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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16화 (16/143)

16화

뭐라고 말을 해야 자연스러울까, 눈을 굴리는데 옆에서 한숨 소리 같기도 하고 웃음소리 같기도 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기도 쑥덕거리는 사람들이 많나 보네요.”

그러면서 연우를 빤히 바라보던 차헌은 시선을 돌려 마나볼을 노려봤다. 질문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아도 대답 없이 마나볼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런 차헌의 주변으로 얼음 둥지가 삐죽삐죽 솟아오르고 있었다. 뾰족한 얼음 끝을 보던 연우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음… 그러니까 하도 쑥덕거려서 여기로 도망친 건데 여기서도 쑥덕거리니까 짜증이 난 건가?

차헌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연우는 눈을 굴렸다. 아니 세상에 강차헌이 양궁선수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 그 넓은 양궁장을 단숨에 얼려버리고 조용히 넘어갈 줄 알았다면 큰 착각이다.

차헌이 각성하고 대한민국이 얼마나 들썩거렸는데. 양궁협회는 큰 별을 잃었다며 안타까워했고, 에스퍼 협회는 물론 온갖 길드까지 강차헌의 집 앞으로 찾아가 온갖 야단법석을 피웠다. 이능력자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강차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각성했는지 알고 있을 거다.

뭐, 자신은 유명해지길 바라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 저를 두고 쑥덕거린다면 기분이 나쁠 만하겠지. 쉽게 납득한 연우는 마나볼을 터트리는 차헌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에요? 몸 보니까 꾸준히 했을 것 같은데.”

대답 없는 차헌을 보던 연우는 마나볼을 집어 들었다. 좌표는 강차헌의 둥지 안. 이능을 사용하자 둥지 안에 마나볼이 쑥쑥 쌓였다.

지금은 이렇게 잘되는데 말이야. 손바닥을 문지르던 연우는 이게 뭐냐는 표정을 짓는 차헌을 향해 방긋 웃었다.

“다음에 시간 나면 요 옆에 체력 단련장 있거든요? 방어계들이 운동하는 곳인데 가서 질문에 답 좀 해줘요. 무슨 운동하는지 엄청 궁금해하던데.”

그 말에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아있던 차헌의 눈꼬리가 살짝 처졌다.

세상은 생각보다 너에게 관심이 없단다. 이런 얘기를 듣고 싶은 모양인데 S급으로 각성한 이상 그건 힘들 거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의 시선을 몰고 다니게 되겠지.

그나저나 저 몸에 저런 옷을 입고 다니면서 관심을 안 받고 싶다고?

당장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훈련복의 솔기를 바라보던 연우는 둥지를 이루고 있는 얼음 가시를 붙잡았다. 훈련장 구석으로 둥지를 옮긴 연우는 차헌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만하고 일어나요.”

“왜요.”

“모르겠어요? 지금 마나 코어 과부하 온 것 같은데.”

에스퍼라면 자기도 모르게 이능이 튀어나오는 것만 보고도 깨달아야 하지만 상대는 차헌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병아리다. 되뇐 연우는 눈썹을 찌푸리고 있는 차헌을 일으켰다.

“그런데요.”

이건 그래서 어쩌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이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힌 연우는 마나볼을 정리했다.

“쉬어야죠. 조금 자거나, 밥을 먹는 것도 괜찮고. 일단 이능을 안 쓰는 게 제일 중요해요.”

어쩐지 어젯밤이랑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다 했다. 그 인간들이 청소 아닌 청소를 하고 떠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밤새 연습한 모양이었다.

“각성할 때 무슨 느낌이 들었는지 기억나요?”

아쉬운 얼굴로 마나볼을 바라보던 차헌이 심장께를 더듬었다.

“심장이 조이는 듯한?”

“네.”

“그때 심장 주변에 마나 코어가 생긴 거예요. 눈을 감고 심장의 두근거림에 집중해보세요.”

가슴에 손을 올려놓은 차헌이 눈을 감았다. 속눈썹으로 길게 그늘진 눈가를 보던 연우가 조곤조곤 설명했다.

“연습도 좋지만 중간중간 마나 코어에 마나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해가면서 하세요. 그러다 잘못하면 발작할 수도 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차헌을 보던 연우는 혀를 깨물었다. 어이가 없었다. 얼마나 훈련을 안 시켰으면 고작 마나볼을 채우는 걸로 S급이, 그 대단한 S급이 과부하가 오냐고.

속으로 혀를 차는 동안 제 마나 코어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깨달은 차헌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떴다.

그런 차헌의 옆에 쪼그려 앉아 솟아오르는 둥지를 정리하던 연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이후에 일정 있어요? 그러니까 오전 훈련 시작하기 전에.”

아직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물음에 차헌이 옆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그 모습에 연우는 눈을 잠시 감았다 뜨며 마음을 다독였다.

대충 왜 물어보냐는 뜻으로 한 것 같은데 말로 물어보지 않고 고개만 까닥이는 모습에 연우의 기분이 더러워졌기 때문이었다.

“혹시 옷 취향이 그래요?”

계속 지적하고 싶었다.

연우의 손짓에 차헌은 고개를 숙여 제 옷을 내려보았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차헌의 허벅지 부분이 팽팽했다. 저러다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작게 입는 게 취향이라면 존중하겠지만….

던전 부산물로 만들어진 훈련복은 C급 공격 정도는 가볍게 막아주는 방어 옵션이 붙어있었다.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려 급소를 보호하는 게 정석이었다. 저렇게 지퍼를 내리고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다니는 건 훈련복을 벗고 돌아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걸 지적하자 뚱한 표정을 지은 차헌이 지퍼를 쭉, 올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찍, 미끄러지는 지퍼를 가리켰다.

“껴서요.”

“작으면 다른 사이즈를 입어요.”

취향도 아니면서 왜 작은걸 입고 다니지?

“이게 제일 큰 거라던데요.”

저게 제일 큰 거라니? 연우는 눈을 깜박이며 차헌을 위아래로 훑었다.

공격계 덩치야 천차만별이라지만 후천적으로 몸이 단단해지는 방어계는 2m가 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차헌의 키가 크긴 하지만 190cm는 안 넘어 보이는데 그 옷들이 작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와, 이 새끼들이 진짜 치사하게 구네.

책은 강차헌의 시점으로 진행돼서 A 구역 이능력자들이 차헌을 왜 배척하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나름의 추측은 가능했다.

센터장은 이상원에 대항할 대항마를 키우기 위해 차헌을 영입했을 것이다. 게이트를 정리하고 던전을 공략하기보다는 위험 구역이 넓어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게 센터의 역할이었다. 토벌대는 이상원의 팀으로 충분한데 상성이 맞지 않는 강차헌을 영입했다는 건 새로운 토벌대를 만들어 이상원을 견제하겠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되면 이상원은 독점하던 던전 공략권은 물론 부산물까지 차헌에게 나눠줘야 했다.

그 꼴을 두고 보고 있을 이상원이 아니지. 가뭄에 콩 나듯 던전 토벌에 참여해 이익을 얻던 A 구역 에스퍼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차헌의 팀이 생긴다면 지금처럼 토벌대 지원을 나서면서 얻을 수 있는 수익이 아예 없어질 것이다. 차헌의 팀에 자신이 속한다는 보장이 없으니, 차헌이 팀을 만들지 못하도록 기를 쓰고 막았겠지.

결국 밥그릇 싸움 때문에 차헌을 이렇게 방치해놨다는 거다.

아니, 근데 훈련복은 좀 아니지 않나? 목숨과 직결된 건데?

과장이 아니라 진짜 그랬다. 돌진형 공격계들이 훈련복 내구도에 목숨을 거는 이유가 정말로 목숨이 걸려있기 때문이었다.

아… 혹시 그래서 가상 던전 훈련 때 죽을 뻔한 건가? 저 훈련복을 입고 가상 던전에 들어가서?

혀를 찬 연우는 몸을 일으켜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어디 가냐는 질문도 없이 뒤에 따라붙는 차헌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보급소였다.

“여긴 왜요?”

“강차헌 에스퍼 훈련복 바꾸려고요.”

“네?”

얌전히 따라오던 차헌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옷에 뭔 하자가 있나, 하는 눈으로 훈련복을 내려보는 차헌을 두고 걸어간 연우는 보급소의 문을 두드렸다.

“잠시만요. 저 아직 정산받은 게 아예 없어서,”

“무슨 소리예요?”

“저 센터에 빚지면 안 돼요.”

그건 누구라도 지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차헌이 다급한 손으로 연우를 붙잡는 것과 동시에 보급소의 문이 열렸다.

“뭐 필요하세요?”

“혹시 A 구역 에스퍼 훈련복도 교환 가능한가요?”

“네? 네. 사이즈 뭐로 드려요?”

“아, 저 말고 저 사람이요.”

사원증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직원에서 한 걸음 물러난 연우가 차헌을 가리켰다. 연우의 손짓에 고개를 뺀 직원이 차헌을 위아래로 훑었다.

“잠시만요.”

직원이 안으로 들어가자 차헌은 연우를 잡아당겼다. 힘없이 끌려가던 연우는 사람을 이렇게 잡아당기면 안 된다고 한마디 하려다가, 초조한 차헌의 얼굴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뭐지? 그 사이에 옷이랑 정이라도 들었나?

“여기요.”

꼼짝도 안 하는 차헌의 손에서 훈련복을 빼낸 연우는 직원에게 가방을 건네받았다. 부피가 상당한 것이 안 봐도 옷이 큼지막할 게 분명했지만, 연우는 굳이 가방을 열어 사이즈를 확인했다.

“탈의실은 저쪽이고요, 입어 보고 작으면 바꾸러 오세요. 그 옷은 반납하시면 되고요.”

“네. 수고하세요.”

인사한 연우는 차헌에게 손짓했다. 주춤주춤 다가오던 차헌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보급소와 연우를 번갈아 보았다.

“계산은요? 형이 한 거예요?”

“아까부터 무슨 말이에요?”

“아니, 이거 던전 부산물로 만들어진 거라 물량이 부족해서 한 벌만 지급된다고, 더럽혀지거나 찢기면 자기 돈으로 사야 한다고….”

말을 하던 차헌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아.”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훈련복을 내려보던 차헌이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거짓말이네. 그렇죠?”

검은색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차헌의 발아래에서 얼음이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차헌의 허리까지 솟아오른 얼음을 보던 연우는 칼을 뽑아 얼음기둥의 중간을 내려쳤다. 센터 건물 자체가 던전 부산물이라 이런 거로 무너질 위험은 없었지만, 누가 발견한다면 소란스러워질 게 분명했다. S급이 이능 조절도 못하고 어쩌고 하겠지.

“아… 말이 안 되긴 했어….”

차헌이 중얼거리는 동안 연우는 계속해서 솟아오는 얼음기둥을 내려치다가 좌표를 설정했다. 훈련장 한구석으로 얼음을 이동시킨 연우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가슴을 붙잡았다.

“와, 센터에 오기만 한다면 내가 원하는 건 전부 퍼준다고 약속하더니. 센터로 오니까 훈련복은 사 입어라? 말이 안 되잖아. 안 그래요?”

묻는 말에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귀 끝까지 따끔거릴 정도로 온몸이 차헌의 마나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 거짓말이었다고.”

차헌은 몸을 나른하게 늘어트린 채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조용한 분노였다. 차헌의 마나가 분노에 동조해 피부가 따끔거리도록 날뛰고 있었다. 그저 옆에 서 있는 것뿐인데도 연우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S급 마나에 동조한 건지 연우의 심장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아, 이래서 연화가 내 앞에서 화를 안 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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