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어? 한연우 에스퍼!”
이상원은 깜짝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사르르 웃으며 연우에게 손짓했다. 그 모습에 연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체리 색 눈동자를 보던 연우는 허벅지를 더듬었다. 손끝에 단검이 걸리자 연우의 심장이 아프게 뛰기 시작했다. 설명할 수 없는 분노로 속이 자글자글 끓고 있었다.
…너 때문에.
연우가 의자에서 일어나던 순간, 그 앞을 막아선 차헌이 뒤로 손을 뻗었다. 얼른 잡으라는 듯 재촉하는 손 위에 손을 올려놓자, 차헌은 재빨리 연우를 제 뒤로 밀어 넣은 뒤 이상원을 향해 눈꼬리를 세웠다.
“무슨 일인데요.”
“아, 이거요. 아까 대련하다가 제가 실수한 것 때문에요. 확실히 같은 급 에스퍼랑 붙으니까 호승심이 어찌나 끓어 넘치던지.”
미안해요? 방긋 웃으며 사과한 이상원은 자그만 포션 병을 내밀었다.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병을 노려보던 차헌이 집어 올리자 어떻게 바르는지 설명해주던 이상원은 옆으로 이동해 연우와 눈을 맞췄다.
“그나저나, 한연우 에스퍼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몰랐던 척하기는. 센터장도 연우가 A 구역을 오가는 걸 아는데 이상원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차헌의 이마에 생긴 화상과 포션 병을 보던 연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강차헌은 그냥 연막이었구나. 나를 만나기 위해 강차헌을 다치게 한 거였어. 깨닫는 순간 적개심이 끓어 넘쳤다.
“마침 잘됐다. 이번에 리아브 새를 잡았는데, 한연화 에스퍼가 그렇게 좋아한다면서요? 좀 한가해지면 다 같이 식사라도 하는 건 어때요?”
권유에 크게 숨을 몰아쉰 연우가 곤란한 듯 웃었다.
“이번에 발견된 던전 후발대 선발을 위해 가상 던전 훈련 중이라서요. 아시겠지만, 마나 멀미 때문에 S급 마나가 조금….”
거북하게 느껴진다는 말에 차헌이 반걸음 물러났다. 차헌은 바로 연우의 안색을 살폈다. 그런 둘을 바라보던 이상원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나저나, 아까도 물어봤는데. 여긴 어쩐 일이에요?”
연우의 사원증을 턱 끝으로 가리킨 이상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강차헌 에스퍼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S급 마나는 거북하다면서….”
삐딱하게 고개를 비튼 채로 차헌과 연우에게 시선을 주던 이상원은 입술만 끌어올리며 웃었다. 그 모습에 차헌이 다시 팔을 뻗어 연우를 제 뒤로 밀어 넣었다.
“이거 주려고 온 거면 이만 가죠?”
“에이. 그렇게 쫓아내면 섭섭하죠. 오늘 다쳐서 기분이 상한 거면… 뭐, 저라고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닌데 눈에 힘 좀 풀죠?”
어깨를 으쓱거린 이상원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이어갔다.
“훈련소장님은 당장 다음 던전에 투입할 수 있도록 실력을 쌓으라고 닦달하지, 센터장님은 귀한 에스퍼 다치면 안 된다고 만류하지. 거기서 제가 뭘 어쩌겠어요. 가르치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그리고 강차헌 에스퍼가 먼저 알려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사람 얼굴을 샌드백으로 쓰냐.
이상원의 말만 들으면 후임을 다정하게 챙기는 선임 그 자체였지만, 실제로 차헌이 배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뭐? 가르치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C 구역까지 찾아와서 마나 흐름을 읽어보려 애쓰던 애 앞에서 할 말이냐,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알았으니까 문 닫게 비키세요.”
울컥한 연우와 달리 차헌은 담담한 목소리로 문을 향해 손짓했다. 축객령에 들으란 듯 한숨을 푹, 쉰 이상원이 연우에게 손을 뻗었다.
“C 구역으로 가실 거죠? 모셔다드릴게요.”
“형이 왜 당신이랑,”
“형?”
기겁하는 차헌의 목소리에 이상원이 체리 색 눈동자를 반짝, 빛냈다.
“강차헌 에스퍼. 이능력자끼리는 상호 간의 존중으로 이름 끝에 에스퍼를 붙여 불러야 한다는 것도 안 배웠나요?”
대체…. 중얼거리며 차헌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이상원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다른 구역은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 출입이 제한되어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죠? 설마 그것도 모를 리는 없을 건데…. 한연우 에스퍼는 무슨 생각으로 초대한 거예요?”
누가 들어도 건수를 잡아서 신난 목소리였다. 무슨 상관이냐며 따질 줄 알았던 차헌이 얌전히 듣고만 있자 연우는 기분이 이상했다. 나한테는 따박따박 잘만 따지더니?
혀끝을 깨문 연우는 앞을 막고 있는 차헌의 옆구리를 손으로 밀었다. 힘으로 버티려던 차헌의 뒤에서 빠져나온 연우는 눈썹을 늘어트리며 웃었다.
“으음…. 용건은 특별히 없는데, 차헌이랑 만나면 시선이 몰려서 좀 부담스럽더라고요. 시선을 피하다 피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금방 나가겠습니다.”
“음. 아니에요. 한연우 에스퍼한테 눈치 준 건 아니고….”
손을 휘젓던 이상원은 음?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얼굴에 주먹을 날려버리고 싶은 욕망을 누른 연우는 차헌을 올려보며 살짝 웃었다. 입술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편안한 미소였다. 그 미소에 차헌은 이 형이 왜 이러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쯧. 속으로 혀를 찬 연우는 차헌의 훈련복을 잡아당겨 제 옆에 서게 했다. 정말 아쉽게도 옆에 선 사람은 연화가 아니었다. 연화는 사전 모의 없이도 손발이 딱딱 맞아 신호를 보낼 필요도 없었는데. 차헌은 손발을 맞춰주기는커녕 얼빠진 표정으로 연우를 내려보고 있었다.
왜 이름으로 부르냐고 따지지 않는 게 어디냐. 한숨을 삼킨 연우는 시선을 옮겨 이상원을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이상원이 진하게 웃었다.
“두 분이 꽤 친하신가 봐요?”
“어렸을 때 알던 동생이라서요. 센터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람 인연이라는 게 정말 모를 일이네요.”
“그래요? 그때는 강차헌 에스퍼가 각성할 줄 몰랐나 보네요?”
“아, 연화가 그때….”
말을 흐린 연우는 침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부모님이 돈을 벌어보겠다고 연화를 집에 가뒀다고 사실은 연우와 연화의 비밀이었다. 각성 사실을 숨겼다고 에스퍼 법으로 처벌받을 것이 뻔했고, 연화가 S급으로 각성했으니 수위는 더 높아졌겠지.
그래도 부모라고 연우와 연화는 사실을 알리는 대신 거짓을 택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던 연화라 각성열을 앓았을 때도 그저 몸이 약해서 그런 줄 알았다고.
정신계 에스퍼는 다른 계열 에스퍼보다 각성한 티가 안 나서 거짓말이 먹혀들었다. 사실 무슨 말을 하든 다 믿어줬겠지. 자기들이 의심하면 어쩔 건데. 그 귀하다는 S급, 그것도 미래를 보는 에스퍼가 그렇다는데 믿어줘야지.
어쨌든, 연화가 에스퍼로 판정받자마자 협회는 물론 온갖 길드와 일반인까지 달려들어 미래를 캐내려 했고, 연우는 연화의 손을 잡고 도망 다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지 한 자락이라도 얻어보겠다고 접근했고, 지금처럼 정보를 털어보려 연우를 떠보곤 했었다.
그때마다 연우는 눈을 내리깔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연우가 눈물을 뚝뚝 흘리든 말든 정보를 알아내려는 악독한 것들은 어디를 가나 존재했지만, 보통은 미안하다며 물러섰다.
그런 자신에게 연우가 고마움을 느낄 거라고 기대하겠지만,
“일단 알겠습니다. 훈련 끝나고 얘기하죠. 그럼 편히 있다 가세요.”
글쎄.
이상원이 다정한 표정을 지은 채로 훈련장을 빠져나가는 걸 보던 연우는 속으로 엿을 날렸다. 살면서 너 같은 애를 한두 명 본 줄 아냐. 저렇게 수가 뻔히 보이는 속셈에 넘어가는 사람이 바보지.
코웃음을 친 연우는 옆을 돌아봤다가 깜짝 놀랐다. 연우는 바짝 다가온 차헌을 밀어내다 말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왜 그래요?”
아까 그 모습 그대로 얼이 빠져있던 차헌은 마른기침하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아니, 그냥 형이 이름 부른 건 처음이라서요.”
“아. 기분 나빴다면 죄송해요.”
연우의 사과에 차헌은 허, 짧은 숨을 토해내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형이랑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불쾌하셨다면 정말 죄,”
“불쾌하기는 무슨. 싫다면 형이 싫었겠죠. 우리가 무슨 사이냐며 썩은 표정으로 도망갈 땐 언제고. 그리고 이 정도면 친한 거 아니에요? 형은 안 친한 사람 훈련장에 막 놀러 가고 그래요?”
다다다 쏟아붓는 차헌의 말에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연우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자기 나름대로 친하다고 생각해서 도와줬을 텐데 거기에 딱 잘라서 우리가 무슨 사이냐고 했던 건, 그래. 연우도 반성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교류가 있으니까 이상원한테 친하다고 거짓말한 거지, 그때는 정말 센터 소속 에스퍼라는 공통점 말고는 아무런 교집합도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저 새끼한테 그렇게 웃어주지 마요. 저거 생긴 것만 반들반들하지, 완전 개싸이코거든요?”
주먹을 쥐고 파들파들 떨던 차헌은 손을 들었다, 놨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말을 이었다.
이상원 저 새끼는 툭하면 대련하자면서 시비를 건단다. 이게 다 마나의 흐름을 공부하는 거라면서 마나를 담아 툭툭 건드리는데 너무 빨라서 반격도 할 수 없다고 했다.
대체 뭘 어떻게 하는지는 몰라도 그냥 툭툭 건드리는 것 같은데 맞아보면 더럽게 아프다고.
맞으면서 배워야 한다며 사람을 후려 까는데, 아프다는 티를 내면 주변에서 S급 맷집이 저게 뭐냐고 혀를 차고, 되받아치려고 해도 얼음을 불로 녹여버리니 건드릴 수도 없어서 더 열받는단다.
정신계 에스퍼 중에 윤석현이라고 있는데 그 새끼는 벽을 보고 집중하고 있으면 마나를 느낄 수 있다며 몇 시간 동안 벽만 보게 했단다. 안 느껴진다고 대답하면 네가 집중을 제대로 안 해서 그런 거라며 그렇게 꼽을 줬다고 했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미친 새끼는 S급이면 치료받을 필요도 없다더니 나중에는 사람을 고치는 게 아니라 지져놓았다면서 상처가 있던 부위를 손으로 짚었다. 아파서 어쩔 줄 몰라 하면 상처가 낫는데 어떻게 안 아프겠냐고, 아프기 싫으면 재생능력을 성장시키라는 조언을 했단다.
그것들뿐만 아니라 A 구역 전부 하나 같이 자신이 실수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몰려들어 비웃었다고 했다.
“미숙하니까 봐주자, 우리가 봐주자, 그러면서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진정하세요.”
연우는 입이 닳도록 부르짖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하며 솟아난 얼음을 칼로 내려쳤다. 옆에 소복이 쌓인 얼음기둥을 보던 차헌은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목이 마르다며 휴게실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랬던 거였군. 치료를 두려워하던 모습과 둥지가 생기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벽을 바라보던 모습을 떠올린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귀를 문질렀다. 귀가 터지는 줄 알았다.
귀에서 피가 난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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