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그래서 강차헌 에스퍼랑은 무슨 사인가요, 한연우 에스퍼.”
튀어나오려는 헛웃음을 억누른 연우는 혀끝을 깨물었다.
이런 질문을 듣는 게 어이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사이라고 하기에는 요즘 차헌과 어울리는 시간이 제법 길었다. 훈련이 끝나자마자 달려오는 차헌에게 C 구역 에스퍼들이 슬그머니 인사를 건넬 정도였다. 그렇게 차헌의 손에 이끌려 A 구역으로 가면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공손하게 문을 열어주곤 했으니 연우와 차헌이 모종의 사이가 되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다른 에스퍼들에게 한 것처럼 어쩌다 보니 친해졌다고 두루뭉술하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상석에 앉은 사람은 대한 에스퍼 센터의 센터장, 정영환이었다.
그런 대답을 바라고 부른 건 아니겠, 잠시만. 강차헌 얘기는 핑계고 연화 때문에 부른 거 아냐?
요 며칠 계속해서 차헌의 뒤에 숨어 직원들을 피해 다녔다. 몇 번은 강차헌을 피해 도망 다니더니, 나중 가서는 이능이 자신들을 해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옆에서 알짱거리는 게 어찌나 얄밉던지. 차헌이 얼음벽을 세워 길을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C구역 복도에 갇혀있었을 거다.
동의서를 받는 작전이 먹힐 기미가 안 보이니까 대놓고 압박하려는 건가.
찻잔을 기울이고 있던 센터장이 연우의 앞을 손짓하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부센터장이 호들갑을 떨며 찻주전자를 들었다.
“하하하. 한연우 에스퍼도 차를 즐기는지 모르겠네.”
“세월 참 빠르지. 벌써 한연우 에스퍼가 이만큼 자랐군. 처음에 봤을 때가 이만…했던가. 그때는 오렌지 주스를 같이 마셨는데. 기억이 나나요, 한연우 에스퍼?”
안 날 리가. 자기들이 일을 저질러놓고 그 어린 연화에게 책임을 물기 위해 이곳에 앉혀놓고 압박하던 기억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연화를 끌어안은 채 벌벌 떨기만 했던 자신이 얼마나 무능력하게 느껴졌던지.
그때 그 기억을 애틋한 추억인 척 말하는 게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도 나지 않았다. 연우는 방긋 웃으며 찻잔을 쥐었다.
“아쉽게도 기억이 안 나네요.”
“어릴 때의 기억이 다 그렇지. 한 번 마셔봐요.”
여기 뭐가 든 줄 알고 마시겠냐.
차헌의 먹을거리에 장난질을 친 게 누군지 뻔히 아는데 부센터장이 권하는 음식을 먹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더구나…. 찻잔을 들어 올린 연우는 센터장의 귀에 주렁주렁 달린 해주, 해독 아이템을 곁눈으로 살폈다. 저러고 차를 마시는데 누가 안심하고 차를 마시겠어.
속으로 코웃음을 치던 연우의 어깨가 갑자기 흠칫, 튀었다. 따뜻한 차를 담은 찻잔이 데워진 게 느껴졌다. 등줄기를 따라 돋아오르는 소름과 함께 찻잔을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괜찮아. 그냥 차야. 따뜻한 차일 뿐이야. 속으로 아무리 되뇌어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떨리는 손끝으로 찻잔을 내려놓은 연우는 남은 온기를 없애려는 듯 손끝을 문질렀다.
“음. 향이 강해 요즘 애들 먹기에는 별로지. 그래도 중국에서 들여온 귀한 차니 입이라도 적셔봐요.”
센터장의 권유에 연우는 습관처럼 미소를 지었다. 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리는 순종적인 미소였다.
“센터장님이 권해주신 건데 별로일 리가 있나요. 제가 뜨거운 걸 못 마셔서요. 조금 식으면 먹겠습니다.”
그 말에 센터장이 흐뭇한 얼굴로 연우를 바라봤다. 만만하게 생긴 얼굴이 이럴 때는 참 쓸모가 있다. 또래들과 있을 때는 불이익을 당하는 날이 더 많지만, 어른들과 있을 때는 이런 식으로 웃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효과를 만들 수가 있었다.
상대가 센터장이니 화기애애한 시간은 짧게 끝나겠지만.
몇 년 전 미래를 바꿔보겠다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달려들었던 그때, 길드는 물론 센터도 피해를 보았다. 센터를 이끌어갈 연륜 있는 에스퍼들이 몇 남지 않아 운 좋게 살아남은 정영환이 센터장이 되었다고 입을 모아 쑥덕거리긴 했지만, 글쎄.
센터장은 이름뿐인 자리가 아니다.
제 실력을 믿고 날뛰는 에스퍼를 잡아 눌러야 하고, 게이트가 발견될 때마다 길드장과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적재장소에 팀을 파견하며 센터의 모든 이능력자를 대표하는 자리가 센터장이었다.
그런 자리가 그저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오를 수 있는 자리라고?
연화의 이능 덕분에 정영환이 어떻게 센터장이 되었는지 알고 있는 연우는 긴장을 놓치지 않은 채 생긋생긋 웃었다.
사람 좋은 척 웃는 얼굴 뒤에 몇 년 묵은 너구리가 있었다. 연우는 눈이 가늘어지지 않게 주의하며 센터장과 부센터장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을까요?”
“아, 말 안 했나?”
센터장의 물음에 부센터장이 허허- 하며 길게 웃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래도 쉽게 말을 꺼내기 힘든 주제다 보니 진영이가, 아니, 부센터장이 말을 못 했나 보군. 한연우 에스퍼도 바쁠 테니 빠르게 본론으로 넘어가겠네.”
연화 때문이구나.
마른침을 삼킨 연우는 허리를 세웠다. 센터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 몰랐는데. 지금이라도 라운드 길드에 연락해서 센터가 협박한다고 말해야 하나.
길드의 압박에 연우에게 들러붙는 직원들은 사라지겠지만 센터와의 관계가 어색해질 수 있어 최후의 보루로 남겨뒀던 작전이었다.
“그, 요즘 한연우 에스퍼가 강차헌 에스퍼랑 그렇게 친하다면서요?”
강차헌? 예상치 못한 이름에 연우는 눈을 깜박였다. 우리가… 친한가? 친하다는 건 좀 더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관계에 붙이는 단어 아닌가?
차헌이 바락바락 주장했듯 연우와 차헌은 사제 관계에 가까웠다. 사제라는 말도 좀 그랬다. 이제 막 각성한 에스퍼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길래 넘어지지 말라고 옆에서 지켜보는 게 다였다. 위험할 것 같으면 그러는 거 아니야. 하며 한 마디씩 주의하라고 경고할 뿐인 관계다. 그러다가 잘하면 한 번씩 칭찬도 해줬고. 같은 센터에 다니는 에스퍼끼리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자기 밥그릇을 지킨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A 구역 에스퍼들이 이상한 거다. 그게 친한 거면 사관학교 동기들이랑은 아주 사귀는 사이게?
하지만 이 상황에서 아니라고 하는 것도 이상했다.
차헌이 C 구역을 들락거린 지가 한 달, 그 뒤로 연우가 A 구역에 들락거린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이미 다 지켜봤을 테니 아니라고 부정해봤자 믿지도 않겠지.
연우가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하자 초조한 듯 바라보던 부센터장이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A 구역 각성자들도 한연우 에스퍼처럼 강차헌 에스퍼와 좀 잘 지냈으면 좋겠는데….”
“아닌가요? 사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아니라서요.”
정말이었다. 차헌과 있을 때마다 이건 뭐냐, 저건 뭐냐 답해주기 바빴다. 한 번씩 미운 일곱 살 시절의 연화가 앞에 앉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땐 정말 물음표 살인마가 따로 없었지….
아득한 기억을 떠올리며 웃는 연우를 보던 센터장은 들으란 듯 한숨을 푹, 쉬었다. 그 한숨 소리에 부센터장은 마른세수를 했다. 잠시 후, 손아래에서 벗어난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부센터장이 고생이지.”
“아닙니다. 하하하…. 으음, 저기, 한연우 에스퍼도 알다시피 강차헌 에스퍼가 좀 늦게 각성한 편이잖아요. 그래서 A 구역 사람들이 이래저래 챙겨주려고 했지요. 하지만 강차헌 에스퍼는 그게 부담스러웠는지 훈련에 참여도 안 하다가 이제는 개인 훈련장에서 나오질 않아요. 다른 에스퍼와 말도 안 섞는다길래 내가 많이 챙겨주려 했단 말입니다. 하지만 이래도 싫다, 저래도 싫다, 네가 챙겨주는 건 안 먹겠다, 퇴짜를 놔버리니 내가 뭘 할 수가 없습니다.”
음. 입으로 똥을 싸는군.
그 뒤로 이어지는 말도 주절주절 개소리였다.
그렇게 챙겨줬지만, 차헌은 제 성의를 모조리 무시하고 있다, A 구역 에스퍼들이 뭘 알려주려고 해도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마다하니 에스퍼들도 눈치를 보게 되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자기도 속이 상한다며 부센터장이 한탄했다.
A 구역 에스퍼들과 강차헌 에스퍼 사이에 끼어서 마음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고 호소하는데….
어이가 없다.
강차헌 얼굴도 안 봤나? 눈치를 본다던 에스퍼들이 사람 얼굴을 그렇게 갈아놔? 그래 놓고 치료도 제대로 안 해주고?
그리고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했으면서 자연스럽게 부센터장에게 떠넘기는 센터장은 뭔데? 부센터장 자기도 A 구역 에스퍼들에게 강차헌을 떠넘겨놓고 힘들다는 말이 나와?
성의라고 대접하는 게 던전 마나도 제거하지 않은 던전 부산물이라면 어디 너희들이 맛있게 먹어보라고 입에 집어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속이 탄다는 듯 찻잔을 술잔처럼 쥐고 털어 넣은 부센터장이 연우에게 몸을 기울였다.
“한연우 에스퍼도 알겠지만, S급이 자존심 좀 강합니까? 자기보다 낮은 등급에게 가르침을 받기 싫은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바쁜 이상원 에스퍼에게 교육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저런 거짓말을 누가 믿을까. 강차헌은 자기보다 한참 낮은 등급인 연우에게 잘만 배웠다. 뭐라도 하나 더 배우고 싶어 연우를 쥐어짰다. 그 간단한 마나볼 연습을 밤새도록, 그것도 마나 과부하가 올 때까지 연습하던 애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궁금해하는 게 강차헌이라고.
제대로 가르쳐준 것도 없으면서 열심히 입만 털었겠지.
부센터장이 제 가슴을 퍽퍽 내려치며 불만을 분출했다. 찻잔에 동동 떠다니는 찻잎에 집중한 연우가 한참이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말을 흘리고 난 뒤에야 센터장은 진짜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네. 센터장님.”
“그래. 내가 센터장인데 말이지…. 이런 자리에 앉아 있다 보니 함부로 뭘 물어보기가 좀 그래. 그러니까 한연우 에스퍼가 슬쩍 물어봐 줘요.”
무릎에 얌전히 두 손을 올려놓은 연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식은 찻물을 버린 센터장이 찻물을 따라냈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에 마른침을 삼킨 연우는 잘게 떨리는 두 손을 마주 잡고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뭐, 다른 건 아니고…. 센터 생활에 불만이 없는지, 혹 바라는 것은 없는지 그런 것들이랑….”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입을 다문 센터장은 부센터장에게 눈짓했다.
“으음… 내가 한연우 에스퍼니까 하는 말인데, 저기 강차헌 에스퍼가….”
말하기 곤란해서 시간을 끄는 건지, 아니면 연우가 먼저 묻기를 바라 시간을 끄는 건지,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센터장과 부센터장 둘 다 으음, 으음, 하며 계속 말을 미루고 있었다.
연우의 속이 터지기 직전에 센터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차헌 에스퍼가, 음… 혹시 다른 길드 사람들과 만나는 걸 본 적이 있나요?”
“다른 길드요?”
강차헌? 연화가 아니라?
눈이 동그래진 연우의 질문에 탐탁잖은 표정을 짓고 있던 센터장이 한숨을 쉬던 그 순간이었다.
삐- 삐-
왼쪽 주머니에서 울리는 호출 벨을 확인한 부센터장이 곤란한 얼굴로 센터장에게 눈짓했다.
“정말 친한가 보군….”
중얼거리며 연우를 품평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센터장은 문을 향해 손짓했다. 연우를 배웅하던 부센터장은 문을 나서기 직전, 손을 움켜잡았다.
“그냥 다음에 넌지시, 다른 길드와 계약을 할 생각이 있는지만 물어봐 주세요.”
“네?”
“있다고 하면 무슨 길드인지 슬쩍 떠봐도 좋고.”
그 말과 함께 등이 떠밀렸다.
이게 무슨 말이야? 강차헌이 다른 길드와 계약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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