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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27화 (27/143)

27화

“진짜 안 올 거예요?”

바래다준다더니 훈련복을 쥐고 놓지 않는 차헌을 올려보던 연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헌이 노골적으로 서운한 티를 내는 게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자기 마음대로 구역을 이동하면서 훈련할 거면 센터가 왜 등급을 나눠 훈련하겠는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훈련을 하는 차헌이 특이 케이스인 거지, 연우는 정해진 구역에서 벗어나 A 구역에서 훈련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 저 훈련하는 건 누가 봐줘요.”

A 구역 훈련소장이…?

그러고 보니 초반에 차헌을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훈련소장을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훈련소장이 방치를 하는 건지, 차헌이 거부를 하는 건지 사정은 모르지만 확실한 건 연우가 봐주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거다.

같은 보조계라도 어떤 이능을 다루는지에 따라 훈련방식이 달라졌고, 같은 공간계라도 마나를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훈련방식이 달라졌다. 기본이야 연우가 어찌저찌 알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는 연우의 영역이 아니었다.

“C 구역 솔직히 더럽게 더럽잖아요. 형도 인정하죠? 형 결벽증도 있으면서 거기서 어떻게 연습해요. 어차피 형 개인 훈련할 거니까 그냥 여기서 같이 하면 좋잖아요.”

결벽증이라니. 그냥 정리된 걸 좋아하는 성격일 뿐이다. 인상을 쓴 연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C 구역에서 연습 안 해요. 그리고 새로운 에스퍼가 합류해서 훈련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몰라,”

“새로운 에스퍼요?”

끝이 날카롭게 올라간 차헌의 목소리에 연우는 흔들리는 몸을 잡아 눌렀다. 이것 좀 놓고 얘기하자는 연우의 말에도 차헌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네. 그때 기억나요? 파란색 얼음.”

“그 인간이에요? 새로 들어왔다는 에스퍼가?”

눈썹을 찌푸리는 차헌의 표정에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자석의 N극을 떠올렸다. 연우도 같은 공간계가 주변에 있다면 마나의 흐름이 요동치는 느낌이라 불쾌한 기분이 들곤 했다. 차헌도 같은 빙결계라서 불쾌함을 느끼는 건가?

뚱한 표정을 지은 차헌은 연우의 훈련복을 움켜쥐었다.

“진짜 안 올 거예요?”

“네.”

벌써 열 번쯤 대답한 것 같다. 잘 자고 잘 먹었는데도 피로함을 느끼던 연우는 결국 한 발짝 떨어진 곳에 문양을 그렸다. 덕분에 허공을 움켜쥐게 된 차헌은 옆으로 이동한 연우를 보다가 땅을 걷어찼다.

“형이 C 구역에 오지 말라고 해서 시험 친거란 말이에요. 개인 훈련장 따면 형이랑 같이 연습할 수 있을 줄 알고 시험 친 건데….”

땅을 퍽퍽 차다가 이쪽을 힐끔거리는 모습에 연우는 혀끝을 깨물었다.

“어제 경비원이 기분 나쁘게 해서 그러는 거면 제가 미리 말해놓을게요. 같이 연습하면 안 돼요?”

‘내가 미리 말해놓을 테니까 오빠가 데리러 오면 안 돼?’

정말 닮은 구석 하나 없는데 왜 계속 연화가 겹쳐 보이는지 모르겠다. 이마를 짚은 연우의 머릿속에 어렸을 적 연화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넓은 교실, 누구와도 교류하지 못한 채 혼자 웅크리고 앉아있던 연화를 떠올린 연우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 *

“A급이라서 저러는 거예요, 배재영 에스퍼라서 저러는 거예요?”

가벼운 발작을 겪고 쓰러진 최동원의 물음에 연우는 힘없이 고개를 움직였다. 박서현도 주저앉아 헐떡거리고 있는 판에 배재영은 표정 변화 없이 손을 휘두르며 허공에 얼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못 하겠다고요!”

날카로운 목소리에 연우는 그저 눈만 깜박였다. 상황을 확인할 힘도 없었다. 어제와 똑같은 상황이니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어제부터 조희서가 가이딩을 못 하겠다고 뻗대는 중이었다.

최동원의 손짓에 강제로 돌아눕게 된 연우는 허공에 둥둥 떠 있는 화살표를 올려봤다. 배재영의 손에서 뻗어 나온 얼음 화살표는 박서현과 최동원, 그리고 연우를 가리키고 있었다.

“제가 무슨 마나 뽑아내는 화수분도 아니고, 방금 가이딩을 했는데 어떻게 또 해요?”

뒷짐을 져 제 손을 숨긴 조희서는 눈꼬리를 치켜뜨며 최동원을 노려봤다. 가이딩을 재촉하는 건 배재영인데 원망은 이쪽이 받고 있다. 헛웃음을 흘린 최동원은 연우를 다시 눕혀놓았다.

“다른 분들은 몰라도 최동원 에스퍼는 받아야 할 것 같지 않아요? 마나가 너무 불안정한데.”

배재영의 말에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조희서는 걸음걸이에 불만을 담아 쿵쿵 걸어왔다. 괜찮아 보이는데. 투덜거린 조희서는 최동원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 그것만으로 얼굴에 혈색이 돌아온 최동원은 나른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와 반대로 사색이 되어 불결한 것이라도 만진 것처럼 손을 탈탈 턴 조희서는 혹시라도 연우가 가이딩을 해달라고 할까 봐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갔다.

도망간 곳이 배재영의 곁이라 그저 웃음만 나왔다. 누구는 발작해야 가이딩을 해주고, 누구는 쉬는 시간마다 가이딩을 해주고. 힘없이 웃음을 흘리던 연우는 마나 코어가 안정된 걸 느끼며 일어났다.

“줄까요?”

너무 뚫어져라 바라봤나.

허공에서 몽글몽글 얼음을 피워내던 배재영이 손짓하자 하늘하늘, 휘날리던 얼음꽃이 연우의 손위에 떨어졌다. 색이 파란색인 걸 제외하면 실제 장미와 똑같았다. 장미의 가시까지 재현해낸 섬세함에 작게 감탄한 연우는 조심스럽게 꽃을 감싸 쥐었다.

“뭔데요. 이거.”

대답할 시간도 없이 차헌의 손에서 박살이 난 얼음꽃을 본 연우는 한숨을 삼켰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소중하게 품어온 꽃을 차헌에게 건네주자마자 박살이 났다.

“외형… 연습한다면서요. 보고 따라 하면 좋지 않을까 해서 받아온 겁니다.”

그냥 장미꽃을 보고 따라 만드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이능을 참고해서 마나가 어떤 식으로 들어갔는지 보고 따라 하면 좋겠다 싶어서 들고 온 거였다. 저렇게 허무하게 박살이 날 줄 알았다면 안 가져왔을 거다.

저를 위해 챙겨왔다는 말에 차헌의 입꼬리가 허물어졌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손끝에 진득하게 남아 있는 마나를 털어낸 차헌은 조각난 얼음꽃을 밟아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얼음꽃을 보던 연우는 차헌이 들고 있는 쿠키 틀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래. 저렇게 동글 네모 한 단순한 모양도 힘겨워하는데 갑자기 꽃을 만들어보라고 하면 당황스럽기도 하겠지.

아니, 그래도 사람 성의가 있지, 주는 사람 앞에서 저렇게 박살을 내냐….

이해해보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말아 문 연우는 가방을 열었다. 장미뿐만 아니라 차헌에게 주려고 배재영에게 부탁해 얻어온 얼음 모형들이 들어있었다. 가방을 거꾸로 들어 탈탈 턴 연우는 떨어진 얼음 모형을 발로 밟아 깨트렸다.

그와 동시에 연우에게 진득하게 붙어있던 마나들이 사라지자 예민하게 날을 세우고 있던 차헌이 시원스레 웃었다. 그런 차헌을 바라보던 연우는 몸을 돌려 훈련장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표정은 평소와 똑같았지만, 핀을 내리꽂는 손길이 살벌했다. 쿠키 틀을 쥐고 눈치를 보고 있던 차헌이 조심스럽게 옆자리에 자리했다.

“어… 형. 그때 말한 보석뱀 있잖아요.”

“네.”

“훈련소장한테 말했더니 연구소를 탈출한 마수가 없다면서, 그래도 혹시 모른다고 방을 수색하고 갔거든요? 근데 아무것도 안 나왔어요. 그러니까 보석뱀 걱정하지 말고 자고 가요.”

“아뇨. 오늘은 시간 전에 돌아갈 거예요.”

잘했다는 칭찬은 기대도 안 했다. 하지만 놀라진 않았냐고 걱정해줄 거라는 약간의 기대는 있었는데…. 무감한 연우의 눈동자에 시무룩하게 시선을 돌린 차헌은 쿠키 틀을 노려봤다.

형 따라 연습이나 해야겠다.

“근데 아까 그 얼음 만든 인간이 이번에 합류했다던 인간이에요?”

결심은 그리 길지 못했다. 몸을 붙이며 묻는 차헌의 말에 연우는 평소와 달리 차헌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에스퍼.”

“네?”

“인간이 아니라 에스퍼예요.”

그 말에 눈을 끔벅거리던 차헌이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마나가 똑같더라. 원래 다른 사람 마나는 그렇게 느껴져요? 찐득한 진흙 같이 끈적거리는 느낌이요. 좀 기분 더럽게?”

그 말에 굳어있던 연우의 눈꼬리가 나긋해졌다. 하긴, 연우도 다른 에스퍼에게 거북함을 느끼곤 하는데 차헌이라고 다를 건 없다. 같은 빙결계니까 더 거부감을 느끼는 거겠지.

얘한테 화내봤자 득이 될 게 하나도 없다. 화를 가라앉힌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퍼는 다른 에스퍼가 만들어낸 마나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런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해요. 가이드의 마나는 다르니까 예외로 두고.”

그 말에 차헌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형 마나는 그렇게 안 느껴지던데요?”

“그거야 저희 둘이서 마나볼 훈련을 해왔으니까요. 마나 적응이 끝난 마나는 거부감이 들지 않아요.”

대답에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차헌은 쿠키 틀에 집중했다. 차헌의 앞에 솟아나는 얼음을 보던 연우는 입꼬리를 쭉쭉 늘렸다. 마나를 다루는 법은 금방 익히더니 이능을 다루는 솜씨는 영 어설펐다. 잘 봐주려고 해도 솟아난 얼음은 쿠키 반죽과 별다를 게 없었다.

저러다 언제 이능을 익히겠냐.

본격적으로 가상 던전 훈련에 돌입하게 되면 발령까지 금방이었다. 마나볼을 다루는 법을 알려줬다고 차헌이 각인한 오리처럼 연우를 따라다니는 건 알겠다. 하지만 차헌은 S급이고 연우는 C급이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같이 연습할 수는 없다.

최소한 발령을 받기 전까지 어느 정도 이능을 익혔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이상원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A 구역에서도 따돌림을 받지 않게 되겠지. 그래야 나중에….

“윽.”

끼-잉 하는 이명에 연우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눈앞이 번쩍거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헐떡이던 연우는 점멸하는 시야 사이로 보이는 차헌의 팔을 움켜쥐었다.

“형?”

크게 숨을 몰아쉰 연우는 눈을 깜박거리며 초점을 찾았다.

“어디 아파요? 불편해요? 왜 그래요?”

“아뇨. 그냥… 오늘 연습을 좀 과하게 했나 봐요.”

흐린 시야로 발을 확인한 연우는 다시 한번 숨을 크게 쉬며 호흡을 조절했다.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했지만 마나 코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얼른 휴게실로 돌아가 좀 자야겠다. 핀을 뽑아내며 정리하는 연우의 뒤를 아쉬운 얼굴로 쫓아다니던 차헌은 나가려는 연우의 훈련복을 붙잡았다.

“제가 잘 때 보석뱀 나오면 어떡해요. 저 무기도 없는데요.”

“아까는 안 나온다면서요?”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게 혹시 모르잖아요.”

그 말에 연우는 흠, 하는 소리와 함께 팔짱을 꼈다. 차헌은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겉으로는 울상을 지었다. 단호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무른 구석이 있는 연우는 거절하다가도 마지막에는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아까 침대 청소해놓길 잘했다. 희미하게 미소를 짓던 차헌은 허공을 움켜쥐고 있는 손을 내려보았다.

“나오면 얼려놔요. 마중은 괜찮으니까 마저 연습하시고. 그럼 내일 봅시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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