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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37화 (37/143)

37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그대로 책상에 엎어진 연우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차헌이 마나볼을 터트리든, 워터볼로 물난리를 치든 신경을 쓰지 말았어야 했다.

“형?”

형이라니. 형이라니. 너 내 이름도 몰랐잖아.

차헌의 미래를 바꾼 것도 모자라 크게 개입해버렸다는 걸 깨달은 연우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연화의 옆에서 책의 주인공에게 접근한 사람들이 어떤 부메랑을 맞는지 다 지켜봤으면서 미쳤다고 강차헌한테 접근했냐, 한연우.

한참 동안 심호흡하던 연우는 천천히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후회한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어지진 않는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가 중요하다.

“왜 이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뇨.”

지금은 없지만, 이제부터 생길 거다. 어떤 식으로 부메랑을 맞게 될까. 이능이 튀는 걸 봐서는 이능을 잃어버리는 쪽으로 부메랑이 올 것 같긴 한데. 부메랑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차헌을 만나기 전부터 이능은 튀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른 연우는 홀쭉해진 다이어리를 노려봤다.

책의 주인공은 명줄이 어찌나 긴지 연화의 예지로도 끝을 못 보는 경우가 많았다. 분명 차헌도 그중에 하나였다. 미래가 보장되어있는, 차헌을 살린 이유가 뭘까. 강차헌이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있었나? 차헌이 있어야 뭔가 달라질 거라고 믿고 자신이 목숨을 투자했다는 가설이 들어맞을 확률이 높았다.

아마도….

입술을 깨문 연우는 다이어리를 챙겨 일어났다. 던전 멀미가 뒤늦게 올라오는지 두통 때문에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들었다.

“그나저나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또.”

문을 열어주던 차헌이 미간을 콱, 찌푸렸다.

“오며 가며 마주,”

“칠 수도 있는 건데 지금은 훈련 시간이잖아요.”

연우야 훈련이 조금 일찍 끝났다지만 차헌은? 점심시간까지 삼십 분은 더 남았는데 왜 다른 구역에서 어슬렁거리지?

“형은요?”

“저는 일찍 끝났습니다. 강차헌 에스퍼는요?”

“아니, 그냥 치료실 갔다가 형 마나가 느껴져서….”

“치료실요?”

“훈련하다 다쳐서요.”

목덜미를 문지른 차헌은 피가 묻어나오지 않는지 확인했다. 훈련복이 어두워 스며든 피가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래도 연우가 피를 보고 놀랄까 봐 몸을 튼 차헌은 일찍 끝났다는 말에 눈을 빛냈다.

“혹시 그 일 해결됐어요?”

“대련 훈련했어요?”

동시에 튀어나온 질문에 차헌은 고개를 끄덕이고, 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차헌의 대답에 잠시 고민하던 연우는 훈련 구역으로 향했다. 어디 가는데요, 뒤를 따라오는 차헌을 데리고 훈련소장을 찾은 연우는 바로 본론을 말했다.

“사정이 있어서 그런데 강차헌 에스퍼와 훈련해도 될까요?”

가상 던전 훈련 결과를 확인하고 있던 훈련소장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다른 구역 에스퍼들끼리 훈련이 금지된 건 혹시 모를 폭주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S급은 C급의 폭주를 견딜 수 있지만, 반대는 아니다. 한연우를 담당하고 있는 훈련소장으로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둘을 주시하라는 명이 있었기에 한숨을 삼킨 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상관없지만, 조심해야 한다는 건 알죠?”

허락에 신이 나서 손짓하는 차헌의 뒷모습을 보던 연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차피 바뀐 미래, 연우가 전전긍긍한다고 해서 날아올 부메랑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형, 점심은요? 먹고 갈까요?”

밥…. 밥을 먹어야 힘이 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얼마나 피곤한지 입맛도 없었다. 밥 말고 잠이나 한숨 자고 싶었다. 운동으로 몸을 혹사한 다음에 기절한 듯 잠이 드는 게 아닌 이상, 선잠이 들었다가 악몽과 함께 일어났다. 아니, 악몽이 아니지.

연우는 식당으로 향하는 차헌을 빤히 바라보았다.

“강차헌!”

그렇게 죽는 게 자신의 미래라면, 그리고 만약… 또 다른 미래가 준비되어있다면… 어차피 인과율의 부메랑을 맞을 거 미래를 조금 더 바꿔도 되지 않을까?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강차헌이 센터장만 되면 되는 거잖아.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손짓하는 차헌에게 걸어갔다.

한 번 죽어봤으니, 두 번째는 더 쉽겠지.

* * *

A 구역 훈련장으로 들어선 연우는 차헌의 뒤를 쫓아가다 한숨을 푹 쉬었다. 목표는 정해졌지만, 뭐부터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강차헌을 센터에 잡아두기 위해서는 A 구역의 태도부터 변화시켜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연우는 공간계였고, 차헌은 공격계였다. 기본적인 것들이야 알려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계통에 따른 한계가 있었다.

한숨만 푹푹 쉬던 연우는 훈련장으로 들어가다 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훈련장 한쪽 벽면이 얼음 장미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장미꽃이잖아요.”

뚱하게 대답한 차헌은 손을 뻗어 얼음꽃을 뚝, 꺾어 연우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꽃을 받은 연우는 가시까지 표현된 섬세한 얼음꽃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다른 거 달라고 해도 계속 쿠키 틀만 주잖아요. 저번에 형이 꽃으로 연습하라고 했던 게 생각나서 요즘엔 이거 만들고 있어요.”

차헌은 대수롭지 않은 듯 꽃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쿠키가 아닌 쿠키 반죽을 만들어 내던 차헌이었다. 언제 이렇게 실력이 향상된 거지?

“이건 이제 어떻게 하는지 감 잡았는데 대련 훈련은….”

말끝을 흐린 차헌이 목을 더듬었다. 수건을 흠뻑 적신 것도 모자라 훈련복에 피가 묻을 정도였던 깊은 상처는 치료계의 손짓에 깔끔하게 아물어있었다. 연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는 차헌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대련 훈련에서 또 다쳤나 본데.

혀를 찬 연우가 한쪽 벽에 놓인 무기장을 살폈다. 이쪽부터 저쪽까지, 석궁부터 대궁까지 다양한 활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단거리 무기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수를 공격할 때는 원거리 무기가 좋지만, 에스퍼끼리의 대련이라면 근거리 무기가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너는 아무래도 활이 편하지? 차헌을 위하는 척 무기장에 활만 꽉꽉 채워놓았을 모습이 안 봐도 뻔했다.

에스퍼의 안전을 위해 대련용 단검은 말랑한 고무로 만들어졌지만, 마나로 감싼 단검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였다. 아마 거기 당했겠지.

A 구역의 만행을 추리해가던 연우는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제가 차헌이라도 치사하고 더러워서 센터를 나갔을 것이다. 지나가는 아무 길드나 붙잡아도 이보다는 나은 취급을 받을 것이다.

곰살맞은 라운드 길드장이나, 필요한 건 뭐든지 구해다 주는 무영 길드장은 말할 것도 없겠지. 무기장을 닫은 연우는 차헌에게 손짓했다.

“대련 훈련 설명은 들었어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차헌은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안 알려줬겠지. 연우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며 허벅지 벨트에서 훈련용 단검을 뽑아 들었다. 차헌에게 꺼내라고 손짓했지만, 차헌의 허벅지 벨트는 텅 비어있었다.

“무기들 어디 갔어요?”

“훈련 때는 잠시 압수한다던데요. 팀이 있어야 호흡을 맞춰서 공격을 할 수 있으니까 저는 방어만 하라고.”

이…. 이…. 속으로 수많은 욕설을 중얼거린 연우는 손을 펼쳐 얼굴을 묻었다. 아, 진짜 책의 주인공만 아니었어도 얼른 짐 싸고 나가라며 내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차헌이 책의 주인공인 이상 센터에 끝까지 남아있다가 센터장이 되어야 했다.

“이것도 거짓말이에요?”

화낼 기운도 없다는 듯 차헌은 손끝으로 얼음 결정을 튕기며 쓰게 웃었고, 그 모습을 보던 연우는 차헌에게 단검을 쥐여줬다.

“아직 오후 훈련 안 끝났죠?”

“네? 네. 그럴걸요. 저는 중간에 치료받는다고 빠져나온 거라.”

“그럼 지금 이거 보고 따라 만들어요.”

손에 들린 단검을 보던 차헌이 이능을 사용하자, 반짝거리는 얼음 단검이 생겨났다. 차헌은 제 실력이 어떠냐는 듯 턱 끝을 치켜들었지만, 연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손잡이가 너무 짧잖아요. 단검을 쥐었을 때 이 정도는 여유가 있어야 해요.”

기세가 수그러든 차헌과 신중한 연우의 손에서 단검이 몇 번 왔다 갔다 하자 단검의 형태가 점점 그럴싸해졌다. 뿌듯해하던 차헌은 저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연우의 손짓에 당황했다.

“대련 훈련은 어디서 하는데요? 단체 훈련장?”

“그렇긴 한데 저 지금 어디 가요?”

“단체 훈련장이요.”

그 말에 연우의 손에 잡혀 순순히 끌려가던 차헌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제가 거길 왜 가요?”

“훈련해야죠.”

“아니, 형은 저를 거기로 보내고 싶어요? 저를 쥐어패는 곳에?”

차헌은 급히 몸을 살폈다. 방금 치료를 받고 온 터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몸은 맞았다는 증거가 없었다. 피를 무서워하는 사람한테 저 새끼들이 칼로 나를 벴다면서 훈련복에 묻은 피를 보여줄 수도 없고!

“그러니까 그걸 왜 맞고만 있어요. 누가 때리면 맞받아쳐요. 멀리서 공격하면 얼음에 가둬버리고, 가까이 다가오면 단검으로 그어버리고, 만들 시간 없으면 주먹으로 후려 까요.”

후려 까라니. 그 말에 차헌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래도 돼요? 선배잖아요.”

기가 찬다. 설마 계속 맞고 있을 생각이었나?

센터는 물론이고 이능력자들이 활동하는 곳 모두 실력 위주로 돌아가는 곳이었다. 후임이라도 등급이 높으면 팀의 리더가 되는 게 당연했다. 까마득하게 어린 각성자라도 저보다 능력이 좋다면 한발 물러서 대접해야 하는 곳이니, 선배라고 봐줄 필요가 없었다.

“안 될 건 뭐가 있어요? 선배고 나발이고 가만히 있으니까 사람을 샌드백으로 보는 거니까 어떻게든 한 대라도 때려요.”

아니, 센터 자체에 선배나 선임이라는 개념이 없는 곳인데 웬 선배? 싶었지만 상대는 차헌이다. 일반인으로 살아온 차헌은 먼저 입사했으니 선배라고 불러야겠지, 하며 나름대로 대접을 해줬을 거고 그놈들은 그걸 이용해 꼴에 지들이 선배라며 차헌을 찍어 눌렀을 거다.

“뭐라고 따지면 그냥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갔다고 해요. 아니다, 그냥 단검을 날려버려요. 방어 기제가 작동했다는 데 지들이 어쩔 거예요.”

연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차헌은 복잡한 표정으로 손을 내려보았다.

“제가 가면, 형은요?”

텅 빈 훈련장과 아무도 없는 숙소를 떠올린 차헌이 연우를 안으로 슬쩍 밀었다. 못 빠져나가게 문을 얼려버릴까, 차헌은 순간적인 충동에 휩싸였지만 연우가 공간이동 에스퍼라는 걸 떠올리고 입을 삐죽였다.

“저요? 여기 있을 테니 다녀오세요.”

연우의 말에 입꼬리를 끌어올린 차헌은 문을 밀어 닫았다. 문고리가 얼어붙은 걸 눈치채지 못한 연우는 차헌의 개인 훈련장을 쭉 둘러봤다.

첫 번째 목표는 A 구역 이능력자들에게 차헌의 능력을 확실히 인지시키는 것이다. 센터장의 태도로 보아 아마도, 아니, 확실히 따돌림을 묵인하는 중이었고, 따돌림을 주도하는 건 이상원일 것이다.

사람이 한순간에 바뀌지 않는 이상 제가 최고라고 자부하던 이상원이 갑자기 나타난 차헌을 반길 리가 없을 테니까.

그런 이상원을 믿고 날뛰는 A 구역 이능력자들에게 자신의 리더가 바뀔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했다. 훈련복을 걷어 올린 연우는 훈련장을 정리했다.

다른 건 몰라도 대련은 가르쳐줄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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