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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14화 (14/143)

14화

“오빠. 내일 우리를 데리러 사람들이 올 거야.”

반은 타고 반은 덜 익은 식빵에 딸기잼을 바르던 연화가 여상하게 말했다. 연화의 말에 연우는 작은 가방을 들고 엉망이 된 방으로 들어갔다. 연우의 물건은 원래부터 몇 개 없었다. 그마저도 부모님이 죄다 챙겨가신 터라 챙길 게 없었지만, 연화의 짐은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에스퍼 협회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문을 두드렸을 때 연우는 작은 가방을, 연화는 스케치북을 꼭 쥐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연화의 이능을 확인한 협회 사람들은 연우가 가방을 쥐여줄 시간도 주지 않고 연화를 데리고 떠나버렸다. 남겨진 연우는 홀로 검사를 받고,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연화와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야. 네 동생이 그렇게 대단하다며?”

“응. 맞아.”

주먹보다 조금 큰 마나볼을 만지작거리던 연우는 빈정거리는 말에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큰 눈을 반으로 접으며 방긋 웃기까지 하는 모습에 시비를 걸기 위해 다가왔던 아이는 할 말을 잃고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근데 너는 왜 C급이야? 네 동생은 S급이라며.”

연우와 연화가 협회에 도착했을 때 불러온 파란은 안 그래도 힘든 사관학교의 아이들을 괴롭게 만들었다.

등급에 상관없이 각성하는 순간, 오직 자신만이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던 아이들은 협회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위치를 깨닫곤 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혹시, 라는 작은 희망을 품고 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얼마 뒤 그 희망조차 버려야만 했다. 아이들은 자신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마나 코어의 크기로 차별을 받으며 비참해했다.

연우도 그래야 했다.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에 절망하고, 풀이 죽어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돌아다녀야 했다. 하지만 연우는 울지 않았고 밤마다 부모님을 찾지도 않았다. 되려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를 찾아다니며 달래주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고 속상해서 울먹일 때마다 연우를 가리켰다.

“너희들 조용히 하고 연우를 좀 봐. 얼마나 의젓하니. 운다고 해결이 돼? 연습해봤어? 제발 선생님 괴롭히지 좀 말자. 응?”

그래서 연우를 괴롭히고 싶었다.

똑같이 낮은 등급이니까, 똑같이 보잘것없는 능력이니까. 그래서 똑같이 힘들어하다가 울상을 짓는 모습을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어… 근데 너는 이거 어떻게 하는지 알아?”

아이는 연우가 불쑥 내민 마나볼을 보며 당황했다. 제일 기초적인 마나볼도 못 다루면서 왜 저렇게 실실거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께 물어보니까 보조계 반에서 네가 제일 마나를 잘 다룬다길래.”

“어… 내가? 선생님이 그랬어? 진짜?”

“응.”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살금살금 옆으로 붙어 입을 가렸다. 조그맣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아이는 몸을 숙였다.

“아무것도 안 가르쳐주니까 뭘 하긴 해야 하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말에 아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역시 사관학교에 들어오자마자 했던 생각이었으니까.

“선생님은 아무것도 안 가르쳐주고.”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에 아이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몇 없는 선생님들은 상급반에 집중하고, 하급반은 방치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신경 썼다.

그 때문에 아이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뭘 배워야 연습을 할 텐데, 테스트할 때마다 아직도 이런 것도 못 하냐며 타박을 들으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나 좀 알려주면 안 돼?”

눈썹 끝을 축, 늘어트리며 묻는 연우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혼자서 깨우쳤다고, 너도 그렇게 하라고 외치는 대신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사관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제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사관학교를 들썩거리게 만든 한연화의 오빠가, 선생님의 칭찬을 듣는 한연우가. 다시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함으로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고마워.”

“어… 뭐, 아니, 응. 이거는 어떻게 하냐면…”

붉어진 목덜미를 문지르던 아이는 마나볼을 쥐고 있는 연우를 보며 열정적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연우는 방긋 웃었다.

최근 3년간은 사정이 달랐지만, 연우의 집안은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아빠는 주말에도 출장을 다녔고, 엄마는 집 근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엄마는 카페에서 전화가 올 때마다 연우와 연화의 손을 잡고 옆집, 또는 앞집 문을 두드렸다.

“뭐야. 쟤들 또 왔어?”

“어쩌겠어. 그렇다고 애들을 쫓아낼 수는 없잖아.”

“하여튼 뻔뻔해…. 어린이집이라도 보내던가.”

“먹고 죽을 돈도 없다는데 거기서 뭐라고 해.”

저와 연화를 앉혀두고 쑥덕거리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연우는 팔을 뻗어 연화의 귀를 가려주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으며 어른의 일을 도왔다. 미움받지 말아야 눈치를 덜 줄 테니까.

그 집 아이와도 친해져야 했다. 그래야 아이가 조금만 더 놀겠다고 떼를 쓰며 연우를 붙잡아 둘 테니까.

그렇게 살다 보니 눈치가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고작 12살짜리 에스퍼였다. 말과 행동에서 뭘 원하는지 빤히 보였다. 이런 어린애 같은 장난에 장단을 맞춰주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럼 내일도 같이 연습할래?”

“응.”

손을 흔들어 준 연우는 곧장 정신계 반으로 달려갔다. 발끝을 세워 안쪽을 바라보자 연화가 한쪽 구석에 배를 깔고 누워 그림을 깨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번쩍 든 연화는 스케치북을 끌어안고 타박타박 걸어 나왔다.

“왜 또 기운이 없어? 오늘도 친구 못 사귀어서 그래?”

“응…. 오늘도 계속 그림만 그렸어. 나 팔 아파.”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연화의 손목을 주물러준 연우는 교실을 둘러봤다. 교실에 있는 의자 전부 연화를 향해 놓여있었다. 이런 상황이면 누구라도 말을 못 붙이긴 하겠네….

연우는 초반이라서 그렇다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연화를 달랬지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연화는 점점 더 구석으로, 구석으로 들어갔다.

더 들어갈 수 없어지자 연화는 그림을 그려 주변에 둥글게 배치했다. 제가 그린 그림을 모두가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생긴 버릇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접근할 수 없도록.

훈련장 입구에 기댄 연우는 솟아오른 둥지와 그 안에 앉아있는 차헌을 바라봤다.

왜 계속 연화가 생각나나 했더니….

강차헌의 현재 상황과 연화가 어렸을 때의 상황이 제법 비슷했다. 차헌이 A 구역에서 배척당하는 것처럼, 연화도 정신계 반에서 배척당했었다.

상급반이라고 해서 별다를 건 없었다. 테스트에서 떨어질 때마다 선생님들은 네가 이런 점이 부족해서 실패한 거야, 조곤조곤 알려주기보다는 연화를 가리켰다. 저렇게 어린아이도 잘하는데! 라며 다그치고 끊임없이 비교했다.

자연스럽게 배척당한 연화를 데리러 갈 때마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연화는 꼭 혼자 구석에 앉아있다가 연우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그래, 이렇게.

뭐, 연화는 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배척당한 거고 강차헌은… 저 성격 때문이 아닐까.

그보다 왜 이렇게 늦었냐니. 연우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봤다. 안 그래도 아침에 눈 뜨자마자 달려왔다. 저렇게 타박할까 봐.

우리 연화는 귀엽기라도 했지…. 속으로 혀를 끌끌 찬 연우는 몸을 풀며 훈련장을 둘러봤다.

훈련장은 점점 개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발에 차이는 훈련 도구들 때문에 넘어질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치워도 치워도 어지르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 보니 정리를 하던 사람도 손을 놓아버렸다. 이렇게 어질러도 받는 벌이라고는 센터 청소뿐이니 몇몇 에스퍼들은 훈련방식에 대한 불만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다른 훈련방식을 원하는 에스퍼들도 암묵적으로 동의했고, 최동원과 박서현 역시 정리하지 말 것을 당부했기에 연우만 고통받고 있었다. 한숨을 삼킨 연우는 발로 훈련 도구를 슥슥 밀어 공간을 확보했다.

그동안 차헌은 슬그머니 다가와 연우가 밀어놓은 훈련 도구를 눈으로 살폈다. 매번 맞지도 않는 훈련 도구를 기웃거리더니 웬일로 공격계 도구에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저번 일로 깨달음을 얻었는지 건드리지 않고 눈으로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차헌을 보던 연우는 고개를 돌려 CCTV를 바라보았다.

이러다가 얘가 다치면 내 탓이라고 하겠지.

CCTV가 없어도 참견은 하려고 했다. 훈련 도구를 아무렇게나 건드는 차헌을 볼 때마다, 깨지기 직전 빙판 위에서 아장거리는 돌잡이 아기를 보는듯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이건 뭐예요?”

“내려놔요. 그것도 방어계 물건이니까.”

그 말에 차헌이 제 뒤로 물건을 밀어냈다.

이런 식으로 아침마다, 혹은 훈련을 마치고 연우가 개별적으로 훈련을 하고 있으면 차헌이 슬그머니 다가와 이게 뭐냐, 저게 뭐냐고 물어봤다. 연우는 그때마다 이건 뭐다, 저건 뭐라고 알려줬었고.

차헌이 자기 혼자 정한 규칙이었다.

“이거는요?”

“그건 훈련용 마나볼인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헌은 손을 빼며 허공을 올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던 차헌은 발밑에 떨어진 마나볼을 걷어찼다. 저 멀리 굴러가는 마나볼을 보며 연우는 눈썹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저번 사건이 트라우마가 된 모양인데.

“이리 와 봐요.”

몰라서 실수했으면 배우면 되는 거지.

옆자리를 툭툭 건드리자 차헌은 연우가 그랬듯 훈련 도구를 발로 슥슥 밀어내며 다가왔다.

“여기에 마나를 담는 거예요.”

마저 설명하려는데 차헌이 눈썹을 치켜올린 채 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요.”

그렇다고 이 자식아.

가르쳐줘도 난리고 안 가르쳐줘도 난리면 그냥 안 가르쳐주고 마음의 안정을 얻는 게 낫지 않나? 방긋 웃은 연우는 마나볼을 저 멀리 던져버렸다.

그러자 차헌이 연우의 훈련복을 붙잡았다.

“왜 가르쳐주다 말고 던져요?”

연우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차헌을 보다가 해맑게 웃었다.

방금… 그게 가르침을 받는 태도였니? 어이가 없어 웃음만 흘리는데 차헌이 손을 뻗어 마나볼이 아닌 슬라임 볼을 쥐고 내밀었다.

“그건 슬라임 볼이라니까요.”

“아.”

근처에 마땅한 마나볼이 없어 몸을 일으키려는데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왜요?”

“잠시 놔봐요. 마나볼 좀 가져오게.”

손가락 힘도 좋지. 몸을 일으키자 따라오던 차헌이 손을 뻗어 마나볼을 가리켰다. 이게 맞냐며 들어 올리는 손짓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차헌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 넣는데요?”

아 사관학교 선생님들아.

이런 건 좀 가르쳐주고 애를 내보내든가 해야지. 혀끝을 깨문 연우는 마나볼을 건네받았다. 마나를 흘려 넣는 순간, 마나볼을 바라보는 차헌의 눈동자가 연둣빛으로 물들었다.

크게 뜨인 눈에 연우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아무것도 모를 줄이야.

“손 좀 줘볼래요?”

그 말에 차헌이 연우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텁, 올려놓았다. 어김없이 느껴지는 포근한 감촉에 나른하게 눈을 깜박이던 연우는 마나를 끌어모았다.

“솜사탕 기계 알아요?”

“네.”

“그럼 그 솜사탕 기계가 심장에 붙어있다고 상상하는 거예요. 솜사탕 기계가 설탕 실을 뽑아내듯 마나 코어에서 마나를 뽑아내는 거예요.”

설명을 끝낸 연우가 따라 해보라는 듯 마나를 뽑아내 손바닥에서 굴렸다. 몽실몽실한 마나를 느낀 차헌이 눈을 끔뻑였다. 연우는 반대 손에 들려있던 마나볼에 그대로 마나를 흘려 넣었다. 그러자 마나를 머금은 마나볼이 연둣빛으로 차르르 빛나기 시작했다.

“해봐요.”

빈 마나볼을 던져주자 차헌은 오만상을 쓰고 마나볼을 노려봤다. 허공을 경계하던 연우는 자석 같은 이끌림에 차헌을 바라보았다.

차헌의 손에 들린 마나볼이 이상한 모양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당황한 차헌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오.”

펑, 훈련장을 가득 울리는 소리와 함께 마나볼이 터지며 차가운 바람이 연우의 머리카락을 헤집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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