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무슨 문제 있습니까?]
직원의 물음에 컨테이너 안을 둘러보던 연우는 손을 들어 엑스자를 그렸다. 혹시나 그때 들었던 환청을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이전 삶에 대한 힌트를 좀 얻을 수 있을까, 싶어 느릿느릿 컨테이너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그 어떤 소득도 없었다.
문을 열고 빠져나온 연우는 쏟아지는 산소에 대비해 입을 틀어막았지만, 곧바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억지로 숨을 몰아쉬는 연우에게 이수빈이 물통을 건넸다.
“너랑 훈련하니까 아직도 사관학교에 있는 것 같아.”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하게 중얼거리던 이수빈은 파들거리는 연우 대신 물병을 열어 건넸다.
“좀 괜찮아?”
물을 마시다 말고 헛구역질하는 연우의 등을 두드린 이수빈은 퀭한 눈을 가리켰다. 빌어먹을 악몽 때문에 여전히 제대로 잔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걸어 다니는 좀비 같다면서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던 이수빈은 컨테이너를 빠져나오는 조희서를 노려보았다.
“팀원이 마나 멀미로 힘들어하는데 가이드는 가이딩을 할 생각도 없나 보네요?”
소리를 높여 빈정거리는 말에도 연우를 바라보는 조희서는 시선은 무감하기만 했다. 혐오에 가까운 시선을 보내던 조희서는 몸을 돌려 배재영을 찾았다.
“저거 언제 정신 차릴 거래?”
그런 조희서를 보며 혀를 차던 이수빈은 마시지 않고 물병만 들고 있는 연우의 손을 기울였다. 마나 포션을 얼마나 넣었는지 평소보다 맛이 더 역하게 느껴졌다. 도저히 못 먹겠다고 손짓하는데도 이수빈은 억지로 한 통을 비우게 만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휘둘러 작은 새를 소환했다.
물병을 두 발로 움켜쥔 새는 최동원에게 날아갔다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물병을 따서 벌컥벌컥 마시다가 헛구역질을 하는 최동원과 저 멀리 선 조희서를 번갈아 보던 이수빈은 들으란 듯 속삭였다.
“저 인간 나한테 가이딩 한 번도 안 해준 거 알아?”
연우도 마찬가지였다. 서유진과 훈련할 때는 가이딩 하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사관학교에서 볼 장 다 본 이수빈에게는 감히 가이딩을 받을 생각도 하지 말라는 듯, 첫날부터 코웃음부터 쳤다.
가이딩을 못 받아서인가, 쉽게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는 마나 코어를 쓸어내리던 연우는 새 물병을 집어 들어 물을 조금씩 빨아 마셨다.
미미한 두통과 함께 찾아온 마나 멀미를 가라앉히기 위해 연우는 물병 뚜껑을 쥔 채로 이능을 사용했다.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에 나타나야 할 뚜껑이 허공에서 떨어졌다. 그 광경에 연우는 한숨과 함께 뚜껑을 낚아챘다.
또다시 이능이 튀고 있었다.
뚜껑을 쥔 채 팔짱을 낀 연우는 바닥을 내려봤다. 왜 이능이 튀는 거지? 인과율의 부메랑이 연우의 이능을 앗아간 건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차헌을 만나기 전부터 이능이 튀고 있었다. 그럼 과거로 돌아온 거랑 연관이 있나…?
이런저런 가설을 세우며 끙끙거리고 있던 연우는 눈을 감고 나른한 숨을 흘렸다. 마나 포션의 효과가 인제야 나타나는지 지끈거리던 두통이 가라앉고 있었다.
“뭐해요?”
제 신발코를 톡, 건드리는 발을 본 연우는 멍한 눈동자를 움직였다. 대충 동여 묶은 신발 끈이 제일 먼저 보이고, 마찬가지로 엉망인 발목의 매듭, 비스듬하게 고정된 허벅지 벨트를 따라 시선을 옮겨가던 연우는 명치까지 내려온 지퍼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지퍼.”
그 말에 차헌이 순순히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며 연우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견학 가자길래 따라왔는데 형이 있을 줄은 몰랐… 형 얼굴이 왜 이래요?”
손을 뻗은 차헌은 연우의 눈 아래를 쓸어내렸다. 뭐가 묻은 줄 알았더니 다크서클이었다. 그런 차헌의 손에 잠시 기대고 있던 연우가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그대로 잠에 빠질 듯 몽롱한 연우의 눈을 보던 차헌은 조심스럽게 제 어깨를 내밀었다.
눈이 동그래진 채 그런 둘을 번갈아 보던 이수빈은 반쯤 잠이 들려는 연우를 흔들어 깨웠다.
“피곤한 건 알겠는데, 던전 마나는 배출하고 자.”
그 말에 연우가 눈을 겨우 뜨고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형. 일어나봐요. 뭐 배출하고 자라잖아요.”
자기 힘이 얼마나 센지 모르는 게 분명하다. 마구잡이로 흔드는 손에 목이 부러질 뻔한 연우는 목덜미를 받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뭐해야 하는데요?”
“네? 어? 네? 저요? 어… 말을 하거나 움직이면 되는데,”
“형. 일어나요. 말하라잖아요.”
이수빈의 말에 연우의 허리를 붙잡아 일으킨 차헌은 졸음에 취해 비틀거리는 연우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저건 뭐예요?”
컨테이너를 가리킨 차헌은 연우의 손을 잘게 흔들었다. 흐릿한 시야로 구조물을 확인한 연우가 들어가는 입구와 나오는 출구를 손짓했다.
“저 두 곳에 게이트와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 던전 마나를 채운 다음 던전의 압박감을 이겨낼 수 있을지 없을지 테스트하는 거예요.”
“하하. 맞습니다. 역시 한연우 에스퍼는 아는 게 많군요.”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에 차헌은 팔을 뻗어 연우를 숨겼다. 그런 차헌을 보던 A 구역 훈련소장은 안타까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연우 에스퍼는 C급인데도 벌써 이런 훈련을 하는데…. 우리 강차헌 에스퍼는 언제쯤 본격적인 훈련을 받게 될까요. 허허허….”
아래로 처진 눈썹과는 반대로 입술은 한쪽만 비스듬히 올라가 있어 걱정이 아니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C급도 하는데 S급인 너는 왜 못하냐는 뜻이 분명했다.
차헌의 등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연우는 언제 졸음에 취했냐는 듯 똘망똘망한 눈으로 A 구역 훈련소장을 올려보았다.
“강차헌 에스퍼는 아직 훈련 전인가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연우에 차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형이 왜 이러지? 나긋나긋한 말투는 똑같았지만 한 톤 높은 목소리 때문에, 좀… 가식, 아니, 평소와 달라 보였다.
“음. 우리 강차헌 에스퍼가 아직 각성한 지 얼마 안 돼서 말입니다. 그래도 보통 이쯤 되면 서서히 안정되던데….”
연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눈알이 삐었나. 차헌의 홍채는 이제 푸른빛이 도는 것도 모자라 은은한 하늘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마나 코어가 안정된 상태인 게 분명한데 훈련소장은 아직 차헌의 마나 코어가 미숙하다며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온 김에 한번 받아 보면 좋을 텐데, 이런 기회가 없는데, 너무 아쉽다며 훈련소장은 혼자서 중얼중얼거리고 있었다. 어이없는 소리를 내뱉는 그의 모습에 연우는 시선을 돌려 차헌을 바라봤다. 평소라면 뭐라고 했냐며 뚱하게 반응했을 차헌이 눈을 감은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뭔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모습에 훈련소장과 차헌을 바라보던 연우는 둘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훈련장을 설명 중이었는데, 마저 설명해도 될까요?”
잠시 연우를 내려보던 훈련소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연우는 차헌의 훈련복을 쥐고 걸음을 옮겼다. A 구역 훈련소장과 거리가 멀어지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차헌이 진절머리가 난다며 혀를 찼다.
“징그러워 죽겠어요. 저런다고 제가 센터랑 계약할 줄 아나.”
투덜거리는 차헌을 보던 연우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연우가 직원을 피해서 도망 다닐 때의 모습이었다.
“더러워서 진짜. 계약 안 할 거면 훈련장 사용료 내라고 협박하더니 오늘은 도발하는 거 봤어요? 분명 훈련받으면 이것도 해봐라, 저것도 해봐라, 그러다가 도장도 찍어보라면서 계약서 내밀걸요.”
천잰데?
차헌의 말에 연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센터의 방식이었다. 호의인 척 베풀어놓고 나중에는 배를 째라며 우기는 것. 연우가 능력이 있었다면 찢어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저게 뭐길래 사람들이 저러고 나오는 건데요? 게이트는 뭐고, 던전 마나는 뭐예요?”
차헌이 난간을 쥐고 구역질하는 에스퍼들을 가리키며 묻자 연우는 이마를 짚었다.
“아니, 알거든요? 아는데, 형이 뭐 어쩌고 하려면 말해야 한다면서요.”
거짓말. 다급한 변명을 무시한 연우는 쪼그려 앉아 물병으로 바닥을 문질렀다. 물병에 묻어 있던 물기가 바닥에 떨어지며 짙은 자국을 남겼다.
“이 물병이 아더라고 치면, 이 흔적들이 게이트예요.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흔적이 남듯, 아더가 지나간 자리에는 게이트가 남는 거죠.”
게이트 또한 아더의 한 부분이라, 게이트를 통해 아더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게 바로 던전이다. 아더가 어떤 존재인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던전의 종류는 다양했고, 등장하는 마수도 달랐다.
“근데 그걸 왜 토벌하는 거예요? 그냥 놔두면 안 돼요?”
“던전 브레이크는 알아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차헌의 표정에 방긋 웃은 연우는 물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더는 무한대의 마나를 생성한다고 하는데, 그런 아더의 마나를 받아먹으면서 살아가던 게이트들이 떨어져나온다면 배가 고프겠죠? 배가 고픈 게이트는 자연에서 생성되는 마나를 마구잡이로 집어먹게 되고, 그 때문에 주변이 황폐화해지죠. 그렇게 마나를 먹으면서 점점 자란 게이트가 품고 있던 던전보다 커지게 되면, 던전이 게이트 밖으로 빠져나오게 되는데 그게 바로 던전 브레이크예요. 그렇게 황폐해진 지역을 위험 구역이라고 부르고요.”
“그럼 큐브는 뭐예요?”
“위험 구역의 아지트라고 생각하면 돼요. 마나가 없는 곳에서는 가이드들이 활동하기 어려우니까 에스퍼들이 마나를 받으면서 휴식하는 곳이에요.”
차헌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우는 작게 한숨을 흘렸다. 진짜 나라도 센터랑 계약하기 싫겠다. 기본적으로 알려줘야 할 건 하나도 안 알려주면서 협박하고 조롱하는 곳이랑 누가 계약을 하겠냐고.
“아더는요?”
“아직 밝혀진 게 없어요.”
그 말에 손을 내려보던 차헌이 찝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은 알겠어요. 이해 안 가는 것도 몇 개 있긴 한데, 이해가 안 간다고 안 할 순 없는 거잖아요?”
이해가 안 간다고 안 할 수는 없는 거다.
그 말을 곱씹어보던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과거로 돌아왔는지, 이능이 왜 튀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연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다.
차헌이 뻗은 손을 잡고 일어나던 순간이었다. 눈썹을 찡그린 차헌이 연우의 손목을 가리켰다.
“근데, 아까부터 계속 거슬렸는데 형 손목에 그건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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