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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34화 (34/143)

34화

그게 무슨 상관이냐니….

에스퍼한테 평판이 얼마나 중요한데. 던전에서 등을 믿고 맡길 수 있을지 판단하기 위해 훈련 태도는 물론이고 주변의 평판까지 분석해 토벌대와 공격대를 정했다.

이능이 미숙한 것도 모자라 C급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차헌과 팀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일반인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뜯어고치지.

“일단 제가 훈련소장님께 말씀드려볼 테니까 그때까지는 따로 훈련하기로 하고, 저 자료실 갈 건데 같이 갈래요?”

연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인 차헌은 어딘지 안다며 앞장섰다.

“같이 훈련하기 힘들면 밥이라도 같이 먹으면 안 돼요? 저 진짜 대화하는 사람이 형밖에 없어요.”

“저런. 그때 친한척한다는 사람들은요?”

“그런 인간들이랑은 말도 섞기 싫다고요.”

그래도 이런저런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좋을 텐데. 앞서 나가 자료실 문을 열던 차헌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연우를 붙잡았다.

“형. 밥은요?”

자료실로 들어가던 연우도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차헌의 훈련장에서 저녁을 함께 먹는 게 익숙해진 탓이었다. 지금이라도 식당으로 갈까, 싶었지만 위험 구역에서 복귀한 B 구역 에스퍼들이 몰려올 시간이었다.

“배고파요?”

“아직은요.”

“그럼 조금 있다가 먹어도 괜찮죠? 온 김에 자료 좀 둘러보게요.”

앉아있으라는 말에도 뒤를 따라온 차헌은 연우가 고르는 책들을 대신 들었다. 공격계에 관련한 자료들은 대충 다 모은 것 같은데…. 책장을 둘러보던 연우가 지나가던 정신계를 불러 세웠다.

“공격계 이능을 정리해둔 자료가 더 있나요?”

“음. 공략을 정리해둔 사료집이 있지만 그건 따로 허락이 있어야 하는데, 허가증 끊어드릴까요?”

공략집까지야…. 괜찮다고 답한 연우는 차헌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맨 뒷장부터 펼친 연우는 혹시라도 놓친 게 있을까 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이능의 종류를 훑어내렸다.

공격계 대부분이 원소의 성질을 띠고 있어 시간과 관련된 이능은 없었다. 좀 더 과거로 돌아가면 한 명쯤은 있겠지만, 최근에 과거로 돌아온 연우와는 관련이 없을 거다.

한 번 더 꼼꼼하게 살폈지만 역시나였다. 이제 보조계를 살펴야 하나. 가볍게 한숨을 쉰 연우는 멀뚱히 앉아있는 차헌에게 빙결계의 특징을 정리한 페이지를 보여줬다.

책을 읽는 차헌을 보고 있자 자연스럽게 차헌의 일생을 정리한 책이 떠올랐다. 그런 책이 없다고 거짓말한 연화도.

연화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긴 한데.

그렇다고 연화의 거짓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일단 책을 읽은 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한 번도 본 적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차헌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심증이 아니라 물증도 있었다. 글자가 다 날아가긴 했지만. 가방에 챙겨둔 다이어리를 떠올린 연우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일단 과거로 돌아온 건 확실하고, 공격계와 정신계에서 시간과 관련된 이능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것도 확인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 읽었어요?”

누가 봐도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던 차헌이 물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료를 반납한 뒤, 차헌과 함께 식당으로 이동했다.

“저번처럼 그냥 형네 구역에서 연습하면 안 돼요?”

우동을 애피타이저로 해치우고는 돈가스를 향해 손을 뻗던 차헌이 불현듯 물었다. 인절미를 조금씩 베어먹던 연우가 안 된다고 고개를 젓자 대번에 시무룩해진다.

“저번에도 말했듯 A 구역이랑 다르게 C 구역은 공동 훈련장이라 다른 구역 에스퍼들의 출입이 제한되어있어요. 다른 구역 에스퍼가 견학 오는 일도 거의, 아니 아예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야 다들 마나볼 훈련에 흥미를 잃고 훈련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향한 거였지만,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된 지금은 자발적으로 남아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훈련으로 예민해진 에스퍼들이 차헌과 만난다면 큰 거부감을 느낄 것이고, 그 거부감은 자연스럽게 차헌의 평판과 이어질 것이다.

다음 날. 연우는 훈련소장에게 말을 꺼내 보려 했었다. 무기를 잃어버린 에스퍼가 방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능력자가 함정을 설치하고, 이를 발견한 훈련소장이 사자후를 터트리지만 않았어도 훈련 종료 후 다른 구역에 가도 되냐고 물어봤을 것이다.

“이수빈 에스퍼.”

훈련소장의 부름에 달려간 이수빈은 함정 주변을 더듬어 보다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수빈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짙은 노란색 마나는 이내 노란색 강아지가 되었다. 몸을 푸르르 턴 강아지는 함정을 킁킁거리다가 이수빈을 보며 왕왕 짖었다.

따라오라는 듯 앞장서는 강아지를 지켜보던 훈련소장은 이수빈에게 훈련하고 있을 것을 명하고, 강아지를 따라나섰다.

“저게 뭐예요?”

방패를 꼬옥 안고 다가온 최동원의 물음에 공간을 감지해보던 연우는 한숨을 흘렸다. 흔히 공간 주머니라고 부르는 이능이었다. 물체에 접촉해야 이능을 사용할 수 있는 연우와 달리 장막처럼 펼친 이능으로 물체를 숨기거나, 이동시킬 수 있는 이능이었다.

그렇게 무기를 숨겨두고 있다가, 소란이 일어나면 자신이 찾았다며 뻔뻔하게 주장할 생각이었겠지.

“저건… 선을 넘긴 했네요.”

중얼거린 서유진은 마수 구슬과 마나볼을 챙기고는 팀원들에게 손짓했다. 그 모습을 본 최동원이 연우의 귀에 속삭였다. 공동구역 에스퍼들은 훈련에 미친 게 분명하다고. 벌써 홀로그램 마수와 대적하고 있는 배재영과 소환수를 불러낸 이수빈을 본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다음 날 역시 훈련소장에게 허락을 받지 못했다. 훈련장 출입증을 초기화했다는 말에 마나를 등록하고 돌아오니 훈련소장은 없고 가상 던전 훈련 동의서만 남아있었다.

동의서를 쓰자 초조해졌는지 박서현이 마나볼을 한 아름 안고 왔다. 박서현은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떠나려는 조희서를 붙잡은 뒤 팀원들을 동그랗게 앉혔다. 최동원이 던진 마나볼을 받은 연우가 이능을 사용하던 순간이었다.

손끝에서 이능이 튀어 올랐다. 서유진의 손으로 향하던 마나볼이 허공에서 뚝 떨어지자 조희서가 들으란 듯 코웃음을 쳤다. 몇 번 더 시도해봤지만, 그때마다 이능은 더 심하게 튀고 있었다.

“괜찮아요?”

박서현의 손짓에 튀어 오르는 마나볼을 낚아챈 서유진이 조금 물러났다. 발작 징후가 없는 걸 보아하니 가이딩 부족으로 이능이 튀는 모양이었다. 손끝을 주무르는 연우를 내려보던 박서현은 딴청을 피우고 있는 조희서에게 손짓했다.

“조희서 가이드.”

박서현보다 먼저 조희서의 이름을 부른 서유진은 하얗게 질린 연우를 가리켰다. 그런 연우를 못마땅하게 보고 있던 조희서는 넌더리 난다는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가이딩은 역하기만 했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말 것이지. 연우는 구역질이 치밀어올라 손을 물리며 무릎 사이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아니, 쟤가 받기 싫다잖아요!”

무언의 언쟁이 있었는지 끝이 올라가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은 연우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한연우 에스퍼. 이능 말고 몸은 어때요? 한숨도 못 잔 사람처럼 보여요.”

처럼이 아니고 실제로 한숨도 못 잤다. 저번 주 금요일. 그러니까 갑작스럽게 센터장이 호출했던 날을 기준으로 제대로 잠을 잔 적이 하루도 없었다.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5일. 다섯 밤 내내 악몽을 꿨다.

잠이 들 때마다 비명과 함께 눈을 떠야만 했다. 그다음부터는 해가 뜰 때까지 침대에서 벌벌 떨다가 출근했으니 몸 상태가 정상일 리가 없었다.

“불안해서 그래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연우를 편하게 눕혀준 최동원은 필사적으로 손을 숨기는 조희서를 노려봤다. 저런 가이드와 같은 팀이니 가상 던전에 들어간다는 게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불안합니다. 그래도 너무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훈련받고 나옵시다. 떨어지면 그만인 거죠.”

조금 쉬고 있으라는 말에 연우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최근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을 더듬어보던 연우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기억력이 나쁜 편이 아니었는데 요즘 들어 드문드문 기억이 날아가는 일이 많았다.

깜빡 잠이 들었는지 정신이 몽롱했다. 훈련소장의 호출에 비틀비틀 걸어간 연우는 무기를 골라 자리로 돌아갔다. 무기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는 박서현의 경고와 함께 마수 구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또 파충류.”

저번에는 내내 갑각류가 나오더니 이번에는 내내 파충류 마수가 나오고 있었다. 연기 아래에서 기어 나오는 노란 눈을 본 연우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손바닥에 고인 식은땀을 닦아낸 연우는 쉭! 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아본트 아나콘다를 피해 달렸다.

이능이 튀고 있으니 몸으로 상대해야 했다. 연우는 최동원이 뻗은 손을 발디딤대로 삼아 뛰어오른 다음 박서현이 날린 바람에 몸을 실었다. 몸을 날려 가볍게 떨어진 연우가 아나콘다의 꼬리를 짓밟았다. 그대로 고정하기 위해 단검을 내리찍었지만, 쉽게 당하고 있을 아나콘다가 아니었다.

발악하며 몸부림치는 아본트 아나콘다의 꼬리가 연우를 향해 날라왔다. 연우는 이능을 사용하려 했지만, 좌표조차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그대로 꼬리에 얻어맞은 연우는 붕, 날아가 말랑한 방어벽에 부딪혔다.

땅으로 고꾸라진 연우는 신음을 흘렸다. 홀로그램 마수에게 다치지 않는 거지 통증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한참 동안 바르작거리던 연우는 바닥을 짚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괜찮아요?”

내민 손을 붙잡고 일어나자 박서현도 한 대 얻어맞았는지 절뚝거리고 있었다. 연우보다 자신의 상황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박서현은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연우를 부축해주며 한쪽을 가리켰다.

“실제 상황이라면 몰살이겠죠?”

박서현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상황은 꽤 심각했다. 대치하고 있는 서유진과 아본트 아나콘다를 본 연우가 급히 마나를 회수했다. 박서현 역시 마나를 회수하자 서유진을 향해 쉭쉭 거리던 아본트 아나콘다가 마수 구슬로 기어들어 갔다. 꼬리에 돋아난 가시의 크기가 줄어드는 걸 보고 있었는데 서유진이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연우를 훑어보던 서유진은 몸을 돌려 쓰러진 최동원을 가리켰다.

“일단 조금 쉬어야겠네요. 최동원 에스퍼가 좀 다친 것 같은데.”

그 말에 연우는 서유진 쪽을 한 번, 손을 잡은 박서현 쪽을 한 번, 마지막으로 최동원을 본 뒤 천천히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이 상황 어디서 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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