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31화 (31/143)

31화

“형.”

문을 나서자 차헌이 성큼 다가왔다. [센터장실] 문패 아래 선 차헌을 올려보던 연우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뭔가 굉장히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인사를 건네는 부센터장을 무시한 차헌은 연우를 데리고 중앙 구역을 벗어났다.

“저긴 왜 갔어요?”

그 물음에 연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센터에서 마주칠 때마다 왜 여기 있냐고 물어보면 오다가다 마주칠 수도 있는 거지 왜 그런 질문을 하냐며 따지던 차헌이었다. 그랬으면서 자기는 왜 물어봐?

“강차헌 에스퍼는 제가 센터장실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제가 먼저 물었잖아요.”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차헌은 대답할 생각이 없는 연우를 내려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형이 안 보여서 기다리고 있는데 형 따라다니던 금붕어 똥 같은 놈이 형을 왜 기다리냐고 꼬치꼬치 캐묻잖아요. 형이랑 친하냐면서.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형이 센터장실로 불려갔다고 하잖아요. 혹시 저 때문일까 봐….”

다다다 쏘아붙이던 차헌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땅을 퍽퍽 차던 차헌은 연우의 옷깃을 살며시 잡아당겼다,

“왜 불렀대요?”

부센터장은 넌지시 물어보라고 시켰지만,

“강차헌 에스퍼.”

돌려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센터랑 계약 안 했습니까?”

“네? 네. 아, 미친. 설마 그거 때문에 형 부른 거예요?”

인상을 쓴 차헌의 주변으로 얼음이 확 솟아났다. 얼음기둥을 걷어찬 차헌은 삐뚜름하게 웃었다. 이제 와서. 중얼거린 차헌은 새초롬한 표정으로 연우를 내려봤다.

나는 왜?

“형은 내가 바본 줄 알아요?”

“네?”

“생각해봐요. 제가 각성하던 날부터 우리 집에 찾아와서 계약해달라고 빌빌거리던 놈들이 한둘이었는 줄 알아요? 거기서 계약하겠다고 도장을 찍는 건 호구 잡히겠다고 선포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일단 뭐라고 하는지 계약 조건부터 들어보고 비교한 다음에 계약해야죠.”

차헌의 말이 맞다. 연화도 지금 여기저기 찔러보면서 누가 누가 돈을 많이 주나, 하면서 비교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차헌은,

“조건은 둘째치고 여기가 유일하게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 싶어서 온 거예요. 길드는 너 세다! 너 강하다! 나 돈 준다! 하면서 부모님께 무조건 선물만 안기잖아요. 누나가 꺼지라고 소금 뿌리는데도 꼼짝도 안 했어요, 징글맞은 것들이.”

그 말에 몇몇 길드장을 떠올린 연우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능 조절하는 법 알려줄 테니까 3개월만 믿고 따라오래서 온 거예요. 근데 제가 지금 계약하게 생겼어요? 이 상황에?”

이 역시 맞는 말이다. 훈련복도 작은 걸 줘, 이능 다루는 법은 물론이고 마나를 다루는 법도 안 알려줬다.

“제가 마나를 다루기 시작하니까 인제야 진가가 드러났니 뭐니 친한 척 달라붙는 거 진짜 역겨워요. 자기 팀에 들어올 생각이 없냐, 마음에 드는 가이드는 없냐 물어보는데 제가 대가리에 총을 맞으면 맞았지, 그 인간들이랑 팀을 이룰 생각은 없어요.”

생각만 해도 빡이 차오르는지 얼음결정이 차헌의 주변을 하늘하늘 날아다녔다. 손끝을 휘저어 얼음결정을 날려버린 차헌이 씩씩거리며 말을 이었다.

“당장 나가려고 했는데, 기본기도 못 다루는데 어딜 가냐고 안 내보내 주잖아요. 다음 달에 라운드 길드 둘러보기로 했는데 그 약속도 자기들 마음대로 취소하려고 하고, 주말마다 부모님 만나게 해준다고 해놓고 일반인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못 나가게 한다니까요! 그래서 주말마다 형이랑 연습만 했어요!”

그게 그렇게 불만이었구나.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솟아오른 얼음기둥을 부숴 차헌의 훈련장으로 이동시켰다.

“기본적인 약속도 못 지키는 곳이랑 계약하고 싶지 않아요. 팀? 어차피 마음에 드는 사람….”

중얼거리던 차헌은 연우를 흘끔 내려보았지만, 연우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입을 삐죽거린 차헌은 엉뚱한 곳으로 걸어가는 연우의 팔꿈치를 잡아끌었다.

그런 차헌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연우는 두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분명 차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는데 그 이야기들이 베일에 덮인 것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려 할 때마다 두통이 몰려와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이명 때문에 귀를 틀어막고 있던 연우는 어깨를 부축하는 손에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형. 치료실 가요.”

“아뇨.”

차헌의 손을 밀어낸 연우는 발을 멍하니 내려보다가 좌표를 잡았다.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책을 살펴봐야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대로 공간을 접은 연우는 누가 다녀간 흔적 없이 말끔한 집을 둘러보았다. 신발을 벗을 정신도 없이 책장으로 직행한 연우는 떨리는 손으로 금고를 열었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아무리 훑어봐도 검푸른색 책이 보이지 않았다. 푸른 기가 도는 책이란 책은 다 꺼내 확인했지만, 강차헌이 주인공인 책이 아니었다. 분명 여기 꽂아놨는데. 책장 두 번째 칸을 더듬거리던 연우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진정하고, 차분하게 생각해보자.

기억을 더듬던 연우는 침대맡을 살폈다. 자다가 일어나서 책을 읽고 여기에 놔둔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다음은…? 아니, 내가 책을 읽었던가?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연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뭐라 설명하지 못할 불안감이 몰려왔다. 마음에 누가 돌을 던진 듯 덜컥덜컥 무거워졌다. 두려움에 몸을 떨던 연우는 멍하니 금고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책. 책. 중얼거리며 손길이 닿는 대로 방을 뒤지던 연우는 머리가 쪼개지는 통증에 주저앉았다. 책이 무슨 색이었는지, 어떤 문양이 그려져 있는지 떠올리려고 할 때마다 이명과 두통 때문에 눈앞이 점멸하고 있었다.

“흐으….”

귀가 찢어질 듯한 이명이 무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려고 집중하려 할 때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머리가 아파져 생각할 수가 없었다.

머리를 붙잡고 몸부림치던 연우는 바닥을 기어 책장으로 향했다. 소란에 들어온 누군가 보지 못하도록 금고 문을 닫고 난 뒤에야 연우는 미련 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멍하니 천장을 올려보았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잠시 뒤, 눈을 깜박이며 몸을 일으킨 연우는 주변을 둘러보다 탄식했다. 집안 꼴이 왜 이렇지? 바닥에 널린 이불을 정리하는데 아공간이 열리며 연화가 나타났다.

“뭐야? 집안 꼴이 왜 이래?”

아공간에서 나오는 것과 동시에 발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말이 되지 못한 욕을 씹어뱉으며 컵을 들어 올린 연화는 발 디딜 틈 하나 없는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벌렸다.

“대청소하는 건 아니지?”

컵을 시작으로 발에 채는 물건을 하나씩 주우며 식당으로 가는 길을 만들어낸 연화를 혀를 끌끌 찼다.

“머리털 나고 집이 이런 건 처음 보네.”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던 연우는 이불의 각을 맞추다 말고 현관으로 뛰어갔다.

“신발도 안 벗고 뭐 하는 거야!”

안 그래도 벗으려고 했다. 연화의 호통에 신발을 벗은 연우는 엉망이 된 신발장부터 차근차근 정리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설마 아니겠지만, 집에 도둑이 든 건 아니지? 으악! 이게 뭐야!”

들고 온 과일을 넣기 위해 냉장고를 연 연화는 엉망인 냉장고 속을 보다 경악했다. 쏟아지는 잔소리를 피하고자 연우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엉망이 된 선반과 수건을 정리하고 나오자, 싱크대 앞에 있던 연화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돌아봤다.

“무슨 일인데? 뭐 없어진 거 있어?”

“책.”

반사적으로 대답한 연우는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연화에게는 그 책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책? 내 책 말하는 거야? 금고에 없어?”

연화의 말에 입술을 깨물고 있던 연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사관학교 졸업할 때 준 책 있잖아. 색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푸른색이 도는 책이었고….”

덤덤하게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떨리는 입술처럼 흘러나오는 목소리도 속절없이 떨리고 있었다. 몰려오는 두통에 말을 잇지 못한 연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오빠한테 책을 줬다고?”

연화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웅, 웅, 울리며 들려왔다. 목덜미를 붙잡은 두통이 고개를 가로젓게 했다. 헐떡거리던 연우가 고개를 젓자 연화의 목소리가 또다시 웅, 웅, 울렸다.

“확실해?”

귀에서 속삭이는 이명은 고개를 끄덕이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안, 아니!”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두통도, 이명도 사라졌다. 바닥에 툭, 툭, 떨어지는 눈물 자국을 보던 연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연화가 연우의 입에 바나나를 밀어 넣었다.

“역시. 그 책 한 권에 돈이 얼만데 아무리 오빠라도 그냥 줬을 리가 없지. 바나나 좀 더 먹어. 새콤달콤해서 맛있더라.”

연화의 권유에 연우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눈물을 닦으며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버릇처럼 식탁 위의 과일을 살폈다. 제거되지 않은 던전 마나가 있을까 봐 꼼꼼하게 살피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연화가 인상을 콱, 썼다.

“상한 거 있어?”

이 새끼들이 빠져 가지고. 살벌하게 바나나를 씹던 연화는 길게 하품했다.

“아니. 문제없어.”

“뭐, 문제없으니 다행이다. 금고 뒤질 거면 지금 해. 자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하품을 하는 건지 말을 하는 건지 뭐라고 웅얼거리던 연화가 아공간을 열었다. 먹을 거라도 좀 챙겨가라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홀랑 들어가 버린 연화의 뒷모습을 보던 연우는 한참 동안 식탁에 앉아있었다.

잠시 후, 천천히 일어난 연우는 책장 앞에 섰다.

연우에게는 연화도 모르는 한 가지 버릇이 있었다. 어렸을 적 연화가 처음으로 쓴 책을 협회에게 뺏긴 이후로 생긴 버릇이었다. 연화가 책을 잃어버려도 다시 쓸 수 있도록 연우는 연화가 쓴 책을 베껴 따로 챙겨두었다.

그리고 그 버릇은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연화가 자라면서 보는 예지의 양도 많아졌고 그에 따라 책도 점점 두꺼워졌다. 모든 책을 옮겨쓰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점점 벅차질 무렵 인과율의 부메랑을 맞은 에스퍼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이후로 연화는 제가 쓴 책을 연우에게 보여주지 않았고, 아침마다 꿈 얘기를 조잘거리던 버릇도 없애버렸다.

모든 책에 어떤 이야기가 쓰인 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연우가 대충이라도 읽은 책은 전부 정리해뒀다고 자신 할 수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연우는 책장 한쪽에 꽂혀있던 다이어리를 뽑았다. 가름끈이 놓인 페이지를 펼친 연우는 표지의 문양에 따라 마나를 흘려 넣었다. 책장이 차르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몇 장 없던 속지들이 부풀어 올랐다.

천천히 속지를 넘기며 제 기억을 확인하던 연우는 떨리는 손으로 강차헌의 이름을 짚었다.

2월 19일.

검푸른색 / 은색 문양 / 강차헌 / S급 공격계(빙결)

자신의 글씨체로 쓰인 차헌의 정보를 확인한 연우는 볼 안을 깨물었다. 연화가 책을 선물했다는 증거가 남아있었다.

…연화가 거짓말을 했다.

대체 왜? 벨을 흔들어 연화를 아공간에서 끌어내고 싶은 욕구를 누른 연우는 다이어리를 살폈다. 책의 줄거리를 찬찬히 읽어가던 그때였다.

“어?”

그 순간 아래쪽의 글자가 흐려지더니 재가 되어 날리기 시작했다.

“뭐야?”

당황한 연우가 다이어리를 덮고 마나를 회수한 다음 다시 흘려 넣어봐도 사라진 글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글씨가 사라지고 남아있는 건 날짜뿐이었다.

2월 19일.

특별한 날도 아닌데 왜… 여기 가름끈이…. 생각하던 연우는 벽에 걸린 시계와 다이어리를 번갈아 보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꿈에서 깬 날이, 센터에 입사한 날이 18일이었다.

짐을 챙기기 위해 집에 몇 번 들리긴 했지만 19일에는 집에 온 적이 없었다. 이능이 튀어 훈련한다고 C 구역에 줄곧 머물렀으니까. 라운드 길드장에게 다이어리를 선물 받은 이후로 누구에게 보여준 적도, 집에서 들고 나간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 어느 누가 연우의 마나로만 반응하는 다이어리를 열어서, 연우와 똑같은 글씨체로 책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놨겠는가. 몰려오는 두통에 이를 악물고 있던 연우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거울을 바라봤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미친 생각이지만, 그 모든 게 가능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미래의 연우.

그 생각과 동시에 물밀듯이 머릿속으로 정보들이 쏟아졌다. 짧게 숨을 토해낸 연우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그제야 모든 기시감이 이해되었다.

끔찍하도록 생생한 꿈도.

“내가… 내가, 과거로 돌아온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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