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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32화 (32/143)

32화

“이 자료들 말고 다른 자료도 있나요?”

“정신계 자료라면 그게 다예요.”

그렇냐고 고개를 끄덕이는 연우를 올려보는 정신계 에스퍼의 시선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연우의 사원증과 자료집의 제목을 번갈아 보던 정신계는 눈썹 사이를 모았다. 그런 정신계에게 손짓한 동료는 작게 속삭였다.

“한연화 에스퍼 오빠잖아.”

그 속삭임에 연우는 입을 벌렸다.

세상에. 보조계가 정신계 자료 좀 볼 수도 있는 거지. 누구 오빠라야 정신계 자료를 볼 수 있는 건가. 자리에 앉으며 작게 헛웃음을 흘린 연우는 자료집을 펼쳤다.

정신계 에스퍼들의 특징을 모아둔 문서에는 이때까지 발견된 이능의 종류도 함께 정리되어있었다.

“...없네.”

훈련 종이 울리기 직전까지 자료들을 훑어봤지만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그런데도 훈련장으로 돌아가는 연우의 얼굴은 후련하기만 했다.

이때까지 느껴지던 기시감이나 의문들이 해결돼서 속이 시원했다. 내가 과거로 돌아와서 그런 거였어.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센터를 둘러보던 의뭉스러운 시선을 거둔 채 훈련장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기분 좋은 일 있어요?”

해맑은 인사에 연우를 붙잡은 에스퍼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연화 덕분에 연우가 혜택을 받았다는, 정은영의 선동에 휘말린 에스퍼 중 하나였다. 아직 후발대가 안 정해진 걸로 아는데. 의심이 잔뜩 담긴 시선과 날 선 목소리에도 연우는 그저 방긋 웃기만 했다.

분명히 낯설어야 할 센터 건물이 익숙한 것도 그랬지만, 존재해서 안 될 존재들이 센터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게 더 큰 이질감으로 느껴졌었다. 죽은 사람이 멀쩡하게 옆에 존재하는 것만큼 소름 끼치는 일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과거로 돌아왔으면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도 있는 거지. 납득한 연우는 자리를 잡고 몸을 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나가는 이능력자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한 줄씩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저 사람은 언제 죽었었지. 고개를 끄덕이고, 저 둘이 언제 각인했더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연우는 출근하는 최동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왜 이렇게 신이 났어요?”

그렇게 티가 나나. 입꼬리를 더듬어보자 볼록 올라간 광대가 느껴졌다. 뭐, 한 달 넘게 골머리를 싸매고 있던 문제가 해결됐으니 당연히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내가 왜 과거로 돌아왔는지에 대한 이유만 알면 된다. 정신계 쪽에서는 시간과 관련된 이능력자가 없는 것 같던데, 보조계 쪽에서 찾아봐야 하나. 최동원과 함께 훈련장을 따라 달리던 연우는 들어오는 박서현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귀에 익은 목소리에 연우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박서현과 함께 들어오는 서유진을 보는 순간 한껏 올라가 있던 연우의 입꼬리가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에 주변을 둘러보던 연우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한연우 에스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흠칫 놀란 연우가 고개를 돌려 서유진을 바라봤다. 당장 여기에서 도망치고 싶은 거부감에 자꾸만 발이 움직였다. 익숙하지 않은 에스퍼의 마나 때문이 아니었다. 저 사람과 함께 있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경고를 보내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붙잡는 손길에 급히 숨을 들이켠 연우는 발을 내려봤다. 나는, 멀쩡해. 중얼거린 연우는 방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한연우입니다.”

“서유진입니다.”

주고받은 마나를 갈무리한 연우는 뒷짐을 지고 있는 조희서를 바라봤다. 서유진의 사원증을 보자마자 손을 숨긴 조희서는 성의 없는 태도로 인사하고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곧이어 배재영을 발견하자마자 양해도 구하지 않고 자리를 떠나는 조희서의 행동에 서유진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 말 맞죠?”

다가온 이수빈은 덩그러니 서 있는 세 명의 에스퍼들을 위로했다.

“쟤, 아니, 조희서 가이드한테는 가이딩 못 받는다고 생각하시는 게 마음이 편하실 거예요.”

그 말에 최동원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발작 증상을 보일 때마다 혐오스럽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을 떠올린 최동원은 배재영 앞에서 살랑거리고 있는 조희서를 노려보았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원래 저런 애니까.”

최동원을 달래던 이수빈은 자신의 팀원들이 출근하자 다음 주에 잘 부탁드린다며 인사를 하고는 떠나버렸다. 서늘해진 분위기에 눈치를 보던 서유진도 훈련 도구를 챙겨오겠다며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자 한숨을 쉰 박서현이 가방을 열었다.

“사탕 좀 드세요. 저번 주에 너무 힘들어서 혹시 몰라 챙겨온 거였는데… 훈련 전부터 슈가 하이가 필요할 줄은 몰랐네요.”

여전히 굳어있는 최동원의 손에 사탕을 쥐여준 박서현은 조희서를 데려오겠다며 떠났다. 실랑이하는 둘의 모습을 보던 연우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조희서는… 사관학교 시절부터 무영 길드에 들어가겠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무영 길드에 들어갔었다. 무영 길드가 원하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조희서는 무영 길드에 합격했었다. 어찌나 콧대를 세우고 다녔던지, 떵떵거리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할 정도였다. 좀 궁금하긴 했다. 어떻게 무영 길드에 들어간 거지?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시선을 돌린 연우는 몸을 푸는 서유진을 바라보았다. 꽤 오랜 시간 바라봐도 그 어떤 정보도 떠오르지 않았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너무 바라봤나. 서유진의 질문에 시선을 돌린 연우는 박서현이 안겨주고 간 사탕 봉지를 들어 올렸다.

“사탕 드실래요?”

연우는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서유진을 보며 사탕 봉지를 뒤적였다. 손끝에 딸려온 건 전부 딸기 맛 사탕이었다.

“우와. 제가 딸기 맛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사탕을 쥐여주자 서유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유진의 질문에 연우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의식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서유진의 손에 가득 담긴 딸기 맛 사탕을 내려보던 연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이런 사소한 취향을 알 정도로 서유진과 자신은 친했던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서유진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기만 했다.

어떻게든 기억에 집중해보려 해도 목덜미가 서늘해지며 소름만 돋아오를 뿐이었다.

“저기, 한연우 에스퍼.”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지르던 연우가 고개를 돌리자 울상이 된 에스퍼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저번 주에 공동구역에서 훈련하셨죠? 배재영 에스퍼랑 같이. 그때 혹시 이만한 방패 보셨어요? 보랏빛이 도는 은색인데.”

에스퍼는 울먹임이 가득한 목소리로 무기의 크기와 형태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지만, 공동 구역은 C 구역처럼 합동 훈련장이 아니라 개별 훈련장이었다. 다른 훈련장에서 연습하던 연우가 그 무기를 봤을 리가 없었다.

못 봤다고 대답하자 초조한 시선이 서유진에게 향했다. 자신도 모르겠다는 서유진의 대답에 에스퍼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에스퍼의 옆에 선 팀원들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자 울먹이던 에스퍼는 혹시나 자신의 무기를 봤을 다른 이능력자를 찾아 떠났다.

“혹시 무기를 잃어버린 건 아니겠죠?”

사탕을 먹던 서유진이 설마, 하고 중얼거렸지만, 설마가 사람 잡았다.

훈련 시작종이 울리기도 전에 들어온 훈련소장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에스퍼의 이름을 불렀다.

“정인혁 에스퍼.”

조용한 호명에도 머리 위에서 천둥이 친 것처럼 흠칫 놀란 에스퍼는 이내 눈물을 뚝뚝 흘렸다. 훈련소장의 손에 들려있는 은빛 방패를 보던 연우는 옆에 선 박서현과 같이 한숨을 흘렸다.

“새로운 훈련에 신이 났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그 말에 원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에스퍼를 노려보던 팀원들이 기대 어린 시선으로 훈련소장을 바라보았다.

“이만한 무기를 잃어버리기도 어려울 텐데 말이죠.”

인벤토리를 개방한 훈련소장이 서랍에 방패를 챙겨 넣자 팀원들의 얼굴에 하나둘씩 절망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자, 저번에 말씀드렸죠? 개인 무기도 아니고 센터에 귀속된 무기를, 다른 상황도 아니고 훈련하다가 잃어버린다는 건 자신이 얼마나 책임감 없는 이능력자인지 스스로 증명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제 등을 맡길 이능력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던 훈련소장은 대기하고 있던 이능력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눈이 벌게진 채 눈물을 뚝뚝 흘리는 팀원들과 신이 난 얼굴로 인벤토리 앞에 줄을 서는 이능력자들을 번갈아 보던 연우는 단검이 들어갈 자리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마찬가지로 방패가 고정될 팔뚝을 문지르던 최동원도 슬그머니 다가와 속삭였다. 서로 감시해주기로 해요.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박서현과 눈짓을 주고받았다. 첫 번째는 실수겠지만 두 번째는 고의가 될 수 있다. 벌점이 쌓였지만 위험 구역에 발령받지 않은 대기조들이 이쪽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훈련소장의 호명에 단검을 챙긴 연우가 조용히 뒤로 빠지자 박서현과 최동원이 무기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다가왔다. 조희서와 서유진까지 합류하고 짐을 챙긴 박서현이 공동구역으로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앞으로 다른 구역에서의 훈련은 금지하겠습니다. 구역을 나눠줄 테니 해당 구역에서만 훈련하도록 하시고. 한 명씩 앞으로 나와서 무기 골라 가세요.”

그 말에 조희서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공동 구역에서 훈련한다고 해서 공동 구역 에스퍼가 되는 게 아닌데도, 어떻게든 C 구역을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입을 삐죽이는 조희서가 미련을 담아 배재영을 바라봤지만, 배재영은 새로운 팀원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조희서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잠시 물러나세요.”

훈련소장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불투명한 막이 생기며 훈련장이 나누어졌다. 박서현이 달려가 명당을 차지하고, 조희서가 마지못해 따라오던 그 순간 굉음이 울려 퍼졌다.

“뭐야?”

방어벽을 펼치는 서유진과 최동원의 뒤로 피한 연우는 형형색색의 날개를 보고 입을 벌렸다. 사람 몸통만 한 날개와 키보다 긴 꽁지깃, 화려한 색감의 깃털. 마코앵무새였다.

“이리 와.”

훈련소장이 팔을 뻗자 날개를 접은 앵무새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안녕!”

훈련장이 떠나가라 인사를 건넨 앵무새는 돌아오는 답이 없자 조금 시무룩한 기세로 팔을 타고 엉금엉금 걸어가 어깨에 자리를 잡았다. 고개를 숙여 귓속말하는 앵무새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훈련소장은 사방으로 흩어진 이능력자들을 불러 모았다.

“센터 담당 지역에 게이트가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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