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C 구역 에스퍼가 A 구역에 왜 가냐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포탈이 열렸다. 포탈 입구에 사원증을 찍은 차헌은 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우의 머뭇거림이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다가온 차헌은 연우의 어깨를 감싸 쥐고 부드럽게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냥 내 구역 가서 씻고 자고 싶었는데.
슬라임을 통과하는 듯한 끈적한 감촉이 피부에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이래서 연우가 이능을 사용하기 전에 다른 에스퍼들이 미리 경고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구나.
비틀거리는 연우를 부축한 차헌이 홍채 인식까지 빠르게 해치우고 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잠시만요. 강차헌 에스퍼.”
“뭔데요.”
가로막는 직원을 본 차헌이 삐딱하게 섰다.
“동행인 신청하셨나요? 외부인은 사전에 동행인 신청을 해야 출입,”
“외부인 아닌데요. 눈알이 없나. 딱 보면 몰라요? 센터 에스퍼잖아요.”
직원의 말에 연우는 어질한 시야를 정리하며 사원증을 들어 올렸다. 파란색으로 쓰인 연우의 이름을 확인한 직원은 입술을 오므렸다.
C등급이 여길 왜 왔지? 라고 얼굴에 적어놓은 직원은 차헌과 연우를 번갈아 봤다.
“방문 목적이 어떻게 되죠?”
“내가 불렀는데 불만 있어요?”
으르렁거리는 차헌의 말에 그제야 삐뚜름하게 연우를 내려보던 시선을 거둔 직원이 문 쪽으로 손짓했다. 그리고 허리를 반듯하게 숙이는 게, 공손을 넘어 비굴하게 보일 정도였다.
연우를 내려보던 모습과 확연히 비교되는 모습에 차헌이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뭐라 말하려는 차헌을 붙잡은 연우는 안쪽을 손짓했다.
“들어가죠.”
방금까지 저를 무시하던 인간에게 수고하라며 목인사까지 건넨 연우가 차헌을 잡아당겼다. 둥글게 처진 눈꼬리나 살짝 말려 올라간 입술, 그 어디에서도 언짢은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재촉에 마지못해 발걸음을 뗀 차헌은 훈련장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훈련이 끝남과 동시에 몸만 빠져나왔던 터라 안이 어떤 꼴인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던 차헌은 지친 기색이 만연한 연우를 살폈다.
이 형 결벽증 있는 것 같던데.
혼자 들어가 정리를 한 다음에 연우를 부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인간성이 결여된 A 구역에 연우를 혼자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차헌이 문을 열었다. 지친 발걸음을 옮기던 연우는 작게 감탄했다.
조금 전 그렇게 대단해 보이던 공동구역이 하찮게 느껴질 정도였다. 벽의 칠이 벗겨져 속살이 보이는 C 구역의 훈련장과 비교하기도 민망했다.
S급 에스퍼의 개인 훈련장이니까 당연하겠지만…. 연우가 입을 살짝 벌린 채 주변을 둘러볼 동안 차헌은 널브러진 훈련 도구를 발로 슥슥 밀어 한 쪽에 숨겼다.
“여기도 볼래요?”
차헌의 손짓에 연우가 비척비척 걸어가 문안의 공간을 살폈다.
와, 이건 좀 너무했다.
훈련장 안의 휴게실로 보이는 공간은 연우의 기숙사보다 넓어 보였다. 침대도 간이침대가 아니라 더블 침대였다.
“마음에 들어요?”
제 훈련장이면서 나한테 왜 묻지?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공간이 마음에 안 들 리가 있나. 뿌듯하게 웃는 차헌에게 힘없이 엄지를 들어준 연우는 C 구역으로 돌아가기 위해 출구를 찾았다.
“저거, 설마….”
휴게실 문 옆에 쌓여있는 종이봉투를 본 연우는 눈썹을 구겼다. 종이봉투의 무늬가 익숙했다. 예전 차헌이 샌드위치를 꺼내던 봉투였다.
“이거 먹은 거 아니죠?”
소파에 널린 옷을 주섬주섬 치우고 있던 차헌이 달려와 내용물을 확인했다.
“아. 이거. 안 먹는다고 했는데도 계속 가져다주더라고요. 중간중간 배고플 때 먹으라고.”
“안 먹었죠?”
“네.”
심드렁하게 대답한 차헌은 연우를 내려봤다.
“형이 먹지 말라고 했잖아요.”
잘했다고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종이봉투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샌드위치나 김밥 같은 포장 음식이 대부분이었다. 포장을 열어 내용물을 살핀 연우는 차헌에게 손짓했다.
“보여요?”
그 말에 얼굴을 불쑥 내민 차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던전 부산물은 대부분 색이 조금씩 달라요. 파란색 오렌지라든가.”
“일단 바닥에서 이러지 말고 저기 가서 앉아요.”
소파를 가리키는 차헌의 말에 연우는 팔을 뻗어 종이봉투를 끌어안았다.
“아, 제가.”
“네?”
연우의 품에 가득 안겨있던 종이봉투가 탁자 위로 이동했다. 손을 뻗고 있던 차헌이 머쓱하게 목덜미를 문질렀다.
“이런 거요?”
소파의 푹신함에 앉자마자 졸음이 몰려왔다. 길게 하품을 하는데 차헌이 초록빛이 도는 단무지를 가리켰다.
“아니에요.”
“초록색이잖아요.”
눈썹을 찡그리며 우기는 차헌의 말에 연우는 손을 뻗어 샌드위치 포장의 뚜껑을 열었다.
“보여요? 집중하면 휘감고 있는 마나가 보일 거예요. 그리고 던전 무는 원래 초록색이에요.”
대체 무슨 말이지? 하는 차헌의 표정에 하품을 참은 연우는 샌드위치의 포장을 열었다. 샌드위치 옆에 놓여있는 과일을 보여주자 차헌이 포장에 들어갈 기세로 집중했다.
“블루베리를 봐요. 옅은 파란색의 마나가 보이죠?”
“블루베리는 원래 파란색 아니에요?”
“던전 블루베리는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차헌에게 연우는 다른 샌드위치를 뒤적거려 멀쩡한 블루베리를 보여줬다.
“색이 조금 다르죠? 제가 생활계가 아니라서 던전 마나를 제거한 블루베리를 못 보여드리는데 던전 블루베리는 주황색입니다. 인간들에게 먹히기 위해 마나로 보호색을 만들어 흉내 내고 있는 거예요.”
“네?”
“던전 부산물들은 전부 식물형 마수니까요. 인간, 그러니까 이능력자에게 섭취 당한 상태에서 마나 코어의 마나를 섭취하는, 아. 조심.”
손을 뻗은 연우는 차헌이 놓친 샌드위치를 잡아챘다. 하얗게 질린 차헌은 블루베리를 가리키며 입을 뻐끔거리다가 제 배를 감싸 안았다.
“그럼 이때까지 제가 먹은 게…?”
“식물형 마수겠죠. 많은 양을 섭취했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많이 먹었으면요?”
연우의 훈련복이 구명줄도 아닌데 차헌은 두 손 가득 훈련복을 움켜쥐었다. 늘어나는 재질도 아닌데 늘어난 훈련복을 내려보던 연우는 차헌의 안색을 확인했다.
음. 멀쩡하군.
“저 같은 C급이라면 모를까, 강차헌 에스퍼처럼 마나 코어의 양이 많은 에스퍼는 섭취 당해도 티도 안 날 겁니다. 던전 마나와 마나 코어의 마나가 뒤섞여 이능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작용은 느끼겠지만….”
이대로 들고 가서 신고할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센터장의 오른팔인 부센터장이 차헌을 챙겨주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신고를 해봤자 제대로 된 처벌도 안 받을 것이고 차헌의 속만 터질 게 뻔했다. 좀 더 제대로 된 증거를….
“형? 자요?”
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연우는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차헌의 손을 밀어냈다. 잠깐 졸았는지 몸에 활력이 돌고 있었지만, 여전히 피곤했다.
“대체 무슨 훈련을 했길래 말하다 말고 졸아요?”
훈련을 떠올리자 급격히 피로해졌다. 박서현도 박서현이었지만 배재영은 훈련에 미친 게 분명했다. 에스퍼가 발작하지 않을 정도로 마나 코어를 쥐어짜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오늘부터 대련 훈련에 들어갔는데….”
원래도 나긋나긋한 편인 연우의 목소리가 졸음에 취해 길게 늘어졌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차헌이 담요를 끌어 연우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담요가 늘어진 허벅지를 내려보던 연우는 벨트에 꽂힌 단검을 더듬었다. 가서 반납해야 하는데…. 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푹신한 소파에 파묻힌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련 훈련이요?”
“음. A 구역에서 하는 훈련이랑은 조금 다를 거예요. 홀로그램이라고 알아요?”
“들어는 봤어요. 나중에 그거 갖고 훈련한다던데.”
작게 하품한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다 말고 그대로 고꾸라지는 머리를 받친 차헌은 소파에서 일어나 연우를 눕히려 했다.
“음. 괜찮아요. 씻고 잘 거라서.”
졸음에 취해 웅얼거리는 연우의 말에 차헌은 휴게실 한쪽에 붙어있는 샤워실로 안내했다. 비틀비틀 따라간 연우는 샤워기 아래에서 반쯤 졸며 나왔다.
“이거 입어요.”
건네는 옷을 입고, 길이를 정리해주는 차헌의 손길에 꾸벅꾸벅 졸던 연우는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침대에 파묻히는 기분이 좋아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연우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침대 매트리스가 좋은 건가… 웅얼거리던 연우는 눈을 번쩍 떴다.
“일어났어요? 안 그래도 깨우려고 했는데.”
저녁 뭐 먹을래요? 묻는 말에 연우는 왼팔을 더듬었다.
“뭐 찾아요?”
“내 보조 가방….”
잠긴 목소리에 차헌은 탁자에 정리해둔 연우의 짐 더미 속에서 보조 가방을 찾아 건넸다. 핸드폰을 꺼낸 연우는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어젯밤, 연화는 예지를 볼 것 같다며 아공간에 들어갔다. 꿈에서 깰 때까지 연락이 오지 않을 걸 알고 있지만, 습관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부재중이 없다는 걸 확인한 연우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침대에서 나왔다.
“좀 잤어요?”
엄청나게 잔 것 같은데. 개운해진 몸을 확인한 연우는 차헌의 물음에 어색하게 웃었다.
“형 그렇게 정신없이 조는 거 처음 봤어요. 저번에 같이 밤샐 때도 그 정도는 아니었지 않아요?”
“그때는 마나볼 훈련만 했지만, 지금은 몸으로 뛰어야 해서요. 이건 어디 벗어둘까요?”
“아. 이것 좀 봐주세요.”
연우에게 손짓한 차헌은 제 옆자리를 도닥였다. 접힌 소매를 펴고 있던 연우가 소파에 앉자 차헌은 바나나를 가리키며 눈썹을 찡그렸다.
“토마토랑 블루베리는 형이 알려줘서 구분했는데, 이건 모르겠어요.”
옅은 보랏빛이 도는 바나나를 들어 올린 차헌은 껍질을 슥슥 까 하얀 속살을 내밀었다.
“이건 껍질로 구분해요? 아니면 속살로 구분해요?”
“껍질로 구분하면 됩니다. 그건 먹어도 돼요.”
바나나의 진한 냄새를 맡고 있자 출출해졌다. 얼른 설명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야지.
“겉에 현혹되지 말고 마나를 구분하는 게 제일 빠른 방법이에요.”
“이… 뭐지. 이거 셔요.”
바나나를 먹던 차헌이 있는 대로 얼굴을 구겼다. 저럴 거면 그냥 뱉어내지, 오만상을 쓴 차헌이 천천히 씹어 삼키는 걸 보던 연우는 몇 가지 과일을 구분했다.
“외형이 비슷하다고 맛도 똑같은 건 아니니까요. 던전 멜론도 신 편입니다.”
물로 입을 헹군 차헌이 바나나를 저 멀리 밀어두었다. 그럼 이거는요? 저거는요? 묻는 말에 대답하고 있으니 배가 점점 고파졌다. 결국 꼬르륵거리는 배를 감싸 쥔 연우는 탁자에 놓인 짐을 들어 올렸다.
“어디 가게요?”
“네. 무기 반납도 해야 해서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궁금한 거 있으면 다음에,”
“네? 지금 출입 금지 시간인데요? 경비 시스템 때문에 저도 밖으로 못 나가요.”
“네?”
아니, 그걸 왜 지금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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