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28화 (28/143)

28화

“그러고 보니 오늘이 벌써 마지막 날이네요.”

배재영의 말에 조희서가 울상을 지었다. 섭섭해서 어쩌냐는 말에 박서현은 가까스로 고개만 끄덕였다. 방금까지 에스퍼를 쥐어짜던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아쉽니, 어쩌니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쓰러진 최동원과 주저앉은 한연우를 바라보던 박서현은 어깨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었다. C 구역의 C급의 에스퍼들이니 A급인 배재영이 어느 정도 무시할 거라는 예상을 했었다. 하지만 구분 없이 알뜰살뜰 마나를 쥐어짜는 모습에 저 역시 A급들은 다 그래, 하는 편견으로 배재영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어느 에스퍼와 매칭되어도 이런 식으로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받지는 못했겠지. 연우의 옆에 쓰러지듯 주저앉은 박서현은 조희서에게 가이딩을 요청하려다 말았다. 다른 에스퍼 앞에서 팀 가이드에게 퇴짜맞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한두 번이다. 가이딩을 조르기보다는 휴식을 택한 박서현의 귀에 조희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이렇게 잘 맞는데 그냥 같은 팀 하면 안 되나요?”

그 말에 박서현은 입만 웃었다. 대답도 없이 웃기만 하는 배재영의 모습에 자존심이 와작와작 구겨졌다. 조금 전까지 가이딩 못하겠다며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조희서는 저것들 데리고 훈련하기 힘드시지 않냐며 배재영에게 가이딩을 하고 있었다.

간신히 한숨을 삼켰다고 생각했는데. 가느다란 한숨 소리에 최동원과 눈을 맞춘 박서현은 애써 웃었다.

“정신이 좀 드셨나요? 음. 우리 조금만 더 맞춰볼까요? 다른 에스퍼들이랑 훈련하다 보면 제 마나를 잊으실까 봐 걱정이 되네요.”

그럴 리가.

잡아끄는 손에 연우는 허허허 웃으며 일어났다. 박서현이 노련하게 마나를 담아 접촉했다면 배재영은 마나를 밀어 넣었다. 배가 불러 터질 지경인데도 입에 숟가락을 들이밀며 한 입만 더 먹어. 더 먹을 수 있어. 더 먹어봐. 하면서 꾸역꾸역 먹여 마나 적응 훈련이 끝나면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반대로 이쪽이 마나를 건넬 때는 이게 끝이야? 조금 더 줄 수 있잖아? 힘내. 할 수 있어. 하면서 마나를 쥐어 짜냈다. 이런 훈련을 반복했는데 배재영의 마나를 잊을 수 있을 리가.

연우는 배재영의 마나가 담긴 마수 구슬을 받은 뒤 잘게 떨리는 손끝을 내려봤다. 최동원이 힘에 겨워 구역질을 해야 훈련을 끝내는 배재영이다. 손이 떨린다고 훈련을 중단시켜줄 리가 없지.

아련하게 웃으며 구슬을 건넨 연우는 발발 떨고 있는 최동원을 부축했다. 박서현에 이어 조희서까지 마나를 불어넣자 허공이 일렁이며 마수가 나타났다.

“아. 또 게야.”

형태를 갖춘 마수를 보며 박서현이 탄식했다. 마수 구슬마다 나오는 마수가 정해져 있는지 나타나는 마수마다 해수 종이었다. 연속해서 갑각류가 나온 터라 지겨운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집게발이 딸깍이는 소리를 들은 연우는 한숨을 쉬는 박서현을 붙잡고 공간을 접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할까요?”

배재영이 묻는 말에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갑각류 마수의 파훼법은 등딱지를 벗겨내는 거였지만 딱딱한 등딱지는 웬만한 공격이 먹히지 않았고, 날카로운 집게발 때문에 근처에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정석대로라면 아랫다리부터 차근차근 제거해 도망가지 못하도록 잡아둔 뒤 등딱지를 벗겨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까이 접근해야 하는데… 집게발의 공격을 막아줄 최동원이 심하게 지친 상태였다. 시선은 당연히 조희서에게 집중되었다.

“어디 맡겨놨나….”

입을 삐죽이고, 들으란 듯 한숨을 푹푹 쉬며 가이딩을 한 조희서는 배재영에게 바짝 붙었다. 약간의 혈색을 되찾은 최동원은 연우에게 손짓했다.

“아까처럼 해도 될까요? 타이밍을 제대로 잡아보고 싶은데.”

최동원의 말에 박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동원이 집게발을 붙잡고 있는 동안, 방어가 허술해진 틈을 타 배재영과 박서현이 수영 다리를 자르는 작전이었다. 최동원의 안색을 살핀 연우가 공간을 접었다. 하프니 게의 까만 눈이 최동원을 직면하는 순간 집게발이 딸깍였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멈춘 집게발을 내려보던 하프니 게는 양쪽 집게발을 번갈아 가며 내려찍었다. 투명한 방어벽을 자르려는 듯 허공에서 집게발을 달싹거리던 하프니 게는 갑자기 투명한 거품을 뱉어냈다.

“하나 잘랐어요!”

외침과 동시에 연우가 최동원을 붙잡고 공간을 이동했다. 뽀글뽀글 거품을 뱉어내던 하프니 게는 모래를 파 숨기 시작했다.

“여기예요.”

감각을 넓혀 공간을 뒤진 연우가 가리키는 곳에 박서현이 바람을 불어넣었다. 파란색 등딱지가 보이자 최동원이 연우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지금.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연우가 공간을 접었다. 쉭,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아오는 집게발을 막은 최동원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졌다.

최동원이 입을 틀어막는 것을 확인한 연우는 홀로그램 바깥을 향해 이능을 사용했다.

“크으….”

“괜찮아요?”

최동원의 눈을 확인한 연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최동원의 눈동자가 올리브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발작의 전조 증세에 최동원을 잡아 누른 연우는 조희서를 찾았다.

배재영이 하프니 게의 다리를 잘라내는 방식에 감탄하고 있던 조희서는 연우의 손짓을 힐끔 바라보고는 그대로 무시했다. 포션 놔두고 뭐한데?

“이만할까요?”

마나를 회수한 박서현은 턱에 고인 땀을 닦아냈다. 마수의 형태가 흐려지자 허공에 떠오른 얼음을 회수한 배재영은 달려가는 박서현의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쓰러진 최동원을 발견했다.

“뭐 하십니까?”

제 옆으로 다가온 조희서를 보는 배재영의 눈길이 싸늘했다. 싸늘한 시선에도 눈을 접어 방긋 웃은 조희서는 배재영에게 가이딩을 방사했다. 그러고는 느릿느릿 최동원을 향해 걸어갔다.

“C급이라 그런가 가이딩 효율이 영….”

최동원의 이마에 손등을 올려놓은 조희서는 들으란 듯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한연우. 기억나냐? 사관학교에서 가이딩 수업할 때. C급이 참을성도 없이 가이딩 조른다고 선생님이 엄청나게 혼냈잖아.”

그래서 발작을 일으킨 에스퍼가 한둘이 아니었지. 혀를 찬 연우는 버둥거리는 최동원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평소에도 가이드의 마나를 갈망하는 에스퍼지만 발작을 일으킬 때는 집착의 정도가 달라졌다. 최동원이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데도 조희서는 한숨을 쉬며 배재영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팀원이 왜 발작을 겪고 있는지, 다른 팀원들이 그런 팀원을 어떻게 잡아 누르고 있는지 관심도 없는 모양새였다.

“눈 색 돌아왔네.”

최동원의 눈동자가 짙은 갈색으로 돌아온 걸 확인한 조희서는 미련 없이 손을 뗐다. 조금도 붙어있기 싫다는 그 손짓에 박서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럼에도 조희서는 아랑곳없이 배재영을 향해 사뿐사뿐 걸어갔다.

“조금 쉬죠.”

버둥거리던 최동원에게 걷어차인 박서현이 벌렁 눕자, 물을 마시던 연우도 따라 누웠다. 그대로 선잠이 든 연우가 훈련 종료 소리에 흠칫 놀라 깨자 박서현도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가서 좀 제대로 자야겠습니다.”

박서현이 눈 밑이 퀭한 최동원을 돕는 동안 연우는 짐을 챙겼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팀이 어떻게 배치될진 모르지만 모든 훈련이 끝나고 나면 같이 밥이나 한 끼 해요.”

누가 들어도 인사치레다. 결정권이 없는 C 구역과는 달리 다른 구역 에스퍼들은 자신이 어떤 팀에 들어갈지 고를 수 있었다. 이 사람과 다시 훈련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과 후보에도 속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억누른 연우는 방긋 웃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많이 배워가요.”

쓰러지지 않는 게 용한 최동원이 비틀거리며 인사를 하고, 상황 파악을 마쳤는지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던 박서현이 인사하는 동안 조희서는 이 모든 게 자신과는 상관없는 듯 팀원들을 관망하고 있었다.

“오늘도 남아서 연습하실 거죠? 도와드릴게요!”

해맑은 조희서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훈련장을 나서던 연우는 갈지자로 걷는 최동원을 붙잡았다.

“이능 쓰면 안 되겠죠.”

속삭이듯 묻는 말에 주변을 살핀 박서현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우리 구역이 아니니까 좀 불안하네요. 마찬가지로 속삭이듯 대답한 박서현이 최동원을 부축한 채 문을 열었다.

“어? 저거….”

“저게 왜 여기?”

그러니까 말이다. 최동원과 박서현이 이쪽을 보며 이유를 묻는 동안 연우는 솟아오른 둥지를 살폈다. 마나의 색이나 느껴지는 파동이나 차헌의 둥지가 분명해 보였다. 오랜만이네…가 아니라 저게 여기 왜 있지?

“형.”

얼음 둥지를 살피기 위해 밖으로 나섰던 연우는 덮쳐오는 그림자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니, 왜 이렇게 가까이 붙어? 다가오는 차헌을 피해 뒷걸음질 치는데도 차헌은 연우를 덮어버릴 듯이 거리를 좁혔다.

“저기, 좀.”

“밖에 그 인간들 있어요.”

좀 떨어지라고 말하려고 했던 연우는 되려 차헌을 붙잡아 바짝 당겼다. 자신을 엄폐물로 사용하는데도 신경 쓰지 않고 차헌은 제 덩치로 연우를 가렸다.

“숙소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저 보고 도망가잖아요. 저번에 그 인간들 같아서 쫓아가 보니까 여기서 형 기다리는 것 같길래요.”

잘했다. 차헌의 어깨를 두드려준 연우는 슬며시 뒷걸음질 쳐 훈련장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말이에요? 저번에 그 인간들?”

박서현의 물음에 연우는 곤란한 얼굴로 눈을 피했다. 사정을 설명하기에는 연화가 마음에 걸렸다. 팀원들에게 모든 걸 공유해야 한다는 게 규칙이긴 하지만….

“강차헌 에스퍼!”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조희서가 달려왔다. 그런 조희서를 무시한 차헌은 입술을 말아 물고 있는 연우의 뒤에 섰다.

“강차헌 에스퍼는 상황을 알고 있군요.”

서운함을 담은 최동원의 중얼거림에 고민하던 연우는 상황을 간추려서 설명했다. 어차피 연우가 연화의 오빠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없었다. 대충 대략적인 내용만 골라서 말을 이어가던 중, 센터가 미성년자 계약서라는 걸 만들어서 강요 중이다. 라고 말하자 박서현이 탄식했다. 최동원 또한 언짢은 얼굴로 연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근데 그거 그냥 알려주면 안 되는 거예요?”

묻는 말에 연우는 힘없이 웃었다. 얼마 전까지 일반인이었던 차헌이니 ‘그 일’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있을 것이고, 그러니 저런 순수한 질문을 할 수 있는 거겠지.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8)============================================================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