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날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사격 시험 날이 되었다.
C 구역의 시험은 진작 끝났지만, 아무도 훈련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B 구역 각성자들이 들어오며 흘린 볼멘소리 때문이었다.
“와, 이거 대놓고 차별하는 거 아녜요?”
“사격 시험 성적으로 아이템을 지급하는 게 어디 있어요…. 그것도 A 구역에 한정해서.”
“우리는 하급 포션 주는 것도 아까워서 물에 타서 주잖아요.”
불공평해요. 누군가 중얼거린 목소리에 다들 동조했다. C 구역보다 B 구역이, B 구역보다 A 구역이 위험한 일을 한다는 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눈앞의 이득에 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보다 등급이 높다는 건 알지만, 우리보다 위험한 일을 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상원 에스퍼 특기가 사격인 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그러니까요. 토벌대 챙겨주려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거지….”
시험을 끝낸 B 구역 각성자들도 합세해 투덜거리자, 이대로 센터장실로 쳐들어가도 놀랍지 않을 정도의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누군가 당장 갑시다! 신호를 던져주면 그대로 몰려가서 불공평한 처우에 대해 하소연할 것 같았다.
그 열기가 터지기 직전,
“안녕하세요.”
이상원이 등장했다.
똑같은 훈련복 차림인데도 이상원은 단단한 갑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넘볼 수 없는 요새와 같은 위압감이 느껴지기도 했고, 날카로운 칼끝이 심장을 노리고 있는 것처럼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 A 구역 각성자들에게 왜 당신들만 아이템을 가져가냐며 따지자던 패기는 어디 갔는지, 다들 이상원의 시선을 피해 땅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래, 저게 이상원이었다.
존재감만으로도 사람을 압도시키는 S급.
사람들을 훑어보던 이상원은 여유로운 태도로 과녁 앞에 섰다. 분명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걸 다 들었을 텐데도,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너희들이 뒤에서 아무리 떠들어봤자 앞에선 단 한마디도 못 할 거란 걸 알고 있다는 듯, 가볍게 콧노래도 흥얼거렸다.
차헌이라면 어땠을까. 가만 상상해보던 연우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너는 뭔데 네 입에서 내 이름이 오르내리냐며 삐딱하게 물었겠지. 이유를 알고 난 다음에는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나름의 노력을 할 테고.
이상원의 뒤를 따르던 각성자들 중, 연우를 발견한 선우건이 인사를 건넸다. 마주 손을 흔들어주자 그 광경을 목격한 차헌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주변에서 히이, 흐으, 하는 소리를 내며 사사삭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차헌이 연우의 앞에 섰다.
“잘하고 와요.”
손을 뻗은 연우가 차헌의 어깨를 두드려주자 차헌의 이름이 불렸다. 씩 웃은 차헌이 다녀올게요, 인사하고 가볍게 뛰어갔다. 차헌이 자리를 비우는 것과 동시에 허어, 하는 소리와 함께 시선이 몰려들었다.
“뭐야, 너 강차헌 에스퍼랑 친해?”
사관학교 동기의 물음에 연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 알고 지내던 동생이야. 각성할 줄은 몰랐는데.”
아- 하는 잠깐의 감탄이 퍼지더니, 곧 부러움이 서린 쑥덕거림이 이어졌다. 저분이 누구신데요? 하는 물음에 한연화 에스퍼 오빠잖아요.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아직도 나를 모르는 사람이 있었군. 연우는 그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척 이쪽을 흘끔거리는 차헌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총을 점검하던 차헌이 손을 마주 흔들자 온갖 탄식이 쌓였다.
들뜬 주변과 달리 연우는 입이 바짝바짝 말라 마른침을 삼켰다. 마나 연습이나 이능 연습을 할 때는 툭하면 연우를 불러 이거 봐달라, 저거 봐달라 찡찡거리더니 사격 연습은 죽어도 못 보게 했다. 아니, 따로 연습하는 것도 아니고 한 훈련장에 있으면서 보지 말라니?
그렇게 신경 쓰이면 따로 연습하자고 권했었는데, 왜 그런 말을 하냐며 역정을 냈다. 보지 말라면서요. 화를 꾹꾹 눌러 담으며 따지니 제가 언제 보지 말라고 했지, 오지 말라고 했냐며 되레 화를 내던 차헌이었다.
연우는 과녁판 앞에 선 차헌을 바라봤다. 다리를 벌려 자세를 잡은 차헌은 과녁판을 향해 총을 조준했다. 그 모습에 연우는 작게 감탄했다. 점수판을 죽어도 못 보게 하길래 어지간히 못 하나보다 싶었다. 그래서 아이템을 얻는 건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강차헌 에스퍼 장난 아닌데요?”
그러니까.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반할 것 같다는 말을 대충 흘려들었다.
한 발을 쏜 차헌은 감을 잡았다는 듯 연달아 쏘기 시작했다. 반동으로 어깨가 약간 흔들릴 뿐 차헌은 마지막까지 곧은 자세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저린 손을 털더니 연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바로 이쪽으로 향하려던 차헌이었지만, 자신을 붙잡는 손길에 누가 봐도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지켰다. 이름이 순서대로 불리고, 이상원의 차례가 되자 앞으로 걸어 나온 토벌대가 한목소리로 파이팅! 외치며 응원했다.
이상원은 차헌처럼 탕탕탕, 연달아 쏘는 게 아니라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쏘고는 총을 정리했다. 훈련소장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넨 이상원이 자리로 돌아가다 말고 센터장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생긋, 웃는 게 아닌가. 이미 아이템의 주인공은 자기가 분명하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음, 아무래도 재시험을 해야겠죠?”
만점자는 이상원 혼자가 아니었다. 훈련소장이 들어 올린 열한 장의 점수판 모두 동심원 한가운데 구멍이 뚫려있었다.
“당연히 해야죠. 한 아이템을 나눌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확한 판결을 내려야 서로 속이 시원하지 않겠어요?”
부센터장이 만점자들을 호명하자 눈치를 보던 몇몇 에스퍼들이 자발적으로 재시험을 포기했다.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상원을 보고 있자니 연우는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물러나는 에스퍼들 대부분이 토벌대였다. 모종의 거래가 있는 게 분명한데도, 이상원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러나는 에스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빼줘요.”
손을 든 건 윤석현이었다. 물러난 윤석현은 과장된 손짓으로 강차헌과 이상원을 손짓했다.
“정신계가 무기형 아이템이 있어봤자 어디 쓰겠어요? 얻는다고 해도 어차피 정신계 에스퍼는 무기가 필요 없으니 빌려줘라, 양보하라 할 게 뻔한 데 굳이?”
공격계 두 분이 나눠 가지든가 알아서 하세요. 인사하며 물러난 윤석현은 손가락을 가슴 쪽으로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는 이런 대회에서 빼주세요. 총 쏘는 게 얼마나 힘든데요. 손가락도 엄청 아프고.”
아아, 연약한 나. 팔을 뻗어 자신을 끌어안은 윤석현은 재시험하라는 말 못 들었냐며 차헌에게 손짓했다. 차헌은 이 새끼는 뭐 하는 새끼지. 하는 표정으로 윤석현을 보다가 곧장 몸을 돌려 총을 점검했다.
연우는 인사하며 물러나는 윤석현의 뒷모습을 보다 센터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센터장은 윤석현이 분수를 깨닫고 물러나는 모습이 무척이나 대견하다는 듯 박수를 치고 있었지만, 윤석현도 S급 에스퍼였다.
윤석현은 사물의 기억을 읽어낼 수 있는 이능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졌지만, 그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이능을 다룰 수 있었다. 단순히 물건에서만 기억을 읽어내는 게 아니라 사람의 기억도 엿볼 수 있었다.
그저 그런 에스퍼 취급을 받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숨기는 윤석현을 이해하는 건 연화뿐이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귀찮으니까.
그렇게 한량처럼 살던 윤석현은 파장이 맞는 가이드를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이능을 완벽하게 조절하게 된다. 그 덕분에 아주 잠깐이었지만 연화를 밀어내어, 윤석현이 정신계 정상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윤석현을 무시하고, 재계약 제안조차 하지 않았던 센터는 나중에 울면서 윤석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게 되지만, 뭐. 다 자신의 업보일 뿐이다.
앞에 강차헌과 이상원 둘만 남자, 센터장은 보관함을 열어 가느다란 팔찌를 들어 올렸다. 은색으로 빛나던 팔찌는 센터장의 마나를 흡수하며 커다란 대검으로 변했다. 센터장의 손짓에 따라 팔찌는 대검에서 창으로, 창에서 방패로, 방패에서 다시 팔찌로 변했다. 변환형 무기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고도 남았다.
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총을 확인하던 차헌이 흥미를 느끼자 벙긋 웃은 센터장이 시합을 재개했다.
연우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모은 다음, 자세를 잡는 차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오늘 아침. 차헌에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다녀오라고 말했지만, 저 팔찌의 주인은 차헌이 되어야 했다. 차헌에게 진다면, 이상원은 자존심을 내세워 차헌을 물고 늘어져 센터를 나가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그렇게 신경 쓰는 이상원이니, 모두가 납득하는 방법으로 팔찌를 빼앗고 난 뒤에야 차헌을 놓아주겠지. 그동안 가만있을 센터장이 아니니 온갖 징글징글한 방법으로 차헌이 센터와 계약하게끔 만들 것이다.
그다음에 연우가 알고 있는 정보로 이상원과 센터장을 차근차근 밀어내면 될 테니, 머지않은 미래에 센터장이 된 차헌의 모습을 쉽게 그려볼 수 있었다. 그 전에 연우는 부메랑에 맞을 테니, 실제로 보지 못할 모습이었다.
가볍게 한숨을 쉰 연우는 탕,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상원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동시에 사격장의 문이 열렸다.
“다들 여기서 뭐 합니까?”
문 뒤에서 나타난 사람은 C 구역 훈련소장이었다. 시계를 확인한 훈련소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모여있는 사람들을 길게 훑었다.
“나오세요. 훈련 안 받을 겁니까?”
“아, 훈련소장님. 제발요.”
“이것만 확인하고 들어갈게요!”
곧이어 B 구역 훈련소장도 나타나자 구경꾼들은 결과만 확인하겠다며 아우성을 쳤다. 사정을 들은 B 구역 훈련소장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C 구역 훈련소장은 아니었다.
“2분 뒤 출석 체크할 겁니다. 그때까지 자리에 없다면,”
누가 봐도 진심인 표정에 연우는 팀원들을 찾아 나섰다. 이상원이 여섯 발을 모두 쐈는지 물러나고 있었다. 차헌이 과녁판 앞에 서는 것까지 확인한 연우는 그대로 공간을 접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7)============================================================