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A 구역 가이드들도 나한테 함부로 말 안 걸어요. 자기들 분수를 아니까. 근데 그쪽이 뭔데요?”
차헌의 말에 어디선가 크흣, 하고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난 조희서는 주변을 노려봤다. 그런 조희서를 심드렁히 바라보던 차헌은 연우에게 샌드위치를 하나 권했다.
“나는 물어보는 말에 대답했는데 그쪽은 왜 대답 안 해요?”
차헌의 말에 입술을 달싹거리던 조희서는 아래를 내려봤다. 아무리 조희서라도 A 구역 가이드보다 자신이 낫다는 말은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왜 안 하냐고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묻던 차헌은 연우의 손에 샌드위치를 쥐여주고 음료수도 챙겨줬다. 연우가 페어 가이드라고 오해할 정도로 알뜰살뜰한 모습에 조희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야에 배재영이 들어오자 표정은 더욱 험악해졌다.
배재영의, 그리고 강차헌의 옆에 앉아서 대접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의 진가를 뒤늦게라도 알아본 사람들 사이에서 의기양양하게 걸어 다닐 수 있었을 텐데!
조희서는 제 가이드를 챙기는 배재영을 노려보다가 자신에게 시선도 안 주는 차헌을 바라봤다. 둘뿐만 아니라 팀원들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다.
감히.
달아오른 얼굴엔 수치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벌떡 일어난 조희서가 식당을 뛰쳐나가자 박서현은 못마땅한 얼굴로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신경 써봤자 우리만 우스워지니까, 마저 식사합시다.”
그 말에 최동원은 출구를 바라보다가 젓가락을 집었다. 조각난 계란 지단을 내려보던 박서현이 작게 웃었다.
“솔직히, 뭐. 여기서 더 우스워질 게 없긴 한데.”
자조적인 웃음을 흘린 박서현과 최동원은 밥을 먹기 시작했지만, 연우는 반쯤 먹은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여기서 더 먹었다가는 먹은 것도 게워낼 판이었다.
이능이 튀는 에스퍼들은 이능 불안정자로 분류되어 평생 마나 구속구를 달고 살아야 했다. 훈련소장도 팀원들도 연우가 가이딩을 받지 않아 이능이 튄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가이딩을 받아도 이능이 튄다면?
연우가 연화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한 이능력자 협회는 연화의 보호자 자격을 손쉽게 뺏어갈 것이다. 그리고는 예전처럼 연화의 능력을 착취하겠지.
내가 또 죽으면 죽었지, 그 꼴은 못 본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은 연우는 마나가 일렁거리는 손바닥을 내려봤다. 연우가 차헌의 미래를 바꿨으니, 연쇄적으로 책의 주인공들의 미래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책의 주인공을 건드린 대가가 연우의 이능이라면 싸게 치는 거래이긴 한데….
차헌이 센터를 나가겠다는 결심만 포기한다면 두려울 게 없었다. 차헌이 센터에 있기만 해도 인과율은 정해진 미래대로 차헌을 이끌 것이고, 차헌은 드래곤이 나오는 던전에 들어가게 되겠지. 센터장이 된 차헌이라면 믿고 미래를 맡길 수 있다.
연화가 성인이 되기 전에 차헌을 센터장으로 만들 수 있을까, 만약 연우가 잘못된다면 연화는 누구에게 맡겨야 할까, 차헌이 센터를 나간 이후에도 예전과 같은 혼돈이 찾아오지 않을까, 고민하던 연우는 박서현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조희서 가이드랑 동기라고 했죠? 거기서도 저랬나요?”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은 아니었는지, 연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박서현의 혀가 신랄하게 움직였다.
“사관학교 출신 가이드들이 대부분 저래요.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하니 자신의 그릇이 얼마나 큰지, 작은지도 모르고 자만심만 넘치죠.”
박서현의 말에 최동원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 아카데미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며 울분을 토하는 최동원과 빈정거리는 박서현을 보던 연우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차헌이 센터장이 되기 전에 팀이 먼저 흩어지게 생겼다.
다른 구역은 모르겠지만 C 구역에서 불화가 생긴 팀은 그대로 찢어져 게이트 탐사대가 되었다. 센터 지정 구역을 돌아다니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고, 이능이 없는 D급 각성자들이 하는 일이라 C 구역에서도 무시당하는 직업이었다.
탐사대가 되지 않으려 억지로 화해하는 팀원들이 얼마나 많은데, 조희서가 그렇게 티를 냈으니 팀이 해체되는 것도 코앞이었다. 혀를 찬 연우는 팀원들과 함께 식판을 정리했다.
“그것만 먹어요?”
되팔아도 될 것 같은 김밥과 겨우 한 입 먹은 샌드위치를 내려보던 차헌이 이거라도 먹으라며 과일 팩을 열어주었다. 블루베리를 보자 반사적으로 보석뱀이 떠올랐다.
“혹시 그 뒤로 보석뱀 보인 적 있어요?”
“아뇨?”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차헌이 내미는 과일 팩을 받아 들던 박서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석뱀이요? 마수 구슬에서 보석뱀은 안 나오지 않아요?”
“아, 마수 연구소를 탈출한 건지 종종 보이더라고요.”
연우의 말에 박서현이 기가 찬다는 웃음소리를 냈다. 재작년에 랑트 쥐들이 떼거리로 탈출해 C 구역에 쳐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때 훈련받은 대로 처리했다가 1년 동안 욕이란 욕은 다 들어먹었다고 했다.
“보석뱀이면 살상 능력이 없긴 할 텐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신고해요.”
박서현의 말에 차헌이 연우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떡 벌어진 어깨가 움츠러들며 그 큰 덩치가 아주 조금은 작게 보였다.
“형이 한 번 둘러봐 주면 안 돼요?”
그럴까. 슬슬 실전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하니 그 전에 마수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렌지를 씹던 연우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최동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데 두 분은 어떻게 하시다가 친해지신 거예요?”
“각인하기 전부터 알던 사이예요.”
“큽.”
오렌지를 잘못 삼킨 연우가 입을 틀어막자 놀란 차헌이 등을 두드려주었다. 눈이 동그래진 최동원이 연우를 빤히 바라보는 동안, 가슴을 두드려 오렌지를 내려보낸 연우가 급하게 정정했다.
“성! 각성! 각성하기 전에!”
“아. 그게 그거 아니에요?”
태연하게 묻는 차헌을 보며 입을 떡 벌린 박서현은 눈만 움직여 연우를 쳐다봤다. 아니라고. 어떻게 에스퍼끼리 각인을 해요! 손사래를 친 연우는 차헌에게 입을 벙긋거렸다.
아니, 대체 어떻게 뭘 배우면 각성이랑 각인이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지?
최동원이 입을 달싹거리고 있자 박서현이 옆구리를 찔렀다. 연우에게 묘한 눈빛을 보낸 박서현이 일어나고, 최동원이 그 뒤를 따랐다. 얼른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연우도 따라 일어나자 차헌이 연우의 훈련복을 붙잡았다.
“형은 왜 일어나요? 밥도 다 안 먹었잖아요.”
“다 먹었어요. 그리고 원래 팀원끼리 움직여야 해서,”
“그럼 나 혼자 밥 먹어요?”
이때까지 혼자 밥 잘 먹었잖아? 얼마 남지 않은 음식의 양을 확인한 연우는 차헌의 손을 피해 공간을 접었다.
“나중에 마치고 봐요.”
허공을 움켜쥔 차헌을 뒤로하고 식당을 빠져나간 연우는 한숨을 푹 쉬었다. 훈련장으로 들어가기가 싫었다. 등급이 낮은 거지 자존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같이 하기 싫다고 그렇게 티를 내는 조희서와 함께 훈련하기 싫은 건 연우도 마찬가지였다.
* * *
모든 임무에서 배제된 팀원들은 기초적인 마나볼 훈련으로 돌아갔다. 팀원들과 동그랗게 앉아 마나볼을 주고받는 동안 조희서는 연우의 손끝에서 떨어지는 마나볼을 주시했다. 연우는 어떻게든 트집을 잡으려는 조희서의 모습에 질릴 대로 질려, 훈련 종이 울리자마자 일어났다.
처음으로 훈련 도구를 정리하지 않고 훈련장을 빠져나온 연우는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직원들을 보고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눌렀다.
직원들을 피하던 연우는 발아래에서 제멋대로 그려지는 문양을 보고도 계속해서 걸었다. 지긋지긋했다. 조희서도, 직원들도, 끊임없이 보내는 연락 때문에 방전된 핸드폰도.
그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는데!
“형?”
몸이 분해되는 기분에 해방감을 느낀 연우는 발끝이 닿자마자 주저앉았다. 연우가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이마를 무릎에 올려두었다.
“오늘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이렇게 이능 써도 돼요?”
찬찬히 호흡을 고른 연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 옆에 쪼그려 앉은 차헌의 뒤로 펼쳐진 익숙한 훈련장이 보이자 어깨에서 긴장이 빠져나갔다. 그대로 벌렁 누운 연우는 천장을 올려보았다.
공간을 접는 순간, 눈이 마주쳤던 직원의 표정이 떠올라 걱정이 밀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천천히 숨을 내쉬자 졸음이 밀려왔다. 계속되는 악몽 때문에 오랫동안 잠을 설쳐서 그런지, 무거워지는 눈꺼풀이 반가웠다.
“형? 뭐야, 자요?”
차헌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던 연우는 눈을 번쩍 떴다.
몸을 일으킨 연우는 구멍이 난 샌드위치 포장을 발견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일이 든 통은 엎어져 있었고, 그 위에 보석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탁탁거리는 소리가 나서 뭔가 했더니 보석뱀이 꼬리 끝으로 통을 내려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통을 내려보고 있던 보석뱀이 머리를 치켜들고는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연우를 반기는 건지, 이 빌어먹을 뚜껑을 열라고 재촉하는 건지 모를 몸짓이었다.
황금빛 콩 눈과 눈이 마주친 연우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며 시선을 낮췄다. 이제 보니 그때 그 보석뱀과 다른 녀석인지, 눈 색만 같을 뿐 길이가 달랐다. 한 뼘 정도 되어 보이는 보석뱀이 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인사하는 것처럼 보여 연우도 손을 흔들었다.
“안녕.”
연우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보석뱀은 통에서 뛰어내려 연우의 손가락에 몸을 감았다. 그러고는 과일 팩을 향해 콕콕, 고갯짓했다. 사람을 턱짓으로 부려 먹는 걸 보아하니 아주 손을 제대로 탄 모양이었다. 연우가 블루베리를 꺼내주자 보석뱀은 작은 입을 열심히 움직이며 블루베리를 먹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검은색 비늘과 매끈한 몸 선만 봐도 관리를 잘 받았다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뭐, 보석뱀의 사체는 어지간한 보석보다 높은 가격으로 거래가 되긴 했으니 애지중지 키울 만도 하지. 블루베리를 다 먹고도 더 달라 턱짓하는 보석뱀에게 사과를 먹여주던 연우가 작게 속삭였다.
“도망친 거야?”
연구용 마수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고 있었다.
연우도 사관학교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작은 보석뱀이 왜 마수 연구소에서 목숨을 걸고 도망쳤는지, 그 정황을 쉽게 예상해볼 수 있었다. 쉼 없이 입을 움직이던 보석뱀은 이제 배가 부른 건지 식사를 마치고 사과 조각을 소중하게 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머리를 치켜들었다.
“일어났어요?”
문을 열고 들어온 차헌은 젖은 머리를 털다 말고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연우를 일으켰다.
“형네 구역에서는 대체 무슨 훈련을 하는 건데요? 어제 여기 오자마자 기절한 건 알아요?”
무슨 일이 있었냐며 심각하게 묻는 차헌에게 사실대로 털어놓기가 좀, 그랬다. 이능이 튀는 것도, 팀원이 저를 쫓아내려 했다는 것도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냥…. 요즘 훈련이 힘들어서요.”
연우의 대답에 혀를 찬 차헌은 밥이라도 든든히 먹고 가라며 책자를 찾다가 엉망이 된 과일 팩을 발견했다.
“그거 또 나왔어요?”
연우가 그렇다고 대답하자마자, 차헌의 발아래에서 피어난 얼음꽃이 방안을 구석구석 수색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회수되는 얼음꽃을 보던 차헌은 연우에게 손짓했다.
“일단 밥부터 먹어요.”
차헌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가던 연우는 마지막으로 방안을 둘러보았지만, 문이 닫히기 직전 발목을 휘감는 보석뱀은 발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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