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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38화 (38/143)

38화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떨어진 차헌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봤다. 제법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도 신기하게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턱을 당기라니까요.”

차헌이 가만히 누워있자 연우가 다가와 차헌의 목 아래에 손을 쑥 집어넣고는 그대로 들어 올렸다.

“이렇게. 안 그러면 머리 깨져요.”

조곤조곤한 말투에 차헌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갑자기 사람을 날려버리더니, 뭐? 턱을 당기라고?

“아니, 아니.”

얼마나 어이가 없는지 제대로 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연우는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려주고는 일어나라며 손을 뻗었다. 그런 연우를 뚱하게 노려보던 차헌이 손을 잡자마자 시야가 바뀌었다.

“형!”

“턱 당겨요.”

다정한 말투에 차헌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말투만 다정하지, 행동은 스파르타가 따로 없었다. 밥을 먹다가 말고 사람을 빤히 바라봤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은근슬쩍 선을 긋고 너는 저기, 나는 여기, 구분하던 연우가 무언가를 가르쳐준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고!

알고 보면 형이 아닌 거 아냐?

별의별 능력을 가진 에스퍼들이 넘치는 센터인데 변신하는 에스퍼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형인 척하는 새끼한테 홀라당 속은 게 아닐까?! 어!?

발딱 일어난 차헌은 도끼눈을 뜨고 연우를 노려보았다.

“일어나요.”

차헌이 아무 말 없이 노려만 보고 있자 연우가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허리부터 떨어지면 허리 나가요. 다리도 들어 올려야죠.”

상냥한 말투에 포장된 신랄한 내용을 봐서는 형이 맞는 것 같긴 한데.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하던 차헌이 손을 뻗어 붙잡자, 익숙하고 따스한 감각이 손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익숙한 마나에 몸의 긴장이 풀어지는 순간, 시야가 뒤집혔다.

“다리.”

연우의 목소리에 차헌이 반사적으로 다리를 들어 올렸다. 등이 땅에 닿자마자 일어난 차헌은 연우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말이라도 해주고 해요!”

“알았어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연우가 손을 내밀자 잠시 씩씩거리던 차헌이 손을 붙잡았다.

“오늘은 이것만 해요?”

“기본 중의 기본이 낙법이니까요. 지금.”

차헌의 말대로 경고한 연우는 이능을 사용했다. 천장에 그려진 문양에서 나타난 차헌이 턱만 당기고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그 모습을 본 연우가 혀를 찼다.

“또 혀 찼죠!”

부릅뜬 눈에 순순히 혀끝을 깨문 연우는 차헌에게 다가갔다.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졌으면 허리가 제법 아플 텐데, 차헌은 통증을 호소하는 대신 입술만 삐죽이고 있었다. S급이 맷집이 좋긴 좋구나.

손을 뻗자 차헌이 팡, 소리가 나게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눈을 질끈 감는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작게 웃던 연우가 마주 잡은 손을 잘게 흔들었다.

“이능 사용할 때 경고하라면서요. 잠시 쉬죠.”

의심을 가득 담은 눈으로 연우를 살피던 차헌이 연우의 쉬자는 말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몸에 힘을 풀었다. 그 순간 손을 잡아당긴 연우가 단검을 휘둘렀다.

“…형?”

너무 놀라 넋을 놓고 있던 차헌은 연우가 칼을 거두자 이게 무슨 짓이냐고 길길 날뛰었다. 연우는 그런 차헌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차헌의 주변을 살폈다.

“이런 식으로 친구들이랑 싸워본 적 없어요? 기본적인 방어 기제가 아예 없는데.”

연우의 말에 차헌의 미간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당연한 거 아닌가? 아니, 보통 싸워도 적당히 치고받는 수준이지 누가 사람을 날려버리고 칼을 휘두르면서 싸워? 그것도 친구들이랑?

더구나 차헌은 그 ‘강차헌’이었다. 유소년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이후로 감히 차헌을 건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헌의 몸, 특히 어깨는 부모님도 쉬이 건드리지 못하는 부위였다. 친한 친구와 어깨동무도 해본 적이 없는데 누가 차헌을 함부로 엎어 치겠느냐고.

“지금?”

손을 뻗는 연우를 보던 차헌은 헛웃음을 흘렸다. 차헌이 발을 헛디디기만 해도 온갖 난리를 치던 코치들과 다르게 너를 날려버릴 테니 어서 내 손을 잡아라. 하는 연우의 태도를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냥 공격하는 걸 배우는 게 어때요?”

바닥에 널브러진 차헌에게 다가온 연우는 쪼그려 앉아 차헌의 팔다리를 다시 교정해주었다. 보통 한두 번 하면 아프기 싫어서라도 자세를 잡던데. S급이라서 위기감이 없어서 그런가. 어떤 식으로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몸을 일으킨 차헌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연우의 말대로 대련 중에 얼음 단검을 만들어 반격을 시도했을 때, 차헌은 뿌듯함보다 두려움을 먼저 느꼈다. 원치 않는 능력을 가지게 된 날, 뜨거운 햇살 아래 서 있던 차헌은 얼음 한 조각이 간절했었다. 그 순간 발아래에서 솟아오른 얼음은 차헌의 체스트 가드에 선풍기 바람을 쐐주던 코치의 볼에 상처를 냈다.

동시에 사방에서 울리는 비명과 차헌을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얼음을 만들어내던 차헌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그런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센터에 온 건데.

차헌은 자신의 반격에 당해 피를 흘리는 에스퍼를 보고,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연우에게 향했다. 그런 차헌에게 연우는 공격법 대신 제대로 된 방어법을 알려주겠다며 약속했었다. 그 결과가 사람을 날려버리는 훈련인 줄은 몰랐지만.

고개를 젓는 차헌을 보던 연우는 입꼬리를 꾹꾹 늘렸다.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공격계 에스퍼들은 자신의 이능으로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다는 얘기를 듣긴 했다. 사관학교 동기인 선우건 또한 제대로 된 공격을 하는 것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으니까. 하지만 차헌이 이럴 줄은 몰랐는데.

반격에 성공했다며, 그동안의 복수를 하겠다며 위풍당당하게 걸어들어올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훈련장에 들어오는 차헌의 어깨는 있는 대로 처져있었다.

저래서 센터장이 될 수는 있을까. 차헌을 지켜보던 연우는 팔짱을 꼈다. 차헌이 반격하지 않는다면 차헌의 능력을 보여줄 기회가 없을 것이다. 이대로 방어법만 익힌다면 A 구역 이능력자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을 게 분명했다. 튼튼한 샌드백이 생겼다고 좋아하겠지.

…2주. 그 안에 센터에 대한 차헌의 인식을 바꾸지 못한다면 차헌은 센터를 방문한 라운드 길드장과 함께 센터를 나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미래가 바뀔 것이고 연우는 인과율의 부메랑을 맞게 되겠지.

다른 건 걱정이 안 되지만, 연화가 아직 미성년자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연우가 잘못되자마자 쌍수 들고 달려들 게 분명한 에스퍼 협회와 몇몇 길드장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앞으로 3년. 연화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지켜주고 싶은데.

연우는 몰려오는 통증에 이마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오뚜기도 아니고 혼자 넘어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하고 있는 차헌을 보다 시간을 확인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벌써 가게요?”

벌써라니. 경비 시스템이 작동되기 20분 전이었다. 저번처럼 어정거리다가 입구에서 직원에게 붙잡혔던 걸 잊었는지 차헌의 얼굴은 불퉁하기만 했다.

“오랜만에 같이 연습하는 거잖아요. 자고 갈 줄 알았는데….”

“너무 오래 연습하지는 말고 오늘도 일찍 자요. 마나 코어 점검하는 거 잊지 말고.”

“그냥 여기서 자고 아침 먹고 가요.”

훈련복을 붙잡는 차헌의 손을 내려보던 연우는 감각을 넓게 펼쳤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마나 반응이 나타났다. 이전에 센터장에게 불려간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차헌을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왜 그렇게 들락거리냐고 물어본다면 할 말이 없었다. 차헌은 계속 사실대로 말하자고 우기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믿어줄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나오지 마요.”

매달리는 차헌을 피해서 공간을 접은 연우는 그대로 훈련장을 빠져나왔다. 이대로 넋 놓고 있다가는 2주 뒤에 방문하는 라운드 길드장이 차헌을 홀랑 뽑아갈지도 모른다. 뭐라도 하기 위해서는 A 구역을 들락거릴 핑계가 필요한데….

“어, 거기! C급 에스퍼!”

앞길을 가로막는 나무 덩굴을 보던 연우가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땀에 흠뻑 젖은 에스퍼들이 손짓하고 있었다.

“심부름 온 거 맞죠? 가는 길에 이것도 좀 옮겨요.”

연우는 수리가 필요해 보이는 가방을 보다 손을 뻗었다. 뻗은 손 위로 훈련복과 가방이 쌓이기 시작했다.

“좌표가 어떻게 되나요?”

입고 있던 훈련복을 벗어 꾸러미 위에 올려둔 에스퍼가 좌표를 알려주자 연우의 손이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이건 직접 갖다 놓아요. 그럼.”

“아, 이것도요.”

이가 나간 단검을 건네주던 에스퍼는 꾸러미가 사라지며 드러난 연우의 사원증을 보고 입을 벌렸다.

“어….”

“다른 건 없나요?”

“어어. 없어요. 가봐요.”

살랑거리는 손짓에 몸을 돌린 연우의 귀에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미친. 저 사람 한연화 오빠잖아.”

“그래서? 그래봤자 C급이잖아.”

맞다. 연화의 오빠라고 받들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차피 C급이라며 무시하는 사람도 많았다. 치켜세워주는 차헌이 이상한 거지. 툭하면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올려보던 차헌 때문에 현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보급소로 향한 연우는 무기를 올려놓고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며 등장한 사람은 무척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연우야!”

“전도현 에스퍼.”

기억상으로는 3년, 실제로는 약 2개월 만에 만나는 사관학교 동기였다. 연우의 입술에 편안한 미소가 걸렸다.

“여긴 무슨 일이야, 가 아니라 에요?”

“아, 이거 심부름 왔습니다.”

엉망이 된 무기를 보던 전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여튼 곱게 사용하는 법이 없다며 혀를 찬 전도현은 시간을 확인하는 연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잘 됐다. 온 김에 이거 가져가.”

막힘없이 가방 고리를 해제한 전도현은 연우의 팔뚝에 새로운 보조 가방을 달아주었다.

“이번에 리아브 깃털이 좀 많이 들어와서, 남은 자투리로 만든 거니까 들고 가서 써. 인벤토리 여는 법은 알지?”

그 말에 깜짝 놀란 연우가 거절하려 했지만, 출입 금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며 전도현이 연우를 거침없이 밀어냈다. 학연 좋은 게 뭐냐며 활짝 웃던 전도현을 뒤로한 채 A 구역을 빠져나온 연우는 보조 가방을 내려보았다.

이전 생에서는 죽기 직전까지 기본으로 제공되는 물건만 사용했었는데….

가방 속을 확인한 연우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차헌의 미래가 변하는 것처럼 연우의 미래도 착실히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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