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내가 여기 있을 줄 알았다고?
둘이서 열심히 마나볼을 주고받은 훈련의 성과가 있는 건가? 눈을 감은 연우는 차헌의 마나를 느껴보려 했다. S급이라서 그런 건지, 차헌이 제대로 마나를 통제하지 못해서 그런 건지, 차헌의 마나는 항상 불투명한 느낌이었다. 연화의 마나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걸 봐서는 아마 S급의 마나는 대체로 이런 식으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렇긴 해도 조희서의 마나보다는 선명했다. 옅게 웃음을 흘린 연우는 눈을 떴다.
“왜 웃어요?”
“신기해서요.”
같은 팀원보다 A 구역 S급 에스퍼의 마나가 더 친밀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웃겨 한숨이 흘러나왔다. 자기 능력에 자부심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언제까지 저렇게 겉돌기만 할건지. 조회서의 마나에 익숙해지기 전에 팀이 박살 나는 게 빠르겠다.
떨어진 서류 조각이 더 없는지 확인하는데 훈련 종료종이 울렸다. 단조로운 음악 소리에 연우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마나 코어를 확인했다. 쉬지는 못했어도 마나 코어가 안정되었으니 작은 소동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항의한다고 그만둘 사람들도 아니고. 한 번 거절했으니 며칠은 안 건드리겠지.
“어디 가요?”
“식당이요.”
연우의 대답에 차헌은 당연한 듯 곁에 따라붙었다. 너는 네 구역 가서 밥을 먹어야지? 물으려던 연우는 찬찬히 차헌을 살폈다.
그런 연우의 눈빛에 차헌은 반사적으로 훈련복에 묻은 피를 숨겼다.
이 형 피를 무서워하는 것 같던데. 차헌의 볼을 타고 흐르는 피를 보며 하얗게 질린 연우의 얼굴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피를 보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차헌이 이능을 다루는 것에 익숙해질수록 훈련 강도는 더욱 거세졌다. 차헌의 훈련을 담당하고 있는 에스퍼들은 차헌이 공격을 막아낼 때마다 더욱 거센 공격을 퍼부었다. 와, 이걸 막네요? 웃으며 이것도 막아보라며 사방에서 덤벼들었다.
아무리 빠르게 얼음벽을 세워봐도 합을 맞춘 공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눈 아래 상처가 났다. 치료를 빙자한 고문을 하기 위해 다가오는 치료계를 피해 차헌은 C 구역 치료실로 향했다. 들린 김에 연우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웃거리던 때, 서류 더미를 껴안고 있는 직원들에게 둘러싸인 연우를 발견한 것이다.
“따라와요.”
언젠가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이 아닌 연우가 손짓했다. 훈련을 빙자한 따돌림을 받느라 제대로 된 훈련도 못 받았을 텐데, 밥도 제대로 된 걸 못 먹는 건 좀… 그렇지 않나. 하는 마음에 충동적으로 동행을 권한 것이다. 저번에 식당이 어디냐고 물어본 걸 보면 식당이 어딘지도 모르는 게 분명했고.
“저긴 어디예요?”
식당으로 가는 내내 차헌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어디로 데려가냐며 경계할 땐 언제고 옆에 붙어서 여긴 어디냐, 저긴 어디냐, 묻고 있었다. 참 단순도 하지. 이러다가 어디 가서 장기라도 뜯겨올까 봐 걱정이다.
“그런데 제가 형을 못 믿을 이유가 있어요?”
저를 믿는다던 차헌의 목소리를 떠올린 연우는 쓰게 웃었다. 못 믿을 이유야 많지. 사람이 다정하게 대해준다고 해서 아무나 덥석덥석 믿으면 안 된다. 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사람을 살살 꾀다가 결국 뒤통수를 치는 게 대부분이니까.
“한연우 에스퍼.”
부름에 연우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팀원들이 식당 앞에서 연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 아니라 조희서가 배재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당 한쪽 구석에서 공동구역 에스퍼들이 모여있었다. 자기들끼리 밥을 같이 먹어야 할지, 아니면 새로 발령받은 팀원들과 먹어야 할지 의논 중이었다.
의견을 나누던 이수빈이 아는 체하며 손을 흔들었다. 눈치를 보던 이수빈은 나중에, 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마주 손을 흔들어주던 연우는 입 모양을 읽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는 서유진이 어색한 얼굴로 눈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배재영까지 확인한 연우는 계속해서 서유진에게 향하는 눈길을 돌렸다.
이쪽을 열렬히 노려보는 시선 때문이었다.
“뭔데요, 저 사람 알아요?”
혹시나 제가 과민반응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차헌 역시 시선을 느꼈는지 못마땅한 얼굴로 저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차헌의 눈짓에 연우는 파란색 끈에 달린 사원증을 확인했다.
B급, 보조계, 정은영.
모르는 사람인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연우는 정은영과 눈을 맞췄다. 뭘 보냐는 듯 눈을 부라리는 정은영을 잠시 바라보던 연우는 턱을 치켜올렸다. 그대로 코웃음을 치는 연우를 향해 달려들 것 같이 움찔거리던 정은영은 주변의 눈치를 보고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연우의 주변에는 이유 모를 호감을 건네는 이들도 많았지만, 이유 모를 적의를 뿌리는 것들도 많았다. 후자의 경우 대부분이 연화의 이능으로 미래를 어떻게 바꿔보려다가 인과율의 부메랑을 맞은 사람들이었다. 팔다리 멀쩡해 보였고, 사원증도 목에 잘 걸고 있는 걸 보아하니 이능을 잃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부메랑을 맞은 사람의 가족이거나 주변인이겠지.
참나. 누가 보면 연화가 미래를 바꾸라고 강요한 줄 알겠다. 자기가 미래를 바꾸겠다고 설쳐놓고서는 왜 애꿎은 남한테 화풀이지? 정은영을 향해 방긋 웃어준 연우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좀 있으면 B 구역이 센터로 복귀할 시간이었다. 자리가 없어 멀뚱히 기다리는 것보다는 누구 하나 들어가서 자리를 잡아두는 게 나았다.
“여기 사원증 찍고 메뉴 고르면 돼요.”
연우의 말에 보라색 줄을 말아쥐고 사원증을 꺼낸 차헌은 빛과 같은 속도로 사원증을 찍었다. 그런 차헌과 달리 느긋하게 사원증을 찍은 연우는 김밥을 골라 자리에 앉았다. 미끄러지듯 서빙된 김밥을 잡아채자 최동원이 대놓고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앞에 앉았다.
“주문은 했는데 기다리면 돼요?”
의자를 빼던 차헌은 최동원이 손을 뻗어 불고기를 잡아채는 걸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마나볼을 처음 봤을 때의 표정이었다.
연우가 답을 해주기도 전에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의자에 앉은 차헌은 날아오는 우동을 잡아챘다. 눈이 동그래진 차헌의 입꼬리가 활짝 올라갔다. 연이어 날아오는 뚝배기와 김밥, 비빔밥을 잡아챈 차헌은 신이 난 표정으로 팔을 뻗고 있었다.
거기서 더 먹어?
부센터장이 싸주는 도시락의 양을 보고 식사량을 가늠하긴 했는데…. 정말 많이 먹는구나.
틈이 날 때마다 입에 뭔갈 집어넣는 연화를 떠올린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S급의 식사량은 대부분 저런가 보군. 납득한 연우와 달리 최동원은 입을 살짝 벌린 채 샌드위치를 잡아채는 차헌을 보고 있었다.
“뭘 봐요?”
“아니. 어, 음. 그, 강차헌 에스퍼가 여긴 어쩐 일…?”
그 물음에 차헌은 연우를 내려봤다. 김밥에서 밥풀을 뜯어내고 있던 연우는 눈을 끔벅였다. 왜 날 봐?
“식당이 어딘지 모른다고 해서….”
같이 왔다? 데리고 왔다? 뒷말을 고르는데 최동원은 연우의 대답보다 차헌의 앞에 널려진 음식의 양에 집중했다.
“와.”
최동원의 옆에 앉던 박서현도 마찬가지였다. 돈가스를 낚아챈 박서현은 질린 얼굴로 테이블에 펼쳐진 음식을 살폈다.
“다른 S급 분들이랑 드시게요?”
그 질문에 우동을 크게 뜨던 차헌의 눈매가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밥맛 떨어진다는 듯 젓가락을 내려놓으려다 잠시 후 젓가락을 고쳐 쥐었다.
“아닌데요.”
“아, 그럼… 이걸 전부… 혼자….”
“보통 이 정도는 먹지 않아요?”
최동원의 중얼거림에 차헌이 연우를 보며 물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 정도는 못 먹을걸. 입 안 가득 김밥을 씹고 있던 연우는 속으로만 웅얼거리며 손짓했다. 신경 쓰지 말고 드세요.
그 손짓에 그 정도는 먹는다고. 중얼거린 박서현이 전투적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근데 형. 그거 먹고 돼요?”
차헌은 연우의 앞에 놓인 앙증맞은 꼬마 김밥을 가리켰다. 검지보다 작은 크기의 김밥은 한입에 다 털어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양이 적었다.
고루한 이야기지만 보조계는 몸이 가벼워야 한다는 편견이 있다. 꼭 편견 때문이 아니더라도 연우의 이능은 무게에 제한을 두고 있어 체중 조절을 하는 것도 있고, 원래 입이 좀 짧은 편이었다.
“이거 먹을래요? 맛있는데.”
차헌이 내미는 뚝배기 불고기를 본 연우는 저도 모르게 몸을 물렸다.
“음. 한연우 에스퍼 뜨거운 거 못 먹어요.”
안 그래도 지글지글 끓는 뚝배기 소리를 억지로 외면하고 있던 연우는 박서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온기가 있는 음식에 거부감이 든 지가 오래라 팀원들은 연우가 뜨거운 음식을 못 먹는다고 알고 있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 따뜻한 커피를 즐겨 마셨던 것 같은데 지금은 김이 올라오는 걸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형 뜨거운 거 못 먹어요?”
그렇다고 대답하려는 데 숟가락이 떨어지며 국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형?”
언제 왔는지 차헌의 맞은편에 앉은 조희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우와 차헌을 번갈아 봤다. 뚝배기 비빔밥을 비비고 있던 최동원도 마찬가지로 눈을 크게 뜨고 연우를 보고 있었다.
왜…들 그렇게 보지? 김밥을 천천히 씹던 연우는 뚝배기를 한입 가득 뜨고 있는 차헌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얘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형이라고 부른 건 처음이구나.
“왜요?”
김밥을 삼킨 연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박서현은 물론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던 에스퍼도 연우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얘가 갑자기 저를 형이라고 부르던데요. 라고 사실대로 말하면 이 사람 중에서 나를 믿어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속으로 가늠해보던 연우는 눈을 내리깐 채 시선을 돌렸다.
“아니에요. 많이 먹어요.”
“그래서 무슨 사인데요?”
식사를 마치고 훈련장으로 들어가자마자 박서현이 달려들었다. 최동원도 호기심이 가득 담긴 얼굴로 연우의 곁에 붙어섰다. 형이라고 불렀다고 무슨 사이라니. 옅게 웃던 연우는 으음. 소리를 내며 눈을 굴렸다. 누가 봐도 말을 고르는 모습에 박서현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냥 밤에 훈련할 때 몇 번 마주친 게 다예요. 훈련 도구가 뭐냐고 물어보다가 제 이름을 모르는지 형이라고 부르던데요?”
제 액면가가 형이긴 한가 봐요. 연우의 대답에 최동원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강차헌이라면야. 라고 불렀을 것 같은데. 적어도 나이를 추측할 수 있을 정도의 이야기가 오고 간 상황인 건 분명했다. 차헌이 연우를 바라볼 때의 눈빛을 떠올린 최동원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박서현도 이상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그게 다냐고 물어보려던 순간이었다.
“그게 다예요?”
내가 물어본 거 아니다. 최동원의 표정에 박서현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옆에 있던 조희서를 바라봤다. 그런 두 사람의 시선에 뭘 보냐는 표정을 지은 조희서가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구에 삐딱하게 기댄 정은영이 연우를 향해 이죽거리고 있었다.
“다 알고 친해진 거 아니에요? 잘난 동생 덕 좀 본 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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