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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35화 (35/143)

35화

“몸 상태 괜찮은 거 맞아요?”

안 괜찮다. 일주일이 넘도록 잠 한숨 편히 못 잔 연우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대로 드러눕고 싶었지만, 지친 몸이 일어나기를 거부할 것 같았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가 악몽과 함께 일어나겠지.

“조희서 가이드.”

딱딱한 서유진의 목소리에 연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서유진의 마나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거부감이 들었다. 에스퍼끼리의 반발력으로 인한 거부감이 아닌 좀 더 본능적인.

비유하자면 다이어리를 펼칠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그래도 확인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목전에 둔 것 같았다.

“어! 훈련소장님 왔어요!”

서유진에게 끌려오던 조희서는 호들갑을 떨며 연우에게서 멀어졌다. 누가 보면 역병 환잔 줄 알겠다. 가이딩 좀 해준다고 마나가 닳는 것도 아닐 텐데. 급이 낮은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하면 가이드의 급이 떨어진다는 속설이라도 있나.

혀를 찬 연우는 무릎을 짚으며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색색으로 물들었다. 어지러워 비틀거리던 연우는 박서현의 부축을 받고 나서야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드디어 금요일이다. 오늘 훈련이 끝나면 미친 듯이 체력을 소비한 다음 쓰러지듯 잠들 계획이었다. 그게 안 통한다면 치료실에서 수면제라도 얻어서 억지로라도 자고 말 거다.

“자, 다들 왔습니까?”

훈련소장이 동의서를 확인하는 동안 연우는 서유진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려 발끝을 움직였다. 딱 십 분만 편하게 자면 소원이 없겠다. 고개를 숙이고 길게 하품한 연우는 최동원의 손짓에 줄을 섰다.

“오늘은 가상 던전을 하기, 조용. 하기 전에 간단한 예비 테스트를 할 겁니다. 몸 상태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포기하세요. 우측 상단, 좌측 하단에 카메라가 있을 겁니다. 그곳을 향해 자, 다들 왼손을 들어보세요. 그대로 주먹을 쥐고 흔들면 됩니다. 네, 그게 포기하겠다는 뜻입니다.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보이지 않아도 직원들의 판단하에 던전 마나를 회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던전 마나의 압박감이 사라지고 난 뒤에 천천히 빠져나오면 됩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안에서 버티고 있는다고 해서 합격하는 거 아니니까 마나 코어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포기하셔야 합니다.”

훈련소장의 설명에 최동원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졌다. 잔뜩 긴장한 이능력자들을 둘러보던 훈련소장은 팀원별로 분류했다. 그러다 서유진이 빠지자 최동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가, 같이 안 가십니까?”

“저는 이미 통과해서요. 다녀오세요.”

팀원들의 어깨를 다독여준 서유진이 갔다 오라며 손짓하니 최동원의 어깨가 처졌다. 같은 방어계라 의지하는 게 있었나. 마지막까지 미련이 남은 얼굴로 서유진을 바라보던 최동원의 뒤를 따라가자 컨테이너가 나타났다.

“저게 뭐야.”

“에게.”

실망한 최동원이 작게 중얼거리자 옆에 선 에스퍼들이 동조했다. 너무 허술해 보이지 않냐며 동의를 구하는 최동원에게 연우는 그저 웃어 보였다.

겉모습은 조악하기 짝이 없지만 속은 아니다. 게이트를 흉내 낸 컨테이너 안에는 순도 높은 던전 마나가 가득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 던전 마나의 압박감을 이겨내고, 시간 내에 뒤엉킨 몸의 감각을 되찾아야만 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냐 없냐는 테스트였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후유증도 제법 심했고.

그 모든 걸 이겨내고 테스트를 통과한다면 토벌대의 뒤를 따르는 후발대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바로 위험 구역의 큐브로 발령 날 것이다.

“한연우 에스퍼. 이쪽으로.”

당기는 힘에 속절없이 끌려가자 팀원을 동그랗게 모은 박서현은 이런저런 조언을 늘어놓았다.

문을 여는 순간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한다, 마나 코어가 던전 마나에 반발해 크게 날뛸 테니 어떻게 가라앉혀야 한다며 경험을 나눠주고 있었지만, 연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이었다.

던전에 발을 들이자마자 숨을 가늘게 쉬는 것보다는 최대한 참는 게 좋다. 던전 마나는 호흡기로도 침투하니까. 날뛰는 마나 코어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이능을 짧게 끊어 쓰며 마나 코어에서 던전 마나를 밀어내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그런 정보를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연우는 입을 닫고 고개만 끄덕였다.

박서현이야 7년, 아니, 지금은 3년인가. 아무튼 경력직 에스퍼니까 이런저런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게 말이 되지만 연우는 이제 입사한 새내기 에스퍼다. 이런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될뿐더러 알려주더라도 연우에게 도움이 되는 건 전혀 없었다.

정보를 알려주는 순간 고마워하다가, 점점 당연하다고 여기겠지. 나중에는 왜 안 알려주냐고 되려 성질을 부릴 것이다. 동생 잘 만나서 좋냐? 한연화가 네 동생이라서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이렇듯 빈정거리는 게 대부분의 사람이었다. 박서현도 그런 사람이었고.

같은 팀원이라서, 마음 터놓을 곳이 없어 팀의 리더인 박서현에게 의지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 우리 잘해봅시다.”

일어나는 박서현에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한 연우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음…. 안 떨리십니까?”

연우가 하얗게 질린 최동원을 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떨지 마세요. 통과하실 거예요.”

사실이었다. 연우의 팀원들은 전부 통과했고, 토벌대의 후발대가 되었다. 토벌대와 공격대가 던전 공략을 끝내고 나오면 게이트가 닫히기 전 던전 부산물을 채취하고, 정리하는 일을 3년 동안 해왔다. 그리고 그 일에 권태를 느끼고 제일 먼저 탈주를 제안한 게 최동원이었다.

위험 구역으로 발령 나기 직전 조희서가 무영 길드로 빠지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무산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멍하니 컨테이너를 올려보던 연우는 하나둘 떠오르는 기억을 천천히 정리했다.

일단 저번처럼 팀원들한테 의지는 하지 말자. 말 그대로 팀원일 뿐 사정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조희서 가이드.”

옹기종기 모여앉은 다른 팀원들과 달리 외따로 앉아있던 조희서가 일어나는 걸 보던 연우는 눈썹을 찌푸렸다. 사관학교 시절, 무영 길드에 가입하겠다고 노래를 부르던 조희서는 결국 무영 길드에 가입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더라….

턱을 괴고 있는 연우를 붙잡고 떨려 죽겠다며 죽는 소리를 내던 최동원은 이름이 불리자 숨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비틀비틀 걸어가는 최동원을 보고 있자 박서현이 좀비처럼 걸어왔다.

손발이 저린지 탈탈 터는 박서현에게 연우가 마나 포션을 묽게 탄 물을 건네자, 단숨에 비우고는 옆에 주저앉았다. 숙취를 앓는 것처럼 머리를 짚은 채로 앉아있는 박서현의 뒤로 쓰러진 에스퍼들이 보였다.

조악한 컨테이너에서 반쯤 기어 나오는 에스퍼를 보며 저게 뭐가 힘들다고, 비웃던 에스퍼들도 심장께를 붙잡은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자, 다들 앉아있지만 말고 조금씩 걸으세요. 걷기 힘드시면 말이라도 하세요. 마나 코어에 쌓인 던전 마나를 배출해야 합니다.”

훈련소장의 말에 죽을상을 하고 있던 박서현이 흐린 눈동자로 주변을 살폈다.

“조희서 가이드는요?”

“아직 안 나왔습니다. 곧 나오겠네요.”

박서현은 연우의 말에 신음을 흘리며, 물병 하나를 챙긴 뒤 느릿하게 일어났다.

“그래도 우리 가이드니까 챙겨야지. 마중 갔다 올게요.”

연우는 출구 쪽으로 향하는 박서현의 뒷모습을 보다 줄을 섰다. 최동원이 빠져나왔는지 박서현이 손을 흔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파이팅. 입 모양을 읽은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고리를 쥐었다. 문을 활성화하기 전, 숨을 깊게 들이쉬고,

“한연우 에스퍼. 들어가세요.”

참았다.

발을 딛기가 무섭게 첨예한 바늘 끝으로 온몸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주먹을 움켜쥐며 통증을 참은 연우는 최대한 느릿느릿 걸어 슬라임 같은 마나 덩어리에서 빠져나왔다. 그것만으로도 폐가 터질 듯 호흡이 가빠오고 있었지만 아직은 숨을 쉴 때가 아니었다.

가상 던전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2m가 안 되는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농도 짙은 던전 마나가 마나 코어에 달려들었다. 동시에 마나 코어가 압축되며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를 악문 연우는 머릿속으로 문양을 떠올렸다. 평소라면 손끝으로 마나를 흘려보냈겠지만, 감각이 혼동된 지금 어디가 발이고 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오른손, 그다음엔 오른발, 다시 왼손, 그리고 왼발.

노랫말을 흥얼거리듯 중얼거리며 차분하게 감각을 구분하던 그때였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모호한 느낌이 들었다. 불투명한 감각을 느끼던 연우는 주변을 둘러보려 했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최동원이 아직 못 나갔나?

열심히 눈을 깜박거리자 왼쪽 눈의 시야가 돌아왔다. 뿌연 시야에도 눈에 힘을 주고 주변을 살피던 순간,

“!”

황금빛 눈동자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눈이었다. 연우를 매번 악몽 속으로 밀어 넣는 황금빛 홍채. 매번 끔찍한 고통을 겪게 하는 눈.

그리고… 연우를 죽게 만든 눈.

순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과 함께 눈앞으로 꿈속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센터가 토벌대의 선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까?’

‘드래곤 레어가 있는 던전이라. 제법 구미가 당기지 않아요? 거기서 아무거나 주워와도 평생 먹고 놀겠는데.“

‘흠. 아무리 저라도 한연화 에스퍼를 잡아둘 수는 없어요. 그 사람 촉이 얼마나 기가 찬 지 그쪽도 잘 알잖아요. 일단 노력은 해보겠는데…. 대가는?’

‘오빠! 내 말 좀 들어! 미래를 바꿔보겠다는 인간들이 어떻게 죽어 나갔는지 몰라?!’

‘정신 차려요.’

‘강차헌!’

매일 밤 꾸었던 악몽이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에 허우적거리던 연우가 그대로 쓰러졌다. 온몸의 감각을 되찾는 것과 동시에 발끝이 녹아내리는 환상통이 느껴졌다.

간신히 눈을 뜬 연우는 발끝을 내려보았다. 내 발은 멀쩡해. 이건 꿈이야. 눈을 뜨면, 아침일 거야.

“꿈….”

중얼거리자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듯, 살랑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귀여워라. 그게 정말 꿈인 줄 알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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