼끼리 서로 돕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다 보니 감사하다는 인사를 주고받은 지가 제법 오래되었다. 민망함과 묘한 기쁨에 비누칠하던 연우는 그만 손에 얼굴을 묻고 푸흐흐 웃었다.
물기를 닦고 나오자 길게 하품하며 일어나던 연화가 연우에게 손짓했다.
“그것 좀 데워줘. 웬 인덕션이야?”
“윗집에 화염계 에스퍼가 이사 와서. 각성한 지 얼마 안 됐다고 불안하다고 싹 바꿔주더라.”
거짓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주 작은 불씨만 봐도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몰려오는 불안함과 두려움에 숨도 못 쉬고 덜덜 떨고 있다 보면 손이 녹아내리는 듯한 환상통이 온몸을 덮쳐왔다. 며칠 동안 환상통에 시달리던 연우는 가스레인지를 떼다 버렸다.
불씨뿐만 아니라 온기가 있는 음식조차 거부감이 들어 따뜻한 음식을 먹은 지가 오래였다.
연화가 잠을 자기 위해 기숙사에 들르지만 않았어도 열기를 내는 기계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리 와. 가르쳐줄게.”
연우의 설명에 인덕션을 기웃거리던 연화는 갑자기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왜?”
“아니, 화염계가 불낼까 봐 인덕션으로 바꿔줬다는 게 웃겨서. 걱정하지 마, 당분간은 불 안 나.”
“당분간만?”
연우의 질문에 연화가 눈을 데굴, 굴렸다.
“잘 모르겠네. 오빠가 인덕션으로 바꿨는지도 몰랐는걸. 알잖아,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누가 무슨 선택을 하냐에 따라 미래는 바뀐다고.”
당연한 말이지만 연화가 그 말을 하는 게 조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누가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어떤 미래를 불러오는지, 그 너머의 연장선까지 모두 예지하는 게 연화의 능력이었다. 연우가 인덕션으로 바꿨다는 것도 예상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인덕션 전용 냄비에 국을 담아왔을 리가 없지.
“뭐, 이제 막 각성했으면 이능이 조금 불안정할 테니까 조심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오빠도 막 각성했을 때는 집에서 꼼짝도 안 했잖아. 밥도 내가 떠먹여 줘야 겨우 먹었고.”
이제부터 널 놀리기 시작할 거라고 시동을 걸고 있는 연화를 보면서도 연우는 아무 반격도 못 하고 달아오른 귀만 문질렀다.
갓 각성했을 때의 연우는 의식하지 못하고 마나를 흘리고 다녔다. 문제는 연우가 공간이동능력자라는 거지.
연화의 말처럼 밥을 먹다가 가자기 숟가락이 사라진 적도 여러 번이라 연화가 고사리손으로 밥을 떠 먹여줬고, 저도 모르게 만들어진 좌표를 밟고 낯선 곳에서 눈을 뜬 적은 정말 수도 없이 많았다.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이 갑자기 사라져 찾아 헤매는 일이 늘어나다 보니 모든 물건이 각자 정해진 자리에 놓여있어야 마음이 놓였다.
사관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이능을 능숙하게 다루다 보니 물건이 갑자기 사라지는 일은 없었지만, 물건의 위치에 집착하는 강박증은 없어지지 않았다.
“근데 밥솥은?”
“아, 고장이 나서 수리 맡겼어.”
이 또한 거짓말이었다.
밥솥에서 김이 빠지는 소리에 비명을 지를 수도 없을 만큼 빳빳하게 굳어있던 연우는 더운 열기가 빠지자마자 밥솥을 붙잡고 좌표를 설정했다. 아마 지금쯤 바다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을 거다.
“그래서 빵만 먹고 살았어? 즉석밥은 없어?”
따끈한 국에 밥 말아 먹고 싶은데.
그 말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따끈한 국이라니.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다른 거 먹으면 되지.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치킨?”
“족발 말고? 족발집이 망하고 치킨집이 생기긴 하는데 그건 2년 뒤야.”
식탁에 볼을 대고 웅얼거리던 연화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 터졌나? 연화를 끌어안은 연우가 허리를 바짝 세우고 긴장했다.
“뭐야, 손 치워. 센터에 치킨집 생겼어?”
자기를 두고 치킨을 먹은 거냐며 발광하는 연화를 보던 연우는 어이가 없어 식탁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만하고 족발이나 시키라고 손짓한 연우는 서늘한 식탁에 이마를 기댔다.
“뭔데? 머리 아파? 귤 먹을래?”
두통이랑 귤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묻기도 전에 입을 벌린 연화가 귤을 쑤셔 넣었다. 당도가 이 세상 당도가 아닌 걸 보니 단순한 귤이 아니라 던전 부산물인 게 분명했다. 식탁 한쪽에 쌓인 파란색 귤을 보며 천천히 턱을 놀리던 연우는 연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보는데?”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요즘 들어 잠을 푹 못 잔다고. 간신히 잠이 들면 꿈 때문에 화들짝 놀라 일어난다고. 무슨 꿈인지 제대로 기억도 안 나면서 심장을 죄는 불안감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다고.
이상한 위화감과 기시감 때문에 하루 종일 주변을 살피면서 다닌다고.
분명 처음 보는 것들인데, 이상하게 낯이 익다고. 익숙한 훈련 도구를 찾을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고.
그게 아니면 이능이 튄다고 말해야 할까.
그렇게 자는 것도 잠이라고 아침에 일어나면 이능이 그나마 말을 듣는데 오후가 되면 될수록 마나에서 반발력이 느껴진다고. 직업을 잃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너를 지킬 수 있는 자격을 잃어버리게 생겼다고.
눈을 깜박거리던 연우는 귤을 턱짓했다.
“맛있네. 좀 더 까봐.”
“손이 없어?”
까서 먹으라며 투덜거리면서도 흰 줄까지 떼어주는 연화를 보며 연우는 눈을 감았다.
안 그래도 제 이능을 노리고 책을 훔치려 드는 사람들의 등쌀에 힘들어하는 연화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숨도 편하게 잠이 들지 못하는 연화에 비하면 연우의 고민은 너무 가벼워 말할 가치도 없었다. 괜한 걱정을 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아까 그래서 뭔 난리가 난 거야?”
그 말에 족발 포장을 뜯던 연우가 잠시 눈을 굴렸다. 연화 앞에서 강차헌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간 이야기를 나눠야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연화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으니까.
죽음을 피할 수 있게 준비해둔 다음에…. 생각하던 연우는 몰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문질렀다. 쟁반국수를 비비던 연화가 귤을 내밀었지만, 연우는 손을 흔들어 거절했다.
“너… 아프면 약 먹어. 이런 거 먹지 말고.”
“와, 동생이 걱정을 해줘도 난리야. 에스퍼한테는 약 안 듣거든? 이런 게 오빠가 받아오는 이상한 포션보다 훨씬 효과 좋거든?”
“우와. 걱정했어?”
그 말에 연화의 눈매가 좁아졌다.
“당연한 거 아냐?”
농담처럼 받아친 말에 진심이 듬뿍 담긴 걱정이 돌아왔다. 당황한 연우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민망함에 쌈 채소가 담겨있는 봉지가 안 뜯기는 척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뭘 하든 조심해. 아무리 나라도 모든 미래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본다고 해도 주의하라고 경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오빠 때문에 괜히 나도 민망해졌다며, 족발을 입에 욱여넣던 연화는 더는 못 먹겠다며 부른 배를 껴안고 벌렁 누웠다. 양치를 하라는 말에도 꾸물거리며 침대로 향하는 연화의 뒷모습을 보며 연우는 연화가 그랬듯 혀를 끌끌 찼다.
그대로 잠이 든 연화에게 이불을 덮어준 연우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연우가 훈련에 집중하는 동안 연화가 몇 번 왔다 갔는지 집안의 배열이 미묘하게 바뀌어있었다. 안 그래야지, 무시해야지, 하면서도 시선이 계속 갔다. 결국 한숨을 쉬며 일어난 연우는 자리가 바뀐 책부터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았다.
책장의 꼭대기부터 착착착 정리해서 내려오던 연우는 컵의 위치를 제대로 돌려놓기 위해 일어나려 했다. 책장 아래 구깃구깃 밀어 넣은 연화의 노트가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바로 달려갔을 거다.
얼마나 있는 힘껏 밀어 넣은 건지 노트는 압축된 것처럼 구겨져 있었고 표지는 찢겨 나가기 직전이었다. 안의 내용물을 보지 않게 주의한 연우는 구겨진 페이지를 조심스레 펴고, 찢겨 나간 표지는 테이프로 잘 붙여놓았다.
이능의 결과물인 노트를 이런 식으로 취급하는 것만 봐도 연화가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지긋지긋해하는지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S급에, 모두가 탐내는 예지 능력을 가졌지만 혼자 아공간에 갇혀 사는 것만 봐도 뻔했다.
노트 뭉치를 들고 일어난 연우는 책장 오른쪽을 더듬었다. 평범해 보이는 책장의 가장 오른쪽 칸은 위장된 금고였다. 손끝으로 더듬어야 느낄 수 있는 돌기에 마나를 흘려 넣자 딸깍, 문이 열렸다.
연화의 아공간과 연결된 금고에는 책이 빽빽하게 꽂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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