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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36화 (36/143)

36화

성별도 나이도 구분할 수 없는 목소리. 소스라치게 놀란 연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앞에 보이는 건 길지 않은 통로와 그 끝에서 일렁거리는 마나뿐이었다.

다시 한번 둘러보아도 악몽을 떠올리게 한 황금빛 눈동자도, 몽환적인 목소리의 주인도 보이지 않았다.

[한연우 에스퍼. 괜찮습니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연우는 카메라 렌즈를 확인했다. 훈련 첫날이라 지켜보는 직원도 많을 텐데 아무도 그걸 못 봤다고?

분명 뭔가가 있었다. 어두운 배경 속에서 환히 빛나던 황금빛 눈동자를 떠올린 연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한연우 에스퍼?]

재촉에 연우는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그려보았다. 치직거리는 잡음이 사라지자 심호흡하던 연우는 몸을 일으켰다. 일단… 나가자. 나가서 생각하자.

일어난 연우는 출구 앞에 좌표를 잡았다. 희미하게 빛났다가 꺼지는 문양을 보니 웃음만 나왔다. 가이딩을 받긴 받아야겠다. 조희서가 순순히 가이딩을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공간을 접는 걸 포기한 연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마나 덩어리 앞에 섰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앞을 가로막는 마나 덩어리를 통과한 연우가 문을 열었다. 퐁, 하고 코르크 마개가 뽑히는 소리가 나며 세척용 산소가 쏟아졌다.

순수한 산소를 들이켜자 목구멍이 간질거리며 기침이 터져 나왔다. 정신없이 기침을 토해내고 있자 다가온 최동원이 물병을 내밀었다.

“맛없어요.”

최동원의 경고처럼 물맛은 최악이었다. 역한 맛에 입을 틀어막은 연우를 보던 최동원은 안쓰러운 얼굴로 더 마시라며 손짓했다. 물병을 입에 가져다 대는 손짓에 조금 더 빨아 마셨더니 혀뿌리가 저리며 구역질이 났다.

“괜찮아요?”

차게 식힌 수건을 건네던 박서현이 최동원과 연우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씩 웃었다.

“우리 팀은 통과하겠네요.”

박서현은 공동구역 에스퍼들 근처에 자리를 잡은 조희서를 가리킨 다음 연우와 최동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다들 멀쩡하게 나오셔서 다행입니다.”

박서현의 말에 물을 마시던 최동원이 갑자기 울먹였다. 머릿속으로 그렇게 시뮬레이션을 했는데도 힘들었다며 눈가를 붉히자, 어깨를 바짝 당긴 박서현이 작게 속삭였다.

“우리 팀 진짜 잘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나오자마자 토하고 쓰러지고 난리도 아니었잖아요.”

널브러져 있는 에스퍼들을 눈짓한 박서현은 주눅이 들어 동그랗게 말린 최동원의 어깨를 도닥였다. 연우에게도 엄지를 내미는 박서현의 손을 본 연우는 옅게 웃었다.

멀쩡해야지.

이게 첫 번째 훈련, 아니, 첫 번째 삶도 아닌데.

“저, 조금….”

속을 게워낼 것 같다는 손짓을 해 보이자 박서현이 팔을 풀었다. 훈련이 끝날 때까지 쉬고 있으라며 연우를 눕힌 박서현은 최동원과 함께 자리를 피해줬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연우가 눈을 감자 눈꺼풀 위로 몇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크게 앓아누운 시점을 시작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던 연화, 그런 연화를 괴물 취급하며 도망친 부모님, 사관학교의 동기들, 그들과 함께 사관학교를 졸업했을 때 연화가 선물해 줬던 책, 연화의 성년식에 참석한 라운드 길드장, 그리고 그 앞에서 울부짖는 자신의 목소리, 그리고 녹아내리던 손가락.

천천히 눈을 뜬 연우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보았다.

그게 꿈이 아니었구나. 나는 그렇게 죽었구나.

그냥 과거로 돌아온 게 아니라 죽어서 과거로 돌아왔구나.

멀쩡한 손을 바라보던 연우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제일 이해할 수 없는 건 연화의 거짓말이었고, 두 번째는 자신의 죽음이었다.

C급인 연우는 던전 후발대로 살아가고 있었고, 후발대를 그만둔 이후로는 위험 구역으로 갈 예정이었다. S급인 강차헌과 엮일 일이 거의, 아니, 아예 없었다.

그런데도 제 허리를 잡아끌던 손과 놀란 차헌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차헌이라면 토벌대, 못해도 공격대로 들어갔을 테니 후발대인 자신과 만날 일이 없었다. 왜 같이 있었는지, 왜 차헌을 구하고 죽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 이제 일어납시다.”

박서현의 부름에 천천히 일어난 연우는 최동원의 옆에 섰다. 다른 팀 가이드가 에스퍼를 살피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다가오던 조희서가 한 발짝 물러섰다. 뭐, 기대도 안 했다.

“시간이 좀 남긴 했지만, 오늘 훈련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오늘 하루는 최대한 이능을 사용하지 마시고 많이 걸으세요. 걷기도 힘들면 팀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던전 마나를 배출해도 괜찮습니다.”

비교적 멀쩡하게 서 있는 무리와 쓰러지기 직전인 에스퍼를 보던 훈련소장은 박수를 쳐 시선을 모았다.

“자, 집중. 가상 던전 훈련은 오늘이 끝이 아닙니다. 다음 주에 또 한 번 테스트를 할 거고, 그때의 결과에 따라 실습생들이 정해질 겁니다. 오늘 통과했다고 너무 안심하지 마시고,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훈련소장이 해산을 명하자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서유진이 다가왔다.

“다들 좀 괜찮으세요?”

해산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훈련장을 빠져나가는 조희서를 바라보던 서유진이 팀원들을 내려보며 웃었다.

“오늘이 훈련 마지막이네요.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깔끔한 인사에 최동원이 울상을 지었다. 배재영처럼 그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으며 인사하던 서유진이 연우에게 물병을 내밀었다.

“한연우 에스퍼도 괜찮으세요?”

다가오는 서유진을 피해 주춤주춤 물러서는 연우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한연우 에스퍼.”

그날 서유진도 같이 있었구나. 그래서 거부감이 들었던 거였어.

박서현이 멍하니 발만 내려보는 연우를 제 뒤로 밀어 넣고는 서유진과 대신 인사했다. 마나 멀미 후유증이 제법 길다며 물병을 쥐여준 서유진이 돌아가고 나서야 연우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팀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도 연우의 머릿속에서는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 * *

“다른 자료는 없나요?”

“이능을 정리해둔 자료를 찾으시는 거죠? 공개된 이능을 정리해둔 건 그게 다예요.”

정신계의 대답에 한숨을 삼킨 연우는 자리로 돌아갔다. 휴식 시간을 아껴가며 넓은 자료실을 뒤졌지만, 소득이 없었다. 자료실을 지키는 정신계 에스퍼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시간과 관련된 이능을 가진 에스퍼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누군가 시간을 돌렸고, 비슷한 시간 선에 놓여있던 연우가 운이 좋게 딸려왔다. 는 가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팔짱을 낀 연우는 다이어리를 노려보았다.

2월 19일.

날짜만 덩그러니 남아있던 페이지에는 강차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 옆으로 그어진 선들과 수많은 물음표를 보던 연우는 길게 한숨을 흘렸다. 서유진과 마찬가지로 강차헌에 대한 정보가 생각나지 않았다. 연우는 턱을 괸 채 볼펜으로 강차헌의 이름 위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강차헌이 어떻게 살았더라.

한 번 읽은 정보를 모조리 기억하는 기억력이 있다면 좋았을걸. 물건의 위치는 또렷하게 기억하지만, 아쉽게도 정신계만큼 기억력이 좋지 못했다.

책은 사라졌고 다이어리의 글자들은 복구되지 않았다. 남은 건 연우의 기억력뿐인데…. 입술을 말아 문 연우가 열심히 머리를 쥐어짰지만, 책의 이야기도, 강차헌에 대한 기억도 희미하기만 했다.

기억나는 건 강차헌이 A 구역에서 따돌림을 받은 것과 어떤 사건을 계기로 센터장이 된다는 것 정도.

머리를 붙들고 있던 연우는 다이어리를 한 장 넘기고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생각을 바꿔 다시 생각해보자. 나는 어떻게 살았더라.

연우는 기억을 더듬으며 볼펜으로 제 이름 위를 꾹꾹 눌렀다.

여느 직장이 그러하듯 적응하고 나면 그날이 그날인 하루가 된다. 그리고 연화가 성인이 된 이후로는 연화의 삶에 집중하느라 연우의 삶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왜 그랬을까.

미성년자도 아니고 성인인 연화를 그렇게 싸고돌 이유가 없었다. 이마를 꾹꾹 누른 연우는 빈자리에 연화의 이름을 적었다.

그 아래 생각나는 기억을 모조리 정리하자 몇 가지 가설이 만들어졌다.

연화처럼 예지를 본다는 가설이 제일 유력했지만, 에스퍼가 두 가지 이능을 가질 수는 없었다. 있다고 해도 그건 예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게 진짜 꿈인 줄 알았니?]

그 말을 믿어야 하나. 환상을 본 건지 환청이 들린 건지. 미미한 두통이 올라와 목덜미를 주무른 연우는 강차헌의 이름이 쓰인 페이지를 펼쳤다.

왜 강차헌을 구했을까. 지금이나 그때나 이능이 미숙하긴 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S급인 차헌이 조금 다치고 지쳐 보인다고 해서 목숨을 바쳐 구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그런 역할이었나?

그렇다면 던전에 들어가기 전 연화가 자신을 말리느라 싸웠던 장면이나, 차헌을 구하고 죽은 이유도 이해가 갔다. 그런 다음 모종의 이유가 있어 과거로 돌아왔겠지.

“으으으….”

팔에 머리를 파묻은 연우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이런저런 가설을 세워봐도 해결되는 건 없고 머리만 아팠다.

“형?”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마나에 연우가 머리를 들자 앞에 차헌이 의자를 빼고 있었다.

“혹시 몰라서 와봤는데 여기 있었네요.”

우리 진짜 오랜만인 거 알죠. 옆에 앉는 차헌의 말에 연우는 다이어리를 숨긴 다음 손으로 셈을 했다. 월요일에 보고 못 봤으니까…. 4일만인가? 매일 같이 연습하다가 따로 연습하니까 옆이 좀 허전하긴 했었다.

엎드린 자세에서 머리만 돌린 연우는 차헌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왜요?”

내가 왜 널 살렸을까 고민하는 중이다. 차헌은 훈련복에 뭐라도 묻었을까 훑어보고 있었지만, 생활감이 묻어날 뿐 훈련복은 깨끗하기만 했다.

“뭐지? 뭐 묻었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연우의 대답에 차헌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이 형이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내려보는 차헌의 눈동자에는 하늘빛이 맴돌고 있었다. 눈동자에 마나의 색이 섞일 정도면 훈련을 많이 했나 보….

잠시만.

몸을 일으킨 연우는 차헌을 다시 한번 훑었다. 그때의 강차헌은 무기도 못 만드는 애송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머릿속으로 책의 내용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그걸 잊었을까. 책이 닳도록 읽었는데 왜 잊어버렸을까.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강차헌과 엮이지 말았어야 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의 차헌은 A 구역에서 따돌림을 받고 있어야 했다. 이능도 서툴고 마나 다루는 법도 몰라서 무능력한 S급이라고 손가락질받는 게 차헌이었다고.

그런데 지금은 따돌림을 받기는커녕 개인 훈련장까지 배정받았고, 심지어 센터를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왜? 연우가 차헌에게 마나를 다루는 법을 알려줬기 때문에. 연우가 센터의 부조리함을 알려줬기 때문에.

“하하하….”

웃음을 흘린 연우는 그대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책의 주인공인 차헌의 미래를 비틀어버렸으니, 인과율의 부메랑이 연우를 덮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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