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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18화 (18/143)

18화

뭐지? 벌써 왔나?

훈련장에 들어가기 전부터 얼음 둥지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보다 크기가 좀… 작아진 것 같은데. 드디어 이능 조절하는 법을 깨달은 건가.

길게 기지개를 켠 연우는 뻐근한 눈을 문질렀다. 요즘 들어 부쩍 꿈자리가 사나워졌다.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았다.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일어날 때마다 차라리 잠을 자지 않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박한 둥지 옆에 자리를 잡은 연우는 팔을 뻗어 얼음기둥을 만졌다. 그대로 이능을 사용하던 순간,

“뭐야?”

평소와 다른 기분에 연우는 불쾌한 표정으로 손끝을 탈탈 털었다.

“뭐해요?”

훈련장 구석으로 가지 않고 도중에 툭, 떨어진 얼음기둥을 보며 멍하게 앉아있는데 차헌이 손을 흔들었다. 손끝을 내려보던 연우는 애써 시선을 돌려 차헌을 바라봤다.

“어디 갔다 와요?”

“방금 왔는데요.”

그럼 이건 뭐지.

연우의 시선을 따라 둥지를 바라보던 차헌이 미간을 콱, 찌푸렸다. 둥지가 아닌 연우를 향한 채였다.

뭐야, 왜 저래.

“이거 제거 아닌데요.”

뚱하게 대답한 차헌은 솟아오른 얼음을 걷어찼다. 그 아래 바로 솟아나는 얼음과 부러진 얼음을 비교해보자 확실히 색이 달랐다. 차헌은 약간 탁한 하늘빛, 낯선 둥지는 쨍한 파란색이었다.

“딱 봐도 제거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C 구역에 둥지를 트는 사람은 너밖에 없단다…. 그래서 당연히 너라고 생각했지…. 라고 말할 수 없었던 연우는 차헌의 시선을 외면하며 좌표를 설정했다.

조금 삐끗하긴 했지만, 구석으로 옮겨진 얼음을 바라보던 연우는 손끝을 주물렀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 피곤해서? 그래도 아침에는 이능이 매끄러웠는데 오늘따라 이능이 툭툭 튀고 있었다.

“밥은 먹었어요?”

샌드위치를 흔들며 묻는 말에 연우는 반사적으로 CCTV를 살폈다. 원칙적으로는 훈련장은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어있는 곳이다. 그리고 다른 구역 에스퍼의 출입도 금지되어있지….

“같이 먹어요.”

이건 뭐 원플러스원도 아니고. 출입 금지 에스퍼가 출입 금지 물품을 들고 있는 걸 가만히 바라보던 연우는 샌드위치를 받았다. 뭐, 내가 데리고 들어온 것도 아니고.

“어디서 사 온 거예요?”

“주던데요.”

S급쯤 되면 식당에 내려가지 않아도 식사가 가능하구나.

샌드위치의 묵직한 무게에 연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샌드위치 크기 봐라. 차별의 역사가 유구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먹는 것까지 차별하고 있는 걸 확인하자 그저 웃음만 나왔다.

뭐, 덕분에 이런 것도 먹어보네. 한 입 베어 물자마자 신선한 채소 향과 함께 상큼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아삭아삭 씹히는 양상추를 씹던 연우의 턱 놀림이 점점 느려졌다. 한 번 더 베어먹은 연우는 눈썹까지 찌푸린 채 신중하게 맛을 보고 있었다.

별로인가?

천천히 턱을 놀리는 연우를 보던 차헌 역시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상큼한 맛이 좀 강하기는 하지만 입맛을 돋울 정도의 적당한 맛이었다. 신 걸 싫어하나?

“이거 누가 줬어요?”

“부센터장이요.”

이왕이면 님 자도 붙여주고 그래라….

연우는 한 입 더 먹으려는 차헌의 팔을 붙잡고 샌드위치의 빵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양상추 아래 토마토를 확인한 연우가 이마를 꾹꾹 눌렀다.

“왜요? 알레르기 있어요?”

“아뇨, 그건 아니고.”

잘 익어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토마토는 와인 빛을 띠고 있었다. 확실하게는 와인 빛을 띠는 마나를 두르고 있었다.

“…식사를 계속 부센터장님이 챙겨주신 거예요?”

“아마? 그럴걸요.”

“앞으로 식사는 식당에서 하는 게 좋겠네요.”

차헌이 먹던 샌드위치까지 확인한 연우는 길게 한숨을 뱉었다. 던전에서 획득한 부산물을 요리해 먹은 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같은 모양이지만 독특한 맛을 내는 것들도 있었고, 과일 같은 경우는 당도가 훨씬 높아 인기가 많았다.

토벌대가 보스를, 공격대가 마수를, 후발대가 던전 부산물을 획득해서 나오면 생활계 에스퍼들이 바빠졌다. 마나를 정화하고 손질해서 경매에 내놓아야 겨우 시장에 풀리는 것이었다.

까다로운 과정 때문에 돈이 있어도 물량이 없어서 못 먹는다지만.

그래. 던전 부산물은 생활계 에스퍼들이 마나를 정화하고 나서야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면 정화되지 않은 던전 마나를 섭취하거나 흡수해서, 마나 멀미라고 불리는 증상을 겪게 된다. 멀미와 흡사한 어지럼증이나 메슥거림 등 가벼운 증상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잘못하면 마나 코어의 마나와 던전 마나가 뒤섞여 이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먹을 수 있는 던전 부산물은 다른 것보다 꼼꼼하게 검수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샌드위치에 들어있는 토마토는 정화되지 않은 날것의 상태였다.

호흡기로 받아들이는 것도 위험한데, 가상 던전 훈련을 하는 와중에 소화기로 먹여버린다고. 샌드위치를 내려놓은 연우는 눈 앞머리를 꾹 눌렀다.

지긋지긋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에스퍼 협회는 하나도 안 변했구나. 자기들 정치싸움에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집어넣고, 이쪽이 손해를 보든 말든 자기들 배만 부르면 그만인 뻔뻔함은 여전하구나.

한숨을 쉰 연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차헌을 바라봤다. 강차헌은 알고 있을까. 모르겠지. 모르니까 저런 표정으로 의심 없이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겠지.

던전 토마토는 연화가 좋아하는 던전 부산물 중의 하나였다. 라운드 길드장이 때마다 보내준 덕분에 연우도 질리도록 먹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쯤 연우도 맛의 차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맛있게 먹고 있었겠지.

그렇게 계속 섭취했다면?

…어쩐지 S급치고 마나를 다루는 게 어설프더라니.

연우의 만류에 차헌은 자신의 샌드위치는 물론 연우의 샌드위치까지 착착 정리해 집어넣었다.

“식당은 어디예요?”

그 말에 연우의 속눈썹이 천천히 팔랑였다. 뭔가 좀… 신기했다. 친동생인 연화도 한때 연우를 믿지 못했다. 한참이나 기다린 뒤에야 상처받은 마음의 문을 열고 곁을 허락한 연화였다.

그런데 강차헌은?

“믿어요, 나를?”

포장되지 않는 노골적인 물음에 쓰레기통을 찾던 차헌이 연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왜요?”

그 말에 차헌이 조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것도 알려주는데 못 믿을까 봐요.”

샌드위치와 마나볼을 눈짓으로 가리키는 차헌의 말에 연우는 눈썹을 찌푸렸다. 어디 가서 옥장판을 사 올까 봐 벌써 겁이 났다. 사람을 저렇게 쉽게 믿으면 어쩌지.

“그럼 안 믿을 이유는 뭔데요.”

뚱한 차헌의 말에 연우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까닥였다. 그 모습을 보던 차헌이 귀를 문질렀다. 너도 한 번 기분 더러워 보라는 뜻으로 한 건데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연우만 민망해졌다. 팔짱을 풀자 마나볼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차헌이 연우를 흘끔, 바라봤다.

“뭐… 형도 알겠지만, 저 얼마 전까지 일반인이었잖아요. 각성하기 전부터… 아니, 지금도 게이트랑 던전이 뭐가 다른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관심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7살 때부터 양궁만 했고, 양궁만 하던 선수였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각성하는 바람에 안 그래도 정신없어 죽겠는데 다들 집으로 쳐들어와 무조건 자기들이랑 계약을 하재요.”

연화도 그랬지. 집이 아니라 사관학교였지만.

“어쩌고저쩌고하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모르겠다고 하니까 일단 계약하면 알려주겠대요. 그나마 여기는 사람 얘기를 들어준다 싶어서 온 건데….”

말끝을 흐린 차헌은 피식 웃었다.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줄 거라고. 제 이능 때문에 누가 다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어요. 근데 이게 뭐예요?”

샌드위치와 훈련복을 번갈아 보는 차헌의 말에 연우는 한숨을 삼켰다. 어떻게 저 멘트까지 똑같냐. 울고 있는 연우에게 조언을 해준 라운드 길드장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쯤 연화도 차헌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었겠지.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죄다 괴롭히는 인간들만 가득해요. 물어보면 몰라도 된다, 벌써 그런 걸 알려 하냐, 입 딱 다물고 있다가 뒤에서는 강차헌 쟤 폭주하면 누가 책임지냐면서, 우리 다 죽는 거 아니냐고 쑥덕거리면서 사람 겁은 있는 대로 주고. 가르쳐준다던 인간은 조금만 기다리라며 허허 웃기만 하고.”

이능을 사용하겠다는 손짓을 마다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온 차헌은 연우의 옆에 털썩 앉았다.

“제가 여기 오는 거 다들 싫어하는 거 아는데 그나마 자기 능력 보여주는 곳이 여기 밖에 없어요. 뭘 어떻게 쓰는지는 알아야 저도 배우든가 하니까.”

그래서 C 구역까지 견학을 온 거군. A 구역은 단체 훈련장이 있지만 개인 훈련장을 선호하는 분위기고 B 구역은 위험 구역의 큐브에서 훈련하곤 했으니까. 기초부터 훈련하는 곳은 C 구역뿐이었다.

쌓여있는 마나볼을 보던 차헌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쳐지더니 결국 떡 벌어져 있던 어깨마저 동그랗게 말렸다.

“S급 어쩌고 하는 것도 솔직히 듣기 싫어요. 아무것도 모르는데 마나 코어만 크다고 조롱하는 것 같아서. 그거 듣고 있는 것도….”

부담스러워서 싫고…. 중얼거린 차헌은 연우와 눈을 맞췄다. 뭐지? 나는 그러지 않았다는 뜻인가?

뭐… 그도 그럴 게 태생 S급을 어릴 때부터 키우고 보호해온 게 연우였다. 일반인일 때도 연화의 마나를 견뎌왔는데 에스퍼로 각성한 지금 차헌의 마나쯤이야.

그런데 S급이 저 정도 참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 않나?

차헌은 화를 참는 시늉이라도 하지 연화는 참지 않았다. 제 눈에 거슬리면 일단 저주부터 하고 봤다. 네 가족이 어떻게 되는지 아냐면서 눈을 부라리는 게 한연화 성격이 더러워서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다른 S급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걸 본 이후로는 그냥 S급의 성질머리가 그렇다는 걸 깨닫게 되었지.

“그 인간들이랑 붙어있는 내내 조롱만 당했지, 배운 게 하나도 없어요. 실수하면 실수한다고 눈치 주고 연습하면 연습한다고 눈치 주고. 그리고 또…”

이마를 더듬던 차헌이 연우를 빤히 바라봤다.

“형은 안 그랬잖아요.”

그 시선에 언젠가 느꼈던 쑥스러움과 민망함이 몰려들었다. 급하게 시선을 피해 바닥만 노려봤다. 한참 그렇게 앉아있자 저 멀리서 벨 소리가 울렸다. 연화의 벨 소리라 급하게 몸을 일으키려는데, 몸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 좀.”

“잠시만요.”

손을 가리키는 말에도 훈련복을 놓지 않은 차헌은 마나볼을 쥐었다. 마나볼에 마나를 가득 담은 차헌은 연우의 손을 끌어 마나볼을 쥐여주고 나서야 훈련복을 놓았다.

“그런데 제가 형을 못 믿을 이유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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