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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15화 (15/143)

15화

바람이 가라앉은 뒤, 얼얼한 볼을 문지르던 연우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눈의 시림이 가라앉자 엉망이 된 머리로 마나볼의 잔재를 쥐고 있는 강차헌이 보였다.

세상에. 저 표정 어쩔 건데.

넋이 나간 얼굴의 차헌과 눈이 마주치자 연우는 작게 웃음을 흘리다가 곧 주저앉았다.

이제 알 것 같았다. 사관학교 시절 마나볼을 뻥, 뻥, 터트릴 때마다 옆에서 배를 잡고 웃던 동기가 이제 이해가 갔다. 내가 저런 표정이었구나.

흐느끼듯 웃던 연우는 까드득,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에 위를 올려보았다. 마나볼의 잔재를 얼려버린 차헌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연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표정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동기가 그런 식으로 웃을 때마다 연우는 저 새끼를 죽여, 살려, 고민했었다. 차헌은 그때의 연우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그쪽도 나를 놀린 거예요?”

한 음절, 음절 씹어뱉던 차헌은 손에 들린 잔해를 집어던졌다. 거칠게 머리를 헤집던 차헌은 연우를 서늘하게 노려보다가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놀리다니. 사람이 좀 웃었기로서니.

뒤를 쫓아간 연우가 붙잡자 뿌리치지는 않았지만, 차헌의 주변에는 얼음결정이 하늘하늘 날아오르고 있다. 당장이라도 훈련복을 잡은 손으로 달려들 것 같은 얼음 결정을 보던 연우는 입가를 더듬었다. 웃음기가 남아있지 않다는 걸 확인한 연우는 고개를 들어 차헌과 눈을 맞췄다.

“죄송합니다. 강차헌 에스퍼 얼굴이 너무 허망해 보여, 아니, 일단 그 상황이 웃겨서 웃은 거지 비웃은 게 아니에요.”

차헌의 손에 마나볼을 쥐여준 연우는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놀린 것도 아니고요.”

“그러면요.”

싸늘한 목소리에 연우는 혀끝을 깨물었다.

이제 얘가 말하는 방식을 좀 알겠다. 제가 놀린 게 아니라면 마나볼이 왜 터졌는지 이유를 물어보는 거다.

“방금은, 강차헌 에스퍼가 마나볼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마나를 욱여넣어서 그런 겁니다.”

연우는 차헌이 쥐고 있는 마나볼 위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이 정도 양이면 충분해요.”

약하게 빛나는 마나볼과 연우를 미심쩍은 눈으로 번갈아 보던 차헌이 손끝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마나볼 주변을 휘감는 연둣빛 마나가 차헌의 손가락을 살랑살랑 건드리더니 이윽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거.”

차헌이 급하게 마나볼을 내밀었다. 딱딱하게 굳은 입술에서 당장이라도 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 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원래 이런 거예요.”

마나볼을 받아든 연우는 다시 마나를 담아 차헌에게 내밀었다. 차헌은 마나볼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받은 뒤 흩어지는 마나를 바라보다가, 눈에 힘을 줬다.

파르르, 작게 경련을 일으키던 마나볼이 빵! 터졌다.

터지기 직전 손을 뻗어 차헌의 눈을 가린 연우는 바람이 가라앉자 굴러다니는 마나볼을 주어와 차헌에게 건넸다.

“마나볼을 채우는 게 생각보다 힘들어요. 마나볼을 꽉 채울 만큼 마나를 흘려 넣는 게 아니에요.”

연우의 말에 차헌은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처럼 안 되는 게 답답한 모양이었다. 뭐, 첫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으니까.

마나볼을 가득 끌어안고 구석에 자리를 잡은 강차헌은 등을 보인 채 쭈그려 앉았다. 관심을 끄고 훈련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집중이 되지 않았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정신이 없었다. 한숨을 삼킨 연우는 어지럽게 널린 훈련 도구를 손에 잡히는 대로 쥐고 옮겼다. 어차피 이능 연습하려고 했으니까! 이건 정리가 아니고 연습이다.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훈련장 한쪽에서 동이 트고 있었다.

뭐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차헌이 연우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몸을 돌릴수록 훈련장이 조금씩 밝아졌다. 그런 차헌의 손에 들린 마나볼은 하늘빛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S급쯤 되면 첫술에 배가 부를 수도 있구나.

발광하는 마나볼을 한참 동안 내려보던 차헌은 빛이 사그라들 때마다 마나를 흘려 넣기를 반복했다. 신기한 것도 한두 번이지 한쪽에서 계속 반짝반짝반짝거리자 눈이 시렸다.

그만하라는 뜻과 성공을 축하한다는 뜻으로 가볍게 박수를 치니 차헌의 몸이 흠칫, 튀었다.

“봤어요?”

안 보였을 리가? 보라고 몸 돌린 거 아녔어?

고개를 끄덕이자 차헌은 등 뒤로 마나볼을 감추며 연우를 노려봤다. 뭘 보냐고 따지는 게 아니라 대충 부끄럽다는 뜻이겠지. 좋게 좋게 해석한 연우가 훈련을 빙자한 정리를 계속해나가는데 앞에 놓인 마나볼을 채가는 손이 있었다.

“여기요.”

굳이 마나를 담아 건네는 이유가 뭘까. 연우는 하늘빛으로 반짝거리는 마나볼을 보다가 차헌을 바라봤다. 두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있었고, 마나볼을 바라보는 검은색 눈동자는 하늘빛으로 물들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입꼬리를 시원스레 끌어올린 차헌은 몹시 소중한 것을 건네듯 마나볼을 내밀고 있었다.

“고마워요.”

받아들자 하늘빛 마나가 손가락 사이에서 넘실거리더니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며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연우는 마나를 흡수한 손바닥을 내려봤다. 잘못 봤나? 따뜻한 온기를 품은 손바닥을 문지르는데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이걸로 뭐 하는 건데요?”

사람을 잡고 흔들면 안 된다는 것도 알려줘야 하나. 연우는 훈련복을 쥐고 있는 차헌의 손가락을 내려보다가 시선을 돌려 발광하는 마나볼을 바라봤다.

“이걸로 훈련한다면서요. 그건 뭔데요?”

A 구역은 마나 적응 훈련도 안 하나? 아, 맞다. 얘 아직 팀 없지.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마나볼에 마나를 담아 차헌에게 건네며 설명했다.

던전이나 위험 구역의 큐브 같이 아더의 마나로 뒤덮인 공간에서는 온몸의 감각이 뒤섞인다. 예를 들면 팔로 냄새를 맡는 기분이다. 시간이 지나면 감각이 돌아오지만, 그 전에 마수와 마주치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이 팀원인지, 마수인지 구분하지 못해 혼란이 일어난다. 그러니 팀원이 어떤 마나를 가졌는지 미리 익혀두고, 팀원을 공격하지 않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마나 적응 훈련으로 서로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 따로 소통하지 않아도 서로가 뭘 할건지 예상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작전이 실패한 상황이나, 작전을 짤 수 없는 상황이 닥쳐와도 팀원들과 손발을 완벽하게 맞출 수 있다. 그래서 팀을 짜게 되면 제일 먼저 하는 훈련이 마나 적응 훈련이었다.

설명을 마친 연우는 마나볼을 가지고 놀다 결국 하나 더 터트려 먹은 차헌을 살폈다. 멀쩡하네. 나는 마나볼 터트리고 며칠을 앓아누웠는데. 확실히 S급이 마나 코어가 크긴 크구나.

지금까지 터트린 마나볼만 벌써 다섯 개째인데도 차헌의 얼굴은 멀쩡하기만 했다. 식은땀 한 방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 끝장을 볼 모양인지 자리를 잡고 앉은 차헌의 둥지를 보던 연우는 길게 하품했다. 혹시 체력도 등급이랑 비례하나?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다음 날 아침, 날아오는 마나볼을 낚아챈 연우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해도 안 뜬 시간이었다. 고개를 돌리는 것도 힘들어 시선만 돌린 연우는 차헌을 바라봤다.

나야 휴게실에서 쪽잠을 자고 왔다지만 쟤는? S급이라서 체력도 남다른가?

“형 매일 아침에 이거 하는 거 같아서 찾아놨어요. 아,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이미 부르고 있으면서?

연우는 바닥에 놓인 핀을 바라보다가 떨떠름한 눈으로 차헌을 올려봤다.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아니, 호칭은 둘째치고 찾아놨다니? 그 말에 주변을 둘러보던 연우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점점 전쟁통이 되어가는 훈련장을 보면서도 훈련소장은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벌점만 줄 뿐이었다. 결국 어젯밤 크게 싸움이 났었다. 정리하겠다고, 정리하면 되지 않냐고, 정리하는 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소리를 꽥꽥 지르더니 이게 정리한 거냐고….

모든 훈련 도구를 쓸어모아 한 곳에 쑤셔 넣은 몰골을 보는 연우의 얼굴이 창백했다. 여기서 저걸 찾아낸 것도 대단하다. 억지로 시선을 돌린 연우는 제게 손짓하는 차헌을 바라봤다.

처음엔 어딜 감히 근처에 오냐며 으르릉거리더니, 지금의 차헌은 마나볼을 쥔 채 바닥을 도닥이고 있었다.

“이거 왜 이런 거예요?”

자리에 앉자마자 차헌은 질문을 쏟아부었다. 마나볼 하나로 이렇게 많을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연우는 질린 낯으로 마나볼을 집어 들었다.

“잠시. 일단 마나볼이 얼어붙는 건 강차헌 에스퍼가 자신도 모르게 이능을 사용해서 그런 겁니다. 마나볼은 순수한 마나만 받아들이니까요.”

그 말에 차헌이 마나볼을 노려보았다.

차르르, 빛나던 마나볼 위로 얼음이 삐죽삐죽 솟아올랐다.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어요.”

마나볼과 차헌의 둥지를 번갈아 보던 연우가 손을 내밀자 차헌이 마나볼을 냉큼 올려두었다.

“아뇨, 손이요.”

그 말에 마나볼을 거둔 차헌이 손을 내밀었다. 언젠가 느꼈던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에 겨우 몰아냈던 졸음이 몰려들었다.

“뭐해요?”

나른하게 속눈썹을 깜박이던 연우는 피가 통하지 않아 붉게 변한 차헌의 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 손짓에 차헌이 있는 대로 미간을 찌푸렸다.

“뭔데요.”

“아뇨, 그, 빙결계라 손이 차가운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신기해서….”

허둥허둥 튀어나온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차헌은 그런가, 중얼거리며 미간을 폈다.

“빙결계는 다들 손이 차가워요?”

제 손을 내려보며 묻는 말에 연우는 급하게 기억을 뒤졌다. 사관학교 동기 중에 빙결계가 있긴 했는데… 걔가 손이 차가웠던가?

“다들 그런 건 아니고 사람에 따라 각성 전후로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어요.”

연우의 말에 제 손을 주물럭거리던 차헌이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전이랑 차이 나는지는 모르겠네요. 여름에 친구들이 덥다고 붙지 말라고 하긴 했는데….”

말끝을 흐린 차헌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봐서는 각성하던 날의 기억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더운 여름날 시험을 치다가 얼음물 한잔했으면 좋겠다, 하고 각성한 경험이 아무래도 좋은 기억은 아닌 듯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기초 체온이 높다던데 그래서 그랬나 보네요.”

그 말에 차헌이 눈만 치켜든 채로 연우를 바라봤다.

“어떻게 알아요?”

“네?”

“저 운동한 거요.”

책에서 봤는데.

시선을 피한 연우는 바닥을 노려보았다. 연화가 자랄수록 꿈의 길이도 길어졌다. 그림을 그리다, 그리다 지친 연화는 모든 꿈을 글로 정리하고 책으로 만들었다.

자신이 연화가 쓴 책에 등장한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누구든 그 책을 읽고 싶어 했다.

갖은 회유 끝에 책을 손에 넣은 사람들의 끝은 똑같았다. 제 입맛대로 미래를 바꿔보려다가 인과율의 부메랑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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