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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43화 (43/143)

43화

귀를 문지르던 연우는 계획을 다시 정리했다.

이미 미래는 뒤틀렸고, 연우가 조금이라도 오래 살기 위해서는 차헌이 정해진 미래대로 센터장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치워야 할 가장 큰 방해물이 이상원이었다. 뛰어난 능력을 갖춘 것도 모자라 청하 길드의 보호를 받는 이상원을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책의 주인공인 차헌의 미래를 바꿔야 했다.

연우의 미래를 대가로 이상원의 미래를 바꾼다고 해도, 강차헌이 나서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었다. 센터와 계약하지 않고 나가버리면 연우의 계획이 모조리 수포가 될 테니까.

하지만 차헌이 이상원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 적개심을 자극해 이상원과의 대결 구도로 센터에 잡아두려는 계획을 짰었다. 이상원을 향한 태도를 보아하니 적개심을 어떻게 자극할지 고민을 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센터장에 대한 불만도 상당해 보였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둘 다 쓸어버리고 차헌이 최연소 센터장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미래를 바꾼 대가로 인과율의 부메랑을 맞더라도, 적어도 연화가 성년이 된 건 보고 죽을 수 있겠지.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돼요?”

잠시 기다렸지만,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아니, 물만 마시고 나오겠다더니…. 얼음을 녹여서 마시고 나오는 건가. 차헌이 휴게실로 들어간 이후로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한참 불만을 쏟아낼 때는 언제고, 뒤늦게 민망해진 건가? 작게 웃은 연우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공간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연우에게 문을 닫고 숨는 건 큰 의미가 없지만, 그 사실을 지적해주기보다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게 더 유의미할 것 같았다.

문을 등지고 선 연우는 넓은 훈련장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훈련 도구를 둘러보던 연우는 반대편의 과녁을 응시했다.

강차헌. 뛰어난 집중력과 실력으로 어렸을 때부터 각종 상을 휩쓴 국가대표가 될 뻔한 인재. 그것도 모자라 차헌은 S급 에스퍼로 각성까지 했다. A 구역 사람들은 차헌에게 제 자리를 빼앗길까 봐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강차헌이 실력을 발휘할 수 없도록, 기를 쓰고 눌렀겠지.

이능을 다루는 법은 물론이고 무기를 다루는 법도 안 가르쳐줬다고 했으니….

연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활과 화살을 한쪽에 정리했다. 공격계 에스퍼는 각종 무기를 다뤄본 다음에 자신의 이능에 맞는 무기를 고를 수 있었다. C 구역도 이능력자에게 무기를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주는데, 활만 가져다 놓은 속셈이 뻔했다. 차헌의 성장을 막겠다는 거지. 화살을 치우기 위해 허리를 굽히던 연우는 차헌이 두고 간 포션 병을 살폈다.

지금쯤 이상원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을 느끼고 있겠지. 연우가 한연화의 오빠가 아니었다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끌어냈을 것이다.

연우가 강차헌의 훈련장에 방문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도 이상원은 오늘처럼 찾아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연우는 C급이었으니까. 차헌이 마나를 다루거나, 제게 반격해도 연우를 의심하지 못했을 거다. C급인 연우가 S급인 차헌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고 있다는 상상도 못 했겠지.

하긴, 연우도 S급이 뭘 알려달라고 부탁하면 훈련소장한테 달려가서 저 새끼가 나 놀린다면서 신고했을 거다. 뭐, 실제로 놀린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버려 뒀겠지만, 차헌의 실력이 점점 늘어날수록 연우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차헌이 연우에게 이능을 배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A 구역 사람들은 무슨 수를 대서라도 둘 사이를 찢어놓을 거고.

하지만 둘이 같이 다니는 이유가 예전에 알던 형, 동생 때문이라면? 오랜만에 만난 둘이 회포를 풀겠다는데 간섭하는 건 지나친 월권이다. 동네 형이 아는 동생한테 모르는 것 좀 알려주겠다는데 거기서 뭐라고 할 건데?

“형. 밥 뭐 먹을래, 아니, 그걸 왜 형이 정리해요.”

문을 열고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던 차헌은 헐레벌떡 튀어나와 연우가 정리하던 훈련 도구를 끌어안았다.

“아니, 이건 아침에 연습한 거거든요. 어차피 또 연습할 건데 정리하면 왔다 갔다 동선만 손해잖아요.”

“음. 그렇죠.”

연우야 공간이동으로 옮겨놓으면 되니까 그때그때 꺼내쓰는 걸 선호하는 편이었지만, 다른 에스퍼들은 차헌의 말처럼 나중에 또 연습할 거니까. 하며 땅에 늘어놓는 걸 선호했다. 벌점 사건 이후로 추세가 변하긴 했지만, 사람의 호불호는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니까.

금방 수긍한 연우는 정리하던 물품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여기는 차헌의 훈련장이지 다른 사람과 함께 관리하는 훈련장이 아닌데도 습관적으로 정리를 하게 되었다. 연우가 거슬린다고 해서 차헌 또한 거슬리는 게 아닐 텐데.

“괜히 두 번 일하게 해서 죄송하네요.”

그 말에 차헌의 미간이 깊게 팼다.

“왜 사과하는데요?”

사과해도 난리지…? 눈을 깜박거리던 연우는 화살을 내려놓다 말고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강차헌 에스퍼 개인 훈련장인데 제가 마음대로 손,”

“또. 그렇게 선 긋지 마요.”

“네?”

“말했잖아요. 형이 마나 다루는 거 안 가르쳐줬으면 아직도 벽 보면서 멍때리고 있거나, 이상원한테 처맞고 있었을걸요. 여기도 원래 안 주려고 하다가 마나 다루는 거 보고 배정해준 거예요. 형 덕분에 얻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내외하지 마요. 이것도 정리 안 한 제 잘못이니까 형이 사과하지 말라고요.”

뚱하게 연우를 바라보던 차헌은 선반에 훈련 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왕 정리할 거 크기대로 정리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연우는 지적하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귓불이 화끈거렸다.

한 번씩 차헌이 연우를 인정해줄 때마다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쪼그려 앉은 연우는 민망함을 날리기 위해 정리한 곳도 다시 정리하며, 차헌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연우를 빤히 바라보던 차헌은 입술을 달싹이다 물었다.

“그리고 아까도 기분 안 나빴어요.”

“네?”

웬일로 조곤조곤한 말투에 연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형이 이름 불러서 미안하다면서요. 솔직히 강차헌 에스퍼라고 부르는 게 더 기분 나빠요. 이능도 못 다루는 게 에스퍼라고 불리고 싶냐고 얼마나 조롱했는지 알아요?”

점점 격양되는 목소리에 연우는 손을 뻗어 차헌의 팔을 도닥였다. 주먹을 쥔 채 씩씩거리던 차헌은 연우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런데 왜 그런 거예요?”

“A 구역에 출입할 핑계가 필요하다고 말했잖아요. 아까 이상원 에스퍼가 말하는 거 들었죠?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다른 구역에 출입하지 못한다고.”

“그래서 형이,”

“강차헌 에스퍼. 잘 생각해봐요. 다른 에스퍼들이 왜 강차헌 에스퍼한테 아무것도 안 알려주려고 할까요?”

그 말에 뭐라 대꾸하려던 차헌이 입을 삐죽였다.

“뭐, 제가 바보도 아니고. 자기들 자리 빼앗을까 봐 견제하는 거 누가 모를까 봐요. 그러니까 치사하고 더러워서 센터 나간다는 거잖아요.”

“그렇다고 순순히 내보내 줄 센터장님도 아니죠. 그렇게 견제하는 상황에서 제가 강차헌 에스퍼를 가르친다고 밝히면 가만히 둘까요?”

“아.”

단말마를 뱉은 차헌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신이 난 기색으로 연우의 옆에 슬금슬금 붙었다.

“그래서 조금 친한 척을 할 필요가,”

“뭔 소리예요. 우리 원래 친했잖아요.”

“어, 음.”

연우가 당황하든 말든 바짝 다가온 차헌은 입술을 끌어올렸다. 형이 센터장한테 불려간 것도 있고, 이상원이 아까처럼 지랄할까 봐 좀 참아야 하나 생각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며 방방 뛰던 차헌은 휴게실을 손짓하며 말을 이었다.

“말했잖아요. 형 아니면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다고. 김강철은 자기랑 같이 먹자고 하는데, S급은 적당히 싸가지가 없어야 한다, 잘못하면 호구 잡히니까 사람들한테 까칠하게 대해야 한다, 가이딩을 함부로 받다가 각인할 수도 있으니 최대한 피해야 한다, 어쩌고저쩌고, 그 소리 듣다가 체할 일 있어요? 그 인간이랑 먹게?”

“김강철이요?”

“네. 아, 형은 모르나? 그… 있어요. 나 따라다니는 아저씨.”

설마 A 구역 훈련소장을 말하는 건가…?

이마를 문지르던 연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S급에게 기대하는 이미지가 있다. 그런 이미지에서 벗어나면 실망하거나, 차헌의 말처럼 호구처럼 보긴 하겠지. 하지만 가이딩은 아니다. 각인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가이딩한다고 각인 되는 거면 센터는 벌써 개판 났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 다른 사람 눈치 볼 필요 없겠네요?”

활짝 웃은 차헌은 연우를 위한 수프와 자신을 위한 각종 음식을 주문한 뒤 소파에 늘어지듯 앉았다. 피아노를 치듯 팔걸이를 두들기는 차헌의 손바닥에 하늘빛 마나가 뭉쳤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연우의 머릿속에 한가지 정보가 떠올랐다.

“…강차헌 에스퍼.”

“그냥 아까처럼 편하게 불러요. 왜요?”

“솜사탕을 뭉쳐본 적이 있나요?”

“네?”

연우가 손을 모아 무언가를 꾹꾹 누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차헌이 연우처럼 손을 모으자 하늘색 빛무리가 손가락 사이로 조금씩 사라졌다.

“엉?”

잠시 후, 차헌은 손바닥을 펼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손바닥에는 작은 얼음 결정이 놓여 있었다.

“이게 뭐예요?”

뭐긴 뭐야…. 네가 천재라는 증거지.

헛웃음을 흘린 연우는 얼음 결정을 쳐다봤다. 미래에 관련된 이능력자를 찾다가 빙결계에 대한 정보를 본 적이 있었다. 원소를 다루는 에스퍼들은 자신의 마나를 결정화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그 짧은 기억에 의지해 혹시나 하고 말을 꺼내 봤는데, 차헌은 그 말도 안 되는 설명만 듣고 바로 결정을 만들어냈다.

이러니까 A 구역 에스퍼들이 그렇게 기를 쓰고 차헌을 견제했구나.

“형! 이거 봐요!”

감탄하는 연우를 앞에 두고 손을 움직이던 차헌은 거대한 얼음을 만들어냈다. 누가 보면 세기의 천재가 나타났다며 대서특필할 모습이었지만 연우는 이마를 짚었다.

“너무 크잖아요.”

“크면 좋은 거 아니에요?”

“크다고 다 좋은 건 아니죠. 저걸 들고 싸울 수 있겠어요? 보관은?”

연우의 말에 시무룩해진 차헌은 손을 휘둘러 마나를 회수했다. 그 뒤로 만들어지는 얼음들도 거대하기 짝이 없었다. 차헌의 손짓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는 얼음을 보던 연우는 벌떡 일어났다.

“다음 주에 사격 시험 있는 거 알아요?”

차헌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상관없었다. 연우가 알고 있으니까.

“내일 훈련 끝나면 사격장으로 올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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