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하단에 노트를 정리하던 연우는 색이 바랜 스케치북을 보고 밀려오는 기억에 미소를 지었다.
스케치북을 들어 올리자 그림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늑대와 꼬리 끝에 커다란 폭탄을 달고 있는 벌레, 창을 들고 있는 인어 그림이었다.
어린 시절, 연화가 그림을 그리면 연우가 옆에 앉아서 서툰 손짓으로 그림을 잘랐다.
“게이트에서 이것도 나오고, 얘도 나와.”
괴상한 생물체를 그리던 연화는 자신의 얘기에 집중하라는 듯 연우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한연화, 오빠 가위 들고 있잖아.”
“얘기 들어줘. 안 하면 아프단 말이야.”
“알았어. 얘기 들어줘? 아니면 그림 잘라줘?”
잠시 고민하던 연화는 배를 깔고 엎드렸다. 그럼 자르면서 들어.
“그래서?”
“그래서, 사람들이 다 죽었어.”
어린아이가 하기에는 어딘가 섬찟한 면이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걸 알아줄 어른이 없었다. 유일한 청자인 연우는 그냥 모든 이야기가 연화의 상상 속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오빠. 나 놀이터 가기 싫어.”
“갑자기?”
어제까지만 해도 밥숟가락 내려놓기가 무섭게 놀이터에 가자고 칭얼거리던 연화였다. 놀이 가방을 챙긴 연우가 진짜 안 가? 물어도 크레파스를 쥔 연화는 도리질만 칠 뿐이었다.
나중에 안 갔다고 난리 치는 건 아니겠지.
눈을 가늘게 뜬 연우가 놀이 가방을 현관문 옆에 내려놓은 연우가 연화를 일으켜 앉혀놓고, 책상을 깔아주었다. 크레파스로 더러워진 옷소매를 걷어줄 때였다.
“엄마한테 전화 왔어.”
연화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연우야!
전화를 받은 연우는 찢어지는 엄마의 목소리에 잠깐 귀를 막았다. 엄마는 급한 목소리로 횡설수설 말했다. 집 근처 놀이터에서 게이트가 발견되었으니 당장 집으로 가라는 말이었다.
이미 집이라는 말에 달려온 엄마는 연우와 연화를 끌어안고 한참 동안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늘 놀이터에 안 갔어?”
“응. 연화가 가기 싫다고 해서.”
“맞아. 오늘 기분이 으응 했어.”
“아이고, 우리 딸. 감도 좋지.”
연화는 단순히 감이 좋은 아이가 아니었다.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을 가진 에스퍼였다. 각성한 에스퍼는 협회에 등록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부모님은 연화의 능력을 숨겼다.
에스퍼는 평균적으로 12살 전후, 2차 성징을 맞이하면서 각성하는데 그때의 연화는 고작 6살이었다. 저 어린애가 던전에 들락거리는 걸 상상만 해도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라며 부모님은 연우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가이딩이 필요할 때 알려도 늦지 않는다며 부모님은 연화의 이능을 숨겼다.
연화는 작은 방에 갇혀 살게 되었지만, 딱히 불만은 없어 보였다.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만 넉넉하다면 어디든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종일 자고 일어난 연화는 그림을 그리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가끔 연우를 불러 꿈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달라며 조르기도 했다.
“그래서 최여름이 물속으로 들어가서 문어 빨판을 잘라내니까 바다가 까매졌어.”
쉼 없이 종알거리던 연화가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 타이밍에 맞춰 죽을 식히고 있던 연우가 숟가락을 내밀었다. 아가 새처럼 받아먹은 연화가 빠르게 죽을 씹어 삼키더니 연우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문어가 화가 나서 팔을 휘두르니까 파도가 이만큼 쳐서, 그래서, 최여름이 파도를 타고 달려가서 문어를 죽였어.”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어주던 연우는 연화의 이마를 바라보았다. 식은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적당히 떼어주고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아주자 연화가 살겠다는 듯 다시 후, 한숨을 쉬었다.
“물도 마셔.”
연우의 말에 팔을 뻗어 컵을 쥔 연화는 급하게 물을 꼴깍거리고 연우를 붙잡았다.
“문어에서 이만한 마석이 나와서,”
3년.
그동안 연화의 예지는 점점 더 섬세해졌다. 단편적인 장면만 보고 끝내던 예전과는 달리, 전후 상황까지 보고 일어난 연화는 어떤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야 할지 한참 고민하다가 크레파스를 쥐곤 했다.
그렇게 연화가 그린 그림은 언제나 현실로 일어났다.
그때마다 심한 열병을 앓던 연화는 잠에서 깨어나 연우를 찾았다. 연우를 붙잡고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한참이나 종알거린 연화는 지쳐 쓰러졌고 다음 날 멀쩡한 얼굴로 일어났다.
미래를 보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지쳐 쓰러지는 연약한 딸이었다. 부모님의 보호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연화는 물론 연우 또한 집 밖을 돌아다니지 못하는 날이 늘어갔다.
부모님은 연화가 게이트나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릴까 봐, 이로 인해 에스퍼라는 걸 들키게 될까 봐 항상 전전긍긍하셨다. 연화가 그린 그림을 꼼꼼하게 살피며 집 근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셨고, 집 근처에서 게이트가 발견된다면 그 즉시 신고했다.
게이트 신고 포상금은 적지 않은 금액이었고, 그 돈은 연화를 보호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 부모님에게 마른 땅의 단비가 되었다.
“연화도 그렇고, 연우를 생각하면 벌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벌어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그렇게 부모님의 욕심을 담은 눈덩이가 구르기 시작했다.
연화를 위해, 연우를 위해, 집 안에만 있으면 심심할 테니까, 외식을 못 하니 맛있는 게 먹고 싶을 테니까, 좀 더 넓은 집을 사주기 위해. 점점 더 커지는 욕심에 게이트 토벌권을 얻기 위해 길드원들이 달라붙었다.
“에-헤이. 길드장님. 그 정보가 어떤 정보인데 포상금이 고작 이만큼입니까? 예? 저도 뭐 땅을 파서 정보를 파는 것도 아닌데~ 아~ 포상금이 이러면 저도 곤란하죠.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저 길드장님이랑 거래 못 합니다.”
전화 너머의 상대방과 한참 동안 실랑이하던 아빠는 전화를 끊자마자 엄마를 끌어안았다. 진하게 입을 맞춘 아빠는 연우를 지나 연화에게 달려가 온몸으로 애정을 퍼부었다.
연화의 발밑에 또래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난감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장난감을 보고 눈을 빛내는 연우와 달리 연화는 크게 기뻐하는 기색 없이 길게 하품만 할 뿐이었다. 그러고는 아빠를 향해 손을 뻗으며 활짝 웃었다.
“아이고, 우리 이쁜 딸. 장난감보다 아빠가 더 좋아요?”
아양을 떠는 아빠를 보며 커다란 눈을 깜박, 깜박거리던 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엄마도 좋지? 엄마한테 올래?”
팔을 뻗는 엄마에게로 옮겨간 연화는 다시 한번 길게 하품했다.
“졸려?”
“우리 딸. 오늘은 무슨 꿈 꿀 거야?”
부모님이 연화를 안고 작은 방으로 향하는 동안, 연우는 품 안 가득 장난감을 끌어안고 그 뒤를 따랐다. 연화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던 엄마는 그때까지 자신에게 시선을 떼지 않는 연화의 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엄마가 그렇게 좋아? 계속 보고 싶을 만큼?”
“응. 곧 못 볼 거니까 지금 많이 봐두려고.”
“…뭐?”
“아빠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빠의 얼굴이 이내 사색이 되었다. 잠이 든 연화의 어깨를 흔들던 아빠는 다정하지 못한 손길로 연화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은색으로 빛나는 연화의 눈동자를 보던 아빠는 입술을 깨물었다.
연화는 지금 잠이 든 게 아니라 예지를 보고 있었다. 예지를 보고 있는 중에는 무슨 짓을 해도 연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연화를 깨워보려 노력하던 아빠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엄마를 바라보았다.
“설마… 우리가 게이트에 휘말려서 죽는다는 건 아니겠죠?”
“그게 무슨….”
“생각해봐요. 연화는 항상 게이트에 대해 예지를 하잖아요. 그러면 당연한 것처럼 주변에 게이트가 나타나고! 알고 보니 얘가 예지하는 게 아니라 게이트를 불러오는 거라면요?”
“아냐, 아빠. 연화는 다른 예지도 봐.”
어제 아침, 자다 일어난 연화는 내일모레 토스트를 먹게 될 거라며 연우에게 집에 식빵이 있는지 물어봤었다. 엄마 아빠가 항상 게이트에 대한 것만 찾으니까 게이트에 대한 예지만 기억하고 있는 거라고. 연화는 사고가 일어나거나, 내일 컵이 깨진다는 소소한 예지도 많이 본다고 말하려던 연우는 아빠의 손에 들린 채 방에서 쫓겨났다.
두려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연화를 바라보던 엄마는 뛰쳐나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연화의 방으로 돌아가려던 연우를 옆구리에 끼운 아빠는 도망치듯 집에서 빠져나왔다.
“연우 안전벨트 해라.”
“연화는요?”
어색하게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리던 연우는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연화는 한 번 자면 안 일어나잖아.”
“아들. 오랜만에 엄마랑 아빠랑 마트 갈까? 운동화 작아서 발가락 아프다며.”
아빠의 말에 연우는 엄지발가락이 꼭 끼는 운동화를 내려봤다. 운동화뿐만 아니라 바지도 필요했다. 발목이 훌쩍 드러나는 밑단을 끌어내리던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팔을 뻗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겨준 엄마가 연우의 눈을 가렸다.
“조금 자고 일어날래? 도착하면 깨워줄게.”
나긋한 목소리에 졸음이 밀려와 눈을 감은 연우는 잠시 후 눈을 반짝, 떴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본 연우가 안전벨트를 풀고 창문을 내다보았다. 도착한 곳은 마트 주차장이 아니라 낯선 곳이었다.
“엄마?”
“일어났어? 아빠가 급한 일이 생겨서 잠깐 확인하고 갈 거야.”
“그럼 연화는요?”
“아.”
아침 대신 먹으라며 빵을 쥐여주던 엄마는 연우와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연우가 빵을 다 먹은 뒤에야 엄마는 핸드폰을 보여주고 쓰레기를 정리했다.
“아까 옆집 할머니한테 전화했어.”
거짓말.
옆집 할머니는 귀가 어두워 벨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전화가 왔다고 손에 핸드폰을 쥐여줘야 겨우 전화를 받았고, 그마저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차가 덜컹거리며 배에 올라탔다. 연우는 다시 한번 연화를 찾았지만, 엄마는 대답이 없었고 아빠는 핸들만 노려보고 있었다. 배가 출발하고 나서야 엄마는 초조하고 화난 얼굴로 연우의 이름을 불렀다.
“한연우. 엄마 말 잘 들어. 이제부터 너는 동생이 없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물어보면 외동이라고 답해.”
부모님은 연화를 잊으라고 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제까지, 아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연우가 오빠니까 연화를 잘 챙겨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하던 부모님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디로 가냐는 질문에 아빠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엄마 고향으로 갈 거야. 거기서 새로,”
“그럼 연화는?”
“한연우. 아빠가 뭐라고 했어? 너한테 이제 동생이 없다고 했지.”
“왜?”
“걔는 에스퍼니까.”
“그래. 감정도 없고 힘만 무식하게 센 게 에스퍼야, 연우야. 연화랑 같이 있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연우는 엄마랑 아빠가 다치는 게 좋아? 연우는 아야 하고 싶어?”
“연화는 좋대. 엄마랑 아빠가 다치는 게 좋대. 부모가 죽는다는데 생글생글 웃는 거 봤어? 연우도 그럴 거야? 연우도 연화처럼 엄마가,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어?”
아니요….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든 연우가 수많은 질문을 삼키는 사이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뱃머리에 선 연우는 떠오르는 해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연화는 아침마다 희미한 울음소리를 내며 일어났고 그때마다 연우를 찾았다.
내가 없으면 아플 텐데. 꿈 얘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저번처럼 크게 아플 텐데.
내가 연화의 곁에 있어 줘야 하는데!
그 순간 연우의 시야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기분 나쁘게 뛰는 심장에 가슴을 움켜쥐고 괴로워하던 연우는 귀가 찢어지는 듯한 이명 소리를 피하려 몸을 웅크렸다. 잠시 후, 이명이 사라지고 심장박동이 가라앉았음에도 연우는 몸을 펴지 못했다.
“얘야. 무슨 일 있니?”
지나가던 사람이 부축해주자 그제야 몸을 편 연우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눈물에 흠뻑 젖은 속눈썹을 깜박거리던 연우는 떨리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상은 뭔가 달라져 있었고 심장 또한 이상한 박자로 뛰고 있었다. 저릿한 심장 위를 쓸어보던 연우는 발아래 나타난 연두색 문양을 내려보았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었지만, 이걸 밟으면 연화에게 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눈물을 닦아내고 크게 심호흡한 뒤 발을 내딛자, 연우를 둘러싸고 있던 공간이 바뀌었다.
“오빠 왔어?”
어지러움에 잠시 비틀거리는 데 연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도 들지 않고 연우에게 인사를 건넨 연화는 배를 깔고 누운 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연우는 신발을 벗어 현관에 가져다 둔 다음 연화를 앉히고 상을 펼쳤다.
“언제 일어났어?”
“방금.”
“밥은?”
“오빠 기다리고 있었어. 같이 먹으려고.”
연화가 들어 올린 스케치북에는 연두색 문양을 밟고 서 있는 연우가 그려져 있었다.
그렇게 연우는 에스퍼로 각성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