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오늘도 집에 올 거지?
연화의 물음에 연우는 그러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요즘 부쩍 집에 오라고 찾는 느낌인데. 센터에 입사한 이후 분리불안이라도 느끼는 건가…?
어리광이 늘어난 것 같아 뿌듯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모르겠다. 상반된 감정에서 고민하던 연우는 같이 밥 먹으면 좋지. 결론을 내리고 짐을 정리했다.
“오늘도 연습했어요?”
박서현의 질문에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서현은 바람에 힘을 실어 마나볼을 공중으로 띄웠다, 받기를 반복하다가 최동원에게 눈짓했다. 방패를 꺼내고 있던 최동원이 다가오자 보이지 않는 조희서를 찾던 박서현이 팀원을 불러 모았다.
“우리끼리라도 합을 맞춰봐야 할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린 박서현은 연우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요즘도 와요? 그….”
연우는 차헌의 둥지가 있던 곳을 눈짓하는 박서현의 말에 작게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박서현을 보며 연우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제 오지 말라고 말하길 잘했지.
“뭐라고 했어요?”
어젯밤. 이제 슬슬 A 구역에서 훈련하는 게 어떠냐는 연우의 물음에 얼음이 확, 솟아올랐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얼음에 당황한 차헌이 불퉁한 얼굴로 얼음을 불러들였다.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이능을 다루는 모습을 지켜보던 연우는 다시 한번 말했다.
“이제 C 구역에 오지 마요.”
“왜요?”
배신감이 얼룩진 얼굴로 자신을 쏘아보는 차헌과 눈을 맞춘 연우가 시간을 확인했다. 훈련이 시작되기 전에 차헌을 내보내야 했다.
지금이야 똑같은 훈련에 지겨움을 느껴 훈련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개판인 훈련장에 남아있다가 뒷정리를 떠안게 될까 봐 종이 치자마자 도망치듯 훈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면 강차헌은 걸림돌이 될 것이다.
팀원의 마나를 느끼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S급의 마나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있으면 누구라도 예민해지겠지. 같은 구역끼리도 종종 싸움이 벌어지는데 편들어줄 팀원이 없는 강차헌은 욕을 바가지로 먹게 될 것이다.
네가 거슬려서 그렇다고 말하면 좀 그러니까, 적당히 포장해서….
주변을 둘러보던 연우는 훈련장 한중간에 쓰인 글자를 가리켰다.
“여기는 C 구역이에요. 원칙적으로는 다른 구역 에스퍼가 들락거릴 공간이 아닌데, 강차헌 에스퍼만 예외적으로 허용한 거예요. 지금까지는 기초 훈련만 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훈련이 진행될 건데 강차헌 에스퍼의 마나가 남아있다면 팀원들의 마나를 제대로 느낄 수 없겠죠?”
그 말에 바닥을 퍽퍽 차던 차헌이 연우를 돌아봤다.
“그럼….”
뭐라 말할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차헌은 연우를 잠시 바라보다가 걸음걸음 얼음을 피워내며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오늘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지.
훈련장 구석에 솟아오른 얼음 뭉치를 힐끔거린 연우는 핀을 마저 정리했다.
“저기, 한연우 에스퍼.”
돌아보자 공격계 에스퍼가 짜증 어린 얼굴로 얼음 뭉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거 안 치워요?”
세상에 뻔뻔하기도 하지….
입을 살짝 벌린 연우는 당연히 제가 치워야 한다는 듯 눈으로 재촉하고 있는 이능력자들을 둘러보았다. 나한테 이걸 말하러 오는 사이에 자신들이 직접 치우는 게 더 빠르지 않나?
천천히 일어난 연우는 얼음 뭉치를 보다가 방긋 웃었다.
“훈련소장님이 저한테 치우라고 했던 건 강차헌 에스퍼의 얼음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요. 안 치우세요?”
곧 훈련 시작하는 데 미리미리 좀 해놓지. 하는 투덜거림에 연우는 눈썹을 늘어트렸다. 여기서 따지면 싸우자는 것밖에 안 된다.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물러나게 만들어야 한다.
“그거 강차헌 에스퍼 얼음 아닌데?”
이죽거리는 목소리에 연우의 고개가 돌아갔다. 바람으로 마나볼을 둥실둥실 띄우고 있는 박서현의 입술에는 노골적인 비웃음이 걸려있었다.
“와. 설마 구분 못 해요?”
놀라워라. 또박또박 국어책을 읽는듯한 박서현의 목소리에 연우를 재촉하던 공격계가 눈썹을 찌푸렸다. 안 싸우려고 했는데…. 그렇다고 여기서 어깃장을 놓을 수도 없다. 입술을 말아 문 연우는 박서현 뒤로 물러섰다.
“와. 이것도 못 알아들으면 문젠데. 강차헌 에스퍼 마나도 구분 못 하면 옆에 선 팀원의 마나를 알아나 보겠어요?”
누가 들어도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공격계가 울컥한 표정을 지으며 따지려던 순간, 입구에서 그러니까요. 하며 동의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색부터 다르지 않나요?”
“맞아요. 그리고 느껴지는 파동도 달라요.”
나는 저 사람과 달리 이게 강차헌의 얼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너는 구분 못 하겠지만 우리는 구분했다, 주장하는 말에 공격계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래서 이걸 안 치우겠다고요?”
“어지른 사람이 치워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강차헌 에스퍼야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얼음까지 한연우 에스퍼가 치워야 할 의무는 없다고 봅니다.”
최동원까지 의견을 더하자 쥐어짜는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한 공격계는 제 팀원들에게 돌아갔다.
저렇게 가는 길에 치우고 가겠다. 얼음 뭉치를 바라보던 연우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나저나 누가 만든 거래요?”
최동원의 물음에 연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 얼음 뭉치가 나타난 지도 제법 오래되었는데도 에스퍼와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가끔 옆 구역의 자연계 에스퍼들이 연습할 때마다 C 구역도 영향을 받곤 하니 이번에도 그런 거겠지. 생각했다. 차헌이 거슬린다면서 얼음 뭉치를 노려보지 않았다면 치울 생각도 안 했을 거다.
오늘은 뭐, 차헌이 없으니까 안 치운 거고.
“집합하겠습니다.”
훈련 시작종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문을 연 훈련소장은 차트를 탁탁, 두드리며 시선을 끌었다. 초반처럼 일사불란하지는 않았지만, 이능력자들이 모여들자 눈으로 인원을 확인한 훈련소장은 훈련장 뒤쪽을 향해 손짓했다.
“뭐야?”
낯선 사람들이 훈련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니, 낯선 사람이 아니다. 세 번째로 들어오는, 초록색 끈의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는 에스퍼를 보는 연우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누군지 알아요?”
작게 묻는 박서현의 물음에 연우는 고개를 저어야 할지, 끄덕여야 할지 잠시 갈등했다. 연우가 고민 끝에 고개를 젓자, 훈련소장이 사람들을 소개했다.
“자, 소개하겠습니다. 오늘부터 함께 훈련할 공동구역의 공격계 배재영 에스퍼.”
“공동구역이 뭐예요?”
최동원의 물음에 연우는 목소리를 낮춘 채 설명했다. B 구역에 속하기에는 마나 코어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고, 그렇다고 C 구역에 속하기에는 이능을 다루는 데 뛰어난 사람들이 공동구역에 속했다. 이들은 정해진 팀원 없이 용병처럼 일하고 있었다.
“아, 고마워요.”
훈련소장이 에스퍼를 한 명, 한 명씩 차례대로 소개할 때마다 어리둥절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 번째 에스퍼의 소개가 시작되는 것과 함께 연우의 숨이 멎었다.
“방어계 서유진 에스퍼.
서유진. 그 이름과 함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살아계셨군요.’
연우는 이명과 함께 찾아온 두통에 이마를 붙잡고 있다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손을 들었다.
“앞으로 나오세요.”
왜? 훈련소장의 손짓에 연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박서현은 의뭉스러운 얼굴로 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이능이 튀는 걸 들켰나? 근데 요즘 들어서는 딱히 튀는 일도 없었는데….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앞에 나서자 긴 머리를 높게 올려묶은 에스퍼가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붉은 끈의 사원증. A급 공격계 에스퍼, 배재영.
이름을 확인한 연우가 손을 잡자 거북함이 느껴졌다. 에스퍼의 마나가 다른 에스퍼의 마나를 배척하면서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울렁거림을 누른 연우가 살짝 웃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한연우 에스퍼 팀은 1주 차에 배재영 에스퍼, 2주 차 서유진 에스퍼, 3주 차 이수빈 에스퍼와 마나 감응 훈련을 한 뒤 4주 차에 가상 던전 훈련에 들어갈 겁니다.”
아. 그래서 부른 거였구나. 작게 안도하는데 다가온 박서현이 작게 환호했다. 최동원이 박서현을 붙잡고 방방 뛰는 걸 보던 연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서유진에게 꾸벅 인사하고, 이수빈에게는 작게 손을 흔들었다.
상처 하나 없는 서유진을 바라보던 연우는 시선을 돌려 발을 내려봤다. 마찬가지로 말끔하기만 한 신발을 내려보는 연우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고여있었다.
“왜 그래요?”
박서현이 연우의 상태를 눈치채고 물었다. 최동원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우를 살피고 있었다. 식은땀을 닦아낸 연우는 부러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마나 멀미 때문에요.”
그 말에 박서현이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성이 맞지 않는 마나를 접하고 난 뒤 멀미를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어 써먹을 수 있는 변명이었다. 그렇게 웃어 보인 연우는 이유 모를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가슴을 쓸어내린 뒤 배재영을 바라보았다.
“잘 부탁드려요. B급 가이드 조희서입니다.”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헛웃음을 흘리던 박서현은 연우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가이드가 높은 에스퍼에게 이끌리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팀원을 앞에 두고 저렇게 티를 내는 건 조희서밖에 없을 거다.
혀끝을 깨문 연우는 계속해서 돌아가려는 시선을 배재영에게 고정했다. 2주 차, 3주 차의 팀원들과 인사를 하고 돌아온 배재영의 손에는 마나볼이 들려 있었다.
“다들 인사 끝냈습니까? 훈련장소는 딱히 정해진 곳이 없으니 자유롭게 연습하시되, 출입이 금지된 장소에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건 당연한 상식이니 들어가지 마세요. 궁금하다면 정당하게 허락을 받고 방문하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만약 출입 금지장소에서 적발되면 벌점 20점이 부과됩니다. 자, 그럼 해산.”
훈련소장의 박수 소리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손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무슨 일입니까?”
“저희는요? 저희는 다른 팀 연습 끝나면 5주 차에 가상 던전 훈련을 하게 되나요?”
초조함과 의문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질문을 한 가이드를 빤히 바라보던 훈련소장은 차트를 넘겼다.
“정준태 가이드.”
“…네.”
“김서희 에스퍼, 이정욱 에스퍼, 안준우 에스퍼. 홍현규 에스퍼. 다섯 분은 물론이고 이름이 불리지 않은 이능력자분들 모두 가상 던전 훈련에 참여할 일은 없을 겁니다.”
“네!?”
훈련소장의 말에 C 구역이 들썩거렸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챈 이능력자들이, 손을 드는 것도 모자라 훈련소장을 향해 뛰어나가려는 팀원을 말리고 입을 틀어막는 소란이 벌어지고 난 뒤에야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분명 첫날에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기본적인 규칙도 못 지키면서 자잘한 규율을 하나하나 다 따지고 지켜야 하는 던전에 어떻게 들어가겠다는 겁니까?”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는 소리, 숨을 들이켜는 소리, 울음을 참기 위한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지만, 그 누구도 훈련소장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당신들은 이제 C 구역 에스퍼도 아닙니다. 바로 위험 구역 정화조로 배정될 테니 나가서 짐 싸세요. 그럼 이제 진짜,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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