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으음….”
침음을 삼킨 박서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굴이 벌게진 이능력자 무리를 한쪽으로 치워낸 훈련소장은 평소처럼 굴고 있었지만, 연우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렇지 못했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 바라보는 시선은 연우에게만 한정된 게 아니라 팀원들을 향할 때도 있었다. 쟤들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냐는 눈빛에 박서현조차 주눅이 들 정도였다.
“죄, 죄송합니다.”
촉수형 마수, 문어의 다리를 피하려다가 제 다리에 걸려 넘어지려는 최동원을 받아준 배재영은 눈썹을 찌푸린 채 박서현과 눈을 맞췄다. 저만 느낀 게 아닌지 최동원도 무기를 주우며 주변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오로지 연우만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저 때문에 죄송하다는 사과가 없었더라면 더럽게 눈치도 없지, 하며 혀를 찰뻔했다.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면서도 담담한 얼굴을 해 보이는 연우를 노려보던 조희서는 짜증 난 목소리를 숨기지 않고 쏘아붙였다.
“너 때문에 이게 뭔데?”
배재영이 얼리고 박서현이 끊어낸 마수 다리를 수습하던 연우는 입술을 말아 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풀이 죽은 연우의 모습에 다친 무릎을 치료하던 최동원이 절뚝절뚝 걸어가 연우의 앞을 막아섰다.
“에이, 따지면 한연우 에스퍼의 잘못이 아니죠.”
“맞습니다. 한연우 에스퍼가 한 건 정리뿐이고, 덕분에 우린 좋은 무기를 독점했잖습니까. 가상 던전 훈련도 하게 됐고.”
박서현의 말에 최동원이 동의했다. 그럼에도 조희서의 기세는 누그러들지 않았다. 배재영이 얼음벽을 세워 시선을 막아보려 해도 쾅, 하고 날아온 무언가가 벽을 허물어트렸다.
“죄송합니다~”
전혀 죄송하지 않은 태도에 팀원들의 마나는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그냥 따로 연습하는 게 낫겠는데….”
배재영의 중얼거림에 박서현이 고개를 쳐들었다. 따로 연습할 곳이 있냐는 있냐고 물어보자 잠시 고민하던 배재영은 훈련소장에게 달려갔다. 이쪽을 가리키며 설명하는 배재영의 말에 훈련소장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러라고 손짓했다.
“홀로그램 장치에 마나를 많이 넣으면 많이 넣을수록 강한 마수가 나타납니다. 차례차례 단계별로 마수를 해치우도록 하고, 훈련장이 좁거나 옆에 있는 에스퍼들이 걱정된다면 구역을 이동해도 상관없습니다.”
훈련소장의 말에 벌떡 일어난 박서현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렇게 향한 곳은 공동구역 훈련장이었다.
“와….”
단순히 넓은 운동장인 C 구역 훈련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던전과 같은 환경으로 꾸며낼 수 있는 홀로그램 장치를 멍하니 바라보던 최동원은 연우를 바라보며 서러운 얼굴을 했다. 배재영이 아니었다면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겠지. 최동원의 어깨를 두드려준 연우는 배재영의 손짓을 보고 달려갔다.
“그냥 평범하게 훈련하다가 마수에 맞춰 배경을 바꾸는 게 좋겠죠?”
그러는 게 좋겠다고 대답한 연우는 배경 선택지 중에 동굴형을 보고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음? 동굴로 할까요?”
“아, 아뇨. 문어 마수였으니 해안형은 어떨까요.”
손에 고인 식은땀을 닦아내며 대답하는 연우의 말에 그러는 게 좋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배재영은 훈련장의 풍경을 바꿨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해변을 보며 감탄하던 연우는 박서현의 손짓에 따라 단검을 쥐었다.
* * *
“한 번 더 할까요?”
“아니요.”
단호한 최동원의 대답에 웃음을 터트린 배재영은 마수 구슬을 회수했다. 홀로그램 장치가 꺼지자 귀가 따갑게 울려 퍼지던 파도 소리가 잠잠해지며 회색 천장이 보였다.
“저기 최동원 에스퍼. 아까 있잖아요.”
배재영이 최동원에게 하는 조언을 배경 음악처럼 듣고 있던 연우는 훈련장을 정리했다. 방금까지 모래에서 그렇게 뒹굴었는데 훈련복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저는요?”
“음? 조희서 가이드는 제가 못 봤네요.”
한 게 있어야 충고할 게 있지. 박서현과 최동원의 뒤에 서 있다가 틈만 나면 배재영에게 가이딩 하려던 조희서였다. 저럴 거면 총은 왜 들고 온 거래. 혀끝을 깨문 연우는 잘했다며 엄지를 내미는 배재영을 향해 방긋 웃었다.
“자, 이제 가이딩 타임.”
“좀 쉬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손을 뒤로 숨긴 조희서가 에헤헤, 웃었지만 배재영은 박서현에게 손짓했다.
“내 몸이 힘들수록 이능을 더 써봐야 해요. 그래야 내 한계도 알 수 있지.”
그 말에 조희서는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최동원과 연우를 바라봤다. 어지간히도 가이딩을 해주기 싫었는지 손톱 끝으로 찍어주는 조희서의 가이딩은 불쾌하기만 했다.
손끝을 터는 연우의 옆에서 나른한 숨을 흘리며 드러눕던 최동원은 훈련 종료종이 울리자 벌떡 일어났다.
“혹시 체력 단련장에 가봐도 됩니까?”
“오. 체력이 남아있을 줄 알았다면 훈련을 좀 더 할 걸 그랬나 봐요.”
살벌한 배재영의 말에 최동원은 연우에게 도와달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근육에 집착하는 방어계의 심리를 보조계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리 그럼 내일도 여기서 훈련하는 건가요?”
“다른 구역에서 연습해도 된다고 하셨으니까… 내일 출근해서 훈련소장님께 출입증 발급해달라고 말씀드려볼까요?”
그러자는 배재영의 말에 조희서는 신이 난 얼굴로 박서현에게 손을 뻗었다. 가이딩을 받은 박서현이 몸을 풀며 짐을 챙겼다.
“그럼 최동원 에스퍼는 체력 단련하고 가고, 한연우 에스퍼는? 바로 가실 거죠. 그럼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박서현의 인사에 연우는 힘없이 허리를 굽혔다 폈다. 인사할 기운도 없었다. 씻기도 전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 비척비척 걸어가던 연우는 따라오지 않는 박서현을 돌아봤다.
“아, 저는 연습 좀 더 하다 가려고요.”
허공에 얼음꽃을 피워내는 배재영의 말에 조희서는 그럼 저도… 하며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 모습에 연우와 눈을 맞춘 박서현은 웃음을 흘렸다. 연우가 그렇게 개인 훈련을 했는데도 단 한 번도 가이딩을 해주지 않던 조희서였다.
C 구역이라 차별받는다면서 눈물을 퐁퐁 흘릴 때는 언제고 자연스럽게 등급으로 차별하고 있는 걸 보니 웃음만 나왔다.
“그럼 저도 좀 더 해볼까요.”
가방을 내려놓은 박서현이 혼자 훈련하면 외롭잖아요. 하며 배재영의 옆에 앉았다. 조희서의 얼굴이 불퉁해지는 것을 확인한 박서현은 고개를 돌려 연우를 찾았다.
“한연우 에스퍼도?”
훈련하다가 실려 갈 일 있나…. 힘없이 고개를 저은 연우는 이리저리 꺾이는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공동구역을 벗어났다.
도저히 못 걸어가겠다. 그냥 벌점 좀 받고 공간을 접을까…. 잔뜩 풀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연우가 마나 코어에서 마나를 끌어모을 때였다.
“형?”
“강차헌 에스퍼?”
문양을 그리던 연우는 손을 흔들어 마나를 흩트렸다. 기성 에스퍼끼리야 에헤이, 못 본 척합시다. 하면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지만 이제 센터 규칙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차헌의 앞에서 불법행위를 하기가 좀 그랬다.
“형이 여긴 무슨 일로….”
반가운 얼굴로 뛰어오던 차헌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표정을 굳혔다.
“무슨 일 있었어요?”
묻는 말에 연우는 제 몸을 내려보았다. 고개를 들어 올릴 힘도 없었다. 숨을 고르고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차헌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연우를 살피고 있었다.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저는 진짜 훈련만 했습니다.”
“아.”
그제야 차헌의 미간이 풀어졌다. 그런데 꼴이 왜 그러냐는 눈빛에 연우는 샤워가 간절해졌다. 집에 갈 힘도 없었다. 뽀송하게 씻고 나면 휴식실의 간이침대도 천국의 구름처럼 느껴질 것이다. 기운 없이 걸어가던 연우는 따라붙는 차헌을 올려봤다.
“강차헌 에스퍼는 여기 어쩐 일입니까?”
“저기가 숙, 왜요.”
차헌이 가리키는 곳을 보는데 뚱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 따라 뚱한 표정을 지은 차헌은 연우를 보며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같은 센터 살면서 오다가다 마주칠 수도 있는 건데 형은 마주칠 때마다 강차헌 에스퍼는 어쩐 일입니까. 하면서 물어보더라.”
설마 지금… 방금 나 따라 한 건가. 강차헌의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인상을 쓰고 있는 차헌을 올려보던 연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헌은 같은 센터라고 퉁 쳤지만, 센터는 보통 넓은 곳이 아니었다. 센터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파낼 때 산 두 개 분량의 흙더미가 나왔다고 했다. C 구역만 해도 반나절은 돌아다녀야 뭐가 어딨는지 알 수 있는데 다른 구역들은 오죽 넓겠나. 뭐… 그래. 오다가다 하면 만날 수도 있겠지.
연우가 납득한 표정을 지었음에도 차헌은 뚱한 표정으로 한구석을 가리켰다. 손을 따라가자 옅은 마나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포탈?”
“네. 저기가 제 숙소 가는 길이라서요.”
이제 됐냐는 표정에 연우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연우를 물끄러미 내려보던 차헌은 갑자기 지퍼를 내렸다.
“올려요.”
“아니.”
“불편해도 버릇 들여야 하니까 올리고 다녀요.”
연우의 말에도 지퍼를 올리지 않은 차헌은 은근슬쩍 가슴을 내밀었다. 뭐 하자는 거지. 지칠 대로 지친 연우는 틀린 그림 찾기를 할 자신이 없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오늘 시험 봤어요.”
마나볼을 채우는 시험을 봤다는 차헌의 말에 연우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S급을 데려다 놓고 그딴 시험을 봤다고. A 구역이 차헌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가 보였다. 사관학교 시절에나, 그것도 갓 각성했을 때 치던 시험이었다.
그때의 연우나 지금의 차헌이나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그런 시험을 볼 수 있겠지. 생각이 있으니까 그런 시험을 치게 했겠지. 계속해서 부정적으로 흘러가는 생각을 바로잡은 연우는 차헌의 팔을 두드렸다. 피곤에 취해 목소리가 한발 늦게 흘러나왔다.
“수고했어요.”
“형 덕분인데요.”
담담한 목소리에 연우의 귀가 달아올랐다. 같은 에스퍼끼리 가르쳐줄 수도 있는 거지 뭘 저렇게…. 민망해하는 연우를 보던 차헌은 목에 걸린 열쇠를 내밀었다.
“열쇠?”
“네. 형, 밥 먹었어요? 다음에 뭐 할 거예요?”
안 먹을 거고 잘 거라고 분명 대답한 것 같은데 차헌은 A 구역의 포탈을 열고 있었다.
“시험 통과하고 개인 훈련장 받았거든요. 보러 갈래요?”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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