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조희서의 열등감이 폭발하게 된 계기는 사내 식당이었다.
위험 구역을 정화하고 복귀한 B 구역 각성자들 중 사관학교 출신 몇이 연우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동기들은 제 팀원을 소개해주고, 연우도 자신의 팀원들을 소개해주며 자연스럽게 합석하게 되었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하지 못했다.
자신과 등급이 똑같은 가이드가 B급 에스퍼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걸 보고 그대로 뛰쳐나간 조희서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조희서는 노골적으로 가이딩을 피했고, 이수빈과 훈련할 때는 아예 근처에 다가오지도 않았다. 이수빈이야 조희서의 야망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다른 에스퍼는 아니었다.
“서유진 에스퍼!”
최동원의 부름에 살짝 웃던 서유진은 조희서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적나라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유진을 무시한 조희서는 배재영을 찾고 있었다. 함께 훈련하던 다른 팀원들에게 둘러싸인 배재영을 발견한 조희서는 그쪽으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저건 무슨 자신감이래?”
다가온 이수빈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누가 보면 배재영 에스퍼랑 각인한 줄 알겠다면서 못마땅하게 중얼거린 이수빈은 연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미안하다는 시선만 봐도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갔다. 공동 구역 에스퍼들과 함께하는 훈련이 종료되었으니, 그들이 속할 팀과 던전 후발대가 정해질 단계였다. 자기는 이 팀을 고르지 않겠다는 거지. 최동원과 짧게 인사를 나누던 서유진도 똑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훈련소장의 등장과 함께 공동 구역 에스퍼들은 함께 할 팀을 골랐지만, 그 누구도 연우의 팀을 고르지 않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배재영까지 팀을 선택하자 조희서가 목이 졸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발밑이 무너진 것처럼 비틀거리던 조희서는 배재영을 향해 걸어갔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분명히!”
“조희서 가이드.”
훈련소장의 부름에도 조희서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솟아오른 방어막에 막힌 조희서는 원망스러운 얼굴로 배재영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훈련소장의 물음에도 조희서가 눈만 치켜뜨고 있자, 한숨을 쉰 배재영이 나섰다.
“계속 같은 팀이 되고 싶다고 끈질기게 요청하셔서 저도 다른 팀원과의 훈련에 집중하기 위해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는데…. 그 대답을 다른 식으로 오해하신 것 같아요.”
그 말에 조희서가 도끼눈을 떴다. 뭐라 말하려는 조희서의 앞을 가로막은 훈련소장이 미간을 문질렀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주변을 살피던 조희서는 울분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저 팀으로 이동하게 해주세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배재영과 한 팀이 되고 말겠다는 조희서의 다짐에 박서현은 얼굴에 손을 묻고 주저앉았다. 최동원은 감정 없는 표정으로 조희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희서 가이드. 저번에도 설명해드렸듯 개인적인 감정으로 팀원을 교체할 수 없습니다. 입사 전에도, 후에도 충분히 설명해드렸던 것 같은데요.”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그러면?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면 뭐 때문에 계속해서 팀원을 바꿔 달라고 요청하는 겁니까?”
그 말에 조희서의 시선이 팀원에게 향했다. 뭐가 그리 억울한지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셋을 살피던 조희서는 결심한 듯 연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한연우 에스퍼 이능 튀는 거 확인해보셨어요? 한두 번 실수한 것도 아니고 입사 직후부터 지금까지 이능이 튀고 있는데, 불안해서 어떻게 같이 임무에 나가요?”
조희서의 주장에 연우를 흘끗 바라보던 훈련소장은 훈련 차트를 펼쳤다. 종이가 팔랑, 팔랑, 넘어가는 소리에 연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와 달리 조희서는 당당하기만 했다. 잠시 훈련 차트를 살피던 훈련소장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꾹꾹 눌렀다.
“조희서 가이드. 한연우 가이드한테 이때까지 몇 번이나 가이딩해 줬습니까?”
조희서가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연우를 쳐다봤다.
왜 날 봐?
“박서현, 공격계 에스퍼에게 가이딩 42번. 최동원, 방어계 에스퍼에게 14번. 한연우, 보조계 에스퍼에게 6번. 조사 결과가 맞나요?”
기억을 더듬어보던 최동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턱에 힘을 준 조희서가 이쪽을 노려봤다. 저런 걸 조사한다는 사실을 왜 이제껏 말해주지 않았냐고 따지는 듯한 눈빛에 헛웃음만 나왔다.
“입사 직후부터 지금까지 고작 6번 가이딩 받은 에스퍼의 이능이 정상인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훈련소장의 물음에 조희서는 입술을 말아 물며 질문을 회피했지만, 훈련소장의 질문은 끝난 게 아니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처음 입사한 에스퍼들은 팀원들과 호흡을 맞춰야 한다, 성과를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실수를 엄청나게 합니다. A 구역 에스퍼들은 아닐 것 같습니까? 마나볼 터트리는 건 예사고 눈먼 이능에 얻어맞아서 피 칠갑하는 때도 많습니다. 얼마 전에 강차헌 에스퍼가 얼음덩어리 떨어트리고 놀라는 거 못 봤습니까?”
뜬금없는 예시에 연우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막 각성한 애가 실수를 좀 할 수도 있는 거지, 그걸 왜 여기 끌고 와?
“초반에는 실수해도 그러려니, 가이딩을 안 해도 그러려니 합니다. 다들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아니까요. 그래서 조희서 가이드가 이런 식으로 가이딩해도 따로 경고를 주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주장하시니, 조희서 가이드를 의심할 수밖에 없네요.”
그 말에 땅만 보고 있던 조희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이해를 못 했습니까? 조희서 가이드에게 무슨 일이 있어서 가이딩을 안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자연스럽게 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팀원들에게 가이딩을 이렇게나 적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마나 친화력 테스트에서 합격점을 받았으니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 테고.”
어디선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입을 틀어막은 이수빈은 마른기침인 척 쿨럭거렸지만, 조희서는 도끼눈을 뜨고 이수빈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 번씩 같은 학교, 아카데미를 나온 각성자들이 과거의 친목을 유지하기 위해 팀원을 바꿔 달라는 요구가 종종, 아니 자주 있습니다. 조희서 가이드처럼 바꿔 달라고 떼를 쓰는 사람도 한두 명이 아니고요.”
“제가 언제 떼를,”
“그만. 뭐, 친한 사람과 팀이 되겠다. 하는 이유가 아니라는 건 알겠습니다. 당연히 강한 에스퍼와 팀이 되고 싶다는 욕망도 알고 있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조희서 가이드는 자신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조희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이수빈은 대놓고 조희서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비웃고 있었다. 웃음소리에 목까지 빨개진 조희서는 파들파들 떨며 이수빈을 노려봤다.
어떻게 보면 참 대단한 사람이다. 보통 이쯤 되면 자신이 무슨 착각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텐데.
아직도 여기가 사관학교인 줄 아는 건가? 사관학교야 가이드의 수가 워낙 적으니 가이드로서 권력을 휘둘러도 오냐오냐해줬겠지만, 센터는 아니다.
“뭐, 당당한 모습은 보기 좋네요. 그 생각이 계속 지속되기를 빌어보겠습니다.”
훈련 차트를 정리한 훈련소장은 공동 구역 에스퍼와 팀을 이룬 이능력자와 후발대로 뽑힌 팀원을 구분했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연우는 당황한 표정으로 훈련소장을 쳐다봤다. 분명 첫 번째 후발대에 속했었다. 처음 들어갔던 던전에서 눈물 콧물 빼며 고생고생했던 기억이 존재했다.
그런데 후발대에서 제외됐다고?
훈련 시간 내내 얼이 빠진 연우를 보던 박서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안 그래도 정은영 때문에 안 좋은 여론이 형성되었는데, 거기서 조희서가 한연우를 저격했으니 온갖 시선이 들러붙을 게 뻔했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훈련장을 빠져나가려는 박서현과 달리 조희서는 배재영을 찾았다.
배재영에게 달려가려던 조희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시선을 보더니 흠칫 놀랐다. 다가가 조희서를 붙잡은 박서현은 연우에게 눈짓했다. 연우가 식당을 향해 공간을 접자 조희서는 멀미를 느꼈는지, 비틀거리다 팔을 뻗어 박서현을 붙잡았다. 그런 조희서를 부드럽게 떼어낸 박서현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분위기 한번 끝내줬다.
지금 이 분위기라면 그 어떤 산해진미를 먹든 체할 것 같았다. 꼬마김밥을 뒤적거리던 연우는 눈만 움직여 팀원을 살폈다. 점심시간이니 식당으로 오긴 했지만, 밥을 먹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박서현이 숟가락을 들고 있긴 했지만, 그도 오므라이스의 지단을 조각내기만 할 뿐이었다.
“분위기 왜 이래요?”
익숙한 목소리에 곤두서 있던 신경이 누그러들었다. 언제나처럼 연우의 옆자리를 차지한 차헌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제육볶음을 낚아챘다. 말없이 고개만 까딱이는 다른 에스퍼와 달리 대각선에 앉아있던 조희서가 눈을 반짝 빛냈다.
“저기, 강차헌 에스퍼는 아직 페어 가이드 없으시죠? 팀도 없으시고.”
그 당찬 물음에 박서현이 헛웃음을 흘리는데도, 조희서는 여전히 강차헌만 바라봤다. 조희서의 의도는 뻔했다. 내가 그 페어 가이드가 되고 싶다는 뜻이다.
꿈도 크지.
S급 에스퍼는 A급 가이드도 감당하기 힘들어했다. 그런데 B급이?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가이드가 아무리 자연에서 마나를 무한대로 흡수한다지만, 소주잔으로 옮겨봤자 드럼통은 쉽게 채워지지 않는 법이었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연우는 주변을 살폈다. 항상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끌벅적하던 식당에 싸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당연했다. 조희서가 등급으로 이능력자들을 차별한다는 얘기는 사관학교 시절부터 유명했었다. 안 그래도 A, B 구역과 차별받는 것 때문에 서러워하던 C 구역 사람들이, 그 안에서도 등급으로 차별하는 조희서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식당을 가득 채우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있다는 걸 눈치챈 조희서는 어깨를 움츠리며 최동원에게 기대려 했다. 최동원은 몸을 비틀어 가볍게 피한 뒤 그제야 식사를 시작했다. 배신감 어린 눈으로 최동원을 바라보던 조희서는 차헌과 눈을 맞췄다.
“저기요.”
그 소리에 저 멀리서 끽, 하고 의자가 들썩이는 소리가 났다. 식당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쪽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짜장면을 비비던 차헌은 심드렁히 물었다.
“그쪽이 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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