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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23화 (23/143)

23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질문에 삐딱하게 서 있던 자세 그대로 연우에게 걸어가던 정은영은 들으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렇잖아요. S급 강차헌 에스퍼가 뭐 좀 알려줬다고 C 구역 에스퍼를 형이라고 부른다? 말이 되나, 이게?”

정은영의 말에 박서현의 표정이 굳었다. 나서려는 박서현의 팔을 잡은 연우는 눈을 내리깐 채 정은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기서 한연우가 한연화 오빠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없을 테고. 강차헌 에스퍼 S급이잖아요. S급이라면 한연화가 쓰는 책의 주인공이 될 게 뻔한데 그냥 모른 척했다고? 에이, 사실대로 말해요, 그냥. 알고 접근했잖아요.”

역시나 대답을 바란 질문이 아닌 듯 곧바로 뒷이야기가 따라붙었다. 그래. 저게 보통 사람들의 반응이겠지.

아니, 근데 저게 어디서 감히 남의 동생 이름을 따박따박 불러? 에스퍼끼리는 상호존중의 뜻을 담아 존대를 했고, 이름 끝에 에스퍼를 붙였다. 강차헌은 에스퍼라고 부르고 연화는 이름만 찍찍 부르는 걸 봐서는 연화에게 불만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한숨을 삼킨 연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식당에서의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물론 자리에 없던 사람들까지 연우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어… 다들 그런 식으로 보고 계실 줄 몰랐네요.”

볼을 쓸어내리는 연우의 말에 정은영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저는 그런 의도로 접근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그런 의도로 접근하려 했다면….”

말끝을 흐린 연우는 한쪽을 흘끗거렸다. 연우의 시선을 쫓은 사람들은 연우가 누구를 쳐다본 건지 찾으려 서로 두리번거렸다. 센터와 계약하면서 한연우 에스퍼에게 그 어떤 정보도 물어보지 않겠다고 서약했지만 다들 미래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한연우 에스퍼가 그런 의도로 접근하려 한 이능력자가 누구인지 찾기 위해 C 구역이 소란스러워졌다. 눈길이 닿아있던 쪽에 서 있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뿌듯해했고, 연우의 뒤통수만 보고 있던 사람들은 시무룩한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뭐, 저는 한 치 앞도 모르고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성질이 못돼서 말이에요.”

방긋 웃는 연우의 말에 미래를 바꾸려 했던 사람들이 어떤 끝을 봤는지 떠올린 사람들은 주춤주춤 물러섰다.

“자기가 불에 타죽는 걸 각오하면서 미래를 바꾸려고… 했던 사람들, 이 있… 있지만.”

마른침을 삼킨 연우는 손바닥에 고인 땀을 무시하며 애써 웃었다.

“그 사람들이 어떤 미래를 맞이했는지 다들 아시잖아요. 그런데 제가 바보도 아니고 미래를 바꾸려고 하겠어요? 저는 제 팔자에 만족하고 있어요. 뭐, 아닌 사람들도 있겠지만.”

네 주변 사람 말이다.

“저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서요.”

소란을 원하진 않지만 먼저 걸어온 싸움에 지고 들어가는 취미는 없다. 노골적인 연우의 시선에 정은영은 도끼눈을 떴다.

“그만 해요.”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보조 가방 위를 더듬거리던 정은영은 배재영의 만류에 핏줄이 터져 빨개진 눈으로 연우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준 연우는 제게 손짓하는 이수빈을 바라봤다.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에 박서현에게 양해를 구한 연우는 훈련장을 벗어났다.

“괜찮아?”

“응.”

눈꼬리가 뾰족해지지 않도록 순하게 웃어 보인 연우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화를 낼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다. 반성도 없이 일단 남의 탓부터 하고 보는 족속들이지 않나. 연화와 연우를 탓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이런 일쯤은 웃어넘길 수 있었다. 죽은 사람 살려내라고 칼 들고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너랑 사관학교 동기인 거 알고부터 진짜 꼬치꼬치 캐물어서 연화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했는데 눈빛이 완전히 돌았더라고. 사관학교 때 연화 납치당할 뻔했던 사건이 생각나기도 했고…. 혹시 몰라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잡아뗐거든.”

“고생했겠다. 다른 구역 애들도 붙잡혀 있는 거 아냐?”

“건이는 훈련하기 바빠서 그런 일도 없었대. B 구역 애들은 모르겠다. 아무튼, 정은영 에스퍼 가족이 그때 이능을 잃었나 봐. 그래서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려고 했는데 벌써 사건이 터져버렸네.”

의기소침한 이수빈의 얼굴에 연우는 부러 활짝 웃었다.

“어디 그런 사람이 한 둘이었어? 갑자기 시비를 걸어서 뭔가 했는데 이유를 알아서 속은 시원하네.”

연우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도 이수빈은 힘을 내라며 등을 두드렸다.

“그럼 다다음 주에 우리 같이 훈련받는 건가?”

오랜만에 같이 연습하겠다. 훈련 시작종이 울리는 소리에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연우는 훈련장으로 들어섰다.

음.

연우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분위기를 환기해놓고 나갔음에도 이런 시선을 보낸다는 건… 혀끝을 깨문 연우는 아까 연우가 그랬던 것처럼 손을 흔들며 웃고 있는 정은영을 바라봤다.

대부분은 혹시, 설마. 하는 표정으로 연우를 보고 있었지만 역시나. 하는 얼굴로 연우를 노려보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벌점이 쌓여 가상 던전 훈련에서 제외된 팀원들이었다.

“자, 집중.”

박수를 쳐 시선을 끌어모은 훈련소장은 손바닥만 한 가방을 열었다. 가방에 손가락을 밀어 넣은 훈련소장이 제 키만 한 서랍을 꺼내자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졌다. 주변으로 몰려든 이능력자들은 묘한 빛으로 일렁거리는 서랍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저게 던전 보상물인 인벤토리냐고 묻는 최동원의 질문에 박서현이 신이 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대련 훈련을 할 겁니다.”

훈련소장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서랍이 한 칸, 한 칸, 열렸다. 서랍에는 무기들이 종류별로 전시되어 있었다. 새로운 훈련을 한다는 소식에 들뜬 이능력자들을 둘러보던 훈련소장은 작은 구슬을 하나씩 건넸다.

“마나볼을 채우듯 마나를 흘려보내세요. 항상 말하지만 과하게 넣을 필요는 조금도 없습, 거기. 설명 듣고 하세요.”

구슬에서 마수가 피어나자 곳곳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비명을 지르는 팀원에게 물러나라고 손짓한 훈련소장은 방어벽을 세워 마수를 가뒀다.

“진짜 마수가 아니라 가상 던전용으로 만들어진 홀로그램 마수입니다. 다칠 위험은 없지만 맞으면 기분이 상당히 더러우니 다들 알아서 잘 피하시길 바랍니다. 마수를 잡겠다고 덤비는 건 좋은데 옆에 팀원이 있는지, 내가 공격하는 게 팀원인지 마수인지 잘 구분하면서 훈련하시길 바랍니다. 각자 한 명씩 나와서 무기 골라가세요. 한연우 에스퍼.”

호명에 서랍 안을 살피던 연우는 손에 감기는 단검을 쥐고 물러섰다. 최동원은 신이 난 얼굴로 방패 두 개를 들고 연우의 옆에 섰다.

“훈련이 끝나면 반납하는 거 잊지 마세요. 훈련 도구를 험하게 쓰는 건 괜찮습니다. 하지만 분실하면 벌점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저기 쉬고 있는 사람들에게 차례를 넘겨주게 될 겁니다.”

그 말에 상기된 얼굴로 무기를 고르던 박서현이 바람개비를 들고 왔다. 그게 뭐냐며 비웃던 조희서와, 마지막으로 배재영까지 무기를 고르자 구슬을 쥐고 있던 박서현이 훈련장의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일단 공간 확보부터 하고 마나를 주입하도록 하죠.”

박서현의 말에 최동원이 방어벽을 착착 치기 시작했다. 투명한 방어벽 너머로 훈련소장에게 다가가는 이능력자 무리가 보였다.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뻔해 듣지 않으려 해도 에스퍼로 각성하며 예민해진 귀는 대화를 잡아챘다.

“혹시 한연우 에스퍼 팀이 첫 번째로 채택된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공손함과 동시에 빈정거림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허, 하는 나지막한 훈련소장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똑바로 물어보세요. 제가 한연우 에스퍼에게 혜택을 준 게 아닌지 물어보는 거 맞습니까?”

훈련소장의 질문에 이능력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게 아니라는 형식적인 변명조차 하지 않는 걸 보니 그렇다고 확신하고 묻는 게 분명했다. 그게 맞냐는 얼굴로 훈련소장을 바라보고 있겠지.

웃기지도 않는다. 한연화 가족이라고 주는 혜택이 고작 가상 던전 훈련이라고? 연화를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연화의 이름을 업고 다닐 거였다면 C 구역에서 훈련을 받고 있지 않을 거다. 사람 세 명 누우면 꽉 차는 원룸에서 살고 있지도 않겠지. 풀빌라 맨션을 지어뒀으니 오시기만 하면 된다고 연우에게 굽신거리던 길드장이 어디 한 둘이었겠는가.

풀빌라 맨션이 뭐야, 원하는 건 모두 들어주겠다며 무영 길드장이 반짝거리는 카드를 내밀었을 때 그 손을 잡았겠지.

어딜 감히 가상 던전에 연화를 비벼.

“아닌가요?”

쐐기를 박았다고 착각하고 있을 되바라진 질문에 한숨을 흘린 훈련소장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은 연우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평온하게 훈련을 준비하고 있는 연우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너무 많았다.

“집중.”

손뼉을 내리친 센터장은 엉거주춤한 시선을 숨기지도 못하는 이능력자들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훑었다.

“자기가 몹시 뛰어나다는 착각은 사관학교를 졸업하면서, 혹은 아카데미를 졸업하면서 버린 거 아니었습니까?”

갑자기 그건 왜…. 불만 어린 목소리가 어디선가 흘러나오자 여기저기서 입을 삐죽였다. 포기하려고, 버리려고 해도 안 되는 게 사람 욕심이다. 그래도 얘보다는 내가 낫다면서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게 C 구역의 이능력자들이였다.

“저기 한 번이라도 정리한 사람 손 들어보세요.”

훈련소장의 손끝은 훈련 도구 정리함을 가리키고 있었다. 박서현이 안 들고 뭐 하냐는 듯 눈짓했지만, 연우는 손끝을 말아쥐고 웃을 뿐이었다.

“훈련 도구 정리 안 하고 그냥 퇴근한 사람. 염치가 있다면 입 다무세요.”

신랄한 목소리에 입을 삐죽거리던 사람들이 슬그머니 입술을 말아 물었다.

“당신들이 훈련장을 방치하는 동안 널려있던 훈련 도구를 정리한 사람이 한연우 에스퍼 한 명뿐이었습니다.”

훈련소장의 말에 연우의 귀가 달아올랐다. 저 뒤에 연우를 본받으라는 말이 나올까 봐 조마조마했다. 들으란 듯 한숨을 쉰 훈련소장은 서늘한 눈빛으로 따지러 왔던 이능력자들을 바라보았다.

“됐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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