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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29화 (29/143)

29화

여기 콜라만 마시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콜라만 선택하겠지만, 만에 하나 사이다를 고르는 일도 있었다. 그 사람은 콜라를 마시고 나면 항상 스트레칭을 했지만, 사이다를 선택했을 때는 스트레칭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이다를 선택함에 따라 그 사람의 미래가 바뀔 수도 있고, 바뀌지 않을 수도 있었다.

예지를 보는 다른 에스퍼들은 그 사람이 콜라를 마시고 스트레칭을 한다는 미래밖에 보지 못했지만, 연화는 아니었다. 그 사람이 사이다를 마실 수도 있다는 선택지와 그로 인해 미래가 어떻게 변하는지도 예지했다.

이처럼 사람의 미래는 한 가지의 길만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선택을 하냐에 따라 미래가 바뀌었다. 무수한 선택에 따라 미래는 수없이 많은 길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책의 주인공들은 아니었다. 어떤 선택지를 택하던 인과율은 주인공들을 정해진 미래로 이끌었다.

던전 브레이크를 피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리게 되고, 던전에서 다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온갖 버프를 두르고, 포션을 챙기고, 치료계 에스퍼까지 동행해도 어떻게든 다쳐서 돌아왔다. 이 모든 사건을 알고 대비하려는 차원에서 연화의 이능을 탐낸 협회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연화의 이능을 사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부모님처럼 던전이 나타나는 위치를 파악한 뒤 게이트 포상금을 얻으려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고, 던전 보상을 노리고 주인공 대신 제가 던전에 들어가거나, 주인공에게 미래를 알려주는 대가로 금전적 보상을 바라는 이능력자도 있었다.

아예 주인공의 미래를 제 것으로 바꾸려고 시도를 한 사람들까지 포함해, 모두 인과율의 부메랑을 맞고 죗값을 치르게 되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인과율의 부메랑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람들은 미래를 바꾸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제 손에 떨어질 보상도 아니었거늘, 미래를 바꾸지 못한 사람들은 제가 쥐고 있던 것을 빼앗긴 것처럼 분개했다.

수많은 시도 끝에 미래를 바꾸려 했던 ‘주체’가 부메랑을 맞는다는 걸 파악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조종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부메랑에 맞은 사람들은 인과관계를 따지기보다는 연화를 향해 돌을 던졌다. 자신을 꼭두각시로 일삼았던 사람을 욕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어리고 확실한 뒷배가 없는 연화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럴 때마다 아무 감정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인형처럼 앉아서 모든 원망을 받아내고 있는 연화를 보느니, 동생의 이능을 한 톨도 양보하지 않는 욕심쟁이 오빠가 되는 게 나았다.

“어…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얘기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요.”

배재영의 말에 최동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에 한연우 에스퍼에게 한연화 에스퍼의 이능을 이유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과 한연화 에스퍼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는 게 명시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연우가 상황을 설명해주지 않아 서운하긴 했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연우가 먼저 상황을 설명해주자 팀원으로서 신뢰감을 얻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박서현도 저와 마찬가지였는지 올라간 입꼬리를 숨길 생각도 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책 때문에 형이 괜히 고생이네요.”

차헌의 말에 연우가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얘도 책의 주인공이었잖아. 차헌을 빤히 바라보던 연우는 책의 내용을 떠올려보려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내용이 기억나질 않았다. 단편적인 장면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센터장이 됐던가? 분명 읽고 읽어서 낡아빠진 책을 조심스레 넘기며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내용이 생각나질 않았다.

“그럼 저 사람들이 포기할 때까지 안에서 좀 기다릴까요?”

“먼저 가셔도 됩니다. 최동원 에스퍼는 치료실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좀 쉬었더니 괜찮네요. 그래도 같이 움직이는 편이 나을 겁니다.”

괜찮다면서 힘겹게 주저앉는 최동원을 부축한 연우는 조희서를 바라보았다. 제게 모인 시선을 외면한 조희서는 차헌의 옆에 섰다.

“오늘 훈련 어떠셨어요? 강차헌 에스퍼.”

사근사근 묻는 말에 언제나처럼 침묵을 택한 차헌은 연우의 옆에 앉았다.

“이 사람 가이딩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최동원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가이딩을 받아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요? 이 사람 마나가 원래 이래요?”

차헌의 질문에 연우는 조희서를 바라봤다. 무언의 압박에 노골적으로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은 조희서는 최동원의 손을 잡았다.

“무슨 훈련을 하면….”

중얼거리던 차헌은 연우를 살폈다. 피로감이 잔뜩 느껴지는 얼굴과 당장이라도 곯아떨어질 것 같은 팀원들의 얼굴을 둘러보던 차헌의 옆에 배재영이 불쑥 끼어들었다.

“강차헌 에스퍼도 해볼래요?”

“아니요.”

빠른 거절에 입술을 오므린 배재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죠, 뭐. 일어난 배재영은 홀로그램 배경을 좁게 설정했다.

“형.”

제발 사람을 부르고 나서 반응할 때까지 기다리래도. 차헌의 손짓에 힘없이 끌려간 연우는, 반짝거리는 모래알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지켜보는 차헌이 쏟아내는 질문에 하나씩 답했다.

“감촉도 진짜 모래예요. 가서 만져보던가.”

그 말에 일어나려던 차헌이 혈색 하나 없는 연우를 힐끔 내려보고는 다시 주저앉았다. 연우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이었다. 저러다가 누구 하나 쓰러지면 다 같이 쓰러질 게 분명해 보였다. 유일하게 멀쩡해 보이는 가이드는 팀원들에게 신경도 안 쓰는 중이었으니 차헌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배재영이 마수 구슬에 마나를 불어넣자 허공이 일렁거렸다. 한 사람분의 마나가 들어가서 그런가 나타난 마수는 D급, 시아 슬라임이었다. 꼬리를 푸르르 떨면서 나타난 슬라임은 얼음 칼을 맞고 반으로 쪼개졌다.

“끝이에요? 저러고 죽어요?”

“아닙니다.”

반으로 쪼개진 슬라임의 몸이 잘게 떨리더니, 없던 꼬리가 솟아났다. 순식간에 둘로 늘어난 슬라임을 본 차헌이 연우에게 봤냐며 손짓했다.

그래. 잘 보고 있으니 제발 좀 놔라….

배재영이 손을 휘두를 때마다 증식하던 슬라임은 뀽뀽 소리를 내며 해변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배재영씩이나 되는 에스퍼가 슬라임 파훼법을 몰라서 저러는 건 아닐 테고, 정말 심심해서 슬라임을 갖고 노는 모양이었다.

구역을 정해놓은 배재영은 구역을 벗어나는 슬라임을 작은 손짓만으로 얼려버렸다. 그런 배재영에게 잔뜩 집중하고 있던 차헌은 이쪽을 향해 튀어오는 슬라임을 보고 반사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손끝에서 날아간 얼음이 슬라임에게 들러붙으며 모래밭에 성에가 꼈다.

“어우. 너무 비효율적이다.”

튀어 오르는 슬라임을 낚아챈 배재영은 차헌의 앞에서 손을 휘둘렀다.

“그렇게 많은 마나를 쏟아부을 필요가 없어요. 이렇게.”

통, 튕기는 손짓과 함께 슬라임이 얼어붙었다. 보여요? 완벽하게 슬라임만 얼어붙은 걸 확인시켜준 배재영은 마나를 거둬들이며 차헌에게 슬라임을 몰아넣었다.

“이게, 지금 무슨. 형!”

연우를 제 뒤로 밀어 넣은 차헌은 양치기견처럼 슬라임을 몰고 오는 배재영을 노려봤다.

“저는 괜찮으니까, 해봐요.”

연우가 등을 떠밀자 차헌은 긴장한 얼굴로 손을 움직였다. 한 몸처럼 얼어붙은 슬라임을 보며 감탄한 배재영은 신이 난 얼굴로 차헌에게 다가갔다.

“무기 써 본 적은 있어요?”

벽면으로 걸어간 배재영이 갖가지 무기를 내보이며 차헌에게 손짓했다. 가서 살펴보라고 등을 떠밀어주는 연우의 손길에 마지못해 걸어간 차헌은 잠시 망설이다 활을 선택했다.

차헌이 머뭇거리며 손에 활을 쥐자, 배재영은 슬라임 앞으로 뛰어가 빨리 오라는 듯 차헌을 재촉했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하는 표정으로 걸어간 차헌이 허벅지 쪽을 더듬거렸다. 손끝으로 화살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을 시간도 없이 배재영은 꽁꽁 얼어붙은 슬라임을 반으로 갈랐다.

뀽! 하고 튀어 오르는 슬라임을 보고 차헌이 뒷걸음질을 치자, 배재영이 허공에서 시위를 당기는 시늉을 했다. 그냥 쏘라고? 화살도 없이? 배재영을 노려보던 차헌은 뀽뀽뀽뀽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슬라임을 향해 반사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핑, 튀어가는 얼음 화살에 차헌이 깜짝 놀라는 것과 동시에 연우의 벨 소리가 울렸다.

“잘했어요. 꼬리가 붙어있는 궁둥이 쪽을 맞춘다는 느낌으로. 다시 한번.”

바라던 칭찬은 뒤가 아닌 옆에서 들려왔다. 핸드폰을 바라보는 연우를 힐끔 바라본 차헌은 다시 한번 활시위를 당겼다.

연화 지정 벨 소리가 아니었지만, 혹시 몰랐다. 급하게 핸드폰을 확인한 연우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스팸이잖아. 번호를 차단한 연우는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차헌을 바라봤다. 한참 동안 차헌을 지도해주던 배재영이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곧 소등 시간이니까 마무리합시다.”

마수 구슬에서 마나를 거둔 배재영이 차헌이 쥐고 있는 활을 붙드는 순간, 차헌은 팔을 크게 휘둘렀다. 팔의 궤적을 따라 솟아난 얼음과 흥분으로 들썩거리는 가슴팍을 보던 연우가 앞으로 나섰다.

“활 이리 주세요.”

연우의 말에 놀란 표정으로 얼음벽을 보고 있던 차헌이 활을 던지듯 건넸다. 배재영에게 활을 전해준 연우는 딱딱히 굳어있는 차헌의 등을 도닥였다.

“괜찮으니까 진정해요.”

흔한 일이었다. 차헌은 처음으로 마수를 상대해서 잔뜩 흥분한 상태였고, 낯선 에스퍼가 다가와 무기를 빼앗으려 하자 배재영을 적으로 인식한 것뿐이었다. 그러다 마나가 익숙한 연우가 다가오자 진정한 거고.

차헌이 진정할 동안 주변을 정리하던 배재영이 슬쩍 문을 열어 밖을 살폈다.

“없는 것 같은데… 가 아니라 아직도 있네요.”

징글징글한 새끼들. 이를 간 연우는 서류를 쌓아 그 위에 앉아있는 직원들을 노려봤다.

“으음. 어쩔까요.”

어쩔 방법도 없다. 다른 구역과 달리 공동구역은 휴게실도 없어서 밤을 새울 수도 없었다. 연우가 밖으로 걸어 나가자 지친 기색이 만연한 얼굴에 미소를 그린 직원들이 손을 흔들었다.

“이제 마치셨어요? 어우, 이렇게 늦게까지 훈련하면 동생이 걱정 안 해요?”

다가오는 직원을 본 박서현이 연우를 붙잡으며 빠르게 속삭였다.

“그냥 달릴까요? 어차피 못 따라붙을 텐데.”

그 말에 최동원의 안색을 확인한 연우는 발끝에 힘을 줬다. 달려가려던 순간 누군가 어깨를 붙잡는 힘에 몸이 휘청거렸다. 얼음벽을 세운 차헌이 직원들을 삐딱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냥 이럴 걸 그랬어요. 그럼 형이 조금이라도 더 쉴 텐데.”

흉흉하게 솟아오른 얼음벽을 보던 연우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들을 해결하고 가겠다는 연우의 말에 박서현이 최동원을 부축한 채 빠져나갔다. 아쉬움에 발걸음을 못 떼는 조희서와 곤란해하는 배재영을 내버려 둔 연우는 어깨를 붙잡고 있는 차헌을 올려보았다.

“벌써 두 번째네요. 강차헌 에스퍼한테 도움받은 게.”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래요.”

뚱한 말투와 달리 차헌의 표정은 어딘가 뿌듯해 보였다. 다가오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직원들이 돌아가는 걸 보며 연우는 다짐했다.

앞으로 직원들이 귀찮게 굴 때마다 강차헌을 들먹이면서 협박하,

“형이랑 제가 어떤 사이인데 이런 것도 못 해줄까 봐요.”

면 되겠다…?

잠시,

우리가 무슨 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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