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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17화 (17/143)

17화

압박감에 몸을 웅크린 연우는 눈만 움직여 차헌을 바라봤다. 차헌의 주변을 휘감은 채 미친 듯이 휘날리는 얼음결정도, 차헌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나도 흉흉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차헌은 팔을 늘어트린 채 서 있을 뿐이었다. 길길 날뛰면 진정하라고 말리기라도 할 텐데. 분노로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데도 저렇게 가만히, 조용히 화를 참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화를 참고 있는 사람에게 화를 참으라고 하기는 좀.

마른침을 삼킨 연우는 빛을 받아 까맣게 빛나는 차헌의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괜찮다. 머리카락이 은색으로 변하는 순간 이제 다 죽는 거다.

저기서 색이 조금만 바래진다면… 시선을 돌린 연우는 벽에 붙은 호출기를 힐끔거렸다.

“다 죽었어.”

차헌이 발걸음을 떼자마자 가냘프게 파들거리던 연우의 무릎이 그대로 꺾였다.

“뭐야? 왜 그래요?”

성큼성큼 걸어가던 차헌은 돌아와 연우를 부축했다. 손이 닿자마자 가쁜 숨을 토해낸 연우는 차헌의 손을 피하듯 손끝을 바르작거렸다. 뿌리치지도 못하는 애처로운 손짓에 손을 놓자 연우는 몸을 물려 차헌을 피했다.

“뭔데요.”

“…마나, 좀.”

무슨 소리냐는 듯 인상을 쓰고 있던 차헌은 그제야 제 주변을 휘감고 있는 반짝거리는 얼음 결정들을 발견했다. 날파리 쫓듯 손을 휘휘 거리자 그제야 압박감에서 벗어난 연우가 가느다란 숨을 토해냈다.

“뭐예요. 저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럼 내가 혼자서 쓰러졌겠냐.

무릎을 짚으며 일어난 연우는 저린 손을 주무르며 차헌을 올려보았다.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온전한 검은색이었다. S급은 S급이구나. 마나 과부하가 온 상태에서 그만큼의 마나를 뽑아냈는데도 멀쩡하구나.

“괜찮아요?”

“저는요.”

형은, 물어보는 차헌을 향해 이마를 가리키자, 연우의 손끝을 따라 이마를 짚어보던 차헌이 눈썹을 콱, 찌푸렸다.

괜찮기는 무슨.

“거기 피나요.”

눈썹 위로 길게 붙여진 반창고 아래에서 피가 질금질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난리를 쳤는데도 상처가 안 터지면 이상한 거지.

“여기도.”

연우의 말에 입가를 더듬던 차헌은 따가운지 습, 하고 숨을 들이켰다. 대체 무슨 훈련을 하길래 볼 때마다 상처가 늘어나는 거야?

옷을 먼저 갈아입힐지, 치료실 먼저 가야 할지 고민하던 연우가 차헌을 돌아봤을 때였다.

반창고가 거슬리는지 떼어낸 차헌의 얼굴 위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일어나요.’

스치듯 들려오는 환청에 연우는 고개를 번쩍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심장이 두려움으로 미친 듯이 쾅쾅쾅 뛰고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던 연우는 팔을 뻗어 차헌을 붙잡았다.

도망가야 해.

어디로?

누구한테서?

귀를 찢을듯한 이명과 함께 어지러움이 몰려들었다. 머리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면서도 연우는 바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범한 C 구역의 복도에 서 있을 뿐인데도 두려움 때문에 등에 식은땀이 고이고 있었다.

“뭔데요? 왜요?”

숨이 턱, 막혀왔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려와 급히 시선을 내린 연우는 비명을 삼켰다. 발끝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또 그 빌어먹을 환상이었다.

입을 틀어막은 연우는 경련을 일으키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내 발은 멀쩡해. 발끝을 내려보면서 한참 동안 중얼거린 연우는 고개를 흔들어 기억을 털어냈다.

“왜 그러는데요?”

가쁜 호흡을 억누른 연우는 차헌의 흉터를 가리켰다.

“치료, 안 받아요?”

치료실까지 찾아가야 하는 C 구역과 달리 A 구역은 치료계 에스퍼가 상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재깍재깍 치료를 안 받아서 사람을 놀라게 하냐고.

도끼눈을 뜨고 물어보는 말에 차헌은 손을 들어 상처를 가렸다. 그러다 손끝에 상처가 닿았는지 인상을 썼다. 차헌을 올려보던 연우는 이마에 고인 식은땀을 거칠게 닦아냈다.

차헌은 답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연우는 답을 바라고 물은 질문이 아니었다. 피로 물든 얼굴을 오래 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기에 연우는 옷이 든 가방 쪽을 향해 손짓했다. 빨리 옷을 갈아입고 A 구역으로 썩 꺼지라는 뜻이었다.

“이 정도 상처는 에스퍼라면 그냥 낫는다던데요.”

가방을 건네던 연우의 손이 삐끗거렸다.

“눅, 누가요?”

얼마나 어이가 없는지 순간적으로 혀가 꼬일 정도였다.

되묻는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혀를 깨문 연우는 상처를 가리고 있는 차헌을 올려봤다.

“강차헌 에스퍼. 치료계예요?”

“아닌데요.”

“그런데 뭔 자가 치유를 하겠다고….”

말끝을 흐린 연우는 차헌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아직 피가 줄줄 흐르는 거로 봐서는 이마의 상처는 제법 깊은 것 같고. 오른쪽 턱에는 멍이 들어있었다. 입술까지 터진 걸 보면 주먹으로 얻어맞은 듯했다. 무기와 주먹이라. 대련 훈련이라도 하는 건가?

혀를 찬 연우는 차헌에게 손짓했다.

* * *

“어디 아파요?”

도착한 곳은 치료실이었다.

“아뇨.”

“그럼, 왜….”

중얼거리던 차헌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배신감으로 얼룩진 얼굴로 연우를 노려보았다.

왜, 뭐가 불만인데.

“치료 안 받을 건데요.”

“그럼 그렇게 피 칠갑한 상태로 돌아다닐 거예요?”

센터에 괴담 만들어낼 일 있나. 치료 안 받을 거면 반창고라도 갈아요. 차헌에게 손짓한 연우는 치료실의 문을 두드렸다.

“치료받으러 왔어요?”

문이 드륵 열리며 치료계 에스퍼가 나타났다. 들어와요. 부름에도 차헌은 움직이지 않았다. 당장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은 듯 움찔거리던 차헌이 연우를 힐끔거렸다.

“형, 발은요?”

내 발? 차헌의 말에 연우가 제 발을 내려보았다. 치료계의 시선도 따라붙었다.

“이쪽은 멀쩡하네요.”

“아니, 아까 분명히….”

차헌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연우의 표정을 바라보며 눈을 끔벅였다. 아까 발이 어쩌고 하지 않았나? 아니, 지금은 또 멀쩡하게 걷긴 잘 걷는데….

그래도 분명 어딘가가 불편해 보였는데. 연우를 내려보는 사이 다가온 치료계가 차헌의 볼을 툭, 건드렸다.

그 순간 차헌은 손을 뻗어 연우를 붙잡았다. 연분홍색 마나가 피어오르며 터진 입술과 멍든 턱, 길게 찢어진 상처를 휘감았다. 그동안 차헌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얘 지금 떠는 건가?

“자, 끝.”

치료계의 말에도 차헌은 웅크린 몸을 펴지 못했다. 피가 통하지 않아 보라색으로 변한 손을 내려보던 연우가 참지 못하고 가볍게 팔을 흔들자 그제야 차헌의 입술 밖으로 헉, 하고 숨이 터져 나왔다.

“뭐, 뭐야. 뭐한 거예요?”

차헌은 눈썹을 있는 대로 치켜올린 사나운 얼굴로 치료계와 연우를 노려봤다. 그런 차헌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인 치료계가 문을 닫고 들어가자, 연우를 내려본 차헌이 대답하라는 듯 눈에 힘을 줬다.

“치료한 거잖아요.”

“뭐, 아니, 네? 방금… 그게 치료예요?”

“네. 일단 나 좀 놔줄래요?”

그 말에 아직 연우를 붙잡고 있던 차헌이 주춤주춤 손을 떼었다. 얼마나 세게 잡았으면 훈련복을 입고 있는데도 팔이 저릿저릿했다. 연우가 팔을 터는 동안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해진 이마와 입술을 더듬거리던 차헌이 순하게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온순해진 차헌을 데리고 보급소로 돌아간 연우가 탈의실로 들여보내던 때였다.

“하하하.”

가방을 받고 얌전히 탈의실로 향하던 차헌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애도 아니고 새 옷이 생긴 게 기쁜 모양이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이.”

아니군.

훈련복을 찢듯이 벗어던진 차헌이 그대로 달려가려다가 연우를 보고 몸을 굳혔다. 그러더니 이쪽으로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왔다.

“형. 치료하는 거 원래 아픈 거 아니죠.”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눈 굴리지 말고.”

“보통은 안 아프죠.”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신음을 흘리던 차헌은 고개를 번쩍 들어 연우와 눈을 맞췄다. 웅크리고 앉아있는 연우와 얼음결정을 번갈아 보던 차헌은 날아다니는 얼음결정을 낚아챘다.

“옷 갈아입고 올게요.”

한숨을 쉰 차헌이 가방을 열어 훈련복을 꺼냈다. 딱 봐도 넉넉해 보이는 훈련복을 몸에 대보던 차헌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런 차헌의 뒷모습을 보던 연우는 팔짱을 꼈다. 애를 따돌리는 정도가 아니라 학대를… 하는 모양인데….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기겁할 이유가 있나? 치료를 처음 받아보는 거라면 마나볼을 봤을 때처럼 신기해했겠지, 그렇게 두려움에 떨 이유가 없었다.

책에 그런 장면이 적혀있었나?

책의 내용을 떠올려보려 해도 기억은 희미하기만 했다. 내용을 외울 정도로 제법 많이, 오래 읽은 것 같은데….

…뭐, 알아서 하겠지.

기억을 더듬어보다 포기한 연우는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차헌을 위아래로 훑었다. 바지가 좀 짧네.

“불편한 데 있어요?”

“없어요.”

교환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차헌이 가볍게 뛰어오르자 손에 들린 허벅지 벨트와 보조 가방이 덜렁거렸다.

“그건 왜 안 하고 나왔어요?”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요.”

당당하기도 하지.

보조 가방을 받자 차헌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오른손잡이? 왼손잡이?”

“오른손이요.”

얌전히 오른손을 뻗는 차헌의 팔을 밀어내고 왼쪽 팔뚝에 가방을 달아준 연우가 가볍게 잡아당겼다. 단단하게 고정된 가방을 보며 알겠냐는 듯 쳐다보자 차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을 분해해서 건네자 의욕 넘치는 얼굴로 받아든 차헌이 조립하기 시작했다.

“아뇨. 그 고리를 반대편으로.”

조금 버벅대긴 했지만, 가방을 고정한 차헌의 입꼬리가 스멀 올라갔다. 작게 손뼉을 쳐 준 연우는 가방을 열어 굴러다니는 약병을 제자리에 넣었다. 딸깍, 하고 고정되는 소리를 들려주고 뽑아낸 다음 약병을 차헌의 손에 쥐여주었다. 차헌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스스로 약병을 넣었다, 뺏다, 넣었다 하면서 사용법을 익히고 있었다.

“오른발 내밀어봐요.”

약병을 끼운 차헌이 얌전히 오른발을 내밀었다.

“총이랑 무기는 어딨어요?”

“없는데요.”

“뭐?”

연우의 미간이 콱 구겨졌다. 기본적인 무기도 안 주고 쟤 얼굴을 그따위로 패놨다고?

“훈련 끝나면 준다던데요.”

그 말에 연우는 속눈썹을 빠르게 깜박였다. 아니 그럼 훈련은 뭐로 하는데? 맨손으로?

이마를 짚은 연우는 허벅지 벨트를 길게 펼쳤다.

“나중에 가서… 무게에 익숙해지고 싶으니까 기본 무기는 달라고 해요. 위험하다고 뭐라고 하면 가짜인 거 아니까 그냥 달라고 하고. 받으면 총은 여기, 칼은 여기, 총탄은 여기. 내일부터 넣고 다녀요.”

고개를 끄덕인 차헌이 벨트를 짚어가며 확인하는 동안 연우는 무기가 들어갈 자리에 결함이 없는지 확인했다. 일어난 차헌의 허벅지에 벨트를 둘러주려던 순간이었다.

“거!”

차헌이 호다닥 물러나고 연우는 멍하니 자신의 손등을 내려보았다.

아니… 그게 왜 허벅지에….

손등을 도려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은 연우가 벨트를 건네자, 다섯 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차헌이 낚아채듯 받아 갔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래요. 알아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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