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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26화 (26/143)

26화

길게 기지개를 켠 연우는 아직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선 천장에 당황했던 것도 잠시, 긴장을 푼 연우는 매트리스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침대가 좋아서 그런가, 주변의 소음이 들리지 않아서 그런가,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간신히 잠이 들던 C 구역 휴게실의 쪽잠과 비교해본다면 몸 상태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몸을 이리저리 풀던 연우는 그래도 너무 푹 잔 거 아닌가, 중얼거렸다.

어제저녁, C 구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연우는 공간을 접어볼까,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누가 지키고 있는 게 아니라 경비 시스템이 가동된 거라면 이능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배달된 저녁을 꼼꼼히 확인하고 식사한 다음, 당연하다는 듯 훈련장으로 이끄는 차헌과 함께 이능 연습을 했다.

“쿠키 틀?”

“네. 외형 훈련이래요.”

쿠키 틀을 내려놓은 차헌은 손을 움켜쥐었다. 쿠키 틀 옆에 쿠키 반죽 같은 얼음덩어리가 생겼다. 저걸 이제 쿠키 틀로 찍는 건가? 호기심을 느낀 연우가 지켜보는데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얼음덩어리를 흩트려버린 차헌이 다시 쿠키 반죽을 만들었다.

뭐지?

몇 번이나 반복되는 훈련을 보고 나서야 연우는 깨달았다. 쿠키 틀이랑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내는 훈련이구나.

허공에서 몽글몽글 얼음덩어리를 만들어내던 배재영의 이능을 떠올린 연우는 거칠게 솟아오르는 차헌의 얼음을 보다가 눈을 굴렸다.

뭐. 알아서 하겠지.

차헌을 등지고 앉은 연우는 바닥에 핀을 내려놓았다. 이걸로 연습하라며 원래의 훈련 도구와 비슷한 도구를 챙겨준 차헌 덕분이었다.

푹 자고 일어났다고 컨디션이 좋은지 이능이 튀지 않았다. 훈련 중간중간에 좀 쉬자고 말해볼까. 이능이 튈 때마다 귀신같은 속도로 이쪽을 쳐다보던 배재영의 눈빛이 어찌나 살벌하던지, 죄송하다는 말도 튀어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쿠키 틀이 얼어붙도록 노려보고 있던 차헌은 벌떡 일어나 연우를 부축했다. 차헌의 팔에 머리를 박은 채 꾸벅꾸벅 졸던 연우의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괜찮다고 말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런 자신을 침대에 눕히는 차헌의 손에 깜짝 놀라 일어났던 것도. 자요. 자라고요. 이불을 덮어주는 차헌의 손길에 그럼 조금만 자고 일어나겠다고 웅얼거린 것도.

조금은 무슨.

민망한 얼굴로 침대에서 벗어난 연우는 차헌의 마나를 찾기 위해 감각을 넓게 퍼트렸다.

뭐지?

눈썹을 찌푸린 연우는 휴게실 한쪽 구석에 놓인 쓰레기통을 노려봤다. 차헌은 훈련장에서 연습하고 있었으니, 휴게실에서 마나 반응이 나타날 리가 없었다.

“센터에 쥐가 있나?”

[먹어요] 쪽지가 붙은 사과에는 뭔가가 갉작거린 흔적이 있었다. 최첨단 보안 시스템 어쩌고저쩌고하더니 쥐는 못 막나 보네. 찝찝한 얼굴로 쓰레기통을 바라본 연우는 벨트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샤악!!

쥐가 아니야? 몸을 꼿꼿이 세운 채 경계하고 있는 뱀을 본 연우는 단검을 고쳐 쥐었다. 조심조심 발을 내딛던 순간, 황금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흐….”

입을 틀어막은 연우는 무릎부터 무너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통증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르작거리던 연우는 몸을 웅크렸다.

뚜렷하지 않은 기억들이 눈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기억을 곱씹어볼 시간도 없이 이명이 울려 퍼졌다. 울리는 머리를 움켜쥐고 괴로워하던 연우를 현실로 건져 올린 건 텅, 텅, 하는 둔탁한 소리였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 연우는 고개를 틀어 소리가 울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소리는 쓰레기통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 옆에는 차헌이 분류해둔 던전 부산물이 담긴 통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손가락보다 가는 뱀이 주둥이로 통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검은색 비늘과 보석 같은 눈동자, 흔히 보석뱀이라고 부르는 마수였다.

텅텅거리는 소리의 정체를 확인한 연우는 흐어어,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웃음이 나왔다. 누가 근처에 없어서 다행이다. 독도 없고 공격성도 낮은 보석뱀을 보고 놀라 쓰러졌다며 최소 십 년간의 놀림감이 되었을 거다.

식은땀을 닦아낸 연우는 단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망설였다. 원칙적으로는 마수 연구소를 탈출한 마수를 발견하는 즉시 사살해야 했다. 그럼에도 연우가 망설이는 이유는 마수 연구소 직원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던전에서 마수를 죽이는 건 쉽지만 산 채로 생포하는 건 까다로운 편에 속했다. 그렇게 잡아 와도 던전 밖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마수들이 픽픽 죽어 나가는 게 대부분이었고.

그러다 보니 자기들이 관리를 못 해놓고 이능력자에게 책임을 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이대로 죽이면 보석뱀 하나 생포 못 하고 죽였다고 난리를 칠 게 눈에 선했다. 이마를 꾹꾹 누른 연우가 어떻게 생포할지 고민하는 동안 보석뱀은 끊임없이 텅, 텅, 소리를 내며 통에 주둥이를 내려찍고 있었다.

지능이 좋은 편은 아니구나.

배가 고픈 건가? 던전 부산물을 향해 달려드는 보석뱀을 보던 연우가 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흠칫 놀란 보석뱀이 빠르게 기어 쓰레기통 뒤에 몸을 숨겼다.

샤악. 위협하는 소리를 배경 삼아 연우는 트랩을 놓듯 블루베리를 놓았다. 통의 크기가 제법 넉넉하니 보석뱀을 생포하기도 좋아 보였다.

잠시 기다리자 주변을 경계하며 기어 나온 보석뱀이 급히 블루베리를 집어삼켰다. 나란히 놓인 블루베리를 따라가며 챱챱거리던 보석뱀은 바나나를 피해 블루베리를 향해 돌진했다.

덫 쪽에 놓인 블루베리를 다 먹어 치운 보석뱀이 주변을 기웃거렸다. 앞에 놓인 게 오렌지랑 바나나라는 걸 확인한 보석뱀은 가차 없이 몸을 돌렸다.

그 와중에 먹을 것도 가려.

감탄한 연우가 블루베리를 몇 알 굴리자 잠시 경계하던 보석뱀은 곧 입을 벌려 챱챱 해치웠다. 그러고는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다가 연우를 향해 서슴없이 기어 왔다.

홀린 듯 블루베리를 더 굴려주던 연우가 손을 뻗자 보석뱀이 손 위에 얌전히 올라탔다. 그러고는 손가락에 감겨 볼을 비비더니 블루베리를 향해 고갯짓했다.

“너 진짜 잘 먹는다.”

연우를 수족 부리듯 블루베리 한 통을 다 먹고도 만족하지 못한 보석뱀은 고개를 쭉 빼고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이거?”

샌드위치를 꺼내 들자 고개를 끄덕거린다. 정확한 의사 표현에 웃음을 흘린 연우가 빵을 뜯어 내밀었다. 손톱만 한 빵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린 보석뱀이 꾸역꾸역 삼켜보려다가 안 되겠는지, 황금빛 콩 눈으로 연우를 빤-히 바라봤다.

손을 탄 게 분명해 보이는 모습과 잘 관리된 비늘을 보던 연우가 핸드폰을 들어 센터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누가 몰래 키우다가 잃어버린 것 같은데….”

보석뱀은 화려한 외형으로 비싼 값에 거래되는 마수 중에 하나였다. 상처 하나 없는 걸 보니 곱게 키워지던 와중에 탈출한 게 분명해 보였다. 반질반질한 황금빛 콩 눈과 시옷 자 입이 제법 귀엽긴 했지만, 보석뱀도 마수였다. 사방팔방에 에스퍼가 널린 곳에서 마수를 키우는 미친놈이 있나. 중얼거리면서도 연우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찾아주세요] B 구역 / 인증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찾아가세요] C 구역 / 훈련용 너클 찾아가세요.

[찾아가세요] C 구역 / 식당에서 보조 가방 획득했습니다.

[찾아주세요] C 구역 / SCD 각인된 가죽 지갑 찾습니다.

[찾아가세요] A 구역 / 인증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석뱀이라고 대놓고 말을 못 할 테니 돌려서라도 올린 글이 있나, 싶어 몇 페이지를 뒤적거렸지만 짐작이 가는 게시글은 없었다. A 구역 글은 확인 못 하니까 강차헌한테 부탁해서 게시글 좀 확인해달라고 해야 하나.

“아야.”

따끔한 느낌에 손을 내려보자 보석뱀이 손끝을 물고 있었다. 이빨에 힘을 주지 않고 잘근잘근 씹으며 이쪽을 빤히 보는 게, 빵을 안 뜯고 뭐 하냐는 재촉인 게 분명했다.

“세상에.”

내가 마수 수발을 들게 될 줄이야.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빵을 뜯어주던 연우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일어났어요?”

씻고 왔는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터는 차헌에게 인사한 연우가 손을 내려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손가락에 감겨서 이거 달라 저거 달라 요구하던 보석뱀이 사라져 있었다.

“어?”

뭐지? 내가 이능을 사용했나?

“왜요?”

“아니… 방에 보석뱀이 나타나서 잡았는데, 방금까지 제 손에 있었거든요?”

“보석뱀이요?”

“네. 이만한….”

허둥거리는 연우의 모습에 수건을 내려놓은 차헌은 휴게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형이 어디 보낸 거 아니에요?”

잠깐 그런 의심도 했지만, 좌표를 설정하지도 않았고 마나 코어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는 느낌도 받지 못했다. 방 어딘가에 있는 게 확실했다.

“독이 없는 종이라면서요. 그 정도로 작으면 물려도 티도 안 나겠네요. 잡히면 어디 가둬둘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요.”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던 차헌이 그렇게 말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홀로그램 마수도 한 번 보지 못한 차헌이었다. 잘못해서 다치기라도 하면 그건 보석뱀을 생포하지 못한, 사살하지 못한 연우의 잘못이었다.

내가 대체 왜 수발을 들었지?

자책하는 연우에게 단검을 집어넣으라고 말한 차헌은 연우를 끌어 소파에 앉혔다.

“바로 죽여야 합니다. 못하겠으면 얼음에 가둬버려요.”

“알았으니까 아침 뭐 먹을래요?”

머리도 좀 정리해요. 차헌의 말에 머리카락을 더듬어보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붕붕 떠 있는 머리카락이 만져졌다.

지금 이 상황에 머리카락이 중요한가?

미간을 찌푸린 연우는 다시 한번 감각을 넓게 펼쳤지만, 옆에 차헌이 있어 그런지 제대로 탐색할 수가 없었다.

“가둬두지 말고 죽일 수 있으면 바로 죽여요.”

연우랑 달리 차헌은 보석뱀을 죽여도 그 어떤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감히 S급을 위험에 빠트렸다며 연구소에게 책임을 물면 물었지, 처벌을 내릴 리가 없을 테다.

공격성이 낮은 대신 방어력이 높은 보석뱀은 마나로 공격하는 것보다 무기로 공격하는 게 효과적이었다. 바로 목을 내려치라고, 그게 힘들면 얼음에 가둬두고 다른 사람을 부르라고. 누구한테 부탁하기 싫으면 자신을 찾으라 신신당부를 하는 연우를 내려보는 차헌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형. 지금 제 걱정해주는 거예요?”

“당연하죠.”

대답에 차헌의 눈이 동그래졌다.

식탐이 왕성해 보였으니 먹을 거에 약하겠지. 샌드위치 빵을 뜯어 여기저기 뿌리던 연우는 갑작스레 터진 차헌의 웃음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연우가 C 구역으로 돌아갈 때까지 차헌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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