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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40화 (40/143)

40화

뭐가 묻었다든가, S급과 C급의 훈련복 디테일이 다르다든가, 그런 점을 지적할 줄 알았는데 차헌이 가리킨 건 손목에 걸려있던 체인 팔찌였다. 팔찌? 이게 왜?

연우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팔찌잖아요.”

“팔찌요? 그게 팔찌라고요?”

차헌이 손을 뻗어 연우의 손목을 건드리는 순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연우의 몸을 덮쳤다. 비명을 지른 연우가 손목을 감싸며 물러나자, 차헌 역시 손을 움켜쥐며 뒤로 물러났다.

“무슨 일 있어요?”

지켜보던 박서현이 다가와 물어도 연우와 차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 끝에 먼저 입을 뗀 건 연우였다.

“정, 정전기가 튀었나 보네요.”

“정전기요?”

눈썹을 찌푸린 차헌은 연우가 감싸고 있는 손목을 내려봤다.

그게 정전기였다고?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연우가 그러하듯 차헌도 뭐라 정의할 수 없는 감각을 느꼈기에 입을 다물었다.

“다들 정신이 좀 들었습니까?”

마지막 이능력자까지 테스트를 끝냈는지 C 구역 훈련소장이 이능력자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박서현이 가자는 듯 손짓하고, 연우가 뒤이어 발을 떼는 순간 차헌이 연우를 붙잡았다.

“오늘은 마치고 데리러 갈까요? 훈련장 돌려받았는데.”

그 말에 눈을 빛내고 있던 박서현이 의뭉스럽게 웃으며 최동원에게 달려갔다. 연우는 방긋방긋 웃으며 이쪽을 보는 둘을 의아하게 쳐다보며 차헌에게 물었다.

“돌려주던가요?”

“네. 어이가 없어서, 나가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는 제발 훈련하러 오라고 빌던데요.”

라운드 길드장의 방문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차헌이 계약할 모습이 없어 보이자 센터는 나름대로 강수를 둔 모양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차헌이었다. 계약할 마음이 없다면 나가라는 말에 차헌은 옳다구나 몸만 빠져나왔고, 그대로 숙소에서 칩거했다.

연우에게 달려와 어떡하면 좋냐며 발을 동동거리는 모습에 어찌나 열이 뻗치던지. 이런저런 교육비나 피해보상금을 청구하면 돌아오지 않을까요? 라는 말에 웃음도 안 나왔었다. 부센터장이라는 체면이 있을 테니 싹싹 빌지는 못할 테니, 훈련장을 돌려주고 앞으로 교육에 힘쓰겠다는 말로 회유해보라고 하자 부센터장은 탐탁잖은 표정을 지었다. 일단 알겠다며 돌아가는 부센터장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얼마나 쉬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며칠간 차헌을 보지 못했고, 연우의 이능은 날이 갈수록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차헌이 센터를 나가기로 마음먹을수록 연우의 이능이 튀는 것 같았다.

C 구역으로 돌아가던 연우는 U를 거꾸로 엎어놓은 듯한 최동원과 박서현의 눈을 보며 떨떠름하게 웃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우리 팀 전부 시험에 통과했잖습니까. 보기 좋습니다.”

“그러니까요. 참 좋을 때죠.”

벙글벙글 웃던 둘은 다가오는 인기척에 표정을 굳혔다. 정은영과 그의 팀원들이 들으란 듯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런 훈련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내정자가 정해진 거 아니에요?”

“제 말이요. 뭐, 자신의 능력으로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끝을 흐린 정은영은 연우를 내려보다가 픽, 웃었다. 그 모습에 박서현이 발끈하여 튀어 나갈 뻔했지만, 연우가 이를 막았다. 박서현은 웃음을 터트리면서 걸어가는 정은영을 노려보았다. 화도 안 나냐는 최동원의 말에 연우는 입꼬리를 올려 방긋 웃었다.

저런 도발에 넘어가 화를 내봤자 한연화를 등에 업고 설친다는 말만 들을 뿐이다. 날뛰는 감정을 억누른 연우는 훈련장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수고하셨고… 뭐, 따로 말씀 안 드려도 되겠죠?”

이수빈의 말에 쓰게 웃은 박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 첫날부터 이수빈은 조희서와 같은 팀이 될 생각이 없다며 훈련을 거부했고, 그렇게 제대로 된 훈련 한 번 못하고 일주일을 보내야 했다.

“아니, 솔직히 조희서 가이드 때문에 이게 몇 번째입니까?”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않고 퇴근한 조희서 때문에 쌓여있던 불만이 터져 나온 최동원의 주변으로 불투명한 막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손끝을 튕겨 최동원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휘젓는 박서현 역시 표정이 좋지 못했다.

“일단… 다음 주에 마저 얘기해보도록 합시다. 던전에 들어가면 상황이 좀 바뀌겠죠.”

설마 그때도 가이딩을 안 해주겠냐며 자조적으로 웃는 팀원들에게 대충 말장단을 맞추고 있자 멀찍이 서 있던 이수빈이 연우에게 다가왔다.

“훈련 끝났지? 건이랑 사격 연습하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

“사격?”

“음? 너네랑 우리랑 스케줄이 다른가? 다음 주에 사격 시험 있잖아.”

그 말에 기억을 더듬어보던 연우는 눈썹을 긁적였다. C 구역에서 사격 훈련은 이름뿐인 훈련이었다. 다른 구역과 달리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라 딱히 사격 시험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거절했는데 아쉽다는 듯 입을 삐죽이던 이수빈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작게 속삭였다.

“가방 말인데, 도현이 만나고 왔어?”

연우 역시 그렇다고 속삭이자, 가방을 살펴보던 이수빈은 작게 감탄했다. 어쩐지 도현이가 만든 티가 나더라면서, 이수빈은 작게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현이가 여기 올 일이 뭐가 있어? 아, A 구역에 심부름 갔다가 만난 거야?”

다른 경로가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의심치 않는 이수빈을 보던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C급이 A 구역에 출입하는 이유가 심부름 말곤 없긴 하지….

차헌의 미래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뭐라도 하나 더 가르쳐줘야 할 것 같은데, A 구역에 출입할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연우가 차헌과 안면이 있다는 걸 아는 이수빈도 네가 왜 A 구역에 가냐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A 구역 사람들은 오죽할까.

연우는 던전 마나를 배출하기 위해 훈련장을 도는 이능력자들과 함께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발밑에서 피어난 얼음꽃을 보다 걸음을 멈췄다.

벌써 이렇게 됐나.

시간을 확인한 연우는 쪼그려 앉아 얼음꽃을 꺾었다. 이렇게 이능을 사용하는 걸 보면 혼자서 연습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아직도 연우를 찾는 차헌이 싫지는 않았다. 이대로 센터랑 계약을 안 할까 봐 걱정이었지.

짐을 챙겨 훈련장을 나간 연우는 직원들과 대치하고 있는 차헌에게 손을 흔들었다. 차헌이 센터를 나간다면 이런 걸 해줄 사람도 없겠지. 한숨을 삼키던 연우의 눈에 반창고가 보였다. 차헌의 볼에 붙어있는 반창고를 보던 연우는 치료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 이거. 치료받고 온 거예요.”

“근데 반창고는 왜요? 안 불편해요?”

연우의 말에 반창고가 붙어있는 볼을 더듬어보던 차헌이 혀를 쳤다.

“다쳤다는 티를 내는 거예요. A 구역 치료계한테 치료받기 싫어서 여기에서 치료받으니까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치료하지 않아도 상처가 사라지는 걸 보니 치유력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지랄하는 거 있죠? 그래서 그냥 다쳤다고 붙여두는 거예요.”

“뭐라고요? 누가요? 그때 그 사람이에요? S급이면 상처 낫는다고 한 사람?”

차헌은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듯 입을 꽉 다물었다. 헛웃음을 흘리던 연우는 A 구역으로 걸어가는 차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대체 쟤한테 말도 안 되는 약을 파는 인간이 누구지? S급이 상처 치유 능력이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S급이라고 상처가 저절로 낫는다면, 연화가 다쳤다는 이유로 제 발로….

속으로 혀를 차던 연우는 끼잉, 하고 울리는 이명에 귀를 틀어막았다. 시야가 까맣게 물들고, 그 위로 글자가 하나둘 떠올랐다.

[강차헌은 피로 물들어 붉게 변해버린 주변을 둘러보다 시선을 내렸다. 동상과 상처 때문에 넝마가 된 손바닥 너머로 길게 늘어진 드래곤의 혀가 보였다. 간신히 숨만 쉬고 있던 드래곤은 강차헌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지긋지긋한 싸움의 끝을,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가늘게 뜨인 황금빛 눈동자에서 서서히 생명의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대로 바로 목숨을 끊어놓아야 한다는 건 알지만….

차헌은 드래곤의 역린에 꽂혀있는 수많은 창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왜 자신을 죽이지 않냐고 물어보는 듯 드래곤의 긴 신음이 들려왔다.

숨통을 끊는 건 나중이다. 드래곤이 죽는 순간 게이트가 열리고 후발대가 들어올 것이다. 차헌이 아는 그들이라면 이능력자들이 얼마나 죽었는지, 누가 어떤 희생을 했는지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드래곤의 시체만 수습해 던전을 빠져나갈 것이고, 그렇다면 죽은 사람들은 던전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그대로 잊히겠지.

드래곤 주변에 얼음벽을 세운 차헌은 힘겹게 발걸음을 떼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마나 코어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차헌은 묵묵히 걸어왔던 길을 향해 돌아갔다.

잠시 후, 드래곤의 주변에 시체들이 정렬되었다. 마지막으로 수습한 시체를 내려보던 차헌은 차분히 숫자를 헤아렸다. 그러나 어느 길드에서 몇 명이 참여한다는 기본적인 작전도 듣지 못한 차헌은 총 몇 명이 희생되었는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는 그 말에 따졌더라면 뭐가 달라졌을까. 내가 저 사람들을 지킬 수 있었을까.

드래곤 앞에 선 차헌은 게이트를 생성하기 위해 창을 만들었다. 눈알에 꽂힌 작은 단검 때문에 편히 눈을 감지 못한 드래곤은 허공을 바라보며 느리게 숨을 몰아쉬었다.

고개를 돌린 강차헌은 ——— 를 바라봤다. 드래곤의 눈을 뭉개버린 건 저 사람이었다. 공격계라고 칭송받은 사람은 자신이었지만, 막상 드래곤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힌 사람은 ———였다.]

한참 후에나 숨을 토해낸 연우는 입을 틀어막았다.

목덜미가 서늘해지며 온몸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두통에 헐떡거리던 연우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형!”

차헌이 쓰러지는 연우를 부축하려 했지만 짝, 하고 밀어내는 손에 당황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눈물 때문에 부풀어 오른 연우의 눈동자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그래서, 그래서 내가….

숨소리가 거칠어지며 이명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발끝이 타오르는 환상에서 도망치려 발버둥을 치던 연우는 그대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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