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아, 하하….”
차헌의 기세에 반걸음 물러난 직원은 웃음을 흘리며 연우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외면한 연우는 눈을 감고 입술도 말아 물었다. 접촉도 대화도 없이 버티다가 저것들이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져야 후환이 없었다.
자신을 도발한 다음, 실수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걸로 건수를 잡아서 연화를 끌어낼 직원들과 말을 섞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차헌은 그런 연우를
“얘기 중이었어요?”
“아니요.”
“그쪽은? 할 말 다 했어요?”
차헌의 질문에 큼, 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일반인이라 그런가. 에스퍼였다면 차헌이 찍어 누르는 마나 때문에 자리를 피했을 텐데 직원들은 물러나지 않고 연우의 곁을 맴돌았다.
“어, 저기….”
“한연우 에스퍼. 당장 계약하자는 건 아니고요, 일단 서류만이라도 읽어보세요.”
“맞아요. 한연화 에스퍼에게 해가 될 만한 조건은 하나도, 아무것도 없어요.
없기는. 연화는 아직 미성년자다. 미성년자가 에스퍼 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법에 어긋나는 데 뭐가 하나도 없다는 거야. 연우의 얼굴에 짜증스러운 기색이 드러났는지, 꼬드기는 직원의 목소리가 조금 더 사근사근해졌다.
“한연화 에스퍼가 미성년자긴 하지만 일찍 각성했으니 성인 에스퍼보다 경험이 더 많잖아요. 정신계 에스퍼들이 한연화 에스퍼에게 이능을 다루는 법을 배울 정도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한연화 에스퍼 보고 던전에 들어가라는 것도 아닙니다. 저희도 한연우 에스퍼의 마음으로, 제 동생이라는 마음으로 특별히 엄선한 내용이니까 그렇게 날 세우지 말고 한번 확인만 해보세요.”
“맞아요. 보면 한연우 에스퍼도 마음에 들 거예요.”
연우는 들으란 듯 코웃음을 쳤다.
말은 잘한다. 저걸 받는 순간 읽어는 봤냐, 무슨 조건이 불만이었냐, 네가 거절하는 거냐, 한연화가 거절하는 거냐, 사람을 사흘 밤낮 달달 볶을 게 뻔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당장 결정 안 하셔도 되고, 일단 읽어만 보,”
“꺅!”
“뭐야!”
까드득, 하는 소리에 놀란 연우가 눈을 떴다.
얼어붙은 서류를 보고 놀란 직원들이 도망가고 있었다. 땅에 떨어진 서류가 산산조각이 나며 떨어진 얼음조각이 하늘하늘 떠올랐다.
“저기요.”
얼음결정을 낚아챈 차헌은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도망치지 못한 직원을 내려봤다.
“그거 알아요?”
“네, 네…?”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에스퍼들은 이능 사용이 미숙한 거.”
그 말과 동시에 차헌이 성큼, 발을 디뎠다. 그러자 비명도 지르지 못한 직원이 뒤로 파드득 물러났다. 저만큼 멀어져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동료들과 합류한 직원은 연우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저 말이 협박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얼어붙어 산산조각이 난 서류를 내려보던 직원들이 슬금슬금 멀어졌다. 그런 직원들의 뒷모습을 보던 연우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몸에 힘을 빼고는 무너지듯 벽에 기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연우도 이렇게 진절머리가 나는데 연화는 더 힘들겠지.
예전, 연우도 연화도 예지를 알려달라고 매달리는 사람들 때문에 한숨도 자지 못한 적이 있었다. 예지를 보고 일어난 연화는 잠투정을 부렸지만, 사람들은 연화가 어떤 꿈을 꿨는지, 꿈에 누가 나왔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고 싶어 연화를 채근했었다. 연우도 마찬가지였다. 협회 사람들에게 불려간 연우는 연화가 그린 그림에 대해 하나하나 다 설명해야 했다.
협회 사람들은 비밀로 해야 한다며 연화의 이능을 숨기려 했다. 하지만 연화는 참지 않았다. 협회 사람들이 귀찮게 굴면 굴수록 들으란 듯 꿈에 대해 떠벌리고 다녔다. 에스퍼 협회는 연화의 입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럴수록 연화의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의 수만 늘어날 뿐이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연우를 감금했을 때 연화는 보란 듯 그림을 복사해 원하는 사람마다 그림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 뒤로 끔찍한 혼란이 찾아왔었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한동안은 연화가 제대로 된 미래를 보지 못할 만큼 세상이 어지러웠다. 그 긴 시간 동안 길드를 말아먹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 던전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그 길로 돌아오지 못했다. 현존하는 S급 에스퍼의 수가 적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결말로 미래를 바꾸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연화가 쓴 책의 주인공이라는 걸 알게 된 에스퍼들은 그 책을 읽기 위해 연화에게, 연우에게 접근했다.
연우는 눈머리를 짚었다. 센터의 직원들뿐만 아니라 각종 길드에서 연우에게 접근해 연화의 책을 한 줄이라도 읽어보겠다며 사람을 탈탈 털 것이다. 한숨을 삼킨 연우는 손을 뻗어 서류 조각을 노려봤다. 센터가 아니라 길드였다면 이미 연우의 집을 털었겠지. 그러고는 막대한 보상금을 주고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은근슬쩍 넘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센터로 오긴 했는데….
문제는 센터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연화의 예지를 취득하려 한다는 것이다. 미성년자 에스퍼 활동 동의서라는 말도 안 되는 서류를 만들어오면서까지.
인과율의 부메랑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어도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미래를 바꾸려 하겠지. 그래, 연우가 그랬던 것처럼….
그 순간 몰려오는 두통에 연우는 귀를 막았다. 이명이 연우의 머릿속을 뒤흔들고 있었다.
“뭐야, 왜 그래요?”
통증에 가쁜 숨을 몰아쉬던 연우는 손을 뻗었다. 도망가야 해. 중얼거린 연우가 차헌의 팔을 붙잡았다.
“왜요? 그 인간들 또 왔어요?”
인상을 쓴 차헌이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연우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내가 방금 무슨….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연우의 눈에 바닥에 흩어진 서류 조각이 들어왔다. 지저분한 바닥을 훑어보던 연우는 몸을 일으켰다. 쯧. 어딜 가나 이렇다니까.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정리하는 사람 따로 있고.
주변을 멍하니 둘러보다가 갑자기 바닥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연우를 어리둥절하게 내려보던 차헌이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손을 휘두르자 서류 조각을 꽁꽁 얼어붙게 했던 얼음조각이 떨어졌다. 발갛게 얼어붙은 연우의 손끝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던 차헌은 제법 큰 서류 조각을 주웠다.
“이거 뭔지 물어봐도 돼요?”
차헌의 손에 들린 서류에는 [활동 동의서]가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차헌의 표정에 연우는 작게 감탄했다. 평생을 한연화의 오빠로 살아온 연우였다. 제 이름 석 자보다 한연화의 오빠라고 불릴 때가 더 많을 정도로 연화의 이능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연우를 앞에 앉혀놓고 연화에 관해 물어보다니.
이상한 기분에 입술을 깨문 연우는 서류 조각을 끌어모은 뒤 좌표를 설정했다. 옆에 놓인 휴지통에 종이가 소복이 쌓이는 소리를 확인한 연우가 힘없이 웃었다.
“동생이 능력이 좀 좋은데, 아직 미성년자거든요. 그것도 법적 미성년자.”
“그래서요.”
“그러니까 보호자인 저한테 달려와서 활동 좀 하게 해달라 징징거리는 거예요.”
에스퍼는 여러모로 위험한 직업이다.
던전을 공략하고 위험구역의 마수를 상대하는 건 차라리 괜찮았다. 인명 피해가 없도록 작전을 짜고 준비를 단단히 한 다음, 쪽수로 밀어버리는 게 대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갑자기 솟아오른 게이트에 휩쓸려 버린다면 홀로 던전에 고립될 수도 있다. 혼자 있는 에스퍼만큼 마수에게 먹음직스러운 것도 없었다. 이러한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 에스퍼는 항상 팀 단위로 움직였다. 그러니 게이트에 휘말리는 것도 괜찮았다.
문제는 연화가 정신계 에스퍼라는 거다. 정신계는 마나가 불안정해 팀원을 꾸릴 수도 없었고, 이렇다 할 공격 스킬도 없었다. 그 어떤 에스퍼보다 예민한 마나 코어를 가지고 있어 가이딩을 받아봤자 효율도 없었다.
그런 연화가 게이트에 휩쓸린다면? 마나 코어에 문제가 생겨서 발작을 일으키게 된다면? 폭주하는데 근처에 가이드가 없다면? 마나 코어가 심장을 쥐어짜서 고통스러워한다면?
그래서 연우는 연화가 최대한 늦게 활동을 했으면 했고, 연화도 동의했다.
한 번씩 몇몇 길드장과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건 연화가 원해서 하는 거래였다. 연우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연화가 활동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부모님과 똑같은 사람이 되기 싫었으니까.
“미성년자 활동은 범죄 아니에요? 근데 왜 형보고 동의해달라고 해요?”
“편법을 쓰는 거죠. 일단 활동은 시켜놓고 성인이 되면 활동금을 지원할 테니 우리와 계약하자는 거죠.”
“아.”
“우리 연화, 아직 어린애인데 벌써 위험한 활동은 안 시키고 싶거든요.”
센터야 보는 눈이 많으니 그럴싸하게 미성년자 활동 동의서라도 만들어왔지만 몇몇 길드는 납치를 시도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아공간이 있으니 납치당할 걱정은 없지만.
어렸을 적 잠이 든 연화를 업고 도망 다니던 연우에게 도움의 손을 뻗는 길드도 많았다. 그때마다 연우는 잔뜩 경계하며 공간을 접었었다.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납치하는 것들이나, 보호해주겠다는 이들이나, 연우의 허락을 받겠다고 접근하는 놈들이나 목적은 하나였다. 연화의 이능.
연화가 성인이 되고 소속 집단이 생길 때까지 오늘 같은 일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한숨을 쉰 연우는 일어나려다 말고 차헌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왜요?”
“지퍼.”
차헌이 아차 한 표정으로 명치까지 내려가 있던 지퍼를 올렸다. 되었냐는 표정에 연우는 차헌을 길게 훑어내렸다. 턱 끝까지 올라간 지퍼와 손목에 고정된 소매, 팔뚝에 달린 보조 가방까지 살핀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에는 진공 포장된 상품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면 이제는 제법 에스퍼 티가 난다. 빛을 받아 푸른빛이 도는 까만 머리와 어두운색의 훈련복이 제법 잘 어울렸다. 발목을 조이는 매듭까지 확인한 뒤 거슬러 올라가던 연우는 눈썹을 찌푸렸다.
“사원증은요?”
“여기요.”
주머니에서 이리저리 엉켜있던 보라색 줄이 쓱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이건 안 할래요. 형이 이거 하루, 아니 하루가 뭐야, 한 시간만 차고 다녀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걸요.”
차헌이 뚱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그 말에 연우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훈련 시간이라 복도에는 단 둘뿐이었다.
하루라도 좋으니 S급이 되고 싶다고 비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곳이다. 차헌이야 이름이 사방팔방 알려지는 게 싫고, 짜증 나고, 이름 보고 수군거리는 것이 싫어 한 말이겠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배부른 투정으로 들릴 수 있었다.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그냥 형이 여기 있을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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