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헉!”
거친 숨을 토하며 일어난 연우는 눈을 깜박여 뿌연 시야를 정리했다. 속눈썹에 뭐가 묻었는지 걸리적거려 닦아내자 손끝에 눈물방울이 딸려왔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대충 닦아내고 있자 옆에서 손이 쑥 다가왔다.
“이걸로 닦아요.”
차헌이었다. 멍하니 바라보다 눈을 깜빡이니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헌이 아직도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 연우 대신 눈물을 꾹꾹 닦아주었다. 서툴지만 부드러운 손짓에 졸음이 몰려왔다. 그대로 수마에 빠지기 직전, 낯선 천장을 본 연우는 몸을 일으켰다.
“여기, 큼, 여기가 어디예요?”
잔뜩 쉰 목소리에 당황한 연우가 목을 감싸 쥐었다. 목이 말랐다. 견디기 힘든 갈증에 혀끝이 바삭거리는 기분이었다.
“…여기 치료실이요. 형 오늘 그… 뭐… 아무튼, 그 훈련한 거 때문에 그래요?”
차헌이 묻는 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기분에 목을 감싸 쥐고 색색거리던 연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요? 목말라요?”
연우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벌떡 일어난 차헌이 치료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런 차헌의 뒷모습을 보던 연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장을 올려보았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강차헌이랑 무슨 얘기를 나눴던 건 기억이 나는데….
“흐….”
머리를 감싸 쥔 연우는 그대로 웅크렸다. 마치 머릿속을 송곳으로 헤집는 것처럼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바르작거리던 연우는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했다. 용광로 속에 갇힌 것처럼 식은땀이 흐르다가, 얼음물에 빠진 듯이 온몸이 떨리기를 반복하던 그때였다.
팅.
언젠가 들어본 소리가 연우의 귀를 파고들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연우는 커튼을 젖혔다.
소리는 침대 옆 협탁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자그만 협탁 위에는 투명한 물병과 컵이 놓여 있었고, 눈에 익은 보석뱀이 물병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아니, 마수 연구소는 마수를 어떻게 관리하는 거야?
눈썹을 있는 대로 찌푸린 연우는 허벅지 벨트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오늘로 벌써 두 번째였다. 이렇게 빠져나올 때까지 관리 안 한 건 자기들이면서, 죽이면 죽였다고 난리 치겠지. 어떻게 생포할지 고민하는 동안 보석뱀은 입을 살짝 벌린 채 물병을 맴돌다가, 톡톡 치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목…이 마른 건가? 물이 마시고 싶은 건가?
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목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물병을 집어 올리니, 인기척에 놀란 보석뱀은 컵 뒤에 몸을 숨겼다. 컵도 필요 없었다. 병 채로 물을 마시던 연우는 이쪽을 기웃거리는 보석뱀을 보다가 쟁반에 물을 쪼르륵, 따랐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기어 나온 보석뱀이 급히 목을 축였다. 물을 마시다가, 쟁반에 물을 따라주기를 반복하고 있자 문이 열리며 차헌이 들어왔다.
“뭐야. 여기 물 있었어요?”
어디서 들고 온 건지 차헌의 양손 가득 물병이 들려 있었다. 차헌은 괜히 나갔다 왔다며 입을 삐죽였지만, 물 한 통으로 해소될 갈증이 아니라 기쁘게 물병을 받아들었다.
목구멍까지 물이 차올랐음에도 갈증이 해결되지 않아 물을 조금씩 빨아 마시고 있자, 차헌이 손을 뻗어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볼에 붙은 머리카락까지 떼어준 차헌을 보던 연우는 협탁을 노려보았다.
“왜요?”
또 없어졌어. 원하는 걸 얻었는지 냉큼 자취를 감춘 보석뱀을 찾고 있는데, 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일어났어요?”
“아! 옷 갈아입고 들어오라고요!”
“아니! 여유분이 여기 있다니까요?”
자신의 경고를 무심히 넘겨버린 치료계가 치료실로 들어오자 차헌이 손을 들어 연우의 눈을 가렸다. 피에 흠뻑 젖은 가운을 벗어 던진 치료계가 새 가운으로 갈아입고 나서야 차헌의 손이 떨어졌다.
“자, 어디 한 번 봅시다.”
매캐한 연기 냄새와 함께 다가온 치료계는 연우의 손을 잡고 이능을 사용했다. 맞닿은 손에서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간 마나에 찬물이라도 맞은 듯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음? 혹시 마나 코어에 문제 있어요?”
치료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말에 연우는 곧장 마나 코어를 살폈다. 문제랄 게…없는데? 연우가 고개를 젓자 잠시 미간을 찌푸린 치료계는 그럼, 뭐. 하며 손을 놓았다.
“오늘 가상 던전 훈련했다면서요? 마나 멀미인 것 같으니까 많이 걷고 많이 떠드세요. 괜찮으시면 그냥 가셔도 되고… 아, 갈 때 칼 챙겨 가시고요.”
치료계는 침대에 올려진 단검을 손짓했다. 단검을 챙기던 연우는 마수 연구소에서 탈출한 보석뱀이 있던데 어떻게 할지 물었다. 치료계는 대답 대신 입술을 삐뚜름하게 비틀며 웃었다.
“내버려 둬요. 알려줘봤자 자기들이 관리 못 해서 빠져나온 건데 우리 보고 그것도 안 잡고 뭐 했냐면서 눈치 주다가 은근슬쩍 책임만 떠넘길걸요.”
연우가 조심스럽게 동의하자 치료계는 그렇죠?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끝난 거냐며 다가온 차헌은 연우의 이마를 짚으며 안색을 살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뭐 했길래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쓰러져요?”
“쓰러지기만 하면 다행일걸요.”
치료계의 말에 차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던전 마나 때문에 발작 직전까지 가는 에스퍼들도 많아요. 멀미라고 우습게 보지 말고 나가서 걸어요.”
축객령에 단검을 챙기는 연우를 일으킨 차헌은 출구 쪽으로 이끌었다. 이쪽을 내려보는 표정이 심상찮은 게 당장이라도 뒤에서 채찍질하며 걸으라고 재촉할 기세였다.
“아. 강차헌 에스퍼.”
치료실을 막 나서려는 순간 차헌을 부른 치료계는 이마 쪽을 손짓했다.
“그거 꼭 확인해요. 이능으로 화상 입은 거라 잘못하면 덧나요.”
화상?
연우는 차헌의 흉터를 올려보다, 문을 닫는 차헌을 붙잡았다.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이상원 에스퍼예요?”
“네. 네? 어? 네.”
대답하던 차헌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이상원인 거 어떻게 알았어요? 그 새끼가 형도 팼어요?”
“아뇨, 아뇨.”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은 차헌을 붙잡은 연우는 이마를 짚었다. 때린 적은 없지만…. 혀끝을 깨문 연우는 발끝을 내려보았다.
아마도 자신은 이상원 때문에 죽었을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드래곤의 브레스 때문이었지만, 드래곤이 나올 정도로 높은 등급의 던전은 센터 혼자 토벌하지 못한다. 적어도 서너 군데의 길드와 연합팀을 만들었을 것이고, 불 속성 드래곤이었으니 이상원이 연합팀 대장이 되었겠지. 아니면 물 속성의 능력을 가진 무영 길드장이 대장을 맡거나.
쪽수로 밀어붙이는 작전이 실패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토벌대가 전멸해도 그 뒤를 따르는 공격대가 있기 때문에 전멸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생존자가 차헌뿐이었으니, 연합팀의 작전이 실패했다는 뜻이겠지.
작전이 실패했다는 건 중간에 누가 배신했거나, 아이템에 대한 욕심을 부렸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는 이상원일 확률이 높았고.
솟아오르는 얼음을 보던 연우는 손을 뻗어, 얼음 소용돌이 한가운데 선 차헌을 끌어당겼다. 아무 말 없이 바닥만 노려보는 차헌을 데리고 어디를 갈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A 구역으로 향하는 포탈 앞에 서자 씩씩거리고 있던 차헌이 보안을 해제했다.
“가요.”
차헌의 손을 잡고 A 구역의 통로를 걷던 연우의 머릿속에 스쳐 가는 의문이 있었다.
“아까, 저 치료실로 데려간 거 강차헌 에스퍼예요?”
“네.”
“저 어쩌다가 쓰러진 거예요?”
연우의 물음에 차헌의 입이 딱 다물렸다.
“저도 몰라요.”
차헌의 걸음이 갑자기 빨리하자 연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지? 왜 저러지? 눈을 깜박이던 연우가 공간을 접어 다가갔다. 그러자 차헌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아! 그 훈련받고 나면 이능 쓰지 말라는 거 못 들었어요?”
듣…긴 들었다. 하지만 마나 코어에 딱히 이렇다 할 문제도 없었고, 마나 멀미도 느껴지지 않으니 이 정도 이능은 사용해도 괜찮겠지, 싶었다. 실제로도 몇 걸음 이동했을 뿐이었고.
마나 멀미 때문에 쓰러진 건가? 손을 내려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연우를 내려보던 차헌은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연우가 쓰러지기 직전까지 저를 노려보기에 크게 잘못한 게 있는 줄 알았다. 처음으로 자신을 밀어내던 손짓에 놀라 심장이 쿵, 내려앉았었다.
곧이어 연우가 갑자기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그때는 정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었다. 연우를 안고 치료실로 향하는 내내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 기분이었다.
마나 멀미로 인해 S급 마나에 거부감을 느껴서 그랬을 거라는 치료계의 설명에도 내내 불안하기만 했다. 형이 또 밀어낼까 봐.
하지만 눈을 뜬 연우는 아무런 거부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차헌과 함께 A 구역으로 오기까지 했다.
그러니 안심이 되어야 하는데, 안심이 되지 않았다. 문을 바라보던 차헌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발아래에서 얼음꽃이 피어올랐다. 장미 덩굴이 문고리를 타고 올라가던 순간,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차헌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아, 안 움직이려고 했는데. 미안합니다.”
종아리를 타고 오르는 얼음꽃을 털어내려다가 발아래에 있던 얼음꽃을 밟아 깨트린 연우는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했다. 방 안 가득 피어난 얼음꽃 때문에 좌표를 잡을 수도 없어 조심조심 걸어야 했다. 그런 연우를 보던 차헌이 얼음을 불러들였다.
“형도 앉아요.”
훈련장 한쪽에 놓인 의자를 가리킨 차헌은 땅바닥에 주저앉다가 있는 대로 인상을 썼다. 등허리 부분이 불편했는지 차헌은 등 쪽을 더듬다 결국 욕까지 씹어뱉었다.
“어디 불편해요?”
“어제 대련하다가 낙법을 잘못 써서요.”
“저런. 떨어질 때 다리 들어 올리라니까.”
그 말에 더욱 험악하게 인상을 쓰던 차헌이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물었다.
“이상원이 형한테도 그랬어요?”
“아뇨. 그건 아니고,”
“그럼 됐어요.”
표정을 갈무리한 차헌은 무릎에 팔을 올려둔 채로 턱을 괴며 평온한 척했지만, 사방에서 얼음이 휘날리고 있었다. 저것도 다 마나 낭비인데. 가늘게 뜬 연우의 눈을 어떻게 오해했는지는 몰라도 차헌은 귀를 빨갛게 물들였다. 그리고 날리는 얼음 결정이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하. 제가 진짜 쪽팔려서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차헌이 입을 열던 순간,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감각을 넓게 펼친 연우는 차헌보다 강렬하게 느껴지는 마나 반응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 지가 호랑이야, 뭐야.”
차헌이 작게 투덜거리며 코로 한숨을 쉬었다. 휴게실 안쪽을 손짓하는 차헌을 향해 연우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일반인도 아니고 상대는 S급 에스퍼다. 몸을 숨겨봤자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대놓고 한숨을 푹푹 쉬며 걸어간 차헌이 문을 열었다. 열린 문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강차헌 에스퍼. 없는 줄 알았잖아요.”
이상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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